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양왕릉(高麗恭讓王陵,사적제191호) 정리 / 솔새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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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 마지막 34대 공양왕(1345~1394, 재위1389∼1392년)의 왕릉은 삼척과 고양시 두곳에 있으며
아직도 그 진의는 서로 다른 의견을 하고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71호인 삼척 공양왕릉에는 왕자와 시녀의 무덤이 함께 있고,
사적 제191호인 고양시의 왕릉엔 공양왕과 왕비의 무덤이 있는데 삼척의 릉은 석조물이 없고 민간에 의해 전승돼 온 반면
고양의 왕릉은 석조물이 있고 조선왕조가 공식으로 인정한 것이 다르다.
그래서 하나는 기념물이고 하나는 사적이다
고양시 원당동 공양왕릉으로 가는 시멘트 포장길 좌우로 얕은 구릉이 북쪽으로 길게 뻗어 있고 구렁이 같은 긴 능선
우거진 송림 사이로 무수한 무덤들이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선왕조 실록에 의하면,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은 1392년 7월 이성계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그해 8월 공양군으로 강등된 채 강원도 원주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왕과 왕자 3부자를 간성으로 옮겼으며
역시 불안하여 태조 3년(1394) 3월 14일에 3부자를 삼척군 근덕면 궁촌리로 귀양지를 옮긴다
그러나 삼척 울진지역의 인사들이 공양왕 복위운동을 벌이고자 고려의 유생들과 군사들이 각지에서
궁촌리로 모여 들었고, 그 세력은 점점 커졌으나 거사를 일으키기 전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공양왕은 삼척으로 유배온지 한달 뒤인 4월 17일 왕명을 받든 사형집행 파견관은 교살(絞殺) 즉
목을 졸라 죽였고, 처형 장소는 근덕면 궁촌리 입구의 살해재였다. 문제는 사형 집행후 시신을 어디에
묻었으며 과연 어느 것이 실묘일까 세간에 궁금이였다
문화재 당국은 세종실록 기록에 근거하여 고양시에 있는 고릉을 공양왕릉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즉 세종 3년(1421) 1월 공양왕의 왕녀가 임금에게 상소하여 아버지를 공양왕으로 어머니를 왕비로 추봉하고 공양왕릉을 정릉(定陵)으로 정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러나 공양왕을 해친 자들이 살해했다는 증거로 목을 잘라가 이성계에게 보인 뒤에 고양에 묻고 몸은 삼척에 남겨둔 것이라는 주장과, 공양왕이 삼척에서 죽어 묻혀 있다가 태종때 복위가 되자 고양으로 이장하면서 삼척의 봉분은 그대로 남겨 두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공양왕릉 제례는 고양지역 유림과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매년 10월 25일 고릉제를 열고 있다.
1389년 이성계등에 의해 창왕이 폐위되자 공양왕은 이성계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 후 이성계 일파의
압력으로 우왕과 창왕을 죽였으며 사회 전반에 걸친 제도 개편을 단행했으나, 이는 신진들이 세력기반 확립을 위한 개혁이었으며 또한 1391년 정몽주를 살해한 뒤, ·정도전은 관제를 6조로 개편하는등 세력을 확장하고 남은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1392년에 폐위되어 공양군으로 강등되었다.
한편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시조지만 고려국에서는 32대 우왕 33대 창왕 34대 공양왕을 이성계가 왕을
마음대로 세우고 폐위 시키고 그리고 屍害까지 하는 악행을 한뒤에 이성계가 스스로 고려국 35대 마지막 왕으로 등극하게 되며
또한 자기 세력에 걸림돌인 최영장군과 정몽주까지 屍咳하게 되는 결국은 성공한 구데타이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른것은 1389년 음력 11월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후 약 1년 반 정도로 이성계는 1392년 음력 7월 공양왕을
내쫓고 공민왕의 계비인 정비 안씨의 명을 받아 새 국왕에 즉위했다. 이는 조선을 개국하기 전까지 이성계는 사실
고려의 국왕이었으며 백성의 눈을 속이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였다.
공양왕 릉은 입구 도로에서 바라 본 모습이지만 너무나 조촐했고 군데군데 묘가 파인 것으로 보아서 문중에서도 관리가 않되는 것 같이 느꼈으며 이성계에 의하여 패망한 고려를 알리려는 흔적들이 있을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 보아도 그런 흔적은 없었으며
그나마 문화재 지정으로 관리 되는것 외는 모든것이 너무나도 조촐하였다.
더구나 별도의 편의 시설도 없으며 문화재에서 우선 울타리 쳐 놓아서 들어 갈수 없도록 되어 있으며 전설에 있듯이 묘지를
지키라고 삽살개상이 놓여 있으나 조철하게만 느껴지는 고려 공양왕릉은 패배자의 설움 또한 느낄수가 있었다.
전설이 담긴 연못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조선 태조에게 왕위를 빼앗기도 도성인 개성에서 도망쳐 이곳 견달산 아래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룰어 사방이 어두워졌다. 두려움과 배고픔으로 지쳐있는 왕의 일행에게 건너편 골짜기에서 한가다 불빛이 보여 찾아가 보니 마침 작은 절이 있어 하룻밤을 묵고자 부탁 하였다.
그러나 이미 불교의 나라 고려는 멸망되고 새로운 유교의 나라 조선이 창건 되었으니 절에서 머물기는 어렵게 되었고 인근의 대궐고개 다락골 누각에 피신하게 되었다. 이후 남몰래 스님들이 밥을 날라 왕에게 드렸는대 이러한 이유로 이마을의 이름이 밥 절 즉 식사동[食寺洞]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공양왕과 왕비가 보이지 않아 스님들과 왕씨 일행이 온산을 뒤지며 왕을 찾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다만 공양왕과 왕비가 귀여워 하던 삽살개만이 골짜기의 적은 연못 속을 향해 겨속 짖고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연못을 가세히 보니 사람의 형상이 보였고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자 그안에 왕과 왕비가 편안한
자세로 죽어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두 분의 시신을 정성들여 모셔 연못 뒤 양지 바른 곳에 장례를 치루고
능을 지키기 위해 능앞에 삽살개 모양의 석물을 세워 지키게 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설로 인해 인근에 식사동 뿐만 아니라. 어침이. 대궐고개. 왕능골. 등 여러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
고려사나 왕조실록과 같은 정서에는 공양왕이 강원도 삼척시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고양사람들의
공양왕에 대한 애절함이 이와 같은 전설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에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을 길이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고양시에서 공양왕릉 정비사업을 하면서
연못을 좀더 깊고 넒게 보수 하였다
묘지앞에는 비석. 석상. 장명등. 양쪽에 석인이 2쌍. 석호등과 비석에는 "고려공양왕고릉" [高麗恭讓王高陵] 이 새겨져 있다.
왕릉뒤에는 여러개의 묘가 더 있는데 보아하니 조선시대에 벼슬 아치를 지낸 사람들이 분명한데 왜 하필
왕릉 뒷편으로 묘지를 조성했는지 알 수가 없으나 개성 왕씨들은 그때 그것을 왜 막지 못 했을까?
왕릉 위에는 어느 묘도 써서는 안되는 불가 항목인데 아마도 패배자의 왕릉이기에 가능 했던게 아닐까 생각 해보며 이들은 마치 멸망한 고려의 왕을 감시하듯이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 특이 하다면 정말 특이하다.
삼척 공양왕름
자료.강원도 고성군과, 삼척문화원 2012.05.26 정리 솔새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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