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단편소설

정말보고싶은소녀(完篇)

시인김남식 2014. 7. 21. 17:11

정말 보고싶은 少女    솔새김

 

 

 

 

1.

내게는 정말 보고 싶은 소녀가 오래전부터 가슴 속에 있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신만이 고이 간직한 애틋함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젊은 날 가슴에 묻었던 사람일 것이다. 바쁘게 사느라 삶의 고락을 한시름 놓으려는 순간 잊은 가했는데 잊지 못하고 여러 날 그렸던 때가 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까까머리 중학시절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송재희 내게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해 준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헤어진 뒤 안부가 조금씩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은 삶의 여유가 있을 때였다. 성수동에 있는 세일전자 품질관리차장으로 어느덧 내 나이 마흔을 넘어섰고 가정은 행복했고 얘들도 커 가면서 생활이 윤택 해졌다. 여자의 첫사랑보다 남자의 첫사랑이 더 그리워한다는 말처럼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냥 궁금하였다. 그러나 어디서 사는지 모르기에 잠시 뇌리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헤어 진지 꼭 30년 만에 그녀의 소식을 우연히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바로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기막힐 일이 생겼다. 바로 그녀의 존재를 뜻밖에도 그녀의 남편으로 부터 듣게 되었다. 더구나 그녀의 남편은 나와 같이 세일전자에 근무하는 직장동료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마는 정말 보고 싶은 소녀가 직장 동료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며 내 자존심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내게 사랑을 가르쳐 준 소녀가 직장 동료의 아내라고 하면 누가 그걸 믿을까마는 그러나 꿈과 소설 속 영화 속이 현실에서 실제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가슴속에 오래 간직 했던 여자가 직장 동료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누구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순수했던 첫사랑의 신비는 모두 날아가고 말았다. 그녀의 남편 박동수는 직장 2년 선배로 생산부장 이었다. 업무 특성상 품질을 담당하는 나와 트러블은 좀 있었지만 그리 나쁜 사이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마을 동구 밖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진 뒤 그 후 30년이 지나서 그 사실을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바로 남북이산가족 찾기에서 나왔던 잃어버린 30년 노래처럼 잃어버린 30년 세월을 단숨에 가져다주었다.

바로 19984월 구미 삼성전자로 박동수와 함께 출장을 가던 날이었다. 승용차로 출장을 가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엔 시골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여러 번 출장을 다녀왔지만 오늘은 좀 이야기가 진지했다. 얼마 전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회사 직원들과 박동수가 시골에 다녀갔었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장례식 때 한번 딱 다녀갔던 시골에 대해서 너무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와 다르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서 오늘은 좀 의아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운전을 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마을이 좀 크던데요"

"옛날엔 100여 호가 넘었는데 지금은 70호로 많이 작아졌죠."

"요즘은 도시로 사람들이 나가서 그러죠

고향엔 자주 가세요?”

부모님이 안 계시니 좀 덜 가게 되더라고요.”

! 서곡 초등학교 졸업했지요.”

그럼 송민국 선생님도 잘 알겠네요.”

“.........”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졸업했던 초등학교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서울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미처 물어보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짐짓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수가 심문을 하듯이 이상하게 세세하게 시골이야기를 물어 오고 있었다. 전혀 아무것도 모른 채 박동수의 물음에 빨려 들어갔다.

송민국 교장선생님을 모르세요?”

그분을 어떻게 알아요?”

송민국은 당시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정말 보고 싶은 소녀 송재희 아버지이다. 사전에 어떤 예고나 준비도 없이 뜻밖에 숨겨진 비밀이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 같았다. 뭔가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심문하듯 물어왔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검사가 마치 죄수를 다루듯이 미리 범죄사실을 사전에 조사해서 자백을 받아내려는 느낌 같았다. 다시 박부장이 말을 이어갔다

우리 장인 이예요.”

!”

몇 년도에 초등학교 졸업 했어요.”

"오래돼서 기억이"

"혹시 우리 와이프 송재희를 아는지요.“

"송재희!“

"우리 와이프와 같은 동네 살았다고 하던데"

설마 정말 보고 싶은 소녀 재희가 그 사람에 와이프인 줄 정말 전혀 몰랐다. 내 귀를 의심하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누구요

우리 와이프 송재희

가슴이 떨리고 멍한 모습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어떻게 이것을 풀어야 현명할지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으로 그에게 황당한 말을 들어야 했지만 정말 이런 일이 정말 이런 인연도 있을까 잠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어떻게 그걸 알았어요."

