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가요칼럼

추억의 졸업식노래

시인김남식 2012. 2. 22. 10:04

추억의 졸업식노래     솔새김남식


1946년 6월 미군정청 편수국장 직함을 갖고 있던 외솔최현배가 한 아동문학가를 찾았다
"여보 석동. 졸업식때 쓸 노래가 마땅하지 않소. 이것저것 가져다 쓰는 형편이니 하나 지어 줘야겠소”

최현배가 보기에 일제 때 부터 동요 작사가로 이름 날린 윤석중이 졸업식 노래를 만들 적임자였다.

“엄마 앞에서 짝자꿍 아빠 앞에서 짝자꿍”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바로 이 노래를 윤석중이 만들었다  

 
당시 최현배의 부탁을 받자마자 윤석중 머리 속에는 시상(詩想)이 번득였고 

그래서 그날이 가기 전 가사를 급히 완성하여 

찾은 것은 작곡가 정순철

그는 "새나라의 어린이" "엄마 앞에서 짝짜꿍" 을 만들었다 

허겁지겁 피아노를 두들겨서 설렁탕 집에서 두 사람이 때아닌 고성방가로 만들게 된다 

다음날 미군정청 편수국 직원들 앞에서 노래가 처음 불리워졌고

그래서 1947년 이듬해 부터 각급 학교에서 졸업식 노래로 불려지게 된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일절가사는 선배들에게 교과서를 물려받아 공부해야 했던 그 시대를 반영하듯 재학생들이 불렀다 

돈 있는 집 아이들은 새책으로 공부했지만 그러하지 않은 아이들은 

새학년이 올라 갈때 마다 주위 있는 상급자에게 책을 얻어야 했기 때문에 

엄마들이 부지런해야 했다 

그래서 교과서는 물론 전과하고 수련장까지 때로는 헌 책을 사고 팔기도 하였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이어서 졸업생들이 이절을 부를 때는 너무 뭉클하여 졸업식장은 모두 눈물 바다가 되었다. 

어느덧 6년을 함께한 동무들과 눈물섞인 목소리로 부르던 졸업식 풍경은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에게는 살갑고 정겨운 순간이었다.

그래서 노래를 끝까지 부르지를 못하고 고갤 떨구며 눈물을 흘렸던 동심이었다

선생님의 손도 떨리는 풍금소리가 당시 어린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해주었던

기억이 어렴푸시 생각이 난다  

콧물을 딱는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보자기에 책을 싸서 언니 손에 이끌려 학교를 다녔던

그 추억의 그날들이 이제는 어느덧 반세기도 더 지나간 세월이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3절은 졸업이 아닌 국가의 장래에 대한 다짐의 합창으로 전교생이 함께 불렀다 

당시는 가정형편상 초등학교 6학년 졸업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특히 중학교 진학하는 아이들보다 시골서 농사짓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래서 읍내 중학교에 가는 동무들을 무척 부러워 하였다 

친구들은 책가방 메고 학교에 가는데 아버지를 따라 지게를 지고 들에 나갔다

하지만 좀 똑똑한 아이들은 호미자루 내 던지고 기술 배우러 공장이 있는 대처로 나갔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배운 사람이나 덜 배운 사람이나 그리 특별한 것은 없다




초등학교 졸업할 당시 옥편과 콘사이스 그리고 학용품까지 선물을 가득않고

교문을 나섰던게 엊그제 같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다   

어째든 그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졸업식노래' 가 추억이 되어서

그때를 기억하듯 가슴 뭉쿨하게 해주고 있다.

지금은 가사가 촌스럽고 현 시대와 맞지않는 이유와 또한

크게 자란 청소년들 목소리로는 부르기는 좀 어색해서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한다.


그런데 윤석중과 정순철은 현대사 격랑 속에서 크나큰 상처를 입게 되는데 
윤석중(1911~2003)은 서울에서 태어 났지만 어릴때 어머니를 잃고 외가에서 자랐다  

아버지와 새어머니, 동생들은 충남 서산에 살고 있었는데 새어머니 쪽이 좌익과 관련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쟁 와중에 벌어진 피의 학살극에 윤석중 가족이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윤석중이 원래 서산으로 피난 오려던 것을 아버지가 전쟁 통에는

서로 떨어져 있어야 누구든지 하나는 살 수 있다고 만류했는데

그것이 천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작곡가 정순철(1901~ 1950)은 충북 옥천 출신으로 그에게도 불행이 찾아왔다  

다름아닌 전쟁통에 성신여고를 홀로 지키다가 

서울수복 하루전에 인민군에게 납북되어 이후 생사가 알려지지 않았다 

손병희 사위였던 그의 제삿날은 그래서 수복 다음날인 9월 29일 이라고 한다.

한편 93세로 작고한 동요의 아버지 윤석중은 대전 현충원에 있다 / solsae kns



'칼럼 > 가요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둘기집 이석  (0) 2012.04.04
내 몫까지 살아주   (0) 2012.03.25
강건너 등불 정훈희  (0) 2012.01.24
잊혀진 계절 이용  (0) 2011.12.08
우수 남진  (0) 2011.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