책방/좋은명시 60

호박잎

호박잎 / 이동순 가난한 밥상 위에서 쓸쓸하게 차려내는 판잣집 아침 식사 무슨 별것인가 했더니 호박잎이네 똥개네 아부지 피어나지 못한 삶처럼 여기저기 담장 밑 둘레 아무 곳에나 힘겹게 제멋대로 돋아서 사립문 곁으로 기운차게 뻗어가는 한여름 아침 신새벽부터 부지런히 길어다 물 부어주니 여기도 탱글 저기도 탱글 청보석처럼 빛나는 호박 아름다워라 사랑이여 상 위에 올라 드디어 자태를 뽐내는 한여름의 청춘이여 가난한 밥상머리에 똥개네 온가족 둘러앉아 구수한 된장에 푹 담구었다가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워가며 한 장씩 쌈 싸먹는 감격의 호박잎이여 이동순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발견의 기쁨》 등 13권, 민족사서시 《홍범도》(전 5부작 10권), 평론집으로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책방/좋은명시 2015.10.11

우표 한 장 붙여서

우표 한 장 붙여서 천양희  꽃 필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 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 한 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미움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 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볼 때까지 헐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럴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의 눈먼 자 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

책방/좋은명시 2014.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