처음에 그의 말을 의심했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면서도 순간적으로 뭔가 느낌이 다가 왔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

"김차장 어머님 돌아 가셨을 때 조문 갔다 와서 얘길 했더니 동네를 알고 있던데요."

"누가요

우리 와이프가

나는 순간 아질한 느낌에 뭔가 퍼뜩 머리를 스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사실로 확인 되는 순간 대답 대신 동수에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반응을 테스트 하는 것 같았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순간 당황 했다. 그리고 운전대를 잡은 내손이 흔들리면서 삐익 하며 차가 고속도로에서 비틀 거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갑자기 위험한 사고의 순간 이었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생각해 보니 모든 게 사실로 확인 되는 순간 대답 대신 하마 트면 고속도로에서 자동차 대형 사고를 낼 뻔 했다.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그녀가 다른 사람도 아닌 동수의 마누라라니? 시팔 도대체 이럴 수가 있나'

속으로 나도 모르게 소름 치게 욕을 퍼부었다. 자동차는 큰 탄력을 받으면서 움찔하더니 다행히 자기 차선으로 들어와서 아무 사고 없이 달리고 있었다. 가슴에 요동을 진정하려고 잠시 대화가 중단 되었다. 그럴 리 없을 거야 하면서도 혹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고 대화를 이어갔지만 모든 게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자동차의 핸들이 흔들릴 정도로 난 무척 당황 했다. 지금 와서 우리의 관계를 이야기 할 필요는 없었다. 세월이 지난 뒤에 그것이 첫사랑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가슴앓이를 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잊혀 진 사람이었다. 이성에 눈을 뜨던 사춘기 시절에 처음으로 만난 첫 여자였고 이성을 느꼈던 정말 보고 싶은 소녀였지만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술 한잔하면 가끔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을 뿐이다.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결혼해서 각자의 길을 가고 있기에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출장 가는 길에 박동수는 재희가 자기 아내라고 뚱딴지같은 소리를 지금 하고 있다. 이걸 보고 정말 기막힌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순간 당황 했고 반신반의 하면서도 놀래야 했다. 동명이인이겠지 했지만 사실로 확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의 말을 들어 보면 재희와 그녀의 남편 두 사람은 이미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면 오늘 처음 알게 된 내가 바보가 된 꼴이 되었다. 내 얼굴은 하얗게 창백해지면서 이상한 느낌이었으나 퍼뜩 무언가 스치는 게 있기에 애써 억지로 태연한 모습을 하였다.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우리 와이프와 한 마을에서 살았나요."

나를 보고 다시 물어 본다.

"아네요. 초등학교는 마을에서 떨어진 다른 곳에 있었어요. 지난번 시골 왔을 때 봤죠.“

그땐 대충 봤는데, 아참 그런 것 같네요

그리고 동네가 커서 서로 잘 어울리진 않아요."

"

! 와이프가 나 안다고 합디까?"

생각 없이 동수에게 물어 보았다.

"조문 갔다 와서 물어 봤는데 김준호차장이 잘 모른다고 합디다."

"저도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않나요."

"! 우리 와이프 지금 초등학교 선생 하고 있어요."

"그래요"

묻지도 않는 말을 그가 한다. 선생들 가족은 모두 선생 한다고 하더니 아버지가 교장 하니까 딸도 선생님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였다. 어느 학교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보면 이상 할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라 생각 했다. 승용차가 추풍령 휴게소로 진입 하자 이야기는 중단 되었다. 휴게실에 들려서 오줌을 누면서 갑자기 이런저런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몇 년 전 직원들과 함께 박동수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분명히 와이프를 보았을 텐데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렇게 만나리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예견된 만남이라면 그럴 리가 없었다. 동수네 집들이 가던 날 저녁이 오래 되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사실을 진즉에 알았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냥 어릴 때 알던 사이였다라고 애써 부정 하지만 정말 이상하고 묘한 느낌으로 무슨 마술에 걸린 것 같았다. 집들이 가던 그냘 저녁은 오로지 술과 음식 ,그리고 화투판으로 12시까지 놀다 온 것으로 기억되었다. 그 집에 갔을 때 가족으로 생각되는 몇 명의 여자들과 인사를 했지만 정말 보고 싶은 그 소녀가 그들 속에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닌 가 곰곰이 생각 해 보았다. 차는 다시 추풍령 휴게소를 출발해서 구미로 향하고 있었다. 동수가 이야기를 다시 할 것 같아서 오늘 해야 할 업무 이야기로 화두를 돌렸다.

