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명성황후 생가 솔새김남식
경기도 여주는 조선시대 7명의 왕비를 배출한 고장으로 그중 여흥민씨 3분은 조선의 역사와 함께했다 할 수 있다.
바로 태조 이방원의 원경왕후, 숙종의 인현왕후, 고종의 명성황후 세사람이 여흥민씨 이다.
원경왕후의 경우 조선3대왕의 태종과 더불어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의 설립을 함께한 분이요
인현왕후는 장희빈과 대립을 통한 조선시대의 당파싸움을 그렸고
명성황후는 구한말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비극을 자초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선의 역사를 승리로 이끈 철의여인 명성황후라고 말을 하지만 과욕이 화를 불러 들여 조선을 치옥으로 만들었다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은 일제가 궁전까지 처들어가 한나라의 왕비를 살해하고 방화까지 한
끔직한 사건은 정말 잊으면 안 되는 역사에서 치욕적인 사건이다.
불우한 일생을 마친 명성황후의 뜻을 기리고자 명성황후 생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명성황후기념관, 공연장, 추모비 동상, 감고당, 민가마을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명성황후는 1851년에 태어나 8살까지 살았던 집으로 사랑채와 행랑채등을 복원했다
명성황후의 실질적인 통치기간은 22년으로 (명성황후 집권 1873~1895년) 마지막 집권해인 1894~1895 년도에
명성황후는 일본제국군(청군과 함께)을 불러 들여 진주 시키도록 허가 함으로써
저절로 일본군의 식민통치를 허락하는 행동이 되고 말았다.
청나라의 힘을 빌려 일본을 몰아내려 했으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청나라가 조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불러 들여서 다시 일본을 견제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조선 침략을 위해서는 명성황후가 제거되어야 한다 생각하고 시해를 감행하게 된다.
아버지 대원군과 마누라 눈치만 살피며 이리저리 줏대없이 국정을 논하고 대처하는 고종
그리고 문무백관들의 무능함이 적라하게 들어나자 국논이 분열되고 우왕좌왕하는 난국으로 말미암아
조선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게되지 않았나 생각해 보는 시각이다.
이곳은 역사를 돌아보기 보다는 명성황후에 亂政의 기록은 거의 없으며 그를 추모하는 내용이 전부이다
명상황후순국숭모비(明成皇后殉國崇慕碑)
다시는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함은 물론이고 더욱 국권을 튼튼해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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