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좋은명시

옛날의 그 집 박경리

시인김남식 2015. 12. 27. 11:36

옛날의 그 집

 

                                                                                  박 경 리

 

빗자루 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일시에 죽어 자빠진그집 십오년을 살았다

빈 창고 같이 횡덩그렁한 큰집에

밤이 되면 소쩍새와 숙국새가 울었고

연못엔 맹꽁이가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

배추심고 고추심고 상추심고 파심고

고양이 둘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이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늘 어르렁 그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 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아, 모진세월 가고 참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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