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노인병원에서 솔새김남식
재종 형수가 뇌신경 마비로 경산 노인병원에 오랫동안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모처럼 시간을 내서 며칠 전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는 여러 번 와봤지만 아직도 지리를 잘 모르겠다. 역전에 도착하면 마중 좀 나오라고 열차에서 조카에게 전화를 했더니 가게일 때문에 나올 수가 없다고 하니 투덜거리며 수성구 상동 시장까지 택시를 타고 찾아갔다. 형님 내외는 상동 시장에서 채소 가게를 수 십 년 하면서 다섯 자식을 자수성가 시켜놓고 이제야 살만하니까 형수가 아프다고 한 걱정을 하셨다. 나이 사십이 훌쩍 넘은 조카는 아버지 가업을 받아 시장에서 두부공장 일을 하고 있었다. 형님 댁에 도착을 하자마자 화가 나서 한마디 쏘아 부첬다. “네가 못 나오면 네 처라도 마중 보내야지.” 그러자 조카는 죄송하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 한다. 아들은 회사를 다니다가 제 힘에 못 이기고는 얼마 전에 사표를 내고 이제는 아버지 가게로 매일 출근을 하다고 이야기 한다. 조카들은 아파트에 살고 형님 내외는 가게가 있는 시장통 일반 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주택은 아주 옛날 집으로 다 낡았다. 그런데 이 노인 형님은 마누라가 아픈 뒤에는 혼자서 식사를 끓여 먹는다고 한다. 물론 며느리가 찬거리를 좀 봐 주겠지만 눈치를 보니까 고충이 많은 것 같다. 더 나쁜 것은 바로 아들 조카였다. 아버지 집에서 점심을 안 먹고 쪼르르 자기 집으로 거서 먹는다고 한다. 형님이야기를 듣고 보니 매 번은 아니겠지만 거의 그렇다는 말 같이 들려왔다. 물론 매일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각자가 편하게 식사를 한다고 하니 부자간의 정이 이럴 수가 있나 걱정을 하였다. 형수가 있었다면 그렇지는 않았겠지 하는 생각이었지만 하긴 우리 집도 한 지붕 세 가족이다. 각자 편한 대로 식사를 하니까 더 이상 우리집도 할 말은 없다. 대구에서 경산병원을 가기 위해서 질부가 자동차를 가게로 갖고 나왔다. 그래서 질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경산으로 내려갔다. 차안에서도 형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무언가 느낌을 알고 병원 갔을 때는 이미 뇌가 절반 이상이 고장 이였다고 한다. 가게 일을 하는데 자꾸만 계산 착오로 잔돈을 이상하게 내 주기고 하고. 때로는 헛소리. 하늘을 멍하니 바라본다든가 가끔 이상한 소리도 하기에 처음에는 그냥 대수롭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 했다고 한다. 형님의 이야기는 주위에서 누가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병을 일찍 발견 할 수 있었다는 말 이었다. 특히 쉬는 날도 없이 장사에 바쁜 날을 보내다보니 그런 것도 모르는 자신의 무지를 후회하고 있었다. 약 30여분 차를 타고 병원에 들어서니 형수는 말도 못하고 누가 왔는지도 모르는 혼수상태에서 눈만 멀거니 뜨다가 아래로 그냥 감아내는 뇌신경 마비 환자였다. “여보 나왔어“ 형수는 눈만 멀거니 뜨다가 다시 아래로 저절로 감긴다. 남편이라는 형님은 아내를 바람 쏘이겠다고 헬 차에 태운다. 그냥 보기에 너무 안쓰러웠다. 처음 일 년은 병원에 넣기가 싫어서 혼자 집에서 간병을 하다가 힘이 너무 들어서 여기에 모셨다고 한다. 지금 상태는 수술도 하지 못한 채 언제 퇴원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아니 종말을 볼지도 모른다고 눈시울을 붉힌다. 운전을 할 줄 모르는 재종형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대구에서 시내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서 혼자서 이곳에 온다고 한다. 아들은 두부공장 가게 일을 하고 있으니 며느리에게 일일이 자동차로 함께 가자고 어려워서 말을 못 한다고 한다. 왜 운전을 진작 배우지 않았을까 후회도 했단다. 쓸쓸히 누워있는 아내를 위해서 형님은 또 한 마디를 한다.
