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원수 대통령 묘역 솔새김남식
서울 동작동 국립 서울현충원은 나라를 위해 힘쓰신 국가 유공자를 모신 공동묘지이다.
대통령은 국가장법에 따라 서거한 경우에는 유족 등의 의견을 고려하여 행정자치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의 심의를 마친 후 대통령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장으로 할 수 있다.
대통령은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 및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대상자가 되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더라도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보존묘지로 지정될 수 있다.
국가원수 대통령묘
*이승만 (1965년 07월 19일 서거, 같은 해 07월 27일 가족장)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283-18 (국립서울현충원 독립묘역)
*박정희 (1979년 10월 26일 서거, 같은 해 11월 03일 국장)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290-7 (국립서울현충원 독립묘역)
*윤보선 (1990년 07월 18일 서거, 같은 해 07월 23일 가족장) 충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34-2 (사설가족묘지.보호미지정)
*최규하 (2006년 10월 22일 서거, 같은 해 10월 26일 국민장) 대전시 유성구 갑동 111-27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 1호)
*노무현 (2009년 05월 23일 서거, 같은 해 05월 29일 국민장) 경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21-7 (사설묘지, 국가보존묘지 1호)
*김대중 (2009년 08월 18일 서거, 같은 해 08월 23일 국장)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299-13 (국립서울현충원 독립묘역)
*김영삼 (2015년 11월 22일 서거, 같은 해 11월 26일 국가장)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222-4 (국립서울현충원 독립묘역)
1. 이승만 대통령 묘소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독립사상을 전파하고 민족계몽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 외교활동을 펼치던 중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1948년 제헌국회의장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거치면서 해방직후의 혼돈을 극복하고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졌다.
6·25전쟁의 국난을 극복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반공 포로를 석방하였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미동맹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4·19민주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뒤 하와이에서 생활하다 1965년 7월 19일 서거하여 동년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최초로 안장된 국가원수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내외분 묘
大韓民國 建國 大統領 雩南 李承晩博士는 本貫이 全州이며 朝鮮朝 太宗王子 讓寧大君의 十五代孫인 敬善公과
어머니 金海金氏의 외아드님으로 1875년 3월 26일 黃海道 平山郡 馬山面 大慶里 ?內洞에서 탄생 하시었다.
1919년 三一독립운동후 大韓民國 臨時政府의 初代 大統領에 추대되어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셨고 1945년 민족해방
후에는 美蘇양군의 분할점령과 강력한 국제간섭속에서 민족을 領導 국토분단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민족자결의
자율적 정부수립운동과 탁월한 외교 끝에 1948년 制憲國會의장으로 民主憲法을 제정하고 初代 大統領에 당선 정부를
수립하여 大韓民國의 건국을 세계에 선포하시었다.
1950년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을 격퇴하며 1960년까지의 대통령 재임중 나라의 안보를 공고히 하고
국가발전의 大本을 확립하여 民族史上 처음으로 자유민주국가 창업을 이룩하시고
1965년 7월 19일 美洲 호놀룰루市 마우날라니 병원에서
享年 91세로 천수를 다하시니 전국민의 애도속에 7월 27일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시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女史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市에서 1900년 6월 15일 루돌프 도너 公과
프란체스카 게르바르트 女史의 셋째따님으로 태어나시어 李承晩 博士와 1934년 10월 8일 뉴욕市에서 혼례를 올리셨으며
독립운동가와 大統領의 아내로서 극진한 내조와 근검절약의 귀감이시더니 1992년 3월 19일 梨花莊에서
享年 93세로 서거 3월 23일 夫君 곁에 안장되시다.
유족으로 嗣子 仁秀 子婦 曺惠子 孫子 丙久 丙朝가 있다.
1998년 光復節에 政府와 國民의 정성을 모아 세우다.
세계를 움직이신 웅대한 기상이시여
거룩한 나라사랑 민족의 은인이시여
아무도 범할수 없던 순수하고 고결한 영원한 한국인이시여
반도산하 읊으신 민족시인이시여
오늘도 임 그리며 오가는 동작의 성지에
주님의 은총중 영복을 누리소서
一九九八년 광복절에 정부와 국민의 정성을 모아 세우다
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한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만나
1934년 10월 8일 뉴욕시에서 결혼하고 1948년 영부인이 되었다.
