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동심초와 영화이야기

시인김남식 2016. 12. 8. 10:05

동심초漢詩와歌曲 그리고 映畵이야기  솔새김남식


同心草 漢詩에 얽힌 그시대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아는 대로 정리해 보고

그 옛날 35원을 주고 삼류극장에서 감동있게 보았던 映畵 동심초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그리고 歌曲 이야기를 정리해서 잠시 추억의 열차에 탑승해 봅니다



가곡 동심초는 저편 한켠에서 불쑥 반가운 이가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아름다운 明曲이었다.
이 음악을 조용히 눈을 감고 들으면 또 얼마나 눈물 겨운지를 나는 모른다.
사라져간 내 젊은 날이 문득 떠 오르는 풀잎에 부치는 노래라고 감히 나는 말하고 싶다.
이 세상에 태어나 정신없이 살아 가다가도 어느 날 문득

내 자신을 돌아 보았을 때
초라한 내 자화상을 발견하고 더 이상 쓸쓸해 하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열심히 사랑하고 또 사랑하여야 한다.
동심초의 노래를 들으면서 자신을 위하여 생각하며 조용한 명상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좋은것이라 생각 한다. solsae. kns



1. 동심초(漢詩)


이 노래의 가사는 7세기 중국 당나라 시인 설도(薛濤)의 작품을 1945년에 김안서가 번역한

싯글을 김성태(金聖泰) 작곡으로 1955년 한국 가곡집에 처음 소개되었으며
광복 이후 민족적인 서정을 강조하며 지은 노래라고 한다.
멜로디의 역동성과 서정성 등 대중적인 의미에서도 많이 불렸다.
그런데 동심초 노래를 들으면서 감동을 느끼는데 과연 동심초가 무엇일까
동심초의 꽃말은 "온순"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동심초가 꽃이란 말인가

하지만 검색에서 아무리 찾아도 동심초라는 식물 자체에 대한 설명은 없다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은 아닌 것 같다.


간혹 유사한 낯선 식물에다

이름을 붙이지만 동심초가 존재한다고 생각 하기엔 상당히 어려웠다.
어쨌거나 그런 풀(草) 이름이 지금 존재 한다고 하여도 
동심초라고 하는 특정한 풀을 지칭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 무엇일까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자
동심(同心)이란 마음이 하나라는 뜻이 아닌가
바로 동심이란 말은 중국에서 이전 부터 연애 편지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草는 편지를 쓴 종이(紙)는 草로 만들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동심초라고 하는게 맞다
  

아무튼  애착이 가는 이유는 漢詩 동심초의 애절한 내용 때문에

마음이 가는 글시(文詩) 이다.


風花日將老(풍화일장노)   꽃은 바람에 시들어가고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만날 날은 아득히 멀어져가네
不結同心人(불결동심인)   마음과 마음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헛되이 풀잎만 맺었는고


꽃이 바람에 시들가는 세월이 가도 그대와 만날 날은 아득하다고 했다

동심초 가사에서 '가기(佳期)'는 사랑을 처음 알게되는 시절

만남을 이루는 시절을 말하며
결동심인(結同心人)은 마음을 맺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사랑의 굳은 약속 또는 영원히 헤어지지 말자는 맹세 같은 것이다.
사랑에 맹세는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할 수 있는 것일까.



2. 동심초 설도(薛濤)의 사랑이야기


동심초의 원작자 설도(薛濤)는 당대(唐代)의 기녀(妓女)로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개 770년과 832년 쯤이라고 한다.
어려서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가 성도(成都)에서 근무하게 되어 그곳으로 이주해 살았다.
어려서 부터 능히 시를 지을줄 알았으며 아버지가 죽자 가세가 기울어

16세에 악적(樂籍)의 고급 기생이 되는데 설도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아주 총명하고 말 재주도 좋았기에 그 지방의 군사 장관이었던 웨이가오라는 사람의 총애를 받았다.
웨이가오는 설도 나이 약 35세에 졸(卒)했는데, 그는 그 때까지 그녀를 계속해서 약 20년 동안 돌봐 주었다.
웨이가오가 죽으면서 설도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겨 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나머지 생애 동안 독립적으로 살수 있었다고 하며 악적(樂籍)에서 나온 후로 끝내 시집을 가지 않았다.


