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계대원군墓는 포천시 선단동 선단초등학교 부근 왕방山 자락에 있다
무더운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에 왕방산 산행후 오랫만에 다시 이곳을 찾아 왔으나 낯설기만 했다.
전계대원군墓 앞으로 동두천에서 포천을 잇는 4차선 도로가 얼마전에 개통되어서 전계대원군은
자동차 소리를 귀가 따겁게 듣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모든 건설 공사는 문화재와는 관계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게 커다란 문제이다.
문화재청을 비롯하여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 하지 않는다
전계대원군묘는 1986년 4월 9일 포천시 향토 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재실 입구로 공터에 주차를 겸하고 있다
앞쪽은 재실이고 뒷 건물은 사당으로 관리하는 후손들이 살고 있다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은 영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도세자이고 아버지는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裀)이다
전계대원군 이광은 1841년 57세로 세상을 뜨자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진관리(은평구진관동)
부친 은언군墓 옆에 안장 했다가 1856년 아들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포천의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완안부대부인과 합장을 하였다
전계대원군은 정실에서 얻은 아들 회평군은 민진용옥사에 연류되어 사사 되었고
측실 이씨에서 아들 하나를 얻었으며 그리고 또 다른 측실 廉氏에서 난 아들이 바로 철종이다
불행한 삶을 이어간 전계대원군의 인생을 돌아보며 방랑객은 잠시 묵념의 예를 갖춘다
전계대원군은 왕족으로 태어나서 강화도에서 평생을 농부로 살다가 심지어는 생계를 위해 남의 집 머슴살이까지
하며 불행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전계대원군의 신도비는 왕명에 의해 조두순이 讚하였다
묘역은 크게 2단으로 구분되는데 곡장(曲墻)을 두른 상단에는 봉분·묘갈·혼유석 등을 배치했다
하단에는 상석·향로석·망주석 1쌍·장명등·무인석 1쌍을 배치했고 완양부대부인 전주최씨와 합장한 단분이다
묘석에는 유명조선국전계대원군지묘 (有明朝鮮國全溪大院君之墓)
완양부대부인전주최씨부우(完陽府大夫人全州崔氏祔右) 보통 부인이 부左 인데 여긴 부右로 합장했다.
섬세한 조각 장식의 장명등과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제작된 무인석, 상석 받침의 단아한 조각에서
19세기 조선 왕족 묘역의 품격을 읽을 수 있다
6.25 전쟁의 그 시절을 말해주듯이 묘를 지키고 있는 무인석등에는 흉상의 총탄 자욱이 가득하다
모란과 난초를 새긴 장명등은 불교에서 온 기물로
무명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로 법신이라고도 표현하는 옥개석 위에 있는 원 모양의 보주는 깨달음의 상징이다
뒷면에서 바라 보면 곡창등 전체적으로 깜끔하게 처리되었다
전계대원군묘역 오른쪽 아래 구릉에 있는 전계대원군의 후처 철종의 모친 용성 부대부인 염씨墓가 있다
유명조선국용성부대부인염씨지묘(有名朝鮮國龍城府大夫人廉氏之墓) 라고 비석에 색인되어 있다
철종의 모친은 側室도 아니고 당시 妾의 신분으로 아들(철종)을 낳았다
그래서 철종이 왕이 오른 뒤에도 모친을 비롯 외가에 대하여 조정에서 논란이 많았다
당시 전계대원군의 장인과 처조, 처증조부를 영의정, 좌찬성, 판서로 각각 추증하는 일을 놓고
명문가인 본처 전주 최씨 친정만 증직하자는 논의가 나왔지만
비록 평민계급의 딸에서 출생한 아들이지만 임금이 되었기에 우여곡절 끝에 철종의 생모도 해야 한다는
반론이 나와 염씨 친정 3대에도 영의정으로 추증 되었다
野談에 의하면 염씨의 신분 또한 평민계급으로 철종을 낳게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알고 보면 재밋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없다
원래 철종의 모친 엄씨 墓와 철종의 이복 형제들과 함께 서울 홍은동 백련산아래 있었으나
이곳에 스위스그래드 호텔을 지면서 포천으로 이장한 것이다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은 불운을 앉고 서자로 태어나 평생을 먹고 살기도
힘들게 억세게 고생 하다가 떠난 불행한 사람이다
아들이 임금이 되고 죽어서 전계대원군의 벼술이 그의 恨을 풀었을까?
그래도 죽은 代 를 살렸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전계대원군은 사도세자의 손자인데 아버지 은언군도 서자, 자신도 서자 그리고 철종도 서자
모두가 왕권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던 사람이었지만 하늘이 도왔는지 아들이 왕이 되었다
그렇게 어렵게 왕좌에 오른 철종은 뜻을 펴보지도 못한채 쥐색잡기에 여념 없다가 일생을 마친다
하지만 이런 서자출신 보다 더 큰 걸림돌은 바로 적자인 이복형 상계군이 정조 3년에 역모죄를 쓰고
아버지 은언군과 강화로 유배길에 오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庶子이었던 자신도 또한 함께 유배길에 오르게 되는데.....
험한 유배살이를 견디다 못한 아버지 은언군은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며 강화도를 탈출하려 온갖 힘을 쓰다가
탈출에 실패하자 감시는 더 삼엄해졌고 전계대원군도 평생을 유배소에서 힘들게 보내게 된다
그러나 1786년 상계군이 자살하고 어머니 송씨와 형수신씨(상계군의 처)는 1801년(순조 1)에
천주교 신자로 사사되면서 아버지도 함께 신유박해때 가족이 4명이 함께 처형되게 된다
자신도 연좌의 죄를 물어 더 입지가 좁아지게 되자 전계대원군은 평생을 강화도로 쫓겨나 빈농 생활을 하며
생계가 곤란해지면 남의집 머슴살이도 하고 일일 잡역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지만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던 그에게도 잠시 봄날이 왔다.
