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원균장군묘

시인김남식 2016. 5. 29. 13:02

원균장군묘   솔새김남식

원균장군의 묘는 1980년 경기도 기념물 제 57호로 지정하였고 평택시 도일동 산 82 에 있다

역사에서 원균은 이순신장군을 모함하여 귀양을 보낸 사람으로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원주 원씨 문중에서는

이유야 어찌 되었던 가문에 낭패가 아닐 수 없으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을 역사적으로 추앙하기 위해서 반대 급부에 있는 원균에게는 이순신을 모함하여 감옥에 가두고 왜적이 처들어 오자 전선을 포기하고 도망가는 무능한 무사(將軍)로 치부하는 스스로가 역사를 왜곡하지 않나 돌이켜 보아야 한다

특히 전쟁에서 승패가 있듯이 반듯이 승자에게는 설자리가 있고 패자에게는 설자리가 없다는 것은 좀 인색한 평가인 듯 하다     

이순신장군 때문에 가려진 원균 장군을 추념하려는 평택시는 최근에 사당을 건립하는등 성역 작업을 하였다


원균(元均, 1540~1597) 

본관은 원주(原州)원성백파(原城伯派), 자는 평중(平仲) 이다
집안은 무인 가문으로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元俊良)의 장남으로 과거 급제후 자헌대부 중추부지사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경상 우수사를 역임했으며 이순신에 이어 제2대 삼도수군 통제사를 역임하였다


묘역은 상당히 넓고 풍광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주차장 한 쪽에는 모선재가 자리하고 건너편 저수지 윗쪽으로

원균 장군 묘가 보인다 

 

宗中의 先祖를 오래도록 사모하는 곳이란 뜻을 가진 원균 장군의 후손들의 際室  모선재(慕先齋)


원균 장군묘 아랫쪽으로 내리저수지가 있어서 풍광이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원균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 통제사로써 임진왜란 당시 옥포, 당포, 한산도 해전에 참여 하였다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하고 거제도로 퇴각했다가 왜적에게 의해 사살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원균은 패전할 것을 알면서도 진을 떠나 공격하다가 전군이 괴멸 당하고 戰死하였다


그러나 칠천량 해전에서 그의 시신이 수습되지 않자 조정에서는 그가 숨었을 것이라 단정하고 그가 나타났을 때 처벌을

건의하는 상소가 올라 가기도 하는 어처구니가 있었으니 이는 ㅂㅏ로 선조에게 반기를 든 대신들 이었다  


당시 그간 그가 행한 여러가지 행실로 보아 장렬하게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심했던 것으로 보아

조정에서도 선조外에는 그를 믿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최근에 假說에 의하면 패전의 후환이 두려워서 홀로 남아 숨어 살았다고 하며 통영에 있는 無名墓가 원균이라는 설까지 있다
하지만 大將帥가 설마하니 패전에서 부하를 잃고 숨어 살아 있었다는 것은 좀 억지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다 


선조30년 7월 22일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조정에 보고 하는데 ....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서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울 무렵에는 헤일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와서 서너겹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 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1599년 권률 장군이 노환으로 사망하고 임진왜란의 공적을 평가할 때 원균 장군의 사망은 그때서야 공식화 되었다

그래서 원균 장군의 묘는 시신이 없는 假墓라고 한다 


1603년 선조36년 임진왜란, 정유재란 공신들을 선정할 때 선무공신 2등에 책록 되었으나 패전을 이유로 공을 깎는 것은

부당하다는 선조의 지시로 선무공신 1등으로 책정되었다 



선조가 내린 선무공신교서에는 .

1등 공신에 맨먼저 이순신 , 권률, 그리고 다음에 원균이 등록 되어 있다

그는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贈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 되었고 원릉군으로 추봉된다  


 


묘역으로 올라가는 돌 계단도 넓직하고 주위는 비교적 깔끔하게 잘 정돈이 되어 있었다 


묘역 안에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무인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국한문 혼용체로 쓴 비문에는 왕이 내린 교서와 장군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도일동 마을 뒤쪽 인접한 야산에 잘 조성되어 있는데 모두 근래에 후손들에 의해서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묘역의 하단부에 '애마총'이라는 비석과 함께 말 무덤이 있는데 ....

"1596년 선조가 원균 장군에게 준마 한필을 하사하였고 장군은 말을 극진히 사랑하였으며 말 또한 영특하여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전장에서 주인이 죽자 그의 유품을 입에 물고 천리 길을 달려와 가족에게 전사 소식을 전하고 슬피 울다 지쳐서 죽고 말았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주인의 무덤 곁에 조그마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고 비문에 쓰여 있다

 


원릉군 원균 장군 사당


사당안에 걸려있는 원균 장군의 초상


원균의 패전 소식이 조정에 전달되고 병조판서 이항복 건의로 이순신장군을 구원투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이때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 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비장한 결의로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자 일본군이 철수하게 되는데 이때 도망가는 왜군을 노량해전에서

추적 하던중 날아온 탄환에 맞아 그해 11월 전사를 하고 이어서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의 임진왜란은 끝나게 된다.


원균과 이순신은 水軍의 先後輩 사이로서 두사람 사이에는 도원수 권율 장군이 있었지만 처음 부터 사이가 

좋지는 않았던 것으로서  특히 임란중 장계를 두 사람이 함께 조정에 올리기로 하였지만


약속을 어기고 이순신이 먼저 올리는 바람에 원균이 틀어 지면서 그로 인하여 사이가 나빠지면서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게 되는데 선조는 조정의 여론을 접어 두고라도 이순신보다 원균을 믿었기에


이순신에게 벌을 내렸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래서 패장이었지만 선조는 그에게도 똑 같이 1등 공신을 주었던게 아닌가?  


당시 국난의 위기에서 극심한 갈등을 빚은 두 사람 중 누가 옳았는지는 잠시 접어 두고서라도

수군 지휘부의 분열을 자초한 책임에서 두 사람은 모두 자유로울 수가 없지 않나 생각이 되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서 패전의 책임을 원균에게만 물을수 있을까


역사란 아무런 검증도 없이 어느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또 다른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원균의 부친을 비롯하여 형제와 그의 아들까지 가족들은 武士로써 임진왜란때 전사 하는등

제몫을 다 하였다는 것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특히 사후 그의 집안은 가난을 면치 못하였으며

당시 남은 핏덩이 손자로 대를 이었왔다


사실 드라마나 소설에서 너무 강인하게 조명하고 있는 탓에 원균 장군은 간신 또는 패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과 함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라는 것을 똑같이 기억하는 게 지금은 옳은 일인 것 같다


찾아가는길 => 송탄IC에서 원균장군 이정표를 따라서 10여분 정도 가면 묘역을 만나게 되는데 

표지판 안내가 잘 되어 있어서 찾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현재 이 지역 국회의원이 한나라당 원균 장군의 후손이라서 평가는 더욱 냉혹한듯   solsae k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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