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김홍집묘

시인김남식 2018. 4. 17. 10:50

충헌공 도원김홍집묘                                                                                                    솔새김남식

 

 

 

김홍집 (1842 ∼1896년)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김굉집(金宏集) 자는 경능(景能)

호는 도원(道園) 시호는 충헌(忠巚)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 숙종의 장인)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개성부유수 김영작(金永爵)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 성혼(成渾 1535∼1598 정치인학자)의 후손

 

 

김홍집(金弘集)은 구한말 개화파의 한 인물로 갑오년 농민전쟁 후 이루어진 갑오경장 주역으로

조선은 우물안 개구리가 아니라 세계로 눈을 돌리는 혜안을 갖고 개화파의 거두이지만

그의 최후는 참으로 정말 비참하였다

 

 

1868년(고종 5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에 급제한 뒤 1880년 수신사의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개화 정책을 적극 추진했으나 '위정척사파'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위정척사파; 최익현을 중심으로 하여 대외 통상을 반대하고 통상 수교를 거부하던 무리

.

 

1882년 임오군란의 뒤처리와 유럽과 미국등 강국의 통상 요구등을 잘 수습이 되자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894년 동학란이후 1.2차 내각을 구성하고 개혁기구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며 홍범 14조를 만들어 악습을 폐지하고

과거제 폐지, 은본위제의 신식화폐제도 채택,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시행 도량형제도 채택등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단발령 실시등 3차 내각을 구성하여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내각이 들어서자 고종은 대신들을 체포하라는 칙령을 내린다.

 

 

총리대신 김홍집과 유길준은 허겁지겁 경복궁 앞으로 달려 갔지만 이미 경관을 배치해놓고

보부상 수천명을 동원해서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일본 군인들이 총검을 세우고 서 있었다

김홍집은 개화파의 일원으로 세 차례나 내각을 조각하며 ‘갑오경장’ 을 비롯한 근대적 개혁을 시도 했지만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결국 친일파로 몰려 김홍집은 광화문 한복판에서 군중들에게 몰매를 맞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조선말기 외세 침략의 구실이 된 여러가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할 때 실무를 담당한 김홍집은

사실상 일본의 내정 개혁 요구에 따라 구성된 친일 내각의 수반일뿐이었다는 이유로 매국적 친일파로

가혹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으며 총리대신이 떠돌이 보부상들에게 맞아 죽은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다

어찌보면 혼란의 정세속에서 개혁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고 했지만 반대파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난세를 살다간 사람이다 

 

 

 

김홍집묘의 초장지는 파주군 임진면에 안장 되었으나 그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현 자리로 이장 되었다

이곳에는 가족묘와 함께 있으며 향토유적 제24호 이다  

 

 

當時 狀況劇

“먼저 전하를 뵙고 말씀을 드린 후 어심을 돌리지 못하면 일사보국(一死報國)하는 수 밖에 없다,”

시위 군중들에게 쫓기던 김홍집에게 일본군들이 피신하라고 권고했지만 총리대신 김홍집은 의연했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로써 조선인에게 죽는 것은 떳떳한 하늘의 천명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과도 같다"

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시 주한 일본공사관의 기록에 남아있는 김홍집 총리대신의 마지막 모습은

"군중들은 총리대신을 난자하는 것도 모자라 시신의 다리에 새끼줄을 비끄러매고 종로 바닥을 쓸고 다니다가 대역부도

죄인을 써 붙인 뒤 다시 몽둥이로 때리고 발로 짓이기고 돌로 찍어 형상을 알아볼 수없게 만들었다" 고 전 하였다.

그리고 당시 항헌의 매천야록에 기록된 김홍집의 마지막 모습의 글

{"조선의 관헌들이 김홍집 총리대신을 경무청의 문 앞으로 끌어냈다.

성난 군중들이 모여들어서 입추의 여지가 없음을 보자 조선 관헌은 칼을 뽑아 들고 군중들을 뒤로 물러서게 한 다음

총리대신 김홍집을 발로 차서 쓰러 뜨렸다.

 

김홍집이 쓰러지자 마자 경관 수명이 달려들어 일제히 가슴과 등을 쳐서 난도질했다.

그리고 시신의 다리 부분을 거친 새끼줄로 묶고 종로로 끌고 다니며 ‘대역무도 김홍집’이라 크게 쓴 장지를 붙였다.

그러자 길에 가득차 있던 보부상들이 시체를 향해 큰 돌을 던지기도 하고 발로 짓이겨 시체에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도록 만들었다" }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정치가라는 평가와 함께 일본에 이용당한 친일파라는

평가가 공존하고 있는 그는 친러들에게 역적으로 단죄 될 때 그의 나이 55세 였다

한편 당시 유길준은 경무청으로 가는 도중 일본 병사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탈출하여 오랜 망명 생활을 하였다

 

 

개화라는 도도한 흐름과 내우외환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권력 다툼만 하던 그때
누군가는 외교 실무를 담당해야 했고, 책임을 져야 했다.
그래서 그는 1880년부터 1893년까지 14년 동안 개화 외교의 중진으로 혼란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탁월한 실력으로 신망을 얻어 1894년 총리대신이 되어 갑오개혁의 주역으로 1896년 2월 까지

진퇴양난만 거듭하다가 역적의 누명을 쓰고 결국 政敵 친러파의 손에 쓰러지는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정치외교가로서 김홍집은 최고의 인물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그 끝은 불행하였다

사후 재평가를 받지 못하였다가 해방후 사위 이시영에 의해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고 그후 그의 개혁 노력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시작되었다

* 이시영(李始榮, 1868~1953)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및 정치인.부통령. 이항복의 후손으로 호는 성재(省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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