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묘 솔새김남식
도봉구 쌍문역에서 130번 버스를 타고 20여분 아파트 숲을 지나면 정의공주 연산군묘라는 정류장 이름을
버스에서 안내방송을 하면 내린다.
우이동 유원지로 가는 2차선 길 사이에 두고 이 편은 세종대왕의 딸 정의공주묘'
길 건너편 쪽은 연산군의 묘 팻말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앞 길은 도봉산 둘레길이다.
주택가 골목길로 들어서자 아름드리 수령 800년된 은행나무가 있고 반대쪽에 연산군묘가 있으며 반대쪽에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 800년 은행나무로 연산군묘와 역사를 같이하고 있다.
연산군묘는 주택가라 그런지는 몰라도 광해군 묘와는 전혀 다르게 이곳은 사무실에 관리인도 있었고
해설가도 있으며 내가 찾아 가던 그날도 그 뜨거운 여름 날씨인데도 연산군 묘에서 관리인은 잡풀을 뽐고 있었다.
연산군묘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다가 왕의 남자라는 영화를 통해 연산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개방에 대한
여론이 높자 문화재청에서 공개하기로 했다고 하며 이곳의 옛 지명은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로 파평윤씨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낮은 언덕을 오르면 연산군묘역 아래는 태종의 후궁 조씨와 연산군의 딸과 사위 무덤이 있는 가족묘이다.
연산군은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1506년 11월 강화 교동에서 31살에 마지막 생을 마첬다
의정궁주 조씨 묘는 태종의 후궁으로 1454년에 조성되었으며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15세의 의정궁주 조씨를
후궁으로 간택했으나 예를 올리지 못하고 승하하자
궁주 작호를 주고 세종은 왕명으로 자기 아들 임영대군에게 자기 소유의 땅에 의정궁주 조씨 묘를 쓰게하고
제사까지 맡게 하였다
연산군의 부인 거창신씨는 임영대군의 외손녀로 즉 외할아버지 종산(種山)에 남편과 자기 딸 내외를 묻은 것이다.
연산군은 우배지인 강화도 교동에 처음 안장 되었다가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이장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여 사후 7년만에 1513년 이곳으로 이장 되었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와 사위 구문경은 1524년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그후 1537년에 군부인 신씨 묘가 마지막으로 조성 되었다.
묘는 대군의 예우에 따라 조성되었으며 연산군은 다른 어느 왕릉 보다도 人家가 있는 곳에 있어서 모후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그가 지금은 외롭거나 쓸쓸하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묘를 내려와서 왼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재실이 있는데 초라한듯 보이나 군으로 남은 연산군과 광해군 중에서
연산군의 묘에만 재실이 있다고 하는데.....
안내를 보면 외손으로 하여 1775년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군사들이 묘를 지키도록 했다고 하며
최근에 다시 보수 했다고 한다 .
연산군일생과 그 가족 이야기 솔새김남식
조선왕조에서 오명을 남긴 대표적 임금으로써 낙인 되어서 드라마와 영화로 수없이 모든이에게 각인 되었기에
우리나라 역사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이름뿐인 몇몇 왕들 보다도 사실 유명세를 더 탄 이가 바로 연산군이다.
그가 왜 그 폭군의 길을 가야 했을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를 한없이 동정한다.
학자들은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스런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었던 사실에서 찾으려는 경향도 없지는 않다. 결국 가족사의 비극은 연산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는 평생을 한(恨)과 업보를
그대로 받게 되었으니 역사란 뜻한 바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요소들이 얽혀지면서
형성되는 것임을 알게 한다.
연산군은 성종 7년(1476년) 성종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성종 14년(1483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가장 못 마당하게 생각한 사람은 바로 할머니 소혜왕후 한씨이다.
소혜왕후 인수대비는 세자빈 시절에 남편 덕종을 잃고 사가에서 성종을 홀로 키우면서 아들 성종을 꼭
보위에 올리겠다는 정치 야심이 많은 여자였다.
딸 셋을 국모를 바치면서 그의 야심을 도우 사람이 바로 압구정의 주인 한명희이다.
드녀 성종이 보위에 오르자 눈에 가시가 바로 연산군의 어미니 윤씨였다.