그녀의 재능을 흠모한 당시의 일류 문인들과의 교류가 많았는데,
백거이(白居易), 원진(元[禾眞]),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중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 했다고 한다.

'동심초' 시는 설도가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쓴 것은 확실하다.
그것이 그녀를 돌봐 주고 총애해 주던 웨이가오를 향한 것이었을 수도 있으나

웨이가오가 죽고 나서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연모하게 된 원진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원진(779 - 831)은 설도 보다 10여세 연하(年下)였고 9세때 시를 짓기 시작 했으며 15세때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다.
사람들이 그들을 경박하고 속되다며 비방을 하기도 했다고 하며 그는 권력 다툼에 져서

중앙에서 밀려나 동천(東川))에 좌천 되었는데, 이것이 대략 809년의 일이다.

809년 3월 설도와 원진이 처음 만나게 된다.

 


당시 원진은 동천으로 좌천되어 와 있었는데, 설도의 문명(文名)을 듣고 사모해서 방문하게 된다.
설도 역시 원진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설도는 자기가 직접 만든 아름다운 색종이에 백 여편의 시를 써서 그에게 주며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고,
원진 역시 설도에게 향한 정을 시로써 화답하며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얼마 지나서 두 사람은 이별을 하게 되는데,

그때 둥근 벼루를 반으로 나누어서 하나씩 간직하며 다시 만나 그것을 둥그렇게 만들 날을 기약했다.

원진은 옛날 은사였던 위하경(韋夏卿)을 만났는데

그는 원진이 기생을 좋아하고 있다고 책망 하면서 자기 질녀(姪女)가 그의 처가 되기를 바랬다.

후에 원진과 설도는 성도에서 만났게 되는데

위(韋)씨녀가 원진을 사랑하여 그 벼루를 잡고 가는 것을 막았고, 급기야 벼루를 시냇물에 빠뜨려 버리고 말았다.


결국 설도는 자신의 한계를 느꼈고 원씨 문중과 부딪칠 수 없음을 알았다
또한 위씨가 원진을 따르려 하는 마음을 알게되자 사랑이 깨지는 아픔을 드디어 감수하게 된다.

그리고 원진과 위씨는 결혼을 했고, 설도는 홀로 남아 외로운 신세가 되어 버렸다.
40세나 되어서야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설도였지만 이미 그것은 떨어진 꽃의 심사(心思)였고

그녀에게 오로지 정을 바칠 수 없는 원진은 흘러가는 바람이었으며

사랑할 사람을 찾았으나 영원히 마음을 엮을 수 있는 동심인(同心人)이 되지는 못한 것이다.
설도는 비록 원진과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사랑했다고 하는데

그녀는 道敎에 들어가 歸依 하여 시냇가에 집을 짓고 홀로 일생을 마첬다고 한다. solsae kns                 



3. 映畵 同心草


영화 동심초는 드라마에서 힛트를 하자 1959년 그리고 1967년 두번이나 영화로 제작 되었다.

내가 본 영화는 방송드라마 작가 조남사原作으로 1967년 개봉한 영화를 보았다

학생 신분의 사춘기 시절이지만 아주 감명깊게 보았던 追憶의 名畵이다 

당시 여성영화의 금자탑이라고 광고하며 청계천 동아극장에서 개봉했으며

출연 배우는 김지미 신성일 남정임 이순재가 열연했다.

동심초의 애절한 싯말처럼 이 영화에서 누군가를 애절하고 애잔하게 사모하는 마음이

아마도 최고의 사랑이라고 명시해 준 영화였다
간간히 영화에서 음악이 배경으로 애절하게 들려 주는데

아직 사랑을 배우는 풋내기 그시절 그때는 그대만을 위해서

이 생명 다하도록 언제까지나 사랑하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 였다.


