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졌던 옛 궁궐 경희궁을 찾아서 김남식
광해군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궁궐을 짓는 일에 힘을 쏟는데.
인왕산 아래 왕이 탄생하는 기운이 서려 있다는 풍수가의 말을 듣고,
이복동생인 정원군(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원종)으로 추존되었다)을
강제로 빼앗아 그 터에 지은 것으로 광해군 8년(1616)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다. 그냥 개방된 공원이다 보니 문 앞은 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흥화문은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세운 경희궁의 정문으로 일제는 1932년 남산 자락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할 때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해방후 박문사는 폐사되고 흥화문은 영빈관(迎賓館) 및 신라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1988년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지금의 자리로 이전(移轉) 복원하였다
광해군은 왕비의 아들이 아닌 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웠고 동생인 영창대군이 너무 어려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대군이 아닌 군의 신분으로 왕위에 올랐던 광해군은 왕권강화라는 커다란 숙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사라진 궁궐들을 다시 짓는 과정에서 신료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 위엄있는 궁궐을 건축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만백성에게 알리고자 짓게된 궁궐이 바로 창덕궁과 경희궁이다.
전쟁이후 사라진 궁궐도 다시 짓고 왕권도 강화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된 것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은 정작 자신이 세운 경희궁에서 제대로 어진정치를 펼치는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다른 궁궐에 비해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런지 분위기는 매우 조용하다. 뒤쪽으로는 작은 쉼터가 있어서 찌든 도시에 소음을 피해 마음을 수양하기에 좋은 곳이다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경덕궁이라 불렀고 경희궁은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많은 임금님들이 머물던 궁궐이 일제강점기로 들어서며 수난을 겪게 되어 전각들을 헐어 여기 저기에 팔아 버렸다.
경희궁은 조선 후기에는 본궁을 떠나 잠시 머무르던 이궁으로 원래 경덕궁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경희궁으로 바꿨다. 순조 29년(1829)에 화재로 대부분 건물이 불에 타 없어졌으며 1831년에 새로 지었다.
일제 강점기때 경희궁을 헐어서 일본인을 위한 경성 중학교가 들어서기도 하였고, 숭정전 등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가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해방후 그 자리에 서울고등학교가 들어 섰고 경희궁 복원 계획에 따라 1980년 서초동으로 이사 하였다
1987년부터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현재 왕의 공식 행사가 행해진 숭정전, 경희궁의 정문인 홍화문, 돌다리 금천교, 신하들과 회의를 하던 자정전,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태령전 등을 만날 수 있다.
궁안에 토굴같은 암벽이 있는 것이 좀 특이한 지형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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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보이는 빌딩들이 역사는 과거에도 흘러왔고 지금도 흐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듯 언젠가응
저 빌딩들도 구시대의 유적이 될지 누가 알까?
경희궁 주변에 엤는 건물 까지가 옛 경희궁터이다
2013.12.29 sols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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