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릉 장희빈묘 경기도 고양시 명릉에는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가 나란히 묻혀있고 그 옆으로 제2계비 인원왕후가 있다 좀 떨어진 곳 익릉에는 정비 인경왕후 그리고 좀 멀리에 장희빈 네 사람 모두 서오릉 구역에 있다 남편에게 버림받아 비운의 삶을 살다 간 女人 장희빈! 그가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했던 인현왕후와 숙종은 건너편 양지쪽에 나란히 묻혀 있다. 그늘진 외진 한 쪽에 쓸쓸히 혼자 묻혀있으니 장희빈이 살아서 이걸 보면 얼마나 약이 바짝 오를까? 좀 초라해 보이지만 그 명성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에 관심을 갖고 찾는 곳이다. 영국에 1000일의 앤과, 장희빈의 3년 5개월간 왕비 在位는 서로 똑 같은 처지의 이야기이다 더구나 경종은 인현왕후에게 양자로 입적이 되어 있다 . 하녀 출신인 앤볼린을 사랑 할수 밖에 없었던 핸리 8세는 그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 아내 캐서린과 이혼을 해야 했지만 이혼이 금지 되었던 법을 고쳐가며 핸리8세는 사랑을 택했다. 사랑의 힘은 어쩌면 무모 할지는 모르지만 핸리 8세는 앤볼린만 얻으면 세상의 모든 지탄과 공격을 받아도 견딜 수 있다고 믿었기에 1533년 캐서린 왕후와 이혼하고 자신의 마음을 빼앗아간 앤볼린을 새 왕후로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헨리8세는 '제인시모어' 라는 또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자 앤볼린의 사랑도 3년만에 물거픔이 되어 그냥 허무하게 깨어진다. 앤볼린은 왕후 자리에 있었던 기간은 꼭 1000일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녀의 사랑을 `천일의 앤` 이라 부른다. 가슴아픈 슬픈 사랑에 오점을 남기게 되는데 앤은 단두대 이슬로 사라지면서 헨리 8세를 한없이 증오했다.
장희빈 역시 왕비가 된 것은 1690년 10월 이었고 왕비에서 쫓겨난 것은 1694년4월이다 무술이 출신으로 숙종 자신이 좋아서 왕비로 격상 시켰지만 또 다른 무술이 숙빈최씨(영조모친)가 있었기에 마음은 어느덧 변해 있었고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숙종은 주때없이 병악한 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맞이하게 되면서 불행이 시작되었다. 장희빈이 왕비로 있었던 기간은 3년 5개월 가량 다시 장희빈은 원래의 빈으로 격하된 채 7년의 세월으로 보냈고 그리고 1701년 인현왕후가 죽자 그도 함께 무고죄로 사약을 받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당쟁을 이용해서 왕비까지 올랐으나 역시 당쟁으로 비참하게 생애를 마감한 그녀의 이야기는 수 없는 사람들로 부터 입방아에 오른다 그래서 다른 묘역보다 오랜 시간 머물며 흘러가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 해본다 아뭏튼 그 시대의 최대 비극일 수 밖에 없는 그녀를 동정하자 여자가 독기가 생기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은 그를 두고한 말 그에게 남은 것은 증오였고 복수 였으니 후에 그의 아들 경종이 어렵게 왕위에 올랐으나 후일 보복이 두려워서 병중에 있는 경종을 숙빈최씨 일당과 영조가 독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 진실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다 인조의 아들 효종 死後에 외아들 현종이 왕위를 이었고 현종 사후 외아들 숙종이 왕위에 오른다 왕조가 번창 하려면 아들이 있어야 하는데 웬지 이때 부터 아들이 귀했다 숙종은 왕비 3명, 후궁 6명을 두어 6남 2녀를 두었으나 아들 3명만 장성 하였다 정비 인경왕후는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천연두를 앓다가 딸만 둘 낳고 일찍 죽었다 제1계비 인현왕후는 인경왕후가 죽은 다음해 책봉되었으나 후사가 없고 폐서인이 되었다가 복위되었다. 제2계비 인원왕후는 인현왕후가 죽은 다음해 책봉되었으나 역시 후사가 없다. 왕비에게는 후사가 없었지만 후궁 희빈 장씨는 그 사이에 아들 둘을 낳았다 하지만 윤(경종)만 남고 둘째는 일찍 죽었다. 숙빈 최씨는 아들을 셋 낳았으나 둘은 일찍 죽고 연잉군 영조만 남았다 명빈 박씨는 아들 연령군 5살때 일찍 죽었으며 아들 역시 21살에 자손없이 요절 하였다 인현왕후와 대비하는 구도의 드라마에서 극적효과를 위해 절묘하게 이용하는 측면도 있다. 어찌 그렇게 악랄하기만 하고 반대 급부는 또 그렇게 인자하기만 할 수 있을까 승자의 기록에 바탕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어쩐지 너무 대비되는 구도이다. 그렇다면 장희빈은 어떤 인물일까?? 장옥정의 부친은 역관이었고 모친은 노비였다고 한다 11살에 부친이 죽자 숙부에 의탁하여 자라던 중 숙부가 형을 받고 유배 생활을 떠나자 의지할 곳이 없어진 장옥정은 나인으로 궁궐에 들어간다. 