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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관한 짧은시 모음

시인김남식 2014. 8. 7. 10:51

여름에 관한 짧은시 모음

 

어느 여름 

애벌레들이 녹음을 와삭와삭 베어먹는 

나무 밑에 비 맞듯 서다. 

옷 젖도록 서다. 

이대로 서서 뼈가 보이도록 투명해지고 싶다. 

(신현정·시인, 1948-)

 

여름 숲 

언제나 축축이 젖은 

여름 숲은 

싱싱한 자궁이다 

오늘도 그 숲에 

새 한 마리 놀다 간다 

오르가슴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마다 

뚝뚝 떨어지는 

푸른 물! 

(권옥희·시인, 1957-)

 

 

초여름, 네 벗은 

초여름, 네 벗은 가는 팔을 보고 싶어라 

초여름, 네 벗은 종아리를 보고 싶어라 

긴 겨울 옷 속에 감추었던 팔과 종아리 

신록 푸른 바람 속에서 보고 싶어라.

(나태주·시인, 1945-)

.

 

여름날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신경림·시인, 1936-)

.

 

여름방 

긴 여름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앉아

바람을 방에 안아들고

녹음을 불러들이고

머리 위에 한 조각 구름 떠있는

저 佛岩山마저 맞아들인다.

(김달진·시인, 1907-1989) 

.

 

비 개인 여름 아침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김종삼·시인, 1921-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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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세월이란 그림 그리시려고 

파란색 탄 물감솥 펄펄 끓이다 

산과 들에 몽땅 엎으셨나봐 

(손석철·시인, 1953-)

.

 

그해 여름 - 아버지 

대지가 뒤끓는 대낮 

대청마루 뒤안길은 

여름 바람이 몰래 지나가는 길 

뒷문 열어제치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솔솔이 바람 

반질반질한 대청마루 바닥에 

목침을 베고 누워 

딴청을 부리시던 아버지 

매미소리 감상하며 

소르르 여름을 즐기시던 우리 아버지

(김용수·시인, 전남 완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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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 

여름방학 때 문득 찾아간 시골 초등학교 

햇볕 따가운 운동장에 사람 그림자 없고 

일직하는 여선생님의 풍금 소리 

미루나무 이파리 되어 찰찰찰 하늘 오른다.

(나태주·시인, 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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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물뱀 잔등 같은 길 

자근자근 밟고 

기억 속으로 숨은 바람 찾아갔었지 

바람은 온데 간데 없고 

개구리 울음소리만 

귓전 가득 생각의 북을 울려 

발목 잡힌 마음만 

눈먼 어둠 속 홀로 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었네  

(권영호·시인,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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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밤

들깻잎에 초승달을 싸서

어머님께 드린다

어머니는 맛있다고 자꾸 잡수신다

내일 밤엔

상추잎에 별을 싸서 드려야지

(정호승·시인, 1950-)

 

..

여름밤 

논배미 

달이 뜨면 

마음을 합장하고 

문간 등 

붉은 웃음 

개구리 신명나고 

여름은 

한숨 돌리고 

고즈넉이 웃는다 

(최봉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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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여름밤 

모낸 논다랑치 

불꺼진 외딴 집, 

쑥불 타는 마당 한켠에 

누런 황소 한 마리 누워 

어둠 씹어 먹고 

편히 쉬는 밤 

접동새만 

검고 깊은 뒷산에서 

밤을 지새기 외로워 

처량한 울음으로 

고향 여름밤을 지키고 있다. 

(강대실·시인, 1950-)


 .

 

 

여름 

아침부터 

그늘은 일어나 무릎꿇고 

기도를 했지만 

낡은 교각 뒤에서 

떨던 몇 마리까지 

차례로 끌려나와 

탈색당하는 

정오 

연도에는 

치를 떠는 數萬의 푸른 이파리들

(이상홍·시인,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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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의 풍경   

날이 덥다

보이지 않는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귄다

새들의 울음소리에 나뭇잎들이 시든다

더운 날 나무에게는 잦은 새 소리가

불안처럼 느껴진다

익어가는 토마토마다 빨갛게 독기가 차 오르고

철길을 기어가는 전철의 터진 내장에서

질질질 질긴 기름이 떨어진다

약속에 늦은 한낮이

헐레벌떡 달려온 아파트 화단엔

기다리는 풀벌레도 없다

아이의 손에 들린 풍선이 터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

(김재혁·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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