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공양왕릉 솔새김남식
강원도 삼척에 또 하나의 고려 공양왕릉 묘가 자리하고있다
강원도 삼척에서 20키로 지점 울진으로 가는 7번 국도 궁촌해수욕장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해안가 작은 언덕에 있는 고려 공양왕릉 무덤은 일명 궁촌왕릉(宮村王陵)으로 불리고 있으며 강원도 기념물 제 71호이다.
왕릉으로 진입하는 길목에는 삼척해안레이바이크 유원지가 있어서 주말에는 매우 복잡하다
왕릉앞에는 작은 주차장이 있고 차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서면 동해 바다가 발아래 보이고 멀리 태백 준령이 보인다
묘단에 올라서면 큰 무덤이 있으며 그 옆과 작은 무덤 두개 있고 작은 또 하나의 초라한 무덤이 있는데 ....
이 분묘들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그의 아들 왕석, 왕우등 3부자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나머지 작은 묘 하나는 왕을 모시던 시녀의 묘 또는 왕이 타고 다니던 말의 묘라고 추측하고 있다
공양왕과 그 아들의 것이라는 주장에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이곳 주민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바로 헌종 3년(1837년) 정유년 가을에 삼척 부사 이규헌이 개축한 기록이 있고 그후 1942년 근덕면장 김기덕이
개축했으며 1977년 6월 면장 최문갑이 다시 봉축하여 매년 음력 4월 17일 제례를 올리고 있다.
왼쪽으로 제일 크게 보이는 묘가 공양왕릉이다
공양왕과 함씨(咸氏)의 일화
일제강점기에서 애국자와 반역자로 나뉘어져서 지금까지도 다 해결하지 못한 사례가 많듯이 그당시 고려가
멸망위기에 있을때 많은 사람들이 어느편에 있느냐에 따라서 역적과 충신으로 나누어진 예가 많았다
고려말 세력자가 된 이성계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찬탈한 역사적 사건은 함(咸)씨 가문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공양왕의 문신이었던 함부열(咸傅說)씨와 이성계를 도와 3등 개국공신이 된 함부림 (咸傅霖)씨는 형제로서
혈육의 정을 끊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조선개국의 흔란기에 형 함부림은 개국공신으로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낸후 영의정에 올랐다.
아우 함부열은 고려말에 예부상서와 홍문관 수사를 지냈으나 조선개국 동참을 거부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함부열은 공양왕이 숨을 거둔 고성산(186m) 서록을 원정동이라 명명하고
암매장한 후 후손에게 자기도 그 밑에 장사하여 시왕(侍王)케 하고 무고축으로 제사(祭祀)하라는 유언을 남겨
지금도 후손들은 이를 지키고 있다.
형과 아우가 조선왕조의 개국으로 충신으로 역적으로 나뉘면서 본관(本貫)도 달리하게 되었다.
형 함부림계는 강릉(江陵)을, 아우 함부열계는 본래의 양근(楊根)을 쓰게 되었다. ==> 간성,삼척 문화원에서 발췌정리
1394년 3월에 함부열은 삼척으로 두 번째 유배되는 간성왕의 뒤를 따랐다. 내려간 지 한 달 만에 간성왕을 살해하러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왔다. 역사 기록에는 중추부사 정남진이 내려왔다는데, 함씨 집안에 전해오는 얘기로는 함부열의 형 형조의랑 함부림도 동행했다고 한다. 함부열은 마주친 형에게 간청하여 다른 왕족의 시신만 거두게 하고 간성왕을 간성으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정남진과 함부림은 도저히 조정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간성으로 자객을 보내 간성왕을 살해해버렸다. 그게 공양왕 삼척 사망일인 4월17일에서 8일이 더 지난, 4월25일의 일이라는 것이다. 살해된 간성왕은 금수리 수타사에서 가까운 고성산 기슭에 묻혔다고 한다. 매장을 주도한 사람은 함부열이다. 함부열은 유언으로 간성왕(공왕양을 그리 불렀다) 밑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묘에 제사 지내기 전에 왕 무덤에 축문 없는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 출처 위키백과
아뭏튼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왕을 양위하고 2년후 1394년 49살에 타의에 의하여 생을 마감한다.
삼척에서 남으로 약 16km 로 근덕면 동막리를 지나 궁촌리로 이어지는 옛길에는 고돌산의 사랫재라는
나지막한 해안 고개가 있는데 이곳에서 도성에서 보낸 자객이 공양왕을 목 졸라 살해했다고 하는 곳으로서
주차장 옆에서 언덕으로 오르는 해안도로를 따라 500m를 올라 가면 소나무 네 그루가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자객이 공양왕을 목졸라 살해했다고하는 사릿재(살해재)가 아닌가 추측이 되며 그때 부터 사릿재라 부른다고 한다
이 해안 도로를 계속 따라가면 삼척시가 나오는데 관심없는 일반 사람들은 왕릉만 잠시 보고는
이 길로 올라 가지않고 그냥 7번 국도 큰 길로 바로 나가 버린다.
위 안내문에서 왕녀는 공양왕의 딸 정신궁주로 단양우씨 우성범과 혼인했으나 1392년 공양왕이 폐위되자 손아랫
동서인 강회계(姜淮季)와 함게 이성계 일파에게 참수되었다.
그후 1421년 세종 3년에 공양왕릉을 수호하는 상소를 궁주가 올려서 정릉으로 정했다고 한다
위 안내문에서 (단양군 이성범의 처) 에서 이성범이 아니라 우성범 (단양군 단양우씨)으로 안내문 착오인 것 같다.
다시 50m 조금 더 올라가면 해안가 절벽에 신을 모시는 사당 건물이 하나 있는데 海神을 위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곳 주위는 황영조기념관과 해신당 조각공원이 있어서 여행하기에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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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공양왕릉 야사 => 크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