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아관파천 고종의길

시인김남식 2019. 5. 16. 09:29

아관파천 고종의길 솔새김남식

 

 

지하철 시청역 3번출구에서 시작하여 대한문까지 역사의 흔적을 따라 가봅니다

 

 

 

 

 

 

 

 

 

 

 

 

 

 

 

 

 

 

 

 

 

 

 

 

 

 

 

 

 

 

 

 

 

 

 

 

 

 

 

 

 

 

 

 

 

 

 

 

 

 

 

 

 

 

 

 

 

 

 

 

 

 

 

 

 

 

 

 

 

 

 

 

 

 

 

 

 

 

 

 

 

 

 

 

 

 

 

 

 

 

 

 

 

 

 

 

 

 

 

 

 

 

 

 

 

 

 

 

 

 

 

 

 

 

 

 

옛날 이화학당 정문

 

 

 

 

 

 

 

 

 

 

 

 

 

 

 

 

 

 

 

 

 

 

 

 

 

이화 여고에 있는 유관순열사 동상

 

 

 

 

 

 

 

 

 

 

 

 

 

 

 

 

 

 

 

 

 

 

 

 

 

 

 

 

 

 

 

 

 

 

 

 

아관파천과 러일전쟁

 

明成皇后 弑害사건과 金弘集 等, 친일 내각의 斷髮令은 親日內閣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백성들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봇물 터지듯 抗爭이 일어납니다.
한편, 太平洋 진출을 위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해 가고자 했던 러시아는 일본이 사실상 조선을 삼켜가는

과정을 앉아서 두고만 볼 수 없었습니다.
- 朝鮮 백성들의 反日감정 등을 활용, 朝鮮 國王을 러시아 公使館으로 모셔오자!
- 일본이 반발하 겠지만 그렇다고 우리와 전쟁까지 하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1896년 2월 11일, 親러파인 李範晉, 李完用 等은 러시아 公使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와 사전 협의하여

高宗이 총애하는 嚴上宮(명성황후 死後, 純獻皇貴妃가 됨)을 통하여 고종에게 접근, 王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설득합니다.

高宗 역시 乙未事變 이후 일본에 사실상 감금된 상태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터라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일본의 毒殺을 우려해 직접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등의 성의를 보고, 러시아 公使館으로 播遷(파천)하는 것을 수락합니다.
파천을 주도한 러시아는 당시 인천에 있던 러시아 水兵 150名과 砲 1문을 서울로 이동시켰는데..

일이 워낙 은밀히 진행된 터라 일본은 파천의 낌새조차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설혹 알았다고 하더라도 지방의 乙未 義兵抗爭의 진압을 위해 主力部隊가 없는 상황에서,

일본이 러시아군을 제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습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高宗과 王世子는 극비리에 嚴上宮의 가마에 오른 후 景福宮 迎秋門(경복궁의 西門으로

延秋門으로 불리기도함)을 빠져나와 貞洞에 있던 러시아 公館으로 옮기게 됩니다.
嚴상궁이 궁궐을 출입할 때 쓰는 가마인지라 경비를 보는 병사들에게 특이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군사들의 철통 경비 아래, 러시아 공사관에 온 高宗은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高宗은 새로이 親러시아 組閣을 발표하고, 金弘集, 兪吉濬 等, 親日內閣의 핵심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 "썪어도 준치"라더니 그래도 皇帝! 御命은 勅令(칙령)이라!

高宗이 俄館으로 播遷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고, 체포된 金弘集, 魚允中, 鄭秉夏 등은 몰려나온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고, 兪吉濬 等은 日本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한편, 高宗과 皇太子가 俄館으로 거처를 옮기자 일본은 당황하고, 高宗을 확보?한 러시아와 미국이 득세하게 됩니다.
(결국 이 일로 일본과 러시아는 곧 전쟁을 하게 된다 ~ 러日戰爭)

- 나라 돌아가는 모습이 말이 아니다.
國格은 더욱 더 추락해가는데.. 그나마 백성들이 나라를 살려보겠다고 義兵을 일으켜 抗爭하는 판국에

皇帝라는 사람은 一葉片舟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之 字' 行步를 하다보니 보기도 그렇고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高宗이 러시아 公使館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嚴上宮!

