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 솔새김남식
이산은 정조대왕(1752년 - 1800)의 본명이다
정조대왕은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1735∼1815) 사이에서 맏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영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을때 어린 세손 정조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구조 요청을 하지않았다 한다
영조는 어쩔 수없이 어명을 거둘수 없었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했지만
혜경궁홍씨가 당파의 득 때문에 무방비했다는 설과 또한 나중에 아들 정조의 독살에도 당파 때문에
막지 못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러나 지아비를 먼저 보내야하는
혜경궁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산은 1759년 세손에 책봉이 되었으며,
1776년 25세의 나이로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 제 22대 왕이 되었다.
정조는 왕이 되기까지도 힘이 들었지만
왕이 된 후에도 끊이지 않는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다.
정조를 죽이기 위해 여러차례 괴한이 침입하였고
이때 홍국영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정조는 즉위하자 마자 규장각을 설치하여 자기 편의 관리들을 길러 내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하고 목숨을 노린 반대 세력들을 제거해 나갔다.
또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정치에 간섭하려 했던 홍국영까지 몰아 내며 왕권 강화에 힘을 썼다
누이를 후궁으로 올렸으나 자식없이 요절하자 모두를 적대시 하며
홍국영은 정조를 배신하고 불난을 일으키자 탄핵으로 강릉으로 축출되여
34세의 나이에 사망하게 되는데 또한
평생을 탕평책 개혁 정치에 힘쓰던 정조는 1800년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
정조의 등창의 치료중 과로사 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치료과정 중에서는 여러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되여
특히 태황비와 사관과 승지는 배석하지 않은채
바로 정조의 할머니가 되는 정순황후가 그 자리에 있었으며
그래서 지금까지 독살에 대한 의문은 끊이지 않으며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대립 관계였다
정조는 아버지 죽음에 대하여 어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해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혜경궁 홍씨는 아들인 정조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아나 생각이 된다
정조는 남편을 비명횡사 시키고 일찍이 혼자된 혜경궁 홍씨를
불쌍히 여겼던 것으로 여겨지나 자식으로써의 도리일 것이다
한중록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빈(嬪)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남편의 죽음을 중심으로 궁중에서 벌어졌던 여러 사건들을 자서전적으로 기록한 궁중문학이다
한편 영조의 정순왕후(1745~1805)는 소생이 없고 사도세자와 사이가 나빴다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위시키고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으며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 까지 하였다
혜경궁 홍씨보다 나이가 아래이다
즉 시어머니가 며느리 보다 10살이 작다
정조가 보위에 오르고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했으며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무정한 고모 화완옹주에게 톡톡히 복수 하는데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은 귀양 보낸뒤 사사 시키고
화완옹주는 궐밖으로 내쳐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데 대신들이 더 강한 처벌을 해 달라고 끊임없이 상소 했으나
정조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순조도 정조의 뜻을 이어받아 그녀에게 더한 처벌을 내리진 않았으며
그러다가 정조가 죽은 후 8년이 지나서야 죽었다
정조는 궁성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100여회를 나와
많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으며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소(園所)를 수원으로 옮긴 뒤로는 능행의 범위가 한강 남쪽으로 확대 되었다
민산의 대본인 농업 발전을 기했으며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해 당쟁의 조정에 힘썼고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해 양역(良役)의 부담을 줄였으며
사회변화에 대응해 실학(實學)의 진작 및 문화창달에 노력하였다
정조가 죽자 수빈박씨의 아들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繼妃)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순조때 부터 천주교 박해가 있었다
정조대왕의 어가행렬
정조는 1795년 새로 축조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 참배와 함께
그해 61세가 된 어머니 혜빈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서 아들 정조가 마련한 조선왕조 사상
최대의 인원과 물자가 동원된 8일의 원행에 나섰다
화성의 현륭원에 당도한 그녀는 28세의 나이로 비명에 죽은 남편 사도세자의 묘소를 어루만지며
오랜 세월 삼켜왔던 눈물을 마음껏 쏟아 냈다
이런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화성 행궁에서 회갑연을 열어주고 혜빈(惠嬪)이었던
그녀의 궁호를 혜경궁(惠慶宮)으로 올려 주었고
아울러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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