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재와 녹번현 솔새김남식
녹번고개에서 바라본 불광동지역
평안도 의주에서 황해도를 거쳐 서울 한양으로 오는 길
구파발로 들어서면 녹번현(綠磻峴)과 무학재의 험준한 두 고개를 넘어야 도성으로 입성하게 된다 .
녹번현은 백련산과 북한산자락 사이에 있는 고갯길로 지금은 산이 깎여서 도로가 되었지만 꿰 높은 고개였다고 하며
당나라 장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험준한 산세를 보고 "군사 1만병의 적을 감당 할 수 있는 요새이다" 라고 했다
녹번이란 말은 고개의 이곳 석벽(石壁) 에서 산골이 많이 나오는 데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
옛날에 돌로 성벽을 쌓던 인부들이 뼈가 부러지면 특별한 치료 방법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접골재로 산골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산골은 자연동(自然銅)이라고도 부르ㅁㅕ산골을 보면 실제 구리로 착각하게 한다.
산골은 여러 문헌자료에 소개된 한약재의 하나로 일제시대 부터 산골 광업권을 부친이 등록하면서 현재까지
산골을 채취하여 서울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지금도 산골을 판매하고 있다.
현대의학에서도 골절에 대한 특효약이 없는 상태에서
오래전 부터 뼈가 자주 부러지는 골절에는 산골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산골을 사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왔다고 한다.
골다공증에도 좋다고 한다
먹는 방법은
산골을 곱게 빻고 갈아서 고와진 가루를 물이나 야구르트나 매실등에
타서 먹는다고 한다
산골판매 사무실 내부는 간단한 자료와 함께 主人 지킴이가 있는데 요즘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내부에는 山神에게 제례하는 곳이 있는데 조상이 예전부터 그리해왔던 것이라고 한다
동굴벽에 빤짝이는 빛을 띠는 물체가 자연동 산골이라고 하며 시중에 판매하는 산골은
중국 수입품이라고 귀뜀을 해준다
접골약으로 많이 사용했다는 산골 오래전에 나온 신문기사
산골판매소 방문기념으로 받은 산골 가격은 그리 비싸지는 않았다
서울시 丈人分野 직업 안내문에 있는 산골을 파는 조종수씨 이야기
북한산과 백련산이 도로때문에 갈라진후 60년만에 생태 연결도로가 2015년 완성되어서 이동이 편리하게되었다.
녹번고개 생태다리를 지나면 산골 마을이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자리하고 있다
큰길이 나기 전에는 이웃하던 마을이었다
조선시대 녹번 고개를 넘으면 서울 성안에 들어오기 전 중국 사신들이 임시로 묵었던 홍제원(洪濟院) 이라는
공관(公館)이 1895년까지 건물이 남아 있었으며 그래서 이곳 홍제동에는 홍제원 아파트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
녹번고개에서 바라본 홍제동지역 남산이 아주 가까이 보인다. 직선거리 약 5키로이다.
홍제원을 지나면 무악재가 나타나는데 겨우
말 한 필이
지나갈 수 있는 좁고 높은 고개였다고 한다
그래서 무악재는 안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고개 이름으로 말안장 같은 모습이라 하여서
길마재라고 하였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북한산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모양새여서 그것을 막고자
서쪽에 있는 안산을 어미산(母岳)이라 이름 붙여 아이를 달래려 했고
고개도 '모악재'로 불리던 것이 무악(毋岳)재로 바뀌었다 한다.
또 무악재는 안현(鞍峴)· 길마재· 무학재· 모래재· 사현(沙峴)· 추모현(追慕峴) 등 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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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에서 무학재를 넘어 녹번현(綠磻峴) 연신내까지 이르는 약 20여리 길은
고개가 험준해서 산적이나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천시장에서 행인 10명이 모여서 같이 넘어 갔다고 하는데
서대문에서 연신내에 이르는 길은 1800년 이전 까지 마을이 거의 없었다고 전 한다
.
한양에서 강화로 가는 길과 의주로 가는 삼거리가 바로 "연신내" 이다
강화도길은 죄인을 호송하는 행렬이 많았으며
의주로는 평양이나 청나라로 가는 관료 행렬들이 많았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무학재는 일제시대 부터 신작로가 넓혀저 서울서 평양, 의주 가는 교통 중심의 관문이 되었다
1966년 11월 김현옥 서울시장이 폭 7m 의 2 차로 고갯 길을 35m 6차로로 확장 개통하였다
'무악재'라고 쓴 비석을 세웠지만 1994년 자유로가 개통되면서 의주로가 지금은 퇴색해지고 있으며
초라한 비석이 그 시절을 말해주고 있다
2018년에 안산과 인왕산을 잇는 하늘다리를 건설하여 산행이 편리해젔다
무학재길 옛사진
1900년도 사진
눈이 많이 내려서 차가 고개를 넘지 못하고 서 있자 출근길 사람들이 걸어서 무학재를 넘고 있다.
1960년도 사진
중량교 문화촌을 다니는 56번 안성여객 버스가 다녔는데 안내양이 종로 정류장에서
청량리 중량교가요 라고 목소리높려서 호객 하는데 듣기에 따라서 차라리 죽는게나요 그렇게 들렸다는
우수게 소리가 있었는데 그 당시 유일한 교통수단인 만원버스를 꽁나물시루라고도 하였다.
백년설의 경기 나그네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1942년 발표
십자가 비석아래 신들메를 고치고 남산별 바라보는 경기 나그네
오늘은 어드메요 내일은 어드메요 아- 송도로 가는 길은 멀기도 하오
무학재 마루턱에 솔방울을 굴리고 홍재원 바라보는 경기 나그네
오늘은 어드메요 내일은 어드메요 아- 큰벼슬 생길 날은 아득하구려
오리정 십리허에 청노새를 세우고 염낭을 만져보는 경기 나그네
오늘은 어드메요 내일은 어드메요 아- 노새도 절름대는 황혼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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