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평대군묘와 신도비 솔새김남식
인평대군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위치한다
1992년 6월 5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130호로 지정
위치는 포천 경복대학교 부근 신평 교차로에서 이정표를 따라 나서면 된다
전주이씨 인평대군파 종중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1622~1658]
자는 용함(用涵)이며, 호는 송계(松溪)이고 ), 시호는 충경(忠敬)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으로
1630년 인평대군에 봉해졌다
그는 아버지 인조에 의해 아들 없이 죽은 삼촌 능창대군의 사후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래서 인평 대군은 사후 경기도 광주 춘궁동 능창대군 묘소 옆에 1658년 처음 안장 하였다가
1693년 숙종이 이장하도록 허락하여 기존의 석물과 함께 포천의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고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청나라를 방문했다.
효종의 유일한 동복 아우였기에 효종은 인평대군과 우애가 좋았으며 그 아들들 또한 총애했다.
인평대군은 제자백가에 정통하였고 시서화(詩書畵)에 능해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에 비유되기도 했다.
『송계집』 · 『연행록(燕行錄)』 · 『산행록(山行錄)』 의 저서가 전해오고 있고 현존하는 그림은 서울대학교박물관 소
장의〈산수도〉 홍성하(洪性夏) 소장의 〈노승하관도〉, 정무묵(鄭無默) 소장의 〈고백도〉 등이 알려져있다
신도비는 묘역 입구에 세워졌는데, 높이 325㎝의 거대한 규모이며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생동감이 넘치는 정교한
모습이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도 사촌인 인평대군의 아들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들과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며
조정 일에 참여시켰고, 외아들로 태어나 가까운 종친이 없었던 숙종 또한 오촌 당숙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형제들을 대접하였다.
그러나 숙종 6년(1680) 허견의 옥사 때 복선군이 역모를 꾀했다는 명목으로 사사될 때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3형제 모두 처형되는 불운울 맞는다. 장남 복녕군은 32세(1670) 요절하여 화를 면했다
인평대군의 공적을 기록한 신도비
치제문이란 공신이나 왕족이 죽은 후 제사지낼 때 임금이 친히 글을 지어 내리는 제문(祭文)으로
비각안에 2기의 비가 새겨져 있다
2기중 제1비는 전면에는경기도 광주에 있던 인평대군의 묘를 이장할 때 효종이 지은 제문(御製御筆)이
초서체로 명각되어 있고 그후 숙종이 직접 짓고 쓴 제문(1693년숙종19 御製御筆)을 1724년(경종4년)에 해서체로
명각하여 세운 것이다
제2비의 전면상단에는 영조의 御製御筆, 하단에는 정조의 御製御筆 들어가 있으며 제2비는 1792년(정조16)
정조가 세운 것이며 후에 순조의 제문을 새겨 넣은 것으로 인평대군의 치제비는 조선임금들의 글과 글씨를 한눈으로
볼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인평대군 묘역은 크게 2단으로 구획되어 상단에는 봉분·묘표·혼유석 등을, 하단에는 상석·향로석·동자석·망주석·문인석
장명등·배례석 봉분은 부인 오씨와 합장한 단분으로 호석을 둘렀으며 봉분 외곽에 곡장을 조성하였다.
묘역은 곡담이 둘러져 있고 묘비1기 상석1기 문인석4기 향로석1기 망주석2기 장명등1기가 배치되어 있고
묘역봉분 좌측에는 비신이 없는 귀부가 있어 또 다른 비석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