 

그녀는 5살의 어린 나이에 景福宮에 들어와 後에 明成王后의 侍位上宮이 되는데, 못생기고 살이 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일개 궁녀에 불과했던 엄상궁이 놀랍게도 高宗의 눈에 들어 承恩을 입게되자, 결국 明成皇后로 부터 미움을 받아

32세 때, 闕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1895년, 日帝에 의해 명성황후가 弑害되고난 지 불과 5일이 지난 後, 高宗은 10년 前에 내쫒긴 嚴上宮을

다시 불러들입니다.

엄상궁은 아관파천이 있기 며칠 전부터 심복 궁녀 하나를 대동하고 가마 두 채로 궁궐을 출입 했습니다.

이와 같은 嚴上宮의 잦은 궁궐 출입은 일본 경비병들의 눈에 익은지라.. 그것은 가마에 대한 경계를 느슨하게 했고

이 점을 이용하여 사건 당일 다시 가마 두 채에 高宗과 王世子(후에 純宗)가 나누어 타고

播遷(파천/宮闕 脫出)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1897년 宮으로 돌아온 高宗은 皇帝로 등극하고 大韓帝國을 선포했으며, 高宗의 씨를 임신한 嚴上宮은

44세의 나이에 아들을 낳자 皇貴妃로 책봉됩니다.
엄상궁이 낳은 이 아이가 바로 11세에 朝鮮의 마지막 皇太子가 된 後, 볼모로 일본에 끌려간 悲運의 英親王 李垠(이은)입니다.
嚴貴妃는 아들을 그리다 끝내 보지 못하고 1911년 7월 20일 58세로 눈을 감습니다.

 

俄館播遷으로 졸지에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잃어버린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까지 검토했으나,

러시아와 전쟁을 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보고, 일단 협상을 추진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니콜라이 2세 (Nocholas 2: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때, 총살됨)의

戴冠式(대관식)에 야마가타가 참석하여 로마노프와

5월 28일부터 6월 9일까지 12일 동안 비밀회담을 통하여 체결한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입니다.

그 주요내용은,
- 장차 필요한 경우, 러일 양국이 朝鮮을 共同으로 점거할 것을 약속한다.
- 예나 지금이나 國際關係는 國益이 최우선인데도 朝鮮의 官民들은 북극곰 러시아를 雙手를 들고 환영했으니...

(우리가 자신의 속내를 들어내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여 '크레믈린' 같다 하고

여우처럼 간교한 사람이나 단체를 빗대어 '사쿠라' 라고 비하하여 부르는 것이 이때부터 유래하지 않았을까?)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朝鮮의 保護國임을 자처하며,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채광권 등,

각종 경제적 利權을 챙기고 알렉시예프를 고문으로 파견해 조선 財政을 載斷하였으며,

그 外 歐美 列强도 철도부설권 等, 주요 利權을 모조리 챙겨갔습니다.

1897년 2월 25일, 高宗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나라 안팍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慶運宮(원래는 成宗의 兄인 月山大君의 집이었으나 壬辰倭亂때 宣祖가 피난後 돌아와 이곳에 기거하면서 宮으로 부르고

高宗이 다시 이곳에 거처하면서 德壽宮으로 개명하였다)으로 환궁하고

國號를 大韓帝國, 年號를 光武로 새로이 정하고 王을 皇帝라 稱하여 內外에 獨立帝國임을 선포합니다.

- 나라는 풍전등화인데 황제칭호라니 좀 어이가 없지않은듯 하다.-

 

俄館播遷과 1897년의 高宗의 還宮, 그리고 大韓帝國 선포 후, 몇 년 동안은 일본과 러시아가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던

때였습니다. 高宗은 나름대로 自主國防을 생각하면서 군사력을 키워가고자 하였으나

그 자주국방의 규모라는게 겨우 궁궐의 수비를 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 정도로 朝鮮이 自力으로 國防을 한다는 것은 모래성을 지어 파도를 막고자 함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사는 길은 러시아가 일본을 막아 주거나 일본과 러시아가 계속적으로 세력 균형을 이루고있거나,

列强들이 조선에 관심을 가져 어느 한 나라가 조선을 장악하는 것을 막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 뿐이었는데