“밥 먹었어...나야 눈 좀 떠봐......” 이 소리에 억장이 무너지듯 내게도 눈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깡마른 아내 얼굴을 보고는 형님은 자기의 윗저고리 소맷자락으로 아내의 눈물을 닦고 자신도 닦는다. 아마 말은 하지 못해도 남편의 소리는 들었던 것 같았다. 식사는 호수로 하고 소변도 호수로 하고 있었다. 아내의 손을 만지고 얼굴을 쓰다듬고 볼을 부비거나 손을 만지면서 갖가지 애정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니 바라보는 내 마음도 아팠다. 형님은 “고생을 시켜서 미안해” 라는 말도 간간이 하며 아내에게 연신 스킨십을 하고 있었다. 1960년대 누구나 어려웠던 그 시절이 있었다. 형님은 배우지도 못한 무식으로 막노동 공사판 일을 하며 객지로 떠돌이로 생활 하다가 청도에서 여기까지 와서 정착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노동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처서 호구지책으로 처음에는 길거리 좌판에서 장사를 했다고 한다. 다행히 장사가 잘 되어서 크게 식료품가게를 하게 되었고 그리고 두부공장이 잘될 때는 직원을 두고 일 했다고 하며 지금은 마누라 생각뿐 가게 일을 뒷전이라고 한다. 경산병원은 경북도립노인 전문병원으로 다 그만그만한 사연을 않고 입원해있는 사람들이다. 뒤를 돌아봐도 앞을 보아도 노인 병원으로 말 그대로 머리가 백발이 된 노인들 뿐 이였다. 마침 점심시간이라서 턱받이를 차고 간병인에게 식사를 받아먹는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밥을 흘리고 투정하고 소리 지르고 모두가 어린 아이들처럼 정신이 없었다. 쓸쓸한 노년을 이곳에서 보내는 많은 노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이 살아 온 지난 삶을 뒤 돌아 보았을 때 정말 행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곳에 있는 환자들 편에 서서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네시간을 병원에 있으면서 간병인들에게서 애절한 여러 사연을 들을 수가 있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 미래도 은근히 걱정이고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이지만 또한 경제력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노인을 갖다 놓을 정도면 다들 살만한데 왜 그럴까 하고 잠시 창밖을 보는데 보이는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노인네, 죽기만 해라. 갖다 묻을 게." 바로 장례식장 건물이 입원 동 바로 앞에 있는데 왠지 보기가 그냥 싫었다. 다른 일반 병원에서 와는 달리 장례식장을 바라보니 씁쓸한 느낌에 가슴이 메여왔다. 이곳에 온 환자들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이삼년 안에 이곳을 떠날 사람들로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잠시 쉬어가는 이정표의 하숙집이다. 그런데 정말 내가 봐서는 모두가 내일이면 하늘로 갈 것 같은 노인들로 병원엔 가득했다. 사실 그런데 질부가 나를 더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병원에 시아버지와 당숙 아재를 내려놓더니 아들이 학교 갔다 돌아오면 점심을 줘야 한다고 하며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고는 쪼르르 나가는 것 이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 세 시간을 훌쩍 넘겨서 오후 세시쯤에 병원에 도착 했으니 배가 고파서 짜증은 났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사실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하려고 했지만 형은 형수 곁을 떠나지 않을뿐더러 또한 생각이 없다고 한다. 당신 마누라가 아픈데 자신의 목에 밤이 넘어가겠냐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자네나 가서 점심 먹고 오라는데 할 수 없이 배가 고팠지만 질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결국 늦은 오후에 질부 차로 타고 다시 대구로 나왔다. 배속에서는 쪼르르 소리가 나는데 대구로 나오는 길 차안에서 자기 친구하고 전화하는 모습이 다시 거슬렸다. 시아버지 뻘이 둘이나 타고 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대구까지 나오는 시간 내내 수다를 하는데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고 눈꼴 찌푸리며 한대 쥐여 박고 싶었다. "어머님이 아프셔서 걱정 이예요." "질부가 두 집 살림하는 라고 고생이 많네." 시어머니를 좀 걱정하는 이런 말이 오갔으면 했지만 더 기막힌 것은 전화를 다 하고 나더니 묻지도 않은 자신에 친구 이야기로 이런저런 불필요한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좋은 게 좋다고 그냥 억지로 말대꾸 해주긴 했어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대구에 도착하자 웬 걸 자기 집 아파트로 가는 게 아니고 차는 시장 통 시아버지 집으로 가고 있었다. 