고부사이가 않좋은 사이에서 여성편력이 심한 성종은 인수대비와 함께 자기가 사랑했던 여인에게
1482년에 사약을 내리는데 연산군의 나이 6살 이였으니 당연히 할머니 인수대비와 아버지에게서
미움만 가득한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중종의 모후 정현왕후를 친 어미로 알고 자라왔다.
연산군은 보위 초에는 선왕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임금다운 면모를 갖고 정사를 돌 보았다고 한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며 폐비사건이 훗날 알려진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왕위에 오르기 전 부터 어머니 죽음을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자식이고 사람이라면 그걸 모를리 있을까 언제 터트릴까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연산군은 후궁들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출생 했으나 이상하게도 어린 나이에 모두
요절 하는데 연산군 자신 스스로가 복이 없다고 자인하며 그래서 더 폭악하지 않았나 생각도 된다.
옛말에 부모덕이 없으면 자식 덕도 없다고...
연산군이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에 안치된지 2개월만에 병사로 죽는데 당시 정황으로는 병사를 믿을 수가
없는 대목으로 타의에 의한 죽음이 아닌가 생각이 되며
그 가족들 또한 천명(天命)을 다할수 없기에 반정 세력들은 성밖 가까이에 있던 폐세자와 대군들을 귀향지에서
유아의 나이에 곧 바로 모두 사사 되었으며 폐비 신씨에 대해서는 그녀 아버지 신승선 집을 수리해서 옮기도록
하고 위호를 낮추어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하였다.
아마도 외조부가 세종의 아들이고 그녀의 착한 성품을 반정 세력들 조차 인정하는 바였기에 이후 그녀에
대해서 만큼은 별다른 위해危害를 가하지 않았는데 아니였나 사료된다.
신씨는 연산군이 죽은 뒤 남편의 신주(神主)를 자신이 모셨다.
연산군(1476~1506)의 부인 거창부원군 신씨 (1472~1537)
연산군의 부인 거창부원군 신씨는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신승선과 왕실의 딸 (새종대왕 아들 임영대군이 외조부) 사이에서 태어나 16살에 12살 왕세자 연산군에게 시집와서 연산군 18살 신씨 22살에 왕비로 책봉 되었으나 그녀의 행복은 너무 짧았다. 무엇 보다도 연산군의 광기에 최대 피해자로 폭정에 간을 졸이며고 살아 왔다고 한다
특히 두아들의 귀양지에서 사사한 뒤에 노비로 전략한 친정 식구 때문에 걱정을 않고 살았다고 하는데......
너무 많은 일들을 지켜보고 직접 겪기도 하였던 그녀는 오히려 고즈넉하다 할 정도로 편안함을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무소유의 소탈함이 그녀에게 생겼으나 세월은 그녀의 머리를 희게 하였고
마음씨 좋은 할머니의 자상함으로 살다가 중종 32년 4월 마침내 죽음을 맞았다.
제사는 외손 구엄(具헪)에게 전해졌다가 다시 그의 외손 이안눌(李安訥)에게 이어졌는데, 이렇게 죽어서도 편치 못하였으니 안타까움만 남는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손위 처남이며 중종의 장인으로 반정군은 진성대군(晉成大君 :중종, 신수근사위)을 임금으로 추대할 뜻을 품고 그에게 ‘누이와 딸중 누가 더 중하냐?’ 고 묻자,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며
‘임금이 비록 포악하나 총명한 세자를 믿고 나는 살겠다.’고 하였다.
결국 유자광에게 두아우 수영과 수겸 삼형제가 함께 피살 되었다
그후 영조는 삼형제를 이름하여 삼충신이라고 칭하고 옛날 고려에 정몽주 충신이 있고 오늘 조선에는 신수근 충신이 있다는 어서를 내리어 어서각을 짓게 했다. 신수근묘는 장흥면 일영에 있다.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도 불쌍하지만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도 만만치 않은 삶을 살다 갔다.
온갖 귀염을 받으며 연산군이 폐위되기 직전에 11살때 능성구씨 집안의 구문경과 혼인하였다.
