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生活수필

내 어머니

시인김남식 2011. 8. 2. 20:13
내 어머니 솔새김남식

 

내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내 어머니에 이야기이다. 어느 어머니인들 자식 키울 때는 그러하지 않을까마는 어머니에게는 늘 미안함을 갖고 평생 지내야했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될 나를 8남매의 막내로 불혹의 나이에 나를 낳아서 어려웠던 시절 온갖 고생을 다 하셨다. 문제는 내가 어려서부터 이상하게 잔병으로 유년기를 보냈으며 나이가 들면서는 여러 가지 합병증이 생겨서 더욱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병원비 때문에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럴 때 마다 외톨이가 되었고 쓸쓸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기에 책과 그림으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어느 날 일기

『변변히 치료도 하지 못한 채 누워 있는지가 두 달이 더 지났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걷지도 못하는 나를 시골집으로 데려 온 아버지는 방구석에 그냥 내버려 두고 있으니 아픈 게 죄이기에 나는 할 말이 없다. 궁둥이에 고름이 가득 있어서 걷지 못하고 누워 있는데도 누구하나 걱정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낳는 병인 줄 알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게 못내 서운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나를 업고 청주에 있는 용하다는 춘광이라는 한의사를 찾아 갔다. 한의사는 나쁜 피가 다리에 몰려 있어서 그렇다고 하며 방바닥에 나를 엎어놓고 궁둥이와 다리와 등에 여기저기 침을 놓기 시작하는데 아픔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지만 독하게 마음먹고 나는 울음을 꾹 참았다. 내가 속으로 우는 줄 모르고 의사는 그놈 참 독하다는 소리를 한다. 얼마나 내겐 아픔이 와야 다리를 고처서 걸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악으로 견디어야 했다.

붉은 피고름이 종지 한 그릇이 나왔다며 어머니는 내 고통을 아시는지 눈물로 울먹인다. 기차를 타고 와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밭에는 푸른 보리가 자라고 이젠 완연한 봄이었지만 내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하루 건너씩 침을 맞으러 시골 역 까지 걸어서 청주로 나가야 했다. 손수레를 타고 가기도 하고 어머니가 나를 없고 가기도 했다. 어머니는 나는 업고 가던 어느 날인가 밭두렁에 나는 내려놓고 한탄 하신다.

"너 키우느라 내가 골병들어 죽겠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 어머니 목소리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침을 맞고 집에 돌아 온 어머니는 어디서 구했는지 약국 단지에 박쥐를 삶고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만 산다는 박쥐를 삶는 냄새는 정말 고약했지만 그걸 먹어야 한다고 하니 억지로 코를 막고 먹을 수밖에 없었다. 침을 맞기 시작한지 보름 만에 문고리를 잡고 있는 힘을 다해 겨우 일어섰다. 일어서지도 못하던 절름발이가 일어 설 수 있다는 것에 게 어머니도 놀라고 나도 놀랬다.

"이제야, 이제야 일어서 다니” 하시며 어머니 눈에서는 눈물이 고였다. 나는 어머니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내가 병석에 누운 지 5개월 만에 겨우 문고리를 붙잡고 일어선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얼마를 더 기다려야 걸을 수가 있을지!”

온 가족이 함께 울었다. 산등성이에서 바라본 저녁노을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아주 오래전 일기의 일부이다.

내가 다리가 아프게 된 것은 초등학교 이학년 겨울방학 때 논에 발 스케이트를 타러 나갔다가 머리통만한 얼음 덩어리 위로 몇 사람이 함께 넘어지면서 내가 맨 아래 쪽으로 깔려서 넘어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둥이 쪽으로 넘어진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궁둥이가 벌겋게 부었지만 울지도 못하고 쩔룩거리며 집에 왔으나 식구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 아무런 치료도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열이 오르면서 궁둥이가 마구 붓기 시작했다 결국 동네의의 안내로 청주로 가보니 서울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한다. 어른들은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대수롭게 생각했는지 아무런 치료도 해주지 않고 일주일 만에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시작한 다리가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어영부영 집에서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하니 내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무지한 가난이 무엇인지 궁둥이에는 고름이 가득했는데 민간요법인 고름을 종지 뜸으로 동네의원이 마취도 없이 주사기로 뽑아야 했으니 그 아픔은 열 살의 어린 나 외엔 아무도 모른다. 무지한 아버지가 돈쓰기 아깝다는 핑계로 결국 지금은 불구의 다리가 된 것이다.

