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수양대군과 신숙주 그리고 성삼문

시인김남식 2012. 10. 30. 10:34

수양대군(1417~1468)과 신숙주(1417~1475) 그리고 성삼문 (1418~1456)

                                                                                                                            =>  솔새김남식

 

수양대군 세조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 제3대 태종과 제7대 세조가 혈육의 피로 얼룩진

권력을 잡았다하여 비난받고 있는 인물이다.

조선건국 초기 바람 같은 권력앞에서 한치 밖을 볼수 없는 등불처럼 휘몰아치는 정치마당 앞에서

수양대군 세조는 할아버지 태종의 행동을 익히 알고 있었다.

 

 

태종은 동생을 죽이고 왕이 되었고, 이어 맏아들이 아닌 셋째 왕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만약 세종이 태종처럼 병약한 문종을 멀리하고 둘째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면

일은 아주 순조롭게 잘 되었을 것이다.

 

또한 문종이 큰할아버지 정종이 아우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 줬듯이

아우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면

일은 아주 더욱 수월하게 잘 되었을 것이며 또한 자기 아들 단종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아버지 세종과 형 문종이 나이 어린 조카 단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는 바람에

결국 또 다시 나라에 혼란이 생겼고 많은 인재를 잃었다.

특히 증조할아버지 태조가 처음 부터 혼란을 자초하여 형제간의 피비린나는 싸움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그것을 익히 알고 있기에 몸소 실천을 하게 된다.

 

수양대군은 숙질간에 왕권을 다투지 않도록 세조는 병약한  큰아들 덕종이 죽자 

아들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 주지 않고 아예 작은 아들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게 한다.

그리고 그는 살아생전 너무나 많은 죄를 지어서 자신의 육신이 빨리 썩었으면 했다는데......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고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했다 한다 

 

당시 신숙주는 ....

신숙주는 고령신씨로 전라도 나주 출신이다

그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며 남는 것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이라고 생각했고

성삼문은 정치적인 것보다는 학문적이며 유교적인 성향을 더 짙게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성삼문의 이러한 생각은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꿋꿋한 것이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신숙주는 단종의 폐위와 죽음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자신이 살아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여 사육신과는 결별을 결심하게 된다.

 

신숙주는 옥에 있는 성삼문을 찾아 가 다음과 같이 말을 전한다.

자네와는 모시기로 한 주군이 달라서 이제 가는 길도 어긋났지만 자네의 굳은 절의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네.

만약 내가 자네와 같은 선택을 했더라면 나도 자네 만큼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 흉내는 냈을 것이네.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는구먼.

굼벵이는 더럽지만 매미로 변해 가을 바람에 맑은 이슬을 마시고 썩은 풀엔 빛이 없지만

그곳에서 나온 반딧불은 여름밤을 빛내는 것이네.

그러니까 깨끗함은 항상 더러움에서 나오고 밝음은 항상 어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성삼문과는 절친이었지만 신숙주는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앞장을 선다.

 

그래서 어린 임금 단종을 버리고 수양대군을 받들었기 때문에 사육신의 충절이 빛 날수록

신숙주는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으며 성삼문은 절의를 지키고 죽은 것과는 달리 새 임금에게서 영화를 누렸다 .

그렇다면 성삼문의 충절과 신숙주의 변절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신숙주는 목숨을 부지했지만 명예를 잃었다.

성삼문은 한 목숨을 바친 대신 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그 이상 더 이룬 것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대의와 원칙을 벗어나면 안되지만 신숙주는 분명히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업적보다 충절(忠節)이 중한지의 문제는 서로 미묘한 관계이지만

신숙주는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갔을 뿐이라고 굳이 변명을 말한다면..???

이런 점에서 오늘날 어느 것이 옳았나를 따지는 것은 가치관 혼란만을 가져 온다는 것이다.

변질자도 충절자 못지 않게 역사의 흐름에 일익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숙주와 성삼문의 정치적 공과 선을 따질 때면 항상 성삼문 편을 드는데 익숙해졌다.

성삼문은 의인이요

신숙주는 비겁자라고 역사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사실 당시 신숙주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로 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10년(융희 4년)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 재조명 여론이 있었다 한다.

 

지금 우리의 현대사를 보면 이러한 것이 분명이 있는데 한쪽의 주장만이 옳다고 하여

다른 한쪽의 공은 묻히가고 있는게 무척 안따까울 분이다

다시 수백년이 지나서 후세 사람들은 세사람에 관계를 또 뭐라고 할까?

신숙주 墓는 의정부 부용산 기슭에 있다

 

한편 성삼문을 ....

絶義의 상징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중종때 조광조 일파가 집권하면서 이다

그리고 숙종때 송시열이 주축이 되어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을 충절과 절의의 상징으로 추앙되었고 이어서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젔다.

성삼문은 창연성씨로 충남 홍성출신이다

 

사육신 중에서 가장 참혹한 거열형을 당한 그 시신을 전국으로 돌렸다고 하는데

시신을 지게에 지고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 고개를 넘던 인부가

“날도 덥고 무겁고 피곤해 죽겠네.” 하며 불평을 하자 성삼문의 시신에서 

“그렇게 무겁고 귀찮거든 아무데나 묻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고 하는 곳이 바로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는 성삼문 墓가 있다

 

세조에게 나으리라고 부르며 항거하는 성삼문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왕을 전하라고 하지 않았다. 세조가 매우 노하자 그는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세조 앞에 서 있는 신숙주에게 "세종대왕이 왕손을 안으시고 유신들에게 경들은 이 아이를 수호하라 하던

말씀이 귀에 쟁쟁하게 남아 있거늘 신숙주 너만 홀로 잊었느냐 너의 악함이 여기까지 이를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단종이 왕위에 등극을 하기 이전 부터 세종은 불길한 예감을 떨치지 못 했는지

어린 단종을 잘 보좌해 줄 것을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등 믿음가는 신하들에게 신신당부까지 했었다.

 

결국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함께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고 형제를 비롯하여

갓난아이 까지 모두 죽음을 당해 혈손이 끊기고 말았으며 아녀자들은 노비로 보내졌고 나중에

성삼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성삼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絶信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성삼문은 논산시와 이렇다 할 만한 연고가 없는 곳에 묘가 있으며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출생한 그곳에는

유허비와 부친 성승장군 그리고 그의 아내 묘가 있다

 

 

역사란 지나고 보면 가정이라는 것을 설정하게 된다

왜냐면 승자 패자 두사람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은 꼭 손해를 보기 때문에 만약에 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만약에 그 가정이 실현 되었을 때는 역사적으로 또 다른 기록이 존재 할 것이다.

역사의 흐름은 정답이 없는 것 같다 史家들은 또 다른 호평을 할 터이니까 ...solsae kns 

 

관련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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