1992년 3월 19일 이화장에서 향년 93세로 서거하여 3월 23일 가족장으로 이 곳에 합장되었다.
2. 박정희 대통령 묘소
박정희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에서 출생했다.
1963년 대한민국 5대 대통령에 취임해 연이어 9대 대통령까지 역임하는 동안 수차례에 걸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산업입국을 다지는 한편,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한 새마을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여 가난을 극복하고 ‘하면된다’는 국민적 자신감을 일깨움으로서 우리 조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여
대한민국 선진화의 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오늘날 우리 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율곡계획을 집념 있게 추진하여 국방력 증강 및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서거하여 11월 3일 국장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25년 11월 29일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육영수 여사는 영부인이 된 후 각종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앞장섰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중 북한의 사주를 받은 괴한의 저격으로 서거하여 8월 19일 국민장으로 이 곳에 안장되었다.
그래서 합장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대통령 육영수 영부인 묘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은 본관이 고령이며, 직강공의 26세손이신 박성빈공과 수원 백남의 여사의 네째 아드님으로
1917. 11. 14.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태어나시어 1945년 건군과 함께 입대
1961년 5.16혁명을 주도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되시고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 1963년 제5대로부터 1978년 제9대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을 역임하시는
동안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서 오천년 이래의 가난을 물리치시고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닦으시어 세계속의
풍요한 한국으로 부각시키셨으며, 겨레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시는 등 민족중흥을 이룩하신
영도자로서 민족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시고
1979. 10. 26. 서울에서 향년 61로 서거, 삼천칠백만 온 국민의 애도 속에 11월 3일 국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시다.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관성 육종관공과 경주 이경령 여사의 둘째 따님으로 1925년 11월 29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시어 1950년 12월 대구에서 혼례를 올리셨으며 1974. 8. 15. 서울에서 향년 49세로 순국
8월 19일 국민장으로 박정희 대통령묘 왼편에 쌍분으로 안장되시다
1980년 2월 2일 온 국민의 뜻을 모아 세우다.
대통령 임기중에 일어난 국장이기에 영구차를 보존하고 있으나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으로서 그리좋은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3. 김대중 대통령 묘소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 1월 6일 전남 신안 하의도에서 출생하여 1961년 민의원, 1963년 제 6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7, 8, 13, 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세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를 딛고 1997년 대통령선거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오랜 기간의 정치적 역경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이 땅에 정착시킨다는 일념으로 헌신했다.
취임 후 1997년부터 시작된 외환위기의 극복을 위해 금융, 기업, 공공, 노동 4대 분야 개혁을 단행하고
정보화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국민기초생활보장과 자율적 문화정책을 통해 우리나라를 복지, 문화국가가 되게 했다.
2000년 6월에는 분단 55년만에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켰으며, 그해 12월에는
민주주의, 인권, 평화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09년 8월 18일 서거하여 8월 23일 국장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묘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후광(後廣) 김대중 선생은 본관이 김해(金海) 이시다.
아버지는 김운식공이시고 어머니는 장수금여사이시며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나시었다.
1952년 정계에 입문하신 후 낙선을 거듭하다 1961년 인제에서 첫 국회의원에 당선되셨으나
5.16 군사정변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 당하셨다.
이때부터 행동하는 양심의 정치인으로 민주주의, 인권, 평화통일을 위해 매진하셨고 일생 동안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셨다
6년의 감옥생활과 수십년 동안의 망명, 연금, 감시를 당하는 고난 속에서도 의회주의 원칙에 충실하며
지방자치 실현과 국민통합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셨다.
1956년 토머스 모어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으시고 깊은 신앙심으로 평생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시었다.
숱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정치보복을 하지 않고 용서와 화해를 몸소 실천하셨다.
1998년 첫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로 대통령에 취임한 후 경제위기의 국난을 극복하였고 우리나라를 민주주의와 인권국가
경제와 사회복지 선진국, 정보화 강국으로 이끌었고 자주 외교를 펼쳐 국격(國格)을 높였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반세기 동안의 적대감을 녹이고 지속적인 햇볕정책으로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하는 평화의 시대를 여셨다. 같은 해 12월에는 민주화와 인권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03년 2월 퇴임하신 후 세계 평화와 민족의 화해를 위해 헌신하던 중에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로 서거하셨다.
온 겨레와 세계지도자들의 애도속에 8월 23일 국장의 예로 현충원에 드시어 하느님의 품에 안기셨다.
