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로 쓰인 숭례문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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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문의 현판은 모두 가로로 쓰여 있지만, 숭례문만은 세로로 쓰여 있다.
이것은 ‘불의 산’이라 일컬어지는 한양 남쪽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관악산의 화기가 강해 경복궁에 화재가 나기 쉬운데, 현판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리면
성문 밑을 막고 누르는 셈이 되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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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현판의 글씨는 누가 썼을까?
현판의 글씨가 과연 누구의 필적이냐에 대한 논란이 많았지만
그 주인공은 태종의 맏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기도 했던 양녕대군의 작품이라는 것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국보 제1호 서울 숭례문
조선시대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교통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 헐릴 위기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한양으로 진입할 때 두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 문을 통해 입성했다는 이유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우리에겐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그렇게 전승기념물의 의미로 보존되었으나 이와 관련이 없는 문은
사정없이 헐어버린 것이다.
그들이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헐고 개선문을 세우지 않은 것만도 참 다행스런 일이다.
왜 국보 1호인가.
숭례문은 국보 1호, 흥인지문은 보물 1호다.
그것이 그것 같은데 왜 어떤 기준으로 국보와 보물을 구분하는가?
보물은 역사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일반적인 것이고 국보는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보물급 중에서 보존상태가 양호하거나 역사성과 문화사적으로 대표할 만한 것을 국보로 지정한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같은 건축물인데도 숭례문은 역사가 더 오래되고 문화사적으로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국보이다.
그에 비해 흥인지문은 후대에 보완하고 건축 기술도 숭례문보다 후대의 것이라서 보물로 분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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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이란 현액을 세로로 쓴 이유
1. 조선은 인의예지의 이념 위에 세워진 국가이고, 숭례문은 그 중 '예'를 상징한다.
2.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하여, 숭(崇)과 례(禮)라는 모두 한학에서 불에 해당하는 글자들을
남쪽에 두어, 관악산의 화기에 맞불을 놓아, 국가적으로 좋지 않은 일을 막는다.
3. 현판이 세로로 쓰여진 까닭은, 숭과 례라고 하는 불을 상징하는 글자들이 더욱 더 활활
잘 타오르도록 하여, 2번의 목적을 더 잘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 초기 도읍 터를 정하는 과정에 있었던 무학(無學)대사와 정도전(鄭道傳)의 의견 대립이 있었다
관악산을 정남향으로 바라보고 궁궐을 세우면, 관악산의 살기가 궁성(宮城)을 위압하여
국가가 평안치 않다는 무학대사의 주장이 먼저 있었다.
화기는 화재와 병란을 암시한다.
그러자 남쪽에 둘리어진 큰 강물인 한강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아내니
관악산을 바라보며 정남향으로 궁궐을 세워도 무방하다는 정도전의 주장이 대두하였다.
결국, 궁궐은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관악산을 바라보며 정남향을 하고 세워졌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한양에정도(定都)한 이후로 도성에는 왕자의 난과 화재가 연이었다.
그래서 풍수설에 따라 불의 산인 관악산과 삼성산의 불기를 끊는다는 비보책(裨補策)으로
서울 남대문 바로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인공적으로 조성하였다
연못뿐만이 아니다. 남대문의 현판에 숭례문(崇禮門)이란 글씨도 결국 세로로 쓰여지게 되었다.
현액(懸額)의 글씨는 가로로 쓰는 것이 관례이다.
숭례문이란 현액을 세로로 쓴 것은
관악산과 삼성산의 화기가 도성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에서였다.
숭(崇)은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본뜬 상형문자이다.
그리고 예(禮)란 글자를 오행(五行)으로 따져보면, 이는 화(火)에 속한다.
화를 오방(五方)으로 따지면 남(南)에 해당한다.
따라서 남쪽에 불을 지른다는 뜻이 되니, 이는 맞불 작전인 셈이다.
그리고 모양으로 보아, 숭례(崇禮)라는 글자를 세로로 써야 불이 더 잘 타오를 수 있다.
그래서 활활 타오르는 숭례문의 화기로 불산에서 옮겨오는 불을 막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세로로 쓴 숭례문의 현판이 정도전의 솜씨라는 점이다.
결국은 정도전이 무학대사에게 지고만 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