高宗은 이런 관점에서 '朝鮮이 獨立國이고 中立國'임을 內外에 선포하였지만

나라가 힘이 없는 상태에서 행한 이러한 선포는 虛空에다 소리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조선에 또다시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그것은 그나마 朝鮮이 시간벌기에 유리한 상황인 러.일 간의 세력균형에 금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前回에서 기술한바와 같이 淸日戰爭에서 日本에 敗한 淸나라가 일본에 遼東半島를 내주는 등의 굴욕을 당하자,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을 强하게 압박하여 遼東半島를 淸나라에 반환하도록 하였던바(이른바 三國간섭),

이 사건 이후 러시아가 功치사를 하며 滿州의 요충지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점령합니다.

또한 서양 세력에 강하게 맞선 義和團 事件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다른 서양세력과 함께 연합군을 이루어 만주로 진출했고

의화단사건이 진압된 후에도 러시아군은 ‘自國民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만주에서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 太平洋으로 진출할 수있는 不凍港을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러시아~
러시아가 南進政策을 노골화하자 일본과 西歐 列强은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에 들어갑니다.
- 朝鮮이 우리 일본의 영향력하에 있음을 인정한다면, 우리도 러시아의 滿州 鐵道 경영을 인정하겠소!
러시아는 당연히 이를 거절합니다.
- 韓半島와 滿州 철도문제는 級이 다르다.

朝鮮의 39도 以北을 중립화하고 韓半島를 군사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일본은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전쟁을 준비합니다.

사실 일본은 일찍이 대륙진출의 野心을 갖고 있었음으로 淸日戰爭 以前부터 러시아와의 一戰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힘이 없으니 내나라 朝鮮 땅에서 로스케와 倭놈들이 또 다시 戰爭판을 벌이게 되는구나..

일본은 明治維新 이후부터 대륙 침략을 위해 군사력을 계속 키워왔고, 그 과정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은 必然的이라는

생각을 굳혀왔기 때문에 전쟁에 대하여 망설임이 없었다.
- 陸軍 120萬, 海軍도 10년 前보다 4배가 증강되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南進政策에 불안함을 느낀 英國, 美國과 동맹을 맺고, 조선과 韓日議政書를 체결하면서 전쟁 준비를

착실히 진행해 왔다.
- 戰爭이 발발할 경우, 경비의 半은 우리가 대겠다! (英國, 美國)

아무런 힘이 없는 高宗은 중립을 선언합니다.
- 장차 일본과 러시아가 싸우더라도 우리는 中立이다!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情報 戰略分析通은..
- 러시아의 군사력이 우리보다 훨씬 강하나 여기는 極東이다!
- 有事時 유럽에 주둔중인 병력과 군수 물자를 보낼 시베리아 철도는 대부분이 短線이고 또 아직 未完成이라,

  40일 後에나 朝鮮에 도착할 主力部隊는 10萬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 우리는 바로 25萬 이상의 兵力을 투입할 수 있다!
-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하기 전에 극동의 기지를 기습해 제압한 다음, 교두보를 확보하고

  협상을 제안하면 勝算이 있다. -

 

이에 따라 일본은 그들의 主特技(眞珠灣 공습처럼 선전포고없이 선제 타격하는 것)를 십분 활용하여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旅順港을 기습 공격합니다.
크게 한방 맞은 러시아는 즉각 일본에 宣戰布告를 합니다. 그러나 日本보다 國力이 훨씬 强한 러시아였지만

국토가 너무 광대하여 陸君의 主力部隊가 滿州까지 도착하고 발트함대 (Baltic Fleet)가 印度洋과 싱가포르 海狹을

통과해서 朝鮮 앞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일본과 대등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습니다.

戰爭 발발 40일 후에야 滿州에 도착한 러시아군 사령관 크로파토킨은 다음과 같이 판단을 내렸습니다.
- 우리 러시아가 强하기는 하나 極東에서 정상적인 대규모 전쟁을 치르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우므로,

長期戰을 펴 일본군을 내륙 깊숙이 유인해 섬멸해야한다.