3. 박정희 김영삼 묘소
김영삼 대통령은 1928년 12월 4일(음) 경남 거제에서 출생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최연소 최다선을 기록한 대한민국 민주헌정사의 상징이자
30여년에 걸쳐 국민과 함께 독재권력에 항거하는 민주화투쟁의 선봉에선 지도자였다.
1993년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써 32년만에 역사적인 문민시대를 열었다.
신한국창조를 국정목표로 군의 정치개입을 영원히 차단하고, 개혁 중의 개역인 금융실명제를 단행했으며,
지방자치 전면실시, 역사바로세우기, 세계화, 정보화 정책 등 과감하고 획기적인 변화와 개혁을 추진했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해 내고자 하는 신념 하나로 일생을
오직 대도무문의 삶을 살다가 2015년 11월 22일 서거하여 11월 26일 국가장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김영삼대통령묘는 하나회를 척결했다는 자긍에서인지 장군묘역을 내려다보는 위치의 높은곳으로 비석 또한 무게감을 주었다
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
4. 최규하대통령 묘소
국가 원수묘역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노은1동 국립대전현충원內 장군 제1묘역과 국가유공자 묘역 중간 위치에
2004년 6월 조성된 것으로 최규하 대통령이 처음이다.
이곳이 국가 원수 묘역으로 선정된 것은 1990년 한 풍수지리학자가 대전현충원을 답사한 뒤 祖山으로 계룡산을 두고
宗山으로 문필봉과 장군봉을, 舟山으로 옥녀봉을 두는 이 곳을 명당 중의 명당으로 선정했고
이후 수차례 검토를 거쳐 국가원수 묘역 최종 조성지로 결정되었다.
원수 묘역은 현재 3곳이 더 마련되어 있지만 대통령들이 사후에
아마 이곳보다는 접근이 편리하고 등급이 높은 서울현충원을 더 선호하지 않을까?
崔圭夏(최규하, 1919 ~ 2006년) 본관은 江陵(강릉).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이며, 제4공화국의 2번째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영어를 가장 능통하게 구사한 인물은 이승만 대통령
그 다음으로 최규하 대통령이 꼽힌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대통령직위가 최단명으로 끝난 비운의 대통령으로 부인 홍기여사와 함께 국가원수 묘역에 안치되었다
최규하 대통령 영전에라는 추모글은 대통령 비서관을 지낸 정동열 신두순 이재원씨가 글을 썼다
평생을 국가보위와 경제발전에 헌신 봉사하고 선공후사와 근검절약을 온 몸으로 실천해 국민 모두의 귀감이 됐다
국가변란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국가원수로 사명의 짐을 지고 국권수호에 진력했으며 세속의 세찬 바람에
태산같이 의연함을 보였다
한국외교의 거목으로 국위선양에 기여하고, 총리로 확인행정을 통해 국민과의 약속을 천금같이 여기는 공직자였고
40년 간 하루도 결근하지 않은 근면성과 청렴결백의 미덕은 국민의 표상이었다"
일반 관료로 시작해서 대통령까지 올라 갔지만 임기중에 일어난
12.12나 5.18에서 책임있는 위치에서 무방비했고 1980년 대통령직에서 하야 하는등
당시 상항에 대하여 증언 및 진술을 거부하였다
그는 사유를 밝히지 않는 것은 전직 대통령이 증언에 응하는 악례를 남기지 않는 것이라며 거부의 이유를 피력하였다
국민 여론은 그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으며 그는 권좌를 내주고 서교동 자택에서
25년간 침묵과 운둔으로 비운의 삶을 산 불행한 대통령이었다
원주초등학교에 최규하기념관이 세워졌다.
5. 윤보선 대통령 묘소
윤보선 대통령묘소는 충남 아산시 동천 2리 비룡산에 있는 가족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아산 시청에서 둔포방향 45번국도 6km 지점에 봉덕사로 진입하는 비보호 좌회전 표지를 따라 1키로 들어간다
묘소 입구에는 비각이 세워져 있으며 敬天孝親(경천효친) 國泰民安(국태민안) 이란 편액이 걸려있고
비각안에는 윤보선 대통령 조상님들의 공적비가 여러개 있다
돌계단이 가파르고 제법 길어서 좀 쉬었다 올라가야 가족묘를 만날수 있으며
부친과 고조부 묘를 지나서 맨 윗쪽으로 윤보선대통령 묘소가 있다.
