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
위치 - 서울 은평구 진관동 428번지 지축으로 가는 지하철3호선 선로 옆
영조(재위 1725~1776)가 옛 일을 회상하면서 친히 글을 짓고 써서 건립한 비로
1978년 12월 18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금암(구파발)은 의주(義州)로 가는 역참(驛站)이었으나
참사는 없고 비만 남아있다.
정조는 1781년 8월 서오릉에 있는 증조할아버지인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금암에 이르러을때 할아버지 영조가 남긴 자취를 둘러 보고
경기도 관찰사에게 오랜 세월에 쓰러진 참사를 새로 짓고
빈터를 닦아 비를 세우도록 했다.
비석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세워져 있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지붕돌이 얹혀있다.
비문 말미에 “소자가 왕위를 이은 지 5년째 되는 신축년 가을 팔월초 길일에 삼가 짓고 써서 15일에 세우다”
(小子嗣位之五年辛丑八月初吉日 敬製敬書 十五日立)라고 했듯이 정조가 직접 짓고 쓴 것이다.
당시 그 사연은 이러하다
영조가 연잉군((延礽君)으로 있었을 때인 경종 원년(1721) 8월 15일 부친 숙종의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농사(農舍)에서 닷새 동안 머물렀다.
장차 대궐로 돌아가 기거하기 위해 말 한 필과 시동(侍童) 두 명을 데리고
저녁에 출발 했는데
덕수천(德水川)에 이르러 밤이 깊고 불도 없어 금암(黔巖)의 참사(站舍)에서 쉬게 되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소를 몰고 앞내를 건너고 있었는데
뒤 따르던 사람이 도둑이라고 알렸다.
영조는 이를 보고 안타까워하며 참장(站將) 이성신(李聖臣)에게
“작년의 흉년으로 기한(飢寒)이 닥친 것이다. 그러나 농부에게 소가 없으면 무엇으로 밭을 갈겠는가?
참장이 비록 낮은 관리이나 그 또한 직책이니 그대가 처리하라” 고 하고
참장은 소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도적을 관청에 알리지 않았다.
그뒤 1756년 영조가 왕위에 올라 명릉에 거둥하는 차에
그 참사에서 다시 머무르게 되었다,
이에 이 성신을 찾았으나 이미 사망한 뒤였으므로 그의 아들 이인량(李寅亮)을 찾아
활과 화살을 하사하고
아비의 옛 관직을 주어 세습하도록 했다는 이야기이다.
비 위치에서 50미터 지점에 하마비를 세워놓고
이곳을 지나칠때는 말에서 내려 예를 하라는 하마비가 설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