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낡은 사진 - 최갑수
서랍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그 여자의 낡은 사진
귀퉁이가 다 닳은 구름 한 조각
비 묻은 귀밑머리 몇 가닥과 졸음에 겨운
희미한 쌍커풀과 그 여자의 얇은 여름 블라우스
점점이 박힌 푸르고 붉은 꽃무늬
가랑비 소삭이던 처마 밑
그 저녁의 일들 일랑은
몇 구절 나지막한 휘파람으로나마 불러 보든지.
돌아 온다는 기약 같은 건 없었다네
(구름에 무슨 기약이 있겠나) 세상의 모든 기약이란
떠나가는 배의 희고 둥근 돛처럼
잠에서 덜 깨어 바라보는
목련꽃 가득한 새벽녘의 마당처럼
참으로 허무하고
또 슬픈 것임을
내 어찌 몰랐을까나
구름은 다 데리고 간다네 다 데리고
구름은 허공에 걸린 새 소리를 지나
나울나울 목련나무 가지를 지나
구름은 아무 말 없이 스윽 팔짱을 한 번을 껴보고서는
창문을 넘어 간다네
내 어찌 모를까나.
오늘은 밤새 새가 울고
그 새소리에 목련이 다 질 것을
내 어찌 모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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