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상암동 박정희대통령 기념관

시인김남식 2012. 2. 27. 10:49

상암동 박정희대통령 기념관   솔새김남식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이 우여곡절 끝에 2012년2월 개관을 했다기에 다음날 2월 22일 찾아가 보았다.

 

나이 먹은 나처럼 대부분 향수에 젖은 관람객들로 60대를 바라 보는 그 이상의 관람객들이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3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그의 업적에 비하여 호의적이지 못하다

이유는 유신독재와 그리고 불우하게 생을 마감한 게 그에게 검은 장막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기념관 사업이 13년이 되어서야 빛을 보게 되었지만 개관하는 날 까지도 반대하는 사람들에 저항이 많이 있었다.

반대하는 일부 사람들은 그가 저지른 반민족적 반민주적 행위를 국민에게 인지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기념관 보다는 과오를 보여주는 전시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용돈을 많이 주면서 그 돈은

내가 강도 짓 한 돈이라고 꼭 일러 주어야하는 절대성 필요가 있을까 잠시 생각 해본다

 

내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1974년 5월20일 대통령 박정희

 

 

 

기념관입구에 들어서면 박정희 대통령의 대형 사진이 손님을 반긴다

 

그가 통치하던 1961년 부터 1979년 까지의 업적을 년도별로 잘 정리해 놓았다

전시실 입구의 너른홀 한쪽 벽면에는 박 대통령의 역사가 연도별로 빼곡하게 정리돼 있는데

몇년도 몇월에 무엇을 선언하고 무엇을 발표했는지 연도별, 월별로 적어 놓았다.

강대국과 나란히 하는 지금의 우리나라 경제산업 발전과 국민의 기초 생활 수준을 향상시킨 그의 업적을

지나간 과거에 너무 침착하다 보면 지하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정말 서운해 하지 않을까?

 

그가 이루고저 했던 조국 근대화의 꿈을 실현 시키기 위해서 노심초사 하였고 그의 일생에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라고 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혹여 정권이 바꾸게 되면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그가 선택한 게 유신독재 !

정당 할 수는 없지만 차선책이 아니었나?     

 

우리나라의 국민성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유익의 중심으로  그러다 보니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게 되고

그래서 오죽하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다 나왔을까마는  

이젠 실정을 다 묻어 버리고 업적을 기리고 통치철학을 연구하여 전세계 으뜸가는 국가 건설을 했으면 한다.

 

조국 근대화와 경제건설   

 

전시실은 3개의 전시실로 나뉘어젔다

 

 

4.19 혁명후 시위와 혼란으로 세계은행 가맹국중 101번째 빈국으로서 가난에시달려 퇴보와 좌절이 있었다

 

 

제1전시실에는 5·16 군사 쿠데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전시물을 설치해 놓았다.       
“3·15 부정선거에 의한 4·19 혁명으로 인한 자유당 정권의 붕괴와 이어진 민주당 정권의 무능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의 정풍과 정군이 절실히 요구되었음. 당시의 모든 정세와 환경이

혁명이 생길 수 있는 요인을 유발함. 윤보선 대통령은 혁명 후 기자 회견시 올 것이 온 것’이라고 말함.”

 

 

2전시실에서는 어떻게 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했는지 여론의 반대와 차관 도입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1968년 2월 착공해 1970년 7월 준공했다고 써 있었는데 특히 건설에 대한 대통령의 꼼곰한 친필 메모도

전시관속에 있었으며 농촌 가옥등을 현대식 집으로 바뀌었다고 영화세트장처럼 소개했다
새마을 운동 관련 각종 전시물 등 다양한 볼거리를 꽤 풍부하게 전시해 놓았다.

 

3전시실에는 ‘인간 박정희’ 라는 주제로  그가 사용하던 선글라스, 도장, 메모철과 같은 유품 등이 전시돼 있고 특히 

그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서 마지막 사용한 가위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박정희 기념관은 우리나라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 볼수 있도록 다양한 볼거리들을 제공하고 있다

 

 

어느 외국 대학에서 명예 博士 학위를 주기로 했다는 보고를 하니 朴大統領은

" 博士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朴 大統領은 18년간 재임했으나

그 흔한 명예 博士 학위가 하나도 없으며 號를 쓴 적이 없다고 한다

당시 고령 朴씨 문중에서 호를 지어 올린적이 있는데 朴大統領은 "朴正熙란 이름 석자로 충분하다"고 했다.

 

 

 당시 경제의 기조를 봉제와 가발로 시작을 하였다

당시 구로공단에는 주로 가발 공장과 봉제공장이 있었고

 

그리고 이어서 구미에 전자공단이 들어섰다.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이념을 조금은 이해하려는 사람들 보다 아직도 반대의 사람들이 더 많아서 인지

국가 차원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기념사업은 여전히 미흡하다

 

 

시골에 낙후된 재래식 화장실 모습.

 

 

아내를 총탄에 잃었고 본인도 불행한 종지부를 마첬기에 인간 박정희를 생각해 보면  그의 인생도

참 지질이도 福이 없다고 생각한다.

욕심이 과했을까?

그 욕심은 국민을 위한 욕심이었을까 아니면 자기영달을 위한 욕심 이었을까?

 

 

과연 그 자신이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인지 그는 분명히 알고 있을까?

조국을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시대적 요구라고 변명할까?

그의 정치철학과 인생은 어떤 것으로도 설명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결국 그를 따라 다니는 여러가지 부정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평생을 조국근 대화에 바첬지만 역사적으로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니 본인 스스로가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당시 혁명공약과 국민교욱헌장을 외웠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것을 기억할 것이다

국민 각자의 체질개선을 위해서 시행했던 것이다

 

 

 

 

박정희대통형의 부정적 평가는 아직도 현재 진행중이기에 나는 그를 '측은지심으로 동정' 한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이 음악을 선물한다.  2012. 2. 22 kns

 

 

                                                                                                                         이 음악은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역사에게....

 

  

박정희 기념관 찾아가는 방법

 

기념관에는 50여대의 무료 주차 시설이 되어 있으면 현재 관람은 무료이며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이 

큰길 하나로 인접해 있어서 무엇이 전시되어 있나하고 호기심에 많은 사람들이 다녀 갈 것 같다

개관시간은 아침 10시 부터 오후 5시이고 월요일은 휴관이다

 

관련글 링크 =>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ontentsView.do?blogid=03Ou5&articleno=16058486&looping=0&longOpen=

'기행 > 역사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양왕릉  (0) 2012.05.26
연산군 금표비  (0) 2012.04.22
운현궁의 봄  (0) 2011.11.30
상오리 7층석탑  (0) 2011.11.27
소현세자의 손자 임성군의 묘   (0) 2011.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