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희수와 일타홍이야기 솔새김남식
문정공 심희수 묘는 고양시 사적 37호로 덕양구 원흥동 산 89번지에 있으며 3호선 원흥역 3번 출구에서
약 1.5키로 도보 20여분 거리에 있다
고양시 원흥동 구석말 마을의 좁은 차도에서 50여미터 들어가는 곳에 위치에 있다
정경부인 광주노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심희수묘 옆에 기생 일타홍의 제단이 마련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심희수(沈喜壽 1548 ~ 1622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이며 본관은 청송 시호는 문정이고
정자(正字) 건(鍵)의 아들이다.
조선개국공신인 심덕부와 세종의 장인이며 영의정을 지낸 심온 그리고 성종때 영의정 심회가 모두 직계 조상이며
명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6촌 누나가 되는 명문가 집안이다.
또한 이연경(충주출신의 문신)의 외손자 이기도 하다
노수신의 文人으로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서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고 1583년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으며
도승지,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고 저서로 일송집(一松集)을 남겼으며 상주 봉암사에 제향 되었다.
묘 正面에는 숙종 1년(1675) 3월에 세운 묘비가 있는데
재료는 화강석이며 높이 132cm, 폭 50.5cm, 두깨 17cm의 규모로 묘비의 앞면에는 ‘의정부 좌의정 일송선생지묘
정경부인 광주노씨 부좌’라고 표기되어 있다. 문정이란 諡號를 이때 받았다
봉분의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그리고 석등이 있으며 심희수와 부인 광주노씨 쌍묘의 뒷 부분이 길게 늘어져 있다
마을앞으로 원흥역에서 강매역으로 이르는 6차선 권율대로가 최근에 개통되었다
심희수가 사랑했던 기생 일타홍이 먼저 죽자 선영에 있는 자신의 묏자리 옆에 시신을 묻어 주었다고 하는데
현재 무덤은 남아있지 않고 1983년에 후손들이 묘역 좌측에 단을 만들어 놓았다
"일타홍금산이씨지단" 비석 뒷면으로는
오른쪽으로 일타홍의 "賞月" 詩 1편과 그리고 왼쪽에는 심희수의 "有倬" 두편의 遺詩가 색인되어 있다
상월(賞月) - 일타홍(一朶紅)의 절명시
靜靜新月最分明 정정신월최분명
一片金光萬古淸 일편금광만고청
無限世間今夜望 무한세간금야망
百年憂樂幾人情 백년우락기인정
맑고 고요한 초승달 또렷하기도 한데
한 줄기 달빛은 천년만년 푸르렀겠지
넓디넓은 세상에 오늘 밤 달을 보며
백년의 즐거움과 슬픔 느끼는 이 몇이나 될까
당시 일타홍의 시신을 심희수가 손수 殮 하여 첩을 귀장하는 예는 일찌기 없었으나 先塋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일타홍의 시신을 상여수레(輀車)에 싣고 금강 나루에 다다랐을 때 마침 봄비가 내렸다고 한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 일타홍의 관을 덮은 붉은 명정이 젖는 모습을 보면서 심희수는 詩 한 수를 읊는다
그 시가 유명한 ‘이별 눈물(有倬)’ 이다.
이별 눈물(有倬) - 沈喜壽
一朶芙蓉載柳車 일타부용재유거
香魂何處去躊躇 향혼하처거주저
錦江春雨丹旌濕 금강춘우단정습
疑是佳人別淚餘 의시가인별루여
한 떨기 연꽃은 버들상여에 실려 있는데
향기로운 영혼(香魂)은 어딜 가려 머뭇거리나
비단강(錦江) 봄비에 붉은 명정(銘旌) 젖어드니
아마도 고운 우리 님 이별 눈물인가 보다
.
심희수와 일타홍의 야담설화
심희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른없이 자라서인지
학업에는 뜻을 두지 않고 마음을 잡지 못한채 술과 여자에 빠져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난봉꾼이었다고 한다.
그날도 벗들과 함께 재상집 연회에 가서 술 마시고 놀면서 기생을 희롱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기생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들을 피 하는데 이날 모인 기생 중에서
단연 뛰어난 미모와 가무를 겸비한 일타홍은 오히려 심희수의 희롱을 받아 주며 후일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일타홍은 관상을 볼줄 아는 사람으로 심희수가 재상이 될 관상이었다고 한다.
약속한대로 심희수를 찾아가 함께 지내게 되는데 아직 결혼 전이었기에 일타홍과 꿈결같은 나날을
보내게 되는 이때 심희수의 나이 15살이고 일타홍의 나이는 분명치 않지만 17살 전후였던 것 같다.
당시 일타홍은 기생으로 이미 이름이 나 있어서 금산(錦山)에서 서울의 재상집 연회까지 초대될 정도였다.
