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죽산성지

시인김남식 2012. 7. 3. 10:55

 

병인박해 순교터 '죽산성지'  경기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죽산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교우들이 살륙됐던 처형지와

교우들을 끌어다 심문과 고문을 하던 곳이다.

이곳 죽산은 충청·전라·경상도로 갈라지는 주요 길목으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조선 시대에 도호부가 설치 되었던 곳이다.

현재 죽산면사무소 자리에서 천주교인들이 참담한 고문 끝에 처형되었다.

순교자들은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이만해도 25명에 이른다.     

    . 

 

한국의 천주교성지를 되돌아 보면 두둘겨 때려 반쯤 죽인 상태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순교성지는 죽산 순교성지가 유일한 곳이다.  

 

 

성지입구 표지석

 

 

성지입구  주차장 

 

 

주차장 성지석 

          

 

 

주차장 왼편으로 성지 안내가 있다

 

 

 

소성당 입구 순교자 표지석 

 

 

성지정원

 

 

주 출입문

 

 

천주교의 4대 박해의 하나인 병인박해(1866년) 때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도 끌려가 이곳에서 순교 하였다.  

 

 

성지 출입문

 

 

출입문 왼쪽 순교비

 

 

출입문 오른쪽 역사비

 

 

지금은 평평한 땅이지만 당시에는 노송이 우거지고 길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골짜기로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송문주 장군이 지키고 있는 죽주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친 장소이기도 하였다.

 

 

 

성지전경

 

 

죽산성지            

 

 

순교자 묘역

 

 

순교자 묘역 제대 

 

 

순교자 묘역 제대, 십자고상 

 

 

 

현양탑,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좌우로 두 개가 세워져있다.

 

 

현양탑 건립 봉헌자

 

 

현양탑 앞 촛불대

 

 

순교자 묘역

 

 

순교자 묘역 십자고상

 

 

무명 순교자 묘역

 

 

프란치스코 (1835 -1868년)

1835년에 태어난 박(朴) 프란치스코는 장성한 뒤 오(吳)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

이후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군 백곡면 절골로 주하여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68년에 9월 5일에 마침내 경기도 죽산 포졸들이 절골에 들어오게 된다.

프란치스코와 마르가리타 부부는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다가

1868년 9월 29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34세였다.

 

 

 

오 마르가리타 ( ? -1868년)

 

오(吳) 마르가리타의 출생지와 천주교에 입교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고, 훗날 박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고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하다가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다.

 

 

 

 

묵주의 길              

 

 

대성당 

 

 

대성당

 

 

 

대성당 내부

 

 

 대성당 감실

 

 

소성당 입구

             

 

 소성당 입구

 

 

소성당 성모상

 

 

소성당 내부

 

 

소성당 제대

 

 

소성당 성모자상

 

 

병인박해                           

1866년 대원군이 프랑스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를 탄압한 사건.

1831년 교황청이 조선을 독립 교구로 설정하자 프랑스 외방선교회는 앙베르·모방·샤스탕 신부를

조선에 파견해 주로 농민, 아녀자, 몰락한 양반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전파해 갔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은 천주교를 침략 세력인 서양 오랑캐를 끌어들이고 제사를 거부하는 등

봉건적 이데올로기와 통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이단(異端)으로 규정했다.

이에 대원군은 1866년(고종 3) 1월초 국내에 있던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66년에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가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구실로 프랑스는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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