미모가 뛰어났던 그녀는 궁궐에 들어와 왕의 승은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숙종의 생모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장옥정이 남인에 연류된 장현의 조카라는 것을 알고 그녀를 궁궐 밖으로 쫓아 내게 된다 이때가 1680년으로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가 나이 20에 죽은 뒤였다 1681년 다시 계비 인현왕후가 책봉되고 1683년 어머니 명성왕후가 죽은 뒤 장례를 마치는 1686년 숙종은 다시 장옥정을 불러 ‘숙원’으로 삼는다 그리고 1688년 10월 숙종이 애타게 기다리던 첫 아들이 태어나게 된다 이어서 숙종은 서인의 반대를 무시하고 다음해 1689년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정1품인 빈의 자리에 올려 놓는다 그러자 왕후가 아직 건재한데 세자 책봉은 불가하다고 상소한 송시열은 제주도 유배를 보낸다 또한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하려 하자 서인은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현왕후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삼는다 그리고 서인들은 유배 보내고 송시열에게 사사(賜死)를 내린다 이제 서인이 몰략되고 남인이 새 정권을 잡게 되는데 이것을 己巳換局 이라 한다 변덕스러운 숙종의 성격을 이용하여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자 장희빈의 지나친 투기와 완악한 성격으로 숙종의 총애를 잃게 될 무렵 이때는 숙최씨가 영조를 낳았고 주위에는 후궁들이 즐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서인과 남인은 교대로 옥사를 당하는 갑술옥사(갑술환국)가 일어난다. 그 결과 폐비 민씨는 복위되고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하고 송시열은 복작되면서 남인은 정계에서 물러난다 결국 장희빈은 '닭 쫓던 개 지붕 처다' 보는 꼴로 차라리 빈으로 있었던 것 만도 못한 치옥이었다 장희빈은 희빈으로 강등되어 취선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고 그리고 한달 후 장희빈 오빠가 모해죄로 사형에 처하게 되자 소론의 남구만은 끝까지 장희재를 옹호하게 된다 그러자 숙종은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장희재에게 위리안치로 마무리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6년의 세월이 흘러 1701년 8월 오랜 지병을 앓던 인현왕후가 35살에 사망하게 되자 조정은 국상이 준비함과 동시에 한 편에서는 장희빈을 다시 왕비로 복위시키는 움직임이 전개 되었던 것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노론과 숙빈 최씨에게 치명적인 상황이었고 또한 숙빈 최씨에게 빠진 숙종에게도 좋지 않은 일 이었다. 무엇보다도 숙빈최씨와 노론측은 중전으로 복귀하는 것은 자신들에게는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기에 절대 허용 할 수가 없었다 1701년 9월 인현왕후와 함께 노론에 있던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는 취선당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병이 아닌 저주에 의해 시해당한 것이라고 숙종에게 발고를 하게 된다 실제 취선당 한편에 신당을 지었다 하지만 희빈 장씨의 측근은 세자 윤이 두창에 걸리자 쾌유를 기원하기 위함이었고 후유증으로 안질을 앓았고 병이 나았다고 하여 그만 두면 귀신의 분노를 산다는 무당의 말에 철거하지 못하였다고 주장했지만 받아 드려지지않고 호히려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원했다는 추가 증언이 더했을 뿐이다. 무속행위는 국법으로 엄중히 금했지만 밖은 물론 궁 안에서도 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하였던 만큼 신당 설치 자체는 굳이 문제 삼을 사안이 아니 었지만 변심한 숙종에 마음은 돌릴길이 없었다. 세자를 위한 그러한 것들이 숙빈 최씨를 비롯한 궁인 전원은 물론 숙종 또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숙종은 숙빈 최씨가 거론한 신당의 존재를 조정 대신들에게 공식화하며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시해하는 저주굿을 했다고 발표를 하게 된다. 당시 편파성, 증거부족, 고문으로 인한 신빙성 문제 등으로 인해 희빈 장씨가 신당을 차려 굿을 한 것이 정말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세자의 쾌유를 위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혹은 지금도 알수는 없지만 당시 숙종실록에는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한 내용은 없다.