조상들 묘소보다 윤보선 대통령 묘소가 더 위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어깨에 무등 태우고 계신 모습과 같지 않냐고 평소에 말씀하셨다고 전 한다.
다른 대통령묘와는 달리 국가에서 관리하지 않아서 묘지기가 없다
윤보선 대통령은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1960년 6월 제2공화국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제 권력구조는 내각제로 변경되어 그해 8월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치러졌다
제4대 대통령 선거는 12명의 후보가 난립이었으나
참의원과 민의원 양원합동회의에서 윤보선은 1차 투표에서 82.2%로 무난하게 당선이 되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민주당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으나 정변주체세력과의 의견 차이로
결국 1962년 3월 하야했다. 그리고 당시 정변주체세력들의 계엄령사후 추인과 정변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했으며
유엔군 사령관과 미국 대사의 군사정변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에 대한 요구 역시 국군간의 교전과 이로 인한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거절했다고 한다. 재임기간 약 19개월 (1960년 8월 13일 ~ 1962년 3월 23일) 이다.
그후 1963년 민정당을 창당하여 그해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출마하여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실패했고 이어서
다시 1967년 2월 제6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또 낙선했다.
그 이후는 재야 정치인으로서 윤보선 대통령은 퇴임후 5·16 군사정변을 방조 내지는 묵인했다는 의혹의 중심에 서 있었다
국립묘지를 마다한 채 이곳 선영에 본인이 직접 묫자리를 준비해 두었다고 하는데 왜 국립묘지를 마다 했을까?
비석은 1990년 윤보선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난 10년 후인 2000년에 자손들이 세운 것이다
회고록에 의하면 집안은 3백석 이상을 걷는 대농 집안에서 태어났고 선대(先代)는 대대로 벼슬을 해온 집안이었으며
그가 부러운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안국동은 99칸의 대저택이다.
그러나 아산시 둔포에 있는 윤보선 대통령생가는 관리하는 이가 없어서 적막감이 돈다.
6. 노무현 대통령 묘소
노무현대통령의 묘역은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21-7 번지에 국가보존묘지 1호 시설묘지로 묘역으로 지정되었다
노무현(盧武鉉[1],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경상남도 김해 출신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4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가 그만 두고 부산서 변호사로 개업하여 여러 인권사건을 변호하였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 제13대 총선에 출마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며 5공비리 특별위원으로 활동했고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고 새천년민주당으로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퇴임후 KTX 를 타고 고향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특정 누리꾼들에게 자연인으로 돌아간 친근한 대통령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2009년 박연차게이트에서 가족들이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노무현 대통령도
검찰 소환을 받았으며 가족들이 재차 소환을 앞두고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 노무현 대통령 사망과 관련하여 각종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봉하마을에는 400만 추모객들에 발길이 이어졌고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특히 퇴임직후 대통령 기록물을 사사로이 봉하 마을로 옮긴 건에 대하여 회수 조치를 하는 와중에서
신·구 정권간 대립과 갈등조짐으로 빚었으며 기록물 유출의혹사건은 노무현대통령의 죽음으로 검찰에서 불기소 종결하였다
2009년 노무현재단이 출범하여 생가복원과 함께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노무현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매일 발길이 잦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라는 노무현대통령의 묘비 이름이 새겨진 너럭바위가
보기에는 웬지 무거워 보였다, 그래서 세워 노면 어떨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 그가남기고간 유서 한장 -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묘비에서 약 200미터 거리에 문제가 된 부엉이 바위가 보인다.
이승만,최규하,박정희대통령은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다.
서울 국립현충원은 성향을 달리하는 정치세력들에 이념 갈등에 각축장으로 변질되고 있다.
유력 정치인들은 국민적지지나 자신의 위상을 위해 현충탑 분향은 의례적일뿐
특정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며 정치 색깔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아직도 평가에 호의적이지 못한 채 냉대를 받고있다.
그 반대 급부에 있는 사람은 상당히 우호적이다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신성한 곳이 어쩌다 정치적 연출과 이념 대립의 공간이 되었을까
바로 안타까운 우리의 정치 현실이다.
국가와 국민만 바라보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투철한 국가관이 아직도 부족하다.
solsae k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