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마담 통증 김남식
초등학교 3학년 4학년을 지나는 2년간은 몸에서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래서 아픔의 악몽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우등상도 탔다. 그러던 5학년 때 아팠던 다리의 무릎 아래쪽에 메추리알처럼 붉게 타원형으로 올라 있었다. 그것이 발견되기 까지는 전혀 몰랐다. 어느 날 교실에서 친구들과 장난 하다가 잘못 부딪히면 무척 아팠다.
그래서 바지를 걷어보니 많이 부어올랐다. 사실 이전에 조금 부어올랐을 때는 고관절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 했다. 걱정은 되었지만 누구에게 애기도 하지 못 하고 혼자 만져 보기도 하고 물로 씻어 보기도 했다,
잉크를 발라 보기도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옛날에는 종기가 나면 잉크를 바르기도 했다. 당시 식구들에게 아프다고 이야기 할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혼자 걱정하며 근심으로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학교에서 청소 하다가 책상에 부딪쳐 아파서 주저앉고 말았다. 체육시간에 팬티를 입고 달리기 하던 중 담임 선생님이 내게 다가 와서 다리를 만져 본다.
“아프지 않니”
“조금 아파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다리 아파서 고생 많이 했잖니 혹 그것인지 모르니 어머니께 말씀 드려라”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아팠던 다리 때문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되었다. 집에 오는 길 괴로우나 슬플 때나 언제나 찾아오던 산등성이에서 홀로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책가방을 배게 삼아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있어도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집에 오니 몸이 나른하고 졸음이 왔다. 밥도 먹지 않고 스스로 그냥 잠이 들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어머니가 깨웠다.
“너 어디 아프니”
“아니요”
“그런데 왜 저녁도 안 먹고 일찍 자 누구하고 싸웠니”
“아뇨 싸우긴 누구하고 싸워 근데 엄마 나 아파”
“어디가”
어머니는 깜짝 놀란다. 어디 아프다고 하면 늘 수심이 가득했던 어머니였다.
“다리가 이상해”
어머니는 내 다리를 보고 이리저리 만져 보고 할 말을 잊은 것 같다. 매일같이 나 때문에 아버지와 싸워서 말을 못했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울고 있고 큰 형이 홍의사에게 왕진을 요청했다.
“전에 궁둥이 다쳤을 때 완전히 치료하지 않아서 발생되는 병으로 나쁜 피가 돌아다니면서
일정한 장소 없이 여기저기 새알같이 튀어 나오는 일종의 종양입니다. 사혈(死血) 즉 죽은피가 고름을 만드는 병인데 건드렸다가 어찌될지 모르니까 청주로 가세요.”
홍의사가 진찰을 끝내고 돌아갔다. 식구들도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어머니 긴 한숨소리가 어린 환자에 가슴을 더욱 슬프게 하였다. 다음날 학교도 갈 수 없고 방구석에 앉아 있었다.
“청주 병원에 가게 돈 오백원만 내 놔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아버지는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어머니의 다시 재촉이 시작되었다.
“애 병신 만들 작정인지 그냥 내 버려 둘 거요”
아버지는 마지못해 쌈지 주머니에서 오백원을 주는 것 같았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청주를 가기 위해 어머니와 집을 나섰다. 낙엽이 뒹구는 늦가을이라 바람이 차가웠다. 금방 눈이라도 올 것 같은 으슥한 날씨 차안에서는 어머니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내수에서 기차를 타고 청주에 도착하니 올해 첫 눈발이 거리를 날리고 있다. 신병원에 들려서 진찰을 하였다.
“아 여기 병원차트 있네요, 엑스레이 검진 결과 뼈와 뼈끼리 어긋나서 붙지 않았네요. 놀랜 피가 엉겨서 돌아다니다가 계란 모양으로 돌출되어 종양이 생긴 것으로 주마담 이라고 해요. 곧 수술해야 겠어요.”
의사는 상처를 약품으로 깨끗이 씻고 주사기로 마취 하더니 어느새 칼로 살을 째면서 종지에 피고름을 쏟아 내고 있었다. 아픔을 참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선생님 수고 하셨어요. 수술비는 얼마예요?”