그에 반하여, 일본은 처음으로 치루는 대규모 전쟁에서 人的, 物的 자원이 막대하게 소모되어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형편이 되지 못했으므로, 어떻게든 短期戰으로 勝氣를 잡은 뒤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했습니다

 

러시아는 전쟁을 長期戰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싸우지 말고 철수하라!

일본은 旅順港 습격, 奉天戰鬪(봉천 : 등 사소한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지만, 러시아 못지않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러한 큰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지 못함으로써 극심한 財政的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戰爭을 長期戰으로 끌고 가던 러시아는 敗北가 계속되자, 드디어 비장의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그것은 러시아가 자랑하는 유럽의 발틱 艦隊(Baltic Fleet)를 1904년 10월 15일 라예파야 港에서 極東으로 출발시켰고,

1905년 5월,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7개월 만에 大韓海狹에 도달했습니다.

日本은 도고헤이하치로 사령관이 이끄는 연합함대를 大韓海狹에 집결시켰습니다.


5월 27일 새벽, 일본 해군은 2列로 東海를 북상해 오는 38척의 大艦隊를 발견하고,

러시아의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이 탄 旗艦 等, 선두에 선 艦船에 집중 포격을 가해 기함을 격침시키고

사령관에게 부상을 입히는 戰果를 올립니다.
機先을 제압한 일본 해군이 이틀 동안 러시아 함대를 무차별 공격하자,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오느라

진이 빠져버린 러시아군은 세계 海戰史上 보기드문 敗北를 當하게 됩니다.

이로써 러일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발틱 함대가 무너지기는 했지만 실은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 모두 더 이상 戰爭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自意半 他意半으로 戰爭을 끝냈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러시아라는 巨大한 국가를 상대를 전쟁을 하면서 러시아 못지않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1년 예산의 7배가 넘는 戰費를 쏟아부어 국가財政이 고갈되었습니다.

미국도 더 이상 일본을 돕거나 일본 國債를 매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 일본이 더 이상 强해지는 것은 곤란하다-

러시아도 自國에서 제1차 러시아革命이 일어나는 등, 帝政末期에 극심한 혼란이 도래하여 더 이상 戰爭을 할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유심히 러.日 간의 상황을 지켜보던 美國의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일본의 仲裁를 수용,

일본과 러시아는 戰爭을 終結하기로 하고 미국의 뉴햄프셔 州의 포츠머스에서 포츠머스(Portsmouth)協約을 체결하게 됩니다.

日本은 협상 과정에서 러시아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실상 러시아가 국내사정 때문에 전쟁을 중단하려는 것뿐이지,

자신들이 敗北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밀히 따져 본다면, 러시아가 敗하기는 했으나, 끝내 전쟁을 이어갔다면,

당시 國力으로는 日本이 러시아를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일본은 말만 꺼냈다가 본전도 못찾고(한푼의 배상금도^^) 포츠머스협약을 수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日本은 國家의 存亡을 건 전쟁에서 결과적으로는 이겼습니다.

러시아 軍 死傷者 27萬名 가운데 死亡者는 5萬인데 일본은 27만의 死傷者 中 死亡者 數가 8萬 6千명이었고

(一說에는 17萬名 以上..) 戰費 또한 淸日戰爭의 10배를 넘어섬으로써 국가재정이 파탄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엄청나게 運이 좋았고, 朝鮮은 너무나도 運이 없었습니다.

이 '포츠머스 協約'에서 親日行步를 보인 미국의 루즈벨트의 調停에 의하여

(1) 일본은 朝鮮에 대한 지배적 권리를 인정받았고

    (이때 日本은 동남아패권을 접습니다. 그래서 조선을 屬國하는 대신 필리핀을 미국에게 넘기게 되죠) 

(2) 中國의 旅順과 大連의 租借權

(3) 長春 以南의 철도 부설권

(4) 북위 50 도 以南의 사할린 섬에 대한 영유권

(5) 동해와 오호츠크(Okhotsk)海및 베링(Bering)海의 러시아 연안에 대한 魚業權도 일본에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협약을 중재한 루스벨트는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습니다.
-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힘이 없으면 列强의 조롱과 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냉엄한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팔불출처럼 내분에 집착하고 외세에 대응하는 조력은 미약합니다 - k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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