어찌하나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맞이한 점심은 시장통 식당에서 배달된 7000원 짜리 순두부찌개였다. 조카들 집 구경을 시켜 주면서 된장국이라도 손수 해주는 걸 먹고 싶었는데 실망이었다. 사실 가자고 해도 사양을 할 요량이었다. 조카와 질부에게 한마디 야단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들이 마누라에게 쥐여 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은 영 안 좋았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며느리와 아들이 어머니 구박 한다는 게 사실 같기도 하고. 아마 다는 아니라고 부정을 하면서도 요즈음 세대는 거의라고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 잔정이 없는 아들과 멋대가리 없는 아들, 그리고 마누라 눈치 보는 아들이 요즈음 세태라고 말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처갓집에 들어가 살면서 시댁은 멀리서 구경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사내들이 제구실을 못하는 시절이다. 사실 여행지에서 봐도 맛있는 식당을 가 봐도 아들내외 보다도 딸 내외와 같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어찌 보면 아들 가진 게 죄 일수 밖에 없는 세상으로 바뀐 지가 오래 되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지만 아들은 대게 어떤 말이든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은 게 보통이다. 그래서 왜 자식을 키워야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재종형 이 양반 거의 혼자서 식사를 한다고 한다. 딸들은 시집가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식품도매상 큰 가게를 내주고 지금은 뒷전이라고 한다. 며느리를 피붙이가 아니기에 욕하지는 않는다. 아들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며느리 자신은 그래도 시부모에게 잘 하고 있다고 생각 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러지 않았다. 옛말에 시아버진 어딜 가나 골치 덩어리라고 한다. 남자는 늙어서 마누라가 없으면 천덕꾸리라고 했던 생각이 났다. 그래서 옛날 할머니들은 영감을 먼저 보내고 내가 죽어야지 늘 그랬다고 하는데 그래서 부부는 여자 나이가 남자보다 적은 이유가 혹여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 질부가 점심상 머리에서 정말 듣기 싫은데 질부는 시아버지에게 잘하고 있다고 묻지도 않은데 자랑을 하고 있기에 그 모습이 얼마나 미웠던지 조크를 주자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한 느낌이었다. 그러자 나는 서울 올라가겠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 앞에서 그냥 헤어지자고 했지만 형님이 동대구역까지 같이 따라 오는 것 이였다. 서울 가는 KTX 차를 예매하고 잠시 이별의 순간의 이였다. 작별을 해야 하는데 발길이 좀처럼 떨어지지를 않았다. "동상~ 차비 못 줘서 미안해" 이 양반 얼굴에 이미 눈물이 피잉 돌고 있었다. 아마 지신의 신세가 처량했던 것 같았다. "........형님,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 하세요" 나이 먹는 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인가 쓸쓸함. 외로움. 고독. 소외감이 바로 내 이야기처럼 밀려왔다. 나이 들어서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할까 우리는 그것을 미리 연습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더 막막하고 답답할 때가 있다. 문득 생각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매표소로 가서 표를 반환하고 돌아왔다. “형님 막걸리 한 잔 하러 갑시다.“ “자네 오늘 서울 올라가지.“ “오늘 안 갈래요.” 우리는 동대구역을 다시 뒤 돌아 나왔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상동시장 입구에서 내려서 술 한 잔 할 수 있는 적당한 곳을 찾았다. 