영화 즐거리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내용처럼 구한말 시대 덕망있는 가정을 배경으로 시작이 된다

전쟁 미망인으로 과부가 된 사대부집 정경부인이 외도의 사랑을 하지만 윤리 도덕으로 내보이지 못한채 

사모하는 마음을 애타게 독수 공방으로 홀로 지내고 있는 모습을 美的으로 그려진 영화였다.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에서는 딸 옥희가 내용을 주도하듯

동심초에서도 딸 경희가 감초처럼 어머니 마음을 읽어주며 드라마를 이끌어 간다 

교감하는 과부의 심경을 연기력으로 섬세하고 절제있게 묘사 했으며

당시 신분계급 사회에서 과부의 위치와 그로 인한 내면적으로 보이지 않게 사랑을 갈구한

좀 안스러운 줄거리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탑깝게 만든 영화이다

특히 배경 음악으로 동심초를 사용했기 때문에  더 내용이 안스럽게 그려젔다



이 영화의 주 무대는 혜화동과 조치원역 그리고 전형적인 시골 풍경과 서울의 옛 모습이 그려진다.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몸저 누워있는 남자 김상규를 찾아가 마음 속으로
"사랑해요 진실로 당신을 전 당신의 행복을 빌겠어요" 하고 이 여사가 서울을 떠난다
딋늦게 떠난 다는 사실을 알고 서울역을 찾아 갔지만 이미 기차는 출발 했으니
결국 두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자 권혜경이 부르는 동심초가 화면에 흐른다

영화 포스터에서 백만여성의 심금을 울린 영화라고 선전했던 이 영화는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
사랑은 내 놓고 하는 사랑이 아니라 먼발치에서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애뜻한 사랑이였음이라고
그래서 지금의 풋나기 사랑 보다는 더욱 아름답고 숭고하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리워 할때는 곧잘 이 노래를 흥얼 거리며 추억속에서 영상을 떠올려 본다 






4. 동심초(歌曲) 

 

김성태가 동심초 노래의 작곡한 시기는 1945년경 이라고 합니다.
작곡자는 어느 잠 못 이루는 날 밤 침상 곁에 가까이 두고 애송하던 김안서의 譯詩集 망우초를 뒤적이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간결하면서도 의미 깊은 시 한수 동심초 한시를 재삼 읊어 보고는

오선지에 가락을 옮겨 놓았다.
이것이 만인이 애창하는 동심초가 된 것이라고 한다.


原詩가 일절 밖에 안되 어서 2절 가사는 작곡자가 새로 덧 붙어서 1.2절의 연결이 

무리없이 이어지게 만들어 놓았다 
단조의 특성을 충분히 살려서 강한 호소력 마저 자아내는 이 곡은

무쇠같은 사람에게도 심오한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이 노래는 여러 성악가들이 많이 불렀으며 그중에서 1959년과 1967년에 만든

영화 동심초에서 가수 권혜경(1931~ 2008년)이 부른 것이 대중들에게 제일 사랑 받았다
가곡을 대중가요 풍으로 부르긴 했지만 

가사의 클래식한 분위기와 성악가적인 목소리가 많은 사람들 머리속에서 기억하고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면 옛 감성에 젖어 추억이 회자되어 떠 오르기도 한다.
동심초 ...!!
사랑이 그렇게 힘든 것일까
첫사랑이 트일 사춘기 나이 무렵 이 노래에 많은 애착을 가젔다

이 노래를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은 고운 마음이다2005.10.25 솔새김남식

  


1.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2.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길은 뜬 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6. 가수 권혜경 (1931 ~ 2008년)


강원도 삼척 출생인 권혜경은

1956년 당시 서울중앙방송국 전속 가수 3기로 발탁되어서

1957년 음반 데뷔곡인 '산장의 여인'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인 '호반의 벤치'

그리고 59년 개봉된 신상옥 감독의 영화 '동심초' 주제가를 취입하였다.

인기 가수 대열에 들어섰지만 불행히도 1959년 심장판막증 판정을

받았고 이어 후두암 선고까지 받으며 병마에 시달렸다.

투병 중 박춘석 씨와 손잡고 발표한 '물새우는 해변'도 대표곡이다
권혜경은 아무도 날찾는 이없는 이란 산장의 여인의 가사처럼

충북 청주시 청원군 남이면에서 산장에 집을 짓고 수도승처럼 쓸쓸히 살았다고 한다  

가수 활동보다 투병 생활에 더 많이 매달리면서도 전국 교도소를 돌며 재소자를 격려하는 봉사 활동을 해오다가 

향년 77세로 별세 하였으며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슬하에 자녀는 없다. kns 


7. 1959년 作品 映畵 동심초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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