“한 3주 정도 치료해야 합니다. 내일도 병원에 오세요. 수술비는 8백원 입니다.”
수술비를 내고 어머니와 병원을 나섰다. 금방 겨울이 다가 온 것처럼 추위를 느낄 수 있었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청주에 와서 수술을 했으니, 몸이 축 늘어지고 머리가 핑 돌아서 걸을 수가 없었고 수술한 다리가 묵직하고 쑤시는 것 같아서 작은형이 살고 있는 사직동까지 걸어 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 속주머니를 다 털어도 한 사람만 타고 갈 수 있는 차비 10원 밖에 없어서 두 사람이 타고 갈 수 있도록 버스 차장에게 부탁 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할 수 없이 사직동까지 절룩거리며 한 시간을 넘게 걸어서 형 집에 도착하니 사방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리 수술하고 오는 길이다. 니 시동생 저녁 차려주라”
방으로 들어서며 어머니는 형수에게 주문한다. 어머니와 형 그리고 형수는 오래 동안 무슨 애기인지 하고 있었고 피곤해서 일찍 잠 들었다. 다음날 시골에서 큰형이 올라 와서 어머니와 같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형은 바쁘다며 곧장 시골로 내려가고 어머니와 또 걸어서 사직동 작은 형 집으로 왔다.
“형수가 싫어하는 눈치지만 할 수 없다. 고생 되더라도 며칠만 여기서 병원에 다니자”
그래서 일주일 사직동 형 집에서 병원을 다녔다. 이제 3일에 한번 정도 병원에 나오면 된다고 해서 집에 오니 가족들에게서 찬바람이 스치고 있었다. 빠듯한 살림에 환자가 생겨서 돈을 쓴다는 게 죄인이 되었다. 시골서 농산물을 장에 내다 팔지 않으면 돈 구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가끔은 어머니가 남에 밭일을 해 주고 얻은 품삯으로 병원에 다녔다. 하지만 치료비 때문에 병원 간다고 말을 못하고 집에서 대충 치료 했더니 상처가 다행히 아물고 말았다. 그러나 학교는 3주 결석을 하였다. 그 후 아무 탈 없이 그러나 계속해서 다시 또 재발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 어디선가 어머니가 술을 드시고 와서 걱정과 한탄으로 늦자식이 생겨 이렇게 속을 편하게 해 주지 못한다고 한풀이를 하고 있다. 옆에 있는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기쁘게 해 주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느덧 5학년 마치고 6학년으로 올라왔고 중학교를 가기위해서 늦게 까지 공부하였다. 다리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성적이 좋은 나와 몇 사람이 청주중학교에 가기로 선생님과 약속을 하고 어머니에게 말 했지만
“청주로 가면 돈도 많이 드는데 누가 너를 보내주니 내수 중학교로 가”
아버지를 비롯하여 가족들은 중학교를 가지 않았으면 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중학교 보낼 형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학교 가지 않으면 집에서 농사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담임선생에게 어렵지만 집에 와서 애기 좀 해 달라고 졸랐다. 몸이 약한 내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도 공부 시켜서 하다못해 선생이라도 시켜주면 고마울 뿐이었다. 그러나 식구들은 아무 것도 내게 해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당신들이 살아가는 게 문제이지 내 장래에 대하여는 안중에도 없던 것이다.
담임선생님이 집에 다녀 간 뒤 청주로 결정을 했다. 만약 입학시험에 떨어지면 여기서 끝이다. 집에서 농사하라고 할지 모르는 일이다. 중학교 진학 문제로 식구들의 불화가 있었다.
형편도 어려운데 굳이 청주로 가야 하느냐고 했다. 합격을 해도 입학금을 집에서 해 줄지도 걱정 이었다. 또한 막상 입학원서를 냈지만 합격이 될까하는 걱정도 되었다. 방심은 손해를 가저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입시 공부는 게을리 하지를 않았다. 선생님도 내게 응원을 보냈고 합격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청주중학교 가는 것을 고집했다. 청주로 입학시험 보러 떠나는 날 어머니가 따라 나서며 신신당부를 한다. 언제 부터인지 어머니는 나를 보면 곧 잘 우셨다. 나 때문에 이런저런 맘고생이 많아서이다.