3개월간 고름을 빼고 다시 6개월을 침을 맞았다. 물론 학교는 못 다녔다. 그리고 지팡이를 짚고 절름발이로 6개월이 지나서야 온전히 걸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방광 뼈와 다리뼈가 튕겨 나가는 고관절이 어긋난 것을 수술로 치료 해주어야 하는데 어린나이에 그대로 아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앉을 때는 편한 책상다리 자세를 할 수가 없고 여자처럼 앉아야하는 불편함을 평생을 갖고 있다. 큰 불편함은 없으나 한쪽 다리는 발톱을 내손으로 구부려서 제대로 깍을 수가 없다. 특히 나이가 들어가니까 관절에 통증이 생기고 있는 것 같아 길을 걸을 때는 가끔 고관절이 엇물려서 발걸음이 엇박자를 놓기도 한다. 그럴 때는 다시 천천히 걸어서 다리를 안정시켜야 한다, 그래서 장애 등급을 받으려 했지만 고관절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때 그 무렵 그렇게 방광염. 주마담. 골수염. 결핵성 늑막염으로 15년을 더 고생했으니 나이가 드신 어머니를 여간 속상하게 만들었다.


내게는 어머니가 참 고마운 은혜의 분이다. 어머니는 내가 병원에 가는 일로 돈 때문에 아버지와 싸움으로 끼니를 거의 거르다시피 했다 아버진 돈이 없다고 학교를 못 가게 했지만 어머니는 학교 졸업은 해야 한다며 병원비와 수업료를 벌기 위해서 남에 밭일을 매일 하다시피 하였다. 어느 날인가 학교 갔다 와서는

"엄마 낼 수업료 안내면 정학시킨데"

그때는 왜 그렇게 학교가 야박했는지 모른다. 정학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 학교 서무실로 불러내서 피곤하게 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면 어머니는 또 남에 일을 가고 없었다. 등잔불 밑에서 공부 하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면 어머니는 또 남에 밭일을 나가셨다. 저녁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 손에는 어김없이 돈이 쥐어졌다. 우리 아버지는 천박한 촌로로써 오로지 술 밖에 모르셨고 맏아들 밖에 몰랐다. 제사를 얻어먹어야 한다는 유교적인 사고방식으로 당신 제사를 지낼 맏아들만 언제나 생각했고 재산의 이탈을 누구도 건들지 못하게 적극적으로 막았다. 지금 와서 생각 해 보면 그 절반도 제사로 받아가지 못 하면서 아버지는 왜 그랬는지 왜 나를 병신으로 만들었는지 지금도 서울 할 때가 있다. 어머니는 내가 시골 다녀가는 날이면 버선발로 동구 밖까지 마중 나 오셨고 조카들이 먹을까 봐 홍시 값을 장농에 몰래 감추었다가 옷을 여러 번 버렸다고 한다.


꼬깃꼬깃 쌈지 돈을 꺼내서 내게 주면서 건강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고 결혼해서 살게 되니까 양념장. 간식거리등 형수 몰래 먹을 것을 미리 감추었다가 버스 정류장으로 먼저 나가셔서 나를 기다리던 어머니였다. 어쩌다 다니러 서울에 오면 보따리가 여럿 이었고 오래 계시다 가라고 하시면 '아니다 오래 있으면 느이 형수가 아예 서울서 살라고 할게다'