구문경의 아버지 휘순공주의 시아버지 구수영은 도총관으로 한때는 연산군에게 붙어 간신질을 하다가
중종 반정에 가담하여 연산군을 배신한다.
연산군이 폐위된후 시아버지 구수영의 요청으로 이혼을 당하여
휘순공주는 친정 어머니 신씨와 함께 외가에서 기거 하다가 3년 뒤에 시아버지가 탄액을 받고
파직 한뒤에 중종에 의해 다시 구문경과 재혼을 하게 된다.
친정 아버지 연산군을 잃은 휘순공주는 시아버지 구수영이 얼마나 미웠을까?
다행한 것은 연산군의 외손들은 할아버지가 반정에 가담한 공로로 孫을 이을 수가 있었기에
외손들이 외할머니 거창부원군 신씨의 제사를 모셨다고 전한다.
중종의 생애
연산군을 몰아내는 정변이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친어머니인 윤대비를
경복궁에서 만나 허락을 얻어 연산군을 폐하고 강화 교동에 안치하는 동시에 이튿날인
경복궁 근정전에서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한다.
이에 중종은 19세의 나이로 조선 제11대 국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으니 .
16세기 초에 일어난 정치사의 일대 변혁인 중종 반정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종의 정비(正妃)인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1487-1557)는 좌의정 신수근의 딸로
태어나 13세 때에 진성대군(中宗)과 혼인을 맺었지만 중종반정에 반대했던 아버지 신수근 때문에
왕비 책봉 일주일 만에 폐위되는 불우한 일생을 살다가 1557년[명종 12년] 71세의 나이로 사저에서 승하한 뒤
본가 선영에 묻혔다가 1739년 영조15년에 복위되어 단경(端敬)의 시호와 온릉(溫陵)의 능호를 받았다.
결국 슬하에 자식도 없이 권력의 암투 속에 희생양이 되고 말았던 안타까운 비운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폐비가된 후 대궐을 향해 바위에 치마를 펼쳐 놓았었다는 인왕산 치마바위 주인공이 바로 단경왕후 신씨이다.
릉은 비공개로 장흥면 일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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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공주묘
연산군 묘를 돌아 보고 나오는 길에 도봉산 둘레길에 있는 철문이 굳게 닫힌 정의공주 묘를 들러 보았다 .
정의공주는 세종의 딸로 총명하고 민첩하여 세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고 하며 출가 후에도 공주 슬하
네아들의 이름까지 세종이 손수 지워 주실만큼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에필로그
한때 왕이였던 연산군 보다도 더 넓고 정갈하게 관리되는 정의공주의 묘를 보았을때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재력의
대단함이 느껴졌으며 길하나 사이에 두고 지척에 있는 왕족들의 무덤과 공주로 태어나 평생을 호사와
행복의 뜰안에서 살다간 정의공주와 후궁도 아닌 외로운 삶을 살았을 의정궁주.
그리고 폐비신씨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인생을 살다간 차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각자의 팔자소관일까?
그리고 연산군 묘를 보며 가슴이 시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시와 서예가 능란하여 128편의 시를 연산일기로 남겼다고 한다.
연산군은 원래 성격이 괴팍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아이들이란 당연히 자라면서 환경에 따라
성격이 변하는 것이고 지금도 사고치는 아이들은 불안한 가정에에서 눈치를 보고 자란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그는 아버지와 할머니를 한없이 미워하며 폭군으로 변했고
결국 그를 막아 내 줄 혈맹도 충신도 없었다.
할머니 인수대비와 아버지 성종 사이에서 모후를 지켜주지 못하고 아부와 아첨으로 한통속이 된 모든 대신들이
미웠기에 부관 참시를 하지 않았나 그래서 피바람이 몰고 간 사화의 원인은
아마도 아닐까 조심히 생각 해본다.
그리고 연산군이 폭군으로 사람들에게 낙인된 이유는 아무래도 흥행을 위해서 드라마 영화의 단골 소재로써
과장된 연출이 한 몫을 한 것 같다고 연산군을 동정하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어찌 되었던 폭군의 누명은 씻을 수는 없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는 한 인간으로써 우리는 그의
고뇌를 이해하고 동정해야 한다. -
솔새김남식 2012.07.11 k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