“엄마 꼭 합격을 할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하얗게 내렸다. 오늘은 학교에 가서 수험표 받는 날 처음으로 청주 중학교에 가서 135번의 수험표를 받았다. 담임선생님과 시골서 큰형도 왔고 교감 선생님도 왔다. 침착하게 답인지 작성을 잘 해 달라고 어머님도 학교에 나와서 격려 해 주었다. 작은 형도 나와서 점심을 사 주었다. 식구들은 처음에는 중학교에 안 갔으면 했는데 그래도 시험 보는 날은 모두가 걱정 해 주고 있으니 여간 고마웠다.
몸이 약해서 체육점수는 기본 점수만 얻었다. 그리고 며칠 후 라디오 방송에서 합격자 발표가 있었지만 그만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합격 했다고 작은형이 전해 주며 축하한다고 한다. 합격을 좀 더 확실하게 알기 위해 아침을 먹고 형과 학교에 도착하니 담임선생님도 벌써 와 있었다.
하룻밤을 재워 준 김기순 선생님 댁을 찾아 가니 축하 한다며 점심을 먹고 가라는 것을 신이 나서 바로 시골집으로 내려 왔다. 식구들은 결혼 잔치에 갔다고 해서 곧장 그 곳으로 갔다. 마당 한쪽 모퉁이에 계시던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니 반가운 미소 지으시며 정말 좋아하는 모습을 정말 그때 처음 본 것 같다.
“애가 이번에 청중에 합격했어. 인사해라.”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였다. 담임선생님이 무척 반가워하며 좋아 했고 저녁에 큰 형이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술 한 잔하고 늦게 가셨다. 모처럼 형과 선생님이 술을 하고 있으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다음날 형과 같이 청주에 가서 입학금 3701원을 충북은행에 납부하고 학교에 가서 모자, 노트, 책가방, 학용품등 입학에 필요한 것들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 왔다. 며칠 후 서울서 누나와 매형의 축하 전보가 도착 하였다. 보내 준 돈으로 입학금을 잘 냈다고 서울에 편지를 하였다.
서울에서 매형이 입학금 1,000원을 보내 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입학금 때문에 내 속이 까맣게 탓을 지도 모른다. 이제 저 넓은 곳을 향해서 더 높은 곳을 가기 위해서 항상 열심히 노력하라는 담임선생님 말씀이었다. 생각 해 보면 초등학교 시절은 여러 번 아프면서 가족들에게 걱정과 미움을 받았지만 이젠 정말 건강해야 했다. 소년 시절을 벗어나 한걸음 도약하고 어른이 되기 위해 넓은 곳으로 이제 나가자. 정말 하루가 좋은 일이 많도록 기도를 하였다. 학교가 있는 청주까지 열차통학을 하였다.
아침에 기차가 연착하면 한 시간 수업이 끝나서 교실에 들어가기도 했고 저녁에 집에 오는 것도 연착을 자주하여 밤늦게 오는 날이 더 많았다.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고통이 끝나고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리가 다시 아파 올 것 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 하였다. 중학교 일학년 4월의 봄 이었다. 무언가 내 몸에 이상함을 느꼈을 때는 몸이 나른하고 기운이 없고 아무 일도 하기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벅지에 무언가 묵직하게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바지를 내리고 확인해 보니 허벅지 살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고관절이 있는 바로 그곳 이었다. 아프다는 생각도 하지 못 한 채 마음은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다. 상처가 빨갛게 부어오르려고 그동안 몸이 나른하고 힘이 없었던 것 같았다. 식구들에게 이 일을 또 어떻게 알려야 좋을지 몰랐다. 일단 집에는 내색 하지 않기로 하고 절뚝거리지 않고 조심히 걸었다.
식구들에게 얼마나 미안 했으면 며칠간 혼자서 고민하며 날마다 걱정 했지만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걸음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알려 주었다. 토요일 오후 집에 오는 길에 작은집 사촌 형수를 만났다. 읍내 장에 갔다 오는 사람들과 어울려 집에 가고 있었다.
“도련님, 왜 다리를 절어요.”
“아닌데요.”
“다리를 저는 것 같은데, 또 아픈 게 아닌지 얼른 약 먹어요.”