내가 좋아하는 막걸리 집으로 들어가서 동태찌개 하나를 시켜놓고 형님 가슴에 담은 푸념을 들어 주어야 했다. 사람의 가슴에 맺힌 한은 누군가가 그것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큰 병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아내와 변변히 여행 한번 다녀 오지도 못 했고. 맛있는 것 먹지도 못 했으며 고생 끝에 형수가 저러니 너무 속상 하다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식물인간 형수를 어찌하면 좋으냐고 하며 가슴을 친다. 그리고는 당신 마누라처럼 본인이 저 정도가 되면 약을 먹고 죽겠다는 서운한 말도 내게 서슴지를 않는다. 병원비가 웬만한 사람의 한 달 봉급 이라고 한다. 서로가 아프면 아들도 며느리도 소용이 없으며 배우자가 최고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형님과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둘이서 비틀거리며 집에 오니 아들 내외가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술기운에 나는 한마디 야단을 하고 싶었다. “소주는 안 먹을 거고 맥주 좀 사 와라.” 조카들 내외가 내 눈치를 본다. 질부가 나가더니 맥주와 술안주 할 과일을 사갖고 들어왔다. 술이 잔뜩 챈 형님은 그냥 쓰러져 옆에서 자고 있었다. . 조카 내외와 셋이서 한 잔 두잔 그리고 석 잔에 술이 목으로 넘어 간다. 이런저런 일상적인 대화를 시작을 하면서 “니들이 그러면 못써.” 라고 잔소리를 끌어 부었다. 자식이 그러면 안 된다며 횡설수설하는 내 이야기를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사뭇 죄송하다고 하며 빈 잔에 술은 잘도 따르고 있었다. 나이도 이제 먹을만큼 먹었으면 무언가 효도라는 걸 알지 않겠냐고 야단도 처 보고 내가 재당 조카들에게 잔소리 하는 게 옳은 일인지 생각하며 다시 달래기도 했다. 나중에 후회 하지 말고 부모님 잘 모셔라. 며느리 노릇도 잘 하고. 딸이 며느리 되고 며느리가 결국은 딸이 되는 것인데 부모에게 자주 관심 좀 갖아야 한다고 미움 받을 욕만 밤이 이슥하도록 조카 내외에게 실 컨 하였다. 이 양반은 한쪽에서 코를 골며 그간 피곤했던지 쿨쿨 자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야단할 자격도 없으면서 술김에 나도 모르게 그런 것 같다. 그 다음은 나도 술이 취해 쓰러져 자고 말았다. 밤이 이슥 하자 형님과 나는 가게 집에서 자고 아들 내외는 자기들 아파트로 돌아갔다. 아침에 일어나니 조카가 해장국 먹으러 가자고 한다. “조카! 어제 내가 술이 많이 취했지. 미안하네.” “죄송합니다.” 왜 너한테 잔소리 했는지는 나중에 반듯이 알게 되며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 한 것에 대하여 꼭 나중에 후회를 한다며 아버지에게 잘하라고 조카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조카들도 조금은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은데 하루아침에 효도하는 선한 마음으로는 돌변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노후는 누구나 저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지금은 집을 나서면 동네 어귀마다 요양원이 서너 개 씩으로 최신식 고려장 문화가 자리한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그러니 내 자식이 효도를 정말 잘 할지는 누구도 모른다. 여하튼 아침 해가 머리위에 올라 와 있을 때 대구 형님 댁을 나섰다. 아들도 며느리도 소용이 없으며 서로 의지하며 사랑하는 배우자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예정에 없던 1박 2일로 대구를 떠나 기분 좋은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사랑이란 젊은 연인들 사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진짜 사랑은 가족에게 반듯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부사이는 사랑의 힘으로 서로 의지하고 부모자식은 보은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인연은 건강하고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는 인연은 아름답습니다." 병원의무실에 있는 표어를 다시 한 번 새겨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