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보고싶은소녀J ..(18.) 솔새김남식
텐지시 서청개발구역 공단지역에는 세찬 바람과 함께 큰 거리는 오가는 사람이 없어서 을씨년스러웠다.
공산국가의 특이한 빨간 벽돌집, 그리고 건물에는 한문 간판과 중국 오성기가 무심하게도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봄이되면 거센 바람 바람 때문에 사람들이 양파망을 머리에 쓰고 다니는 모습에서
웬지 촌스런 측은한 느낌이 들었다
텐진시는 년 강수량도 500mm 정도로 매우 건조 하기 때문에
자동차가 지날때 마다 비포장도로나 아스팔트 길에서도 뽀안 먼지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해외 근무를 하게 되었다.
우리가 일본으로 부터 기술을 이주 받았던 것처럼 대부분 기술 이전 목적이기에 중국 사람들에게
기술을 가르처 주는 조건이라서 융슝한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한국에서 보다도 더 아주 재밋는 생활을 할 수가 있었으며
저녁에 일이 끝나면 으례히 유흥가를 돌아 다녔고
일요일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곳저곳 중국내 여행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퇴근후에는 한국 식당이나 술집 무도장에 찾아 가면 여걸로 부터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월급은 한국에 있는 회사에서 집으로 직접 보내지만 이곳에서 받는 번외 수당은 유흥비로 모두 탕진하였다
일주일에 두세번은 한국주점에서 1차 회식을 하고 2차는 나이트로 놀러 다녔다
중국에 와 있는 한국 사람들은 미희들과 술 한잔하며 춤추는 것으로 그렇게 대부분의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은 삐뚤어진 생각이지만 그것은 아마 부와 가치라고 생각 할까
그 당시 중국의 여공 월급이 보통 600원(한국돈 6만원)을 받았다
간부의 남자들 급료가 1500원 정도 였으니 우리가 받는 급료와는 아주 엄청난 차이었다
당시 중국 인민들이 먹고 사는 일은 우리나라 돈 천원이면 한국에서 만원어치의 생필품을 살수 있는것과 같다
그러나 문화생활에 들어가는 비용은 우리나라 물가 수준이 같았다
즉 여가와 문화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인민이 대부분 이란 뜻이고 지금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중국은 1960년대와 2000년대가 같이 공존하는 나라였다
70년대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건너 와서 마산 수출지역에서 돈을 물 쓰듯이 우리도 그리했던 것이다
그무렵 조선족을 멸시하고 국내에서도 조선족을 노예처럼 일만 시키고 월급은 주지않고 불법체류자로
추방하는 일이 많아서 중국에서 한국 사람들에 인식이 그 당시 별로 좋지 않았다
어찌보면 같은 민족이지만 회사내에서 뭐가 없어지면 서로 의심을 하기도 하고 그랬었다
중국은 술집에서 디스코 춤을 추는 우리와는 달리 대부분 사교 댄스가 주로 더 많았다
춤 파트너는 조선족 아가씨로 아주 나이 어린 17.8세의 애띤 소녀들로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었다
그리고 당시 대만가수 등려군의 노래 월랑대표아적심은 대단한 인기였다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한다는 이 노래는 주점에 가면 무도춤을 추면서 애창곡으로 모두 불렀다
노래는 들으면 들을 수록 정말 가슴이 아프도록 여미여오는 노래였다
이제 한국을 떠나온지 여러 달이 지났으나 그녀가 보고 싶어도 참아야 했으며 연락 할수 없었다
아니 이곳 생활에 재미로 인하여 생각나지 않았으며 어느덧 세월은 일년을 보내고
휴가차 잠시 귀국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박동수가 회사에 사표를 내고 다른 직장으로 이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몇몇 사람들은 우리들에 관계를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나와 같이 근무 하기가 어렵게 되자 사표를 낸 것 같다고 한다
이직한 회사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찾아 갈 필요는 없었다
서로가 껄끄럽고 불편한 관계이기에 서울을 떠난게 아니가 생각 했고
더구나 내가 좀더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한게 아닌가 반성을 하였다
남편이 다른 곳으로 이직을 했으니 그녀는 이미 내곁을 떠났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못내 섭섭해 하였다
그녀가 근무햇던 성남에 있는 초등학교를 찾아 가면 만날 수가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가 편한대로 해 주는게 좋다고 생각하고 2주 휴가를 마치고 쓸쓸한 발 길로 다시 들어왔다.
중국에 들어 와서도 왜 그들이 내 곁을 떠났는지 여러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으나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나 그녀!
정말 보고싶은 그녀 였는데 그래서 그냥 가끔은 보고 싶을 때
한번씩은 만나서 회포를 풀려고 했는데
차 한잔으로 추억을 이야기하고 싶었던게 솔직한 내 욕심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인 여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남자들 입장에서 였다.
이제 그들이 내 곁은 떠났기에 그런 소박한 꿈도 산산히 부셔젓다
중국 연수를 마치면 내가 먼저 사표를 내고 다른 곳으로 떠나려 했는데 그녀의남편이 먼저 시행을 했다
오히려 그들이 내 곁을 먼저 떠났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으며 무엇 보다도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어느덧 세월은 다시 1년의 해외 연수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였다
이때 예기치못한 국내경제가 휘청거리는 IMF로 인하여 세상이 많이 변해 가고 있었다
복잡한 경제 불황속에 그녀를 찾아 볼 생각은 전혀하지 못 했으며 숨어버린 사람을 애써 찾을 필요까지 없었다
그냥 모른체 하는게 그들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 했다
그리고 2년 세월이 더 지난 후에 명퇴라는 올가미에 밀려서 본부장이라는 최종 직함을 마지막으로 퇴직 하였다
일순간에 실업자의 올가미에 갇히게 되자 새로운 삶에 복잡한 경제에 부딯치면서 마음에 여휴가 없었다
재취업과 창업으로 하루가 바쁘게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토록 보고싶고 만나야 했던 정말 보고 싶은 소녀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서 차차 잊혀저가고 있었다
세월은 그녀 소식은 잊혀지게 하고 있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늘 꿈처럼 그리워했던 첫사랑 소녀를 만났지만 내게 얻어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리움으로 머리만 더 복잡 해졌을 뿐이고 보고 싶지만 세월속으로 그렇게 잊혀가고 있었다
그녀와 쓸쓸한 이별을 두번씩이나 한 것이 된 셈이였다
첫사랑이란 어쩌면 그리움이라는 그것 하나만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다만 어딘가에 나처럼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고 같은 하늘 아래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겠지 하며
나는 그녀 행복을 영원히 이제는 빌어야 했다
다행히 다른 회사에 재취업을 해서 실업자 신세를 면하고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4년의 시간이 더 흐르고 이어서 2007년
구정 설이 지난 며칠뒤에 정말보고싶은 소녀의 소식이 다시 들려왔다
거의 10년만의소식 solsae kns
-> 노래를 따라서 불러보세요
1953년 대만에서 태어난 등려군은 아시아 최고의 가수로 자리 매하고 중국 본토까지 진출해서 명성을 떨치던 중
프랑스 남자친구와 1995년 태국의 한 호텔에서 의문에 심장마미로 42살에 죽었다
내 사랑은 저 달만이 내 맘을 알아 줄꺼라는
월량대표아적심(亮代表我的心)은 2001년 방송된 MBC 수목드라마 '네자매' 배경음악에 사용되면서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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