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신당동 박정희대통령 가옥

시인김남식 2015. 12. 7. 11:15
신당동 박정희대통령 가옥  솔새김남식

 

2호선 신당역 3번 출구 중앙시장 횡단보도 휴대폰가게 옆에 이정표가 있으며 길을 20여분 따라가면 된다

 

신당역에서 10여분 지나서 만나는 중소기업은행에서 평지가 아닌 현대아파트 부근 오름길 언덕위에 있다.

 

이곳은 등록문화재 제412호. 박정희 대통령이 1958년 5월부터 1961년 8월까지 가족과 함께 거주하던 집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의 큰 사건의 하나인 5·16혁명을 계획한 장소이다.

 

또한 이 집은 1930년대 후반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에서 신당동 문화주택지 개발로 조성한 주택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가옥으로 한국 주거사의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박정희 가옥은 서울시가 역대 정부수반 유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정비하고 복원하여 일반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박정희 가옥은 2008년 10월10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서울시에서 5년간의 준비 끝에 2015년 3월에 

대중들에게 처음 공개 되었다.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가진 사람들과 근현대사의 숨결을 느끼고자하는 사람들에게서 관심을 받게 되었다.

 

박정희 문패가 걸려있는 단층 주택 짙은 녹색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관리인이 사람을 반가이 맞이한다

 

일반 가정집이라서 내실이 복잡하여 1회당 20명 내외로 실내로 들어 갈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곳에서 초등학교 1학년 부터 3학년까지 살았다.

 

​집안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차양이 드리워진 목재 마룻바닥에 올라서니 외빈을 맞던 응접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 집은 육영재단의 소유라고 하네요.

 

응접실 한켠에 걸린 '신이심정(神怡心靜: 정신이 온화해지면 마음 또한 고요해진다)' 글씨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 일가의 가풍을 짐작하게 했다.

 

이 글씨는 옥천 출신의 한 서예가가 썼다고 전 한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박지만1958년)이 태어났던 안방에는 화장대와 거울과 재봉틀과 함께 반짓그릇이 놓여있다.

 

혁명 전 날 잠시 집에 들려서 아이들을 보고 나갈 때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몸조심 하라고 당부 했을 터인데

 육영수 여사가 '근혜 숙제 좀 봐주고 나가시지 그러냐고' 그렇게 말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안방의 미닫이 넘어로 대통령 박근혜와 전 육영재단 이사장 박근령이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자녀방이다.

 

당시 '국민학교' 저학년이었던 근혜, 근령 자매가 사용했던 방에는 두 자매가 각각 장충국민학교 3학년과 1학년

이었을 때 썼음직한 교과서와 문구용품들 실로폰 등이 놓여있다.

 

서재 벽에는 5.16 당시 시청 앞에 입고 나타난 것과 같은 빛바랜 전투복 점퍼와 군복바지가 걸려 있었다.

 

벽에 걸린 당시 박정희소장이 입었던 군복과 군모는 예전것은 없고 모두 소품을 준비해서 비치했다고 한다.

 

혁명 당시를 기억하려는 듯 세월을 멈춘 단기4294년, 서기1961년도 빛바랜 조흥은행 카렌다가 거실에 걸려 있다.


 .

 























1961년 그날의 신문 화일 스크랩에서 구테타로 명기했지만 성공한 구데타는 혁명이 아닌가를 놓고

아직도 찬반 논쟁중이며 군사정변, 군사구데타, 군사혁명 어느것 하나 정립 할수가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5.16을 계획하고 지휘한 이곳은 하루 전날 장태화, 이낙선, 김종필등 주요 참모들이 모여서 숙의했던 곳으로

인조가 반정을 모의했던 은평구 구산동 인조별서유기비를 손자인 숙종이 세웠던 것을 생각하며

이곳도 분명 후세 역사의 현장이었다.  

 

5.16구데타를 일으킨 그는 국가 재건에 힘쓰며 이전과 다른 한국을 움직이는 새지도자로써 경제부흥을 만들어 놓았다

 

그 당시의 물품은 한 점도 남아있지 않기에 언론 자료등을 통해 최대한 당시 물품을 구해서 재현했다고 한다.

 

빛바랜 책상과 60년대 있었던 금성사 라디오가 눈길을 끌었는데 1961년 5월 16일 아침 5시에 혁명을 알리는

kbs 긴급 뉴스를 방문객에게 들려 주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는 라일락인데 육영수 여사가 이 꽃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 옛날 나무는 없어지고 최근에 다시 심었다고 하네요

 

맨 위에는 박정희 대통령 저서의 책 몇 권과 그리고 아랫 층에는 5.16 혁명 당시 부터 3년간 하루도 빼지 않고

일기를 썼다는 어떤 사람의 자필 노트가 귀중한 자료로서 보관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를 비교 하면서 구테타를 일으킨 후 그가 만약 사리사욕에 머물렀다면 대한민국은 어찌 되었을까?

어찌보면 우리 민족에게 5.16 혁명은 자랑스런 선물이 아니었까 지금와서 조심스럽게 유추해본다

 


이곳은 지역의 명소로 그 활용 가치가 충분하지만 접근성이 떨어지고 편의성이 부족함에 따라서 

그리고 세월속에 무관심으로 점차 방문객 수가 줄어 들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이 된다

 

 

국가재건을 힘섰던 공로보다는

구데타로 정권을 잡고 장기집권을위해서 갖가지 편법을 썼으며 그리고 슬픈 末路가 그를 괴롭힌다.

과연 그 자신이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인지 그는 분명히 알고 있을까? 혁명은

조국을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시대적 요구라고 변명할까?

그의 정치철학과 인생은 어떤 것으로도 설명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결국 그를 따라 다니는 여러가지 부정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평생을 조국근 대화에 바첬지만 역사적으로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니 본인 스스로가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그의 부정적 평가는 아직도 현재 진행중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측은지심으로 동정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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