그녀는 어우야담(於于野譚)등 여러기록에는 시(詩)와 가무로도 이미 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고 한다
일타홍이 기녀 생활을 청산하고 심희수와 살게 되는데 명문가의 자제가 결혼도 하기 전 기생과 함께
사는 것을 허락을 했다는 것은 일타홍의 진심을 어머니가 느꼈음인지 그 뜻을 받아 들였던 것 같다
어찌 되었든 일타홍은 심희수에게 글 공부에 전념할 것을 요구 하였고
그래서 그는 아버지 친구이자 姨母夫인 노수신의 문하에 들어 가서 공부를 하게 된다
매일 학업에 정진하도록 했고 과제를 내어 태만하면 정인이자 낭군인 그대와의 연을 끊겠다고
일타홍은 연일 엄포를 하였다고 한다
그후 진사에 합격하여 성군관에 들어가자 일타홍의 옆에서 떨어질 생각은 아니하고 학업을 게을리하자
자신에게 너무 빠져 있어서 학업에 방해되는 것을 알고 있던 일타홍은 심희수의 곁은 떠난다는 뜻을 밝히고
과거에 급제한 뒤에 찾으라는 편지를 두고 나오게 된다
그러자 한때 나태해 졌던 심희수는 그제야 자신의 學行이 미진함을 스스로 자책하고는 다시 학업에 정진한 덕에
대과에 급제하여 2년후 일타홍과 다시 재회하여 함께 살게 돈다
그러나 일타홍은 자신은 기녀 출신으로 엄연히 신분 차이를 스스로 깨달았던지 서로 사랑해서 먼저 결혼했다 하여도
정실부인이 될수 없었던 현실을 받아 들여서인지 그녀는 심희수에게 결혼 할 것을 재촉한다
그리하여 노수신 동생의 딸 광주노씨와 결혼 하는데 그래서 일타홍 그녀는 스스로 妾室이 되었다
그런데 노수신(1515~1590년)은 심희수에게는 이모부이면서 처삼촌 이기도 하다.
五日周期로 4일은 정실부인에게 가서 보내고 자신과는 하루만 지내기로 일타홍과 약속 했지만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 심희수는 번번이 약속을 깨고 밤이면 밤마다 일타홍을 찾았다고 하는데.....
사랑을 독점하지 않고 나눔도 기꺼이 받아 들이는 그녀의 현명한 심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시 10여년이 흘러 심희수 나이 35세 되던 해 탄핵 사건에 연류된 허봉(허균의형) 을 두둔하다가
금산 군수로 좌천 되어 금산에 내려 가서는 그녀의 부모를 위해 크게 잔치도 베풀었다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타홍이 그만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 할 무렵 심희수의 손을 잡고
"삶이 짧고 긴 것이 뭐가 다르겠는가 군자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으니 여한은 없지만
다만 죽은 후 낭군의 옆에 묻혀 지하에서 다시 만나는 게 소원" 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나게 된다.
그리고 시 한 수를 남겼으니 유명한 상월(賞月-달구경)이라는 절명시로
이때 심희수의 나이가 36세 일타홍의 나이는 38세 이다
살아서는 신분의 굴레 때문에 정식 아내가 될 수가 없었지만 죽어서 來世에서는 정실 아내이고
싶었지 않았을까하는 간절한 일타홍의 마음을 알아채렸는지 특히 신분이 낮은 첩실을 선영에 모시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고 정말 힘든 일이었지만 심희수는 고향의 선영에 그녀를 장사 지냈다고 한다.
비록 첩실이지만 情人인 아내 일타홍의 헌신과 사랑이 심희수에 마음을 감흡하게했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으로서
분명 아내인 일타홍을 향한 심희수의 사랑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기도 하다.
그래서 한그루 소나무(一松) 심희수와 한떨기 붉은 꽃(一朶紅) 일타홍의 애뜻한 사랑은
오래도록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윗쪽에 있는 심희수의 부친 심건묘
심건(沈鍵 1519∼1550년)
남달리 총명하여 뭇 사람들로부터 기대를 받았으나 32세에 충청도 어사로 나갔다가 공주에서 갑자기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 심희수의 나이 불과 3세였다고 하며 어머니는 광주(廣州) 이씨인데
중종때 조광조와 친분이 두터웠던 유명한 학사(學士) 이연경(李延慶)(1484 - 1548)의 따님이다.
아랫쪽 묘는 심희수 아들
묘로 들어가는 初入에 있는 심희수 신도비
신도비 윗쪽으로는 선대(조부.증조부등) 묘역으로 최근에 깔끔하게 잘 정리를 한 모습이다
지금은 도로가 개설 되면서 선대의 묘역과 그리고 심희수의 신도비가 서로 갈라져 떨어져 있는 모습이다
심희수는 벼슬을 지내면서도 허물어져 가는 집 한 채 밖에 없는 청백리 재상으로 임금이 대궐의 말 한 마리를 보내어
팔아서 집을 고치라고 시켰을 만큼 가난하게 살았으며 연산군때 폐모론이 다시 일자 지조를 지키면서
1620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둔지산(屯之山 용산소재)에 은둔하여 詩로써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6.25때의 총탄자욱이 그날의 기억하게 해준다
청송심씨 재실 은덕사
이곳에서 500m 주변에는 한규설(1856~1930)묘와 고려청자 도요지 그리고 민속박물관이 있어서 함께 둘러보면 좋은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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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홍은 특이하게 난봉꾼 심희수를 선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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