순조 30년(1830년) 왕의 특명으로 유배가 풀려 도성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관직을 받지 못했지만
첩을 들일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었기에 후처인 용담염씨 사이에서 원범이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고 헌종 7년(1841) 전계대원군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고
이어서 3년後 이복형인 장남 원경이 모반에 가담한 죄로 사사되자 원범(철종)은 14세때
또 다시 강화도로 유배가 된다
그리고 얼마후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만천하에 깔려있던 시기 순원왕후(순조妃)가 철종을 왕위에 앉혀 놓는데
이는 왕권이 약해야 안동김씨 자신들이 힘을 내 세울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현재 이곳 전계대원군墓 주위에는 그 아들들 즉 철종의 이복형제들과 함께 후손들 墓가 함께 있다
사당安 왼쪽에 있는 비석 두개 中 뒷쪽의 비는 전계대원군의 서자 둘째 영평군경응(1828~1901)의 묘비이고
앞쪽은 영평군의 양자 청안군재순의 묘비이다. 청안군(1851~1904)은 1868년 (고종5) 문과에 급제 판서와 궁내부대신을 했고 외교의 공으로 勲一等에 책록 청안군에 봉해졌다.
한편 전계대원군의 父親 은언군묘는 은평구 진관사입구 부근에 있다가 한국전쟁 당시 안타깝게도 실전 되어
흔적없이 사라젔는데 一說에 의하면 일사 후퇴 당시 영국군이 처소로 사용하면서 건물을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후 묘비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절에서 절로 옮겨지다가 지금은 한강 절두산 순교성지에 있다.
절두산성지에 있는 은언군비석
碑文은 "유명조선국현록대부은언군겸오위도총부도총관위인(有名鮮國懸錄大夫恩彦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之墓偉裀)"
현록대부란 조선시대 정일품 종친에게 주던 최고의 품계로 왕이된 손자가 내린 것이다.
은언군婦人 宋氏는 천주교신자 송마리아로 碑文은 "상산군부인진천송씨부좌(常山君夫人鎭川宋氏袝左)"
당시 전계대원군의 서자 영평군(철종兄)이 손을 잇지 못하고 養孫 청안군 이재순이 대를 이었으나 우찌된 일인지
손을 얻지 못 하였다 그러자 소현세자孫 풍선군 이한용(豊善君李漢鎔 1875~1890)이 양증손으로 大를 잇지만 역시
대를 잇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덕흥 대원군孫 청풍군이해승(1890~1958)이 전계 대원군 봉사손으로 대를 잇는데
결국 3대가 養子로 잇게 된다
어찌되었던 은언군파 후손들이 역모로 몰리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하여 거의 몰살되었던
집안이 철종이 임금이 되자 복권이 되어 꺼진 잿더미에서 불이 되 살아나듯 은언군파 후손들이
다시 일어나 現在 20세대가 남아 오늘에 이르게 된다
홍은등 백련산 스위스그랜드 호텔 會長 이우영(愚英)은 청풍군 이해승의 손자이다
그랜드힐튼호텔이 자리한 홍은동 선산은 당시 철종이 이복형 영평군에게 조상을 모시고 食率을 보살피라고
사패지(賜牌地 왕이 내려준땅)로 내려준 땅이다. 또한 이뿐만 아니라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거처했고
전계대원군의 종택이기도 한 종로구 익선동에 있던 누동궁까지 영평군에게 주게 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면서 왕족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 되었지만 덕흥대원군 전계대원군 흥선대원군의
후손에 재산은 개인 재산으로 분류되었기에 고종 직계후손 재산을 빼앗길때 전계대원군 후손들은 지킬수 있었다
그러나 이해승(전계대원군 4대손)은 후작 작위와 은사금을 일본에게서 받았으며 친일 단체에서 고문으로
활동했다는 사유로 2007년에 친일행위자로 지정되어 수백억원의 친일재산 환수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일부는 승소하고 일부는 패소하여 소송은 현재 진행중이다
당시 이우영회장이 철종의 모친을 비롯하여 선산을 포천으로 옮기고 누궁동까지 팔아
선산이 있던 홍은동 땅에 병원을 지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마침 스위스항공에서 호텔사업을
제안해옴으로써 1988년 스위스그랜드호텔을 세우게 된다
.
왕족 자존심을 중시했다면 호텔사업 같은 건 안했어야 하는데 사업은 그리 변변치 못 하였다
2001년 세계적인 항공업계 불황으로 스위스항공이 파산하면서 2002년 4월 그랜드힐튼으로 바뀌어
현재 이르고 있으며 이해승의 자부 신봉원(作故 그랜드호텔 이우영회장 모친)은 학교법인을
설립 홍은동에 정원여중을 1969년에 개교한다
1970년초까지만해도 구기동 터널에서 이곳까지는 하천계곡을 따라서 절경을 이루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옛 모습의 풍치는 하나도 없다
'필서 > 야담설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표전축과 쉐이코 카세트 (0) | 2014.02.11 |
---|---|
명동 본전다방 (0) | 2013.11.09 |
내인생 내지게에 지고 (0) | 2013.04.06 |
수양대군과 신숙주 그리고 성삼문 (0) | 2012.10.30 |
경희궁 답사 (0) | 2012.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