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금표비 솔새김남식
연산군의 유흥지인 고양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하여 세운 금표비로
무단으로 들어올 경우 처벌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금표비는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금천군 이변의 묘역 안에서 발견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의 크기는 높이 1.38m, 폭 0.54m, 두께 22.5cm이다.
이 비석은 금석문으로 희귀할 뿐만 아니라 문헌의 사실을 고증해주는 귀중한 예이다.
국가의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놀이터로 삼기 위해서이다
이곳이 한양에서 가깝기도 하지만 교통이 편리해서 사냥터로 삼기에 무난했던 모양이다.
많은 고을을 제쳐두고 이 마을이 선정되었으니 말이다.
주변 여러 곳에 금표비를 세워 두었는데 이것만 발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연산군의 유흥지인 고양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하여 세운 금표비로
무단으로 들어올 경우 처벌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금표비는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금천군 이변의 묘역 안에서 발견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의 크기는 높이 1.38m, 폭 0.54m, 두께 22.5cm이다.
이 비석은 금석문으로 희귀할 뿐만 아니라 문헌의 사실을 고증해주는 귀중한 예이다
본래 금표란 조선시대에 군사훈련이나 왕이 사냥을 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백성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지역을 말한다.
그러나 연산군 10년 8월 연산군은 금표를 도성 밖 30리로 확장해
경기도 일원의 고양, 광주, 과천 등지에 살던 백성들이 터전을 잃는 사상 초유의 명을 내린다.
민가를 허물고 그 입구마다 금표비를 세워 백성들의 출입을 금지했다.
그리고 금표지역 내로 들어 온 백성들은 현장에서 처형되거나 효수형에 처해져 금표는 곧 백성에게 죽음의 땅 이었다.
연산 12년, 말년 횡포 때에는 도성 밖 100리로 넓혀져
김포, 의정부, 하남시 일대는 물론 서쪽으로는 인천 앞바다까지가 모두 금표지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