'느그 아버지가 죽으면서 어디든 가지 말고 큰형한테 있으라고 했다. 그리 하시면서 일주일도 안 계시고 시골로 내려 가셨다. 우리 어머니는 80세에 세상을 뜨시면서 줄곤 막내아들만 걱정 하셨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내가 교통사고 등 위급한 상황에서 잘 벗어 날 때면 늘 어머니가 지켜주고 있다고 지금도 나는 믿고 있다. 내 어머니는 참 마음이 고운 분으로 인정이 많으셨다. 먹던 것도 남에게 나누어 주고 동네에서 으뜸이셨다. 차를 타고 가던지 길을 걷던 지나는 사람마다 내 친척처럼 아는 척을 잘 하셨고 손님이 와서 밥을 먹으면 꼭 반찬을 새로 만들어 주었고 밥은 다 먹으라고 먹던 밥에 덥석 물을 말아 주었으며 이불은 꼭 새 것으로 내 주셨다 예의 바르고 경오가 밝았다. 소화 불량으로 체한데 바늘로 잘 따는 동네 돌팔이 의사였고 어느 집이든 부부 싸움을 하면 들어가서 쌈을 잘 말리는 선수였다 나는 내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나는 모자랐습니다.


그것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아옵니다. 첫 월급 타던 날 어머니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워 주시니까 한번 끼고는 이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나중에 "느그 색시 줄기다." 하시면서 고운 손수건에 곱게 싸서 장농 깊숙이 넣어 두었던 우리 어머니이다 결국 그 손 가락지는 내 아내에게 돌아왔다. 어느 자식인들 내 어머니가 고마울까 마는 내 어머니는 나 때문에 고생했기에 더욱 생각나게 합니다. 살아 계실 때 효도하지 못하면 돌아가신 후 후회한다는 말이 맞습니다.

​어느 해인가 연말 보너스를 탔는데 어머니께 처음으로 현금이 아닌 10만원 수표 한 장 드렸더니 그 이듬해 여름에 세상을 떠나신 뒤에 장 농을 뒤져 보니 그 수표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쓰실 줄 몰라서인지 또는 아까워서인지 손수건에 1년을 고스란히 쌓여 있었는데 그걸 보고 눈물이 고였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드린 수표 한 장을 써 보지도 못하고 가신게 몹시도 아팠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어머님 성격에 아마도 아까워서 쓰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요즈음 우리 세대는 자식들에게 처음으로 버림을 받고 부모님에게 마지막으로 효도하는 세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더욱 더 부모님에 효도가 더욱더 필요 할 때입니다. 그러나 바쁘게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조금은 덜한 것 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이제는 내 어머니 내 아버지를 기억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 입장은 세월이 변해도 한결같이 언제나 같습니다.


그저 나보다 더 좋은 삶을 살아 주기를 바라지만 요즈음 자식들은 부모 마음을 알지 못해서 속상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지금에 자식들도 또 부모가 되어야 우리에 마음을 알아주겠지만 그때 가서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살아 계실 때 마음하나 변치 않고 따뜻하게 해야 하는데 가신 후에는 소용이 없으며 반듯이 꼭 후회를 하니 자주 찾아뵙고 가끔은 늙으신 어머니에 손도 잡아 보세요?

핏줄기 불거진 까칠한 그 손이 우리를 어루만지고 키워서 오늘에 나를 만드신 우리의 어머님들입니다. 바쁘다는 힘들다는 핑계로 오늘도 어머님을 혹시 잊지는 않으셨는지요? 고된 삶의 여정에 지치고 세월의 무게에 마음마저 연약해진 늙고 병드신 힘없는 어머니에 손이 있을 뿐입니다 아내와 자식들에 손을 잡았던 내 손으로 이제는 내 어머니에 손을 잡아 보세요. 어머니를 위해서 나를 사랑하신 내 어머니가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할 때까지 효도를 해야 합니다. 언제든지 어머님을 뵈 오면 며느리는 시어머님에 손을 남편은 장모님의 손을 덥석 잡으며 '어머님!' 하고 어리광 한번 부려 보세요. 아마 그 어떤 선물보다도 더 값지고 좋아 하시며 아주 흡족하실 겁니다.

"나도 자식을 키우니까 이제야 엄마 마음을 알겠다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그렇게 말하면 먹을 것을 하나 더 내 주시며 어머니가 많이 우실 겁니다. 부모님은 마음에 등불 정신적인 지주이기 때문에 제일 어려울 때도 생각나고 행복 할 때도 생각이 납니다. 살아생전에 효도를 못하면 부모님 돌아가신 뒤에는 반듯이 후회합니다. 나는 내 어머니에게 늘 죄송한 마음으로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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