“새 운동화 때문에 물집이 생겨서 그래요”
마침 그때 새 운동화를 신어서 다리가 아프다고 핑계를 하며 위기를 모면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주위 사람을 속일 수는 없었다.
“엄마 또 다리가 아파”
“어디가 또”
또 아프다는 이야기에 이젠 어머니도 화를 내며 역정을 한다. 아픈 다리를 보여 주는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픈 곳을 이리저리 만져 보며 긴 한숨을 쉬며 걱정했다. 혼자 방에 누워서 천정을 멍하니 바라보며 바보같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고 학교도 가지 못했다. 두 시간 지나서 어머니와 홍의사가 왕진을 왔다.
“그냥은 안 되겠어요. 수술을 해야 되겠어요.”
“집안에 초상이 나서 청주에 못 가겠는데 그냥 여기서 해 주세요”
작은 형수에게 부탁하고 어머니는 상가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수술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형수 등에 업혀서 마을에 있는 홍의사 집으로 갔다. 방바닥에 엎드린 채 내 허벅지 다리 위를 칼로 째는 수술이 시작 되었다. 내 슬픔은 강물처럼 밀려오고 있었고 아파서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방바닥을 치며 아프다고 몸부림 하는데 잡아 주는 사람도 없이 형수는 멀리서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얼굴엔 눈물로 범벅 되었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흰죽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름 많이 나오지”
아침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몹시 배가 고팠다. 한참 자랄 어린 나이에 무엇이 이렇게 되었을까 혼자 속상해 해도 소용이 없었다, 제발 이런 고통이 없도록 해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학교에서 일주일이 지나자 수업료 납기가 지났다는 편지가 집으로 왔다. 어렵게 중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수업료가 문제였다.
다음날 학교에 갔다. 이은호 담인 선생님에게 다리를 수술 했다고 하며 며칠 간 휴학계를 내고 집으로 왔다. 모든 게 귀찮아서 그냥 집에 누워있었다. 상처가 어느 정도 낳아지게 되자 다리에 붕대를 칭칭 매고 학교에 나갔다. 공부 때문에 학교를 오래 도록 결석 할 수가 없었다.
약 한달 이상 치료 했지만 상처는 보기 흉하고 상처가 움푹 깊이 패어서 쑥 들어가서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때의 상처는 지금까지 그대로 살 속으로 깊은 상처가 남아 있다. 두 번째 재발을 그렇게 대충 수술해서 그렇게 마무리를 하였다. 가난이 죄가 되었다. 수업료가 밀리면 화장실 청소를 시켰다. 화장실 청소를 한다고 없던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선생님들이 무척 야속했다.
“엄마! 수업료가 몇 달씩 자꾸 밀리면 나중에 한꺼번에 내려면 힘들어요.”
“아버지한테 달래”
퉁명스런 어머니의 대답에 사랑방으로 가서 아버지에게 나오지 않는 말을 겨우 꺼냈다.
“지금 벼가 타 죽고 있는데 돈이 어디 있냐. 학교에 가지마.”
아버지에게 말을 한 것이 잘못이다. 어쩔 수 없이 가족들 눈치를 보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매일 새벽이면 말라가는 논에 물 대라고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마당에서 들려 왔다. 그 당시만 해도 저수지 시절이 부족해서 천수답 다락 논은 가뭄이 계속되면 물 때문에 온가족들이 고생을 해야 했다. 통학 하느라 힘이 부처서 인지 밤에 잘 때면 꿈속에서 가끔 헛소리도 하곤 식은땀으로 이불을 흠뻑 적시곤 했다.
학교에 가면 수업료를 내라하고 집에서는 가족들 눈치를 보고 몸은 아파서 볼품이 없으니 공부를 제대로 할 수도 없었다. 그럴 때면 산등성이에 있는 땔감 짚더미에 묻혀서 추위를 잠시 이기면서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그냥 스스로 잠이 들기고 하였다. 얼마 후에 스스로 잠이 들고 추위를 느낄 때는 이미 밤이 깊어진 뒤였다.