결국 장희빈에게 ‘내전을 질투하여 모해하려 한죄’로 자진하라는 명이 떨어지고 장희재와 취선당 궁인들에게 참형을 내리게 된다. 장희빈에게 관대한 태도를 취한 소론이 몰락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되는데 이렇게 숙종대에 일어난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정권 쟁탈전인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옥사 중심에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있었으니 그들은 역사적 사건에 휘말려 희생되었던 것이다. 이후 숙종은 후궁이 왕비로 승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을 내린다. 사역을 내리는등 숙종이 냉혹하게 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실록에는 희빈 장씨의 죽음에 대한 예우는 지극히 극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례는 물론 후에도 예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파격적 이었다고 한다. 경기도 양주 인장리로 결정된 장씨의 장례까지의 모든 절차는 종친부 1품의 예로 궁에서 주관하고 예로 받들어젔으며 아들 세자 부부에게 상주로서의 몫을 다하도록 3년 복을 입도록 했다 당시 장씨의 장례는 여느 후궁의 장례처럼 3월장으로 치루어지지 않고 4월장으로 하였는데 왕과 왕후의 장례인 5월장 보다 단지 하루가 부족한 1702년 1월에 치루어젔다. 그리고 그후 16년이 지난 1718년 묘지가 불길하다는 지적에 따라 장지를 물색하여 다음 해에 경기도 광주 진해촌 현재 광주시 오포읍으로 천장을 하게 된다 묘가 용맥(龍脈)은 있으나 혈(穴)이 없고 수법(水法)도 합당하지 못하다는 함일해의 상소가 올라왔다 당시 숙종은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와병중인 숙종이 직접 천정지를 택점 하였다. 1719년에 치루어진 천장식 역시 궁에서 주관하였으며 숙종이 왕세자 부부에게 망곡례를 명함으로써 노론의 극렬한 반발이 있었지만 초장지와 마찬가지로 종친부 1품의 예장으로 단장 되었다 천장의 또 다른 이유가 굳이 있었다면 희빈묘가 있는 인장리(구리시인창동)는 동구릉 능참길 가는 경종 때문에 서두르지 않았을까이다 그래서 아예 세자의 능행차가 가지 않는 광주시 오포읍으로 자연스럽게 유배 보내듯 숙종은 죽기 1년 전 희빈장씨의 묘를 천장하는데 아내를 죽인 남편으로 아내와 아들에게 베푸는 마지막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음해 경종이 왕위에 오른자 다시 또 조중우가 상소를 올리게 된다. “낳아주신 어버이 명호가 없이 적막한 마을에 계시고 사당은 쓸쓸하고 한 줌의 무덤에는 풀만 무성합니다 예관에게 명을 내려 빨리 명호를 정하여 지극한 도리를 다하소서.” 그러자 노론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 상소를 올려 처벌하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경종은 생모의 작위를 회복하라는 조중우를 처벌하기를 꺼려했으나 빗발치는 상소 때문에 그는 유배지로 가던 중에 죽게 된다 아들 경종은 왕위에 오른 후 어머니를 추존하고 싶었지만 선대의 뜻을 따를 것을 신하들이 주장하였다 . 숙종의 대상을 치른 1722년에 私廟를 세우자는 논의가 일어나서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숭하고 낙원동에 대빈궁(現종로세무서)을 세우게 되는데 폐비되어 사약까지 마신 어머니를 둔 경종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건강까지 좋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대빈으로 추존하고 사당을 세운 것으로 자식의 도리를 다 하게 되었다. 대빈궁은 1908년 7월에 다시 육상궁 경내로 옮겨졌다 그가 일직 요절만 아니 했다면 어머니의 복권은 물론 피바람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점처본다 대빈궁은 1908년 7월에 다시 육상궁 경내로 옮겨졌지만 2010년 까지만 해도 종로세무소 옆으로 대빈궁길이라는 표시가 있었으나, 지금은 삼일대로 26길로 바뀌었다. 경기도 광주군 오포읍 문형리에 있는 장희빈 묘는 능도 원도 아닌 채 혀지다가 도시 팽창으로 1969년 서오릉 경내로 옮겨지는데 파란만장한 인생 행로를 거쳐 두 번의 移葬과 잊혀진 수많은 세월을 지나서 死後 268년 만에 마침내 남편 곁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녀는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폐비가 되었기에 대빈묘(大嬪墓)로 남아 있다 결국 숙종은 사후에도 세왕비와 네후궁을 주변에 거느리고 있으니 조선의 왕중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한편 경기도 광주군 오포읍 문형리에는 희빈 장씨묘가 있던 느티나무는 1983년 광주시 보호수 48호(수령 510년)로 지정되었다 장희빈은 1961년은 김지미 1968년은 남정임 두번 영화로 제작 되었으며 이후 영화와 TV에서 셀수 없을 정도로 20여편 이상 등장 하면서 사람들에게는 나쁜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가을이 짙어지는 만추의 11월쯤 되면 서오능 길은 온통 낙엽으로 쌓여있어서 우리들의 인생을 이야기하며 걷기에는 참 좋은 피크닉 장소이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마음을 달래이며 시간을 보낸다 고양시 일산 중산동 96-1 고봉산 기슭에 있는 장희재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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