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기(義妓) 강아(江娥)의 묘 솔새김남식
강아는 송강정철(1536년 - 1593년)이 말년에 아끼던 애첩으로
고양시 신원리 송강골 초입에 그의 묘가 있다
송강의 묘는 본래 이곳에 있었는데
송강의 손자가 진천 현감으로 있을 때인 1665년 우암송시열이 진천으로 이장하였다
영감님 묘는 진천으로 옮겨갔지만 강아는 그대로 홀로 남아있게 되었으니
그 안타까움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송강이 살았던 옛집은 그대로 송강정철문학관(지금은閉管)으로 되어 있고 39번 국도에는 정철시비공원이 있다
송강이 전라감사로 있을때 남원 관아에 있던 자미(紫薇)라는 동기(童妓)에게 머리를 얹어 주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진옥(眞玉)이었으나 정철의 호인 송강(松江)의 '강(江)'자를 써서 강아(江娥)라 불렸다고 하며
강아는 기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조집 권화악부(權花樂府)등에 송강첩(松江妾)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정인(情人)은 정철뿐이었나 생각이 된다.
남원의 市木은 배롱나무
일명 자미화(紫薇化)라고 하며 개화기가 길어서 백일홍이라고도 하는데
정철이 광한루를 크게 중수할 때 자미에 대한 사랑의 증표로 자미화를 심지 않았을까 사료되는 것으로써
정철이 중년의 지천나이에 젊고 이쁜 애첩을 하나 얻었으니 얼마나 사랑스럽겠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남원 사람들은 송강 정철이 자미를 아끼고 사랑하자 송강의 이름을 따서 강아(江娥)라 불렀다고 한다
얼마후 도승지가 되어 한양으로 전직하게 되자 송강은 자미에게 다음과 같은 詩를 주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詠紫薇花(영자미화)
一園春色紫薇花 (일원춘색자미화)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纔看佳人勝玉釵 (재간가인승옥채)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莫向長安樓上望 (막향장안누상망) (자미야!)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아라
滿街爭是戀芳華 (만가쟁시연방화)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라
이처럼 강아는 정철의 사랑을 듬뿍받은 행복한 妓女였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송강에 대한 연모의 정은 깊어 갔지만 쉽사리 만나지 못 했으나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 뒤에는 다시 만남이 있는 것이기에
세월이 흘러 10년 후 1591년 송강은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다가 파직되어
평안도 강계로 송강은 귀양가게 된다
이때 강아는 불원천리(不遠千里) 송강을 찾아 전라도에서 수천리 길을 달려 가는데
오랜 세월 사무치는 그리움 끝에 마침내 술상을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 농염한 연시를 주고 받는다
먼저 송강이 한 수 읊는데 ....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임이 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이에 그녀는 다소곳 요염한 목소리로 和答하는데...
철이 철이라커늘 섭철(憾鐵)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임이 분명코나
내게도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번옥과 섭철"이란 위 내용은 인터넷에 무수히 떠도는 이야기로서 그 내용이 정말
사실 이었을까하는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 복직되어 충청, 전라, 경상도 도관찰사로 임명된다
이를 모르는 강아는 그를 만나기 위해 홀홀단신으로 강계로 갔다가 그를 만나지 못하고 왜병에게 잡히게 된다
이때 그녀는 송강의 제자인 의병장 이량(1519~1582)의 권유로 자기 몸을 조국의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敵將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유혹하여 군사기밀을 빼내어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후 더럽혀진 몸으로 송강을 더 이상 섬길 수 없게 되자 출가하여 소심(素心)이란 여승이 된다.
하지만 1593년 58세로 정철이 생을 마감하자 그녀는 돌아와서 정철의 묘를 지키다가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녀도 생을 마감하자 마을 사람들이 정철 묘옆에 정성껏 모셨다고 전한다
그래서 죽은 뒤에 그녀는 義妓라는 호칭을 後世 사람들에게서 얻었다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시라도 임 생각 말아 이 시름 잊으려 해도
마음속에 맺혀 있어 뼛속까지 사무쳤으니,
편작과 같은 명의가 열 명이 오더라도
이 병을 어떻게 하랴.
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가 되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기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께서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좇으려 하노라.
송강정철이 1588년 58세에 쓴 사미인곡의 일부이다
동인이 서인을 몰아내자 서인의 영수였던 송강은 고향에 내려가 지내게 될때 쓰인글이다
선조에 대한 충성심을 한 여인이 지아비를 사모하는 마음에 비유하여 썼던 글이다
매봉산 아래로 보이는 기와집은 송강정철 문학관이었으나 진천으로 이관 되면서 지금은 거의 운영하지 않고 있다
秋日作(추일작)
山雨夜鳴竹(산우야명죽)
산에 비 내려 밤새 대숲 울리고
草蟲秋近床(초충추근상)
가을 풀벌레 소리 밤엔 더욱 크게 들리네
流年那可駐(유년나가주)
흐르는 세월 어찌 멈추랴
白髮不禁長(백발부금장)
길어지는 흰머리 막을 수 없네
나름대로의 명리를 찾아 왔지만
가족을 떠나 모내는 세월은 야속하기만 했던 듯하다.
이러한 때에 정철을 연모하던 기생 진옥은 송강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하여 송강의 답답함을 표현한다.
居世不知世(거세부지세)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겠고
戴天難見天(대천난견천)
하늘 아래 살면서도 하늘 보기 어렵구나
知心惟白髮(지심유백발)
내 마음 아는 것은 오직 백발 너 뿐인데
隨我又經年(수아우경년)
나를 따라 또 한 해 세월을 넘는구나
연일정씨(延日鄭氏) 문중에서 강아의 묘는 지금도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보존하고 있다
정철과 기생 진옥의 사랑의 情表로 무수히 심었다고 하는 남원 광한루에 있는 배롱나무(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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