잠에서 깨어나 마을 뒷산을 내려오면 등잔불은 꺼져있고 냉기가 돌며 을씨년스럽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그냥 잠을 자고 배가 고프면 부엌에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는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 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게 내 죄이고 내게 주어진 운명이기에 스스로 마음을 달랬다.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가면 여전히 어머니가 수건으로 머리를 싸 메고 누워있다. 어머니에게 무어라고 말을 해야 되는지 눈치를 살핀다. 그냥 할 말은 없다. 가만히 어머니 옆에 조용히 누웠다.
“엄마 저녁 먹어야지. 미안해요.”
“밥 먹었냐.”
방에 누워서 생각해도 왜 무엇 때문에 내게 이런 고통을 주는지 모르겠다. 좋은 환경에 태어나지 못한 것도 어찌 보면 내 죄이다.
모든 것이 가난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아닌 것 같다.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서로 불신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가 생각해본다. 내가 먹으면 괜찮고 다른 사람이 먹으면 아까운 것이 지배적인 것 일까. 어린 내게는 열심히 공부하는 길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그냥 편안히 자고 싶었다.
미워하는 가족들은 하루가 멀다고 트집을 잡아 언쟁을 하고 있었다. 운명은 각자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자기의 몫 운명의 신은 어떤 이 에게는 후하게 한 몫을 주고 어떤 이 에게는 박한 몫을 줄 수도 있다. 자기의 몫을 살펴보고 좋은 것이 있으면 고맙게 생각하며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삶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며 모든 것을 운명이라 해야 하는지 돌아보았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고 죽는 것 그리고 아픔은 혼자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누가 아프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또 누가 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신에게 자신을 운명을 맡기고 있다.
그 이듬해 중학교 2학년 4월쯤에 반대 쪽 정강이가 다시 또 부어올랐다. 다행히 상처가 길이가 1cm 로 그리 크지를 않았다. 예전처럼 열도 나지 않았고 크게 아프지도 않았다. 어머니와 고민을 하다가 약국에서 이명래 고약을 사서 매일 갈아 붙였다. 그리고 항균작용을 하여 세균성 감염증을 치료하는 테라마이신을 2주정도 먹었다. 천만다행이 그것으로 치료가 간단히 되어서 크게 고생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6개월 후 그해 가을 이번에는 옆구리에 붉은 혹이 또 올라왔다.
이것도 예전처럼 열도 나지 않았고 크게 아프지 않았지만 걱정이 되었다. 이번에는 밀가루와 담배를 피운 뒤 누런 가래침으로 개어서 그것을 상처에 부치고 다녔다. 2주정도 매일 밀가루를 부쳤더니 다행히 상처가 아물었다.
테라마이신 약을 며칠 함께 먹었다. 그런데 왜 자구 이런 게 몸에 생기는지 불안했다. 이후에도 아픔은 여러 번 계속 되었다. 주마담은 나쁜 피가 핏줄을 따라 다니며 여기 저기 새알처럼 불거져 나오기 때문에 매번 그것을 절개해서 고름을 제거해주는 아주 고약한 병이다.
그런데 그 나쁜 피의 잔량이 몸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다시 얼마의 시간이 되면 확장해서 다시 재발 하는 고질병이다. 당시 시골에는 무면허 의사들이 많았다. 그는 6.25전쟁 때 간호보조사로 따라 다니며 배운 의술을 무지한 시골 사람들에게 의료업을 하였다. 그리고 민간요법이 많이 성했다.
그간 주마담 때문에 고양이를 삶아서 먹기도 했고 박쥐 삶은 물도 먹기도 하였다. 또한 말고삐까지 삶아서 그 물을 마시기도 했다. 먹을 때는 정말 역겨워서 속이 매스꺼워 먹기에 여간 어려웠지만 살기 위해서 코를 막고 먹어야 했다. 왜냐면 살기 위해서 이다. 어머니는 어디에서 약효를 듣고서 그런 것을 구해왔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의술은 돈이 들어야 하지만 민간요법은 쉽게 주위에서 구 할 수 있는 것들이기에 선호하게 되었다. 예전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병을 고쳤는지는 모르지만 정확한 약효도 모른 체 막연하게 그걸 먹어서 낳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지금 사람들에게 그걸 먹어라 하면 아마 도망 갈 것이다. 건강이 최대의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