그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은 두 사람이 고향도 학교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어떻게 부부가 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하였다. 분명히 연애는 아니고 중매결혼 같았다. 그날 구미 삼성전자 텔레비전 사업부에 출장을 다녀오면서 하루 종일 기분은 찜찜하고 개운치 않았다.

갑자기 두 사람 사이가 서먹해진 듯 적과 동침하는 적대적으로 갑자기 멀어졌다.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얼마나 변해있는지 가끔 생각나게 하는 정말 보고 싶었던 그녀가 바로 곁에 있다는데 전혀 몰랐었다. 머리가 멍한 띵한 모습에서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전쟁에서 패배자는 말이 없다고 내가 지금 그 모습 이었다. 더구나 업무상 라이벌인 동수에 부인이라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재희로 부터 알게 되었지만 내가 그의 아내와 서로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오늘 그것을 확인하려 했던 것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한참이던 9월 박동수가 아파트를 구입해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직원들과 함께 집들이에 가게 되는데 정말 보고 싶은 소녀가 살고 있는 집을 아무 것도 모른 채 참석을 했다. 일일이 가족들과 인사를 하지 못한 채 술상이 차려진 곳으로 들어갔다. 당시 여러 사람들이 있었던 기억으로 형식적인 인사만 했던 것 같았다. 물론 그들 속에서 정말 보고 싶은 소녀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런데 가족들 속에는 옛날에 소꿉장난 하던 첫사랑 소녀 정말 보고 싶은 소녀가 있었다고 한다. 10년 전 그때 그 자리에 있었는데 왜 얼굴을 서로 몰랐을까 궁금했다. 정말 모를 수 있었을까 그것이 아니었다.

일행이 들어갔을 땐 그녀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그 자리를 일부러 피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남편과 내가 같은 회사에 근무한다는 것을 그녀가 먼저 알았다고 했다. 그걸 먼저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은 회사에서 하는 각종행사와 등산 야유회에서 직원들과 찍은 사진을 보았고 그 속에 내가 있었다. 사진에서 우연히 발견하고는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연치고는 너무 필연이라 이상해서 자신도 모르게 놀랬다고 했다. 며칠 후 총무과에 확인을 하고 출근하는 모습까지 봤다고 했다. 혼자만 알고 있어야하는 비밀이었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었지만 소심한 성격에 혹시 알게 된다면 오해가 생길까 걱정 했다고 한다.

조금은 의야 했고 자신도 놀랐으며 그래서 다른 곳으로 이직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집들이에 직원을 초대하는 것을 바쁘다는 핑계로 반대 했으며 굳이 하고 싶으면 식당을 빌려서 하라고 했지만 오해를 할까봐 더 이상 막을 수도 없어서 집들이는 예정대로 했다고 한다. 회식자리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순간순간 신경 썼다고 했다. 나중에 그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런저런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우연히 부딪칠 수 있는 기회를 어렵사리 그날은 잘 피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몇 년 더 지나서 1996년 여름 어머니가 돌아 가셔서 박동수부장은 회사직원들과 상가 집에 내려오게 된다. 그때서야 동수는 자기 아내가 김준호차장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아무것도 모르고 시골에 왔던 그가 놀랬던 것 같았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이야기와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초등학교에 대하여 그녀가 결혼 전에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지금 같은 일이 생길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청주를 다녀와서 남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김준호 차장 어머니가 돌아 가셔서 청주에 갔었지. 그런데 가보니 당신이 졸업했다는 서곡 초등학교가 가기 있더군. 그곳서 오랫동안 살았나. 참 김차장도 잘 알겠네.“

라고 물었다고 한다.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던 모습을 남편이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가능한 남편 기분을 건들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사사건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찮은 일까지도 시시비비로 피곤하게 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출장길에서 그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2.

내가 처음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다닐 때였다. 그때는 청주로 기차 통학을 하고 있었다. 4km 떨어진 면소재지 역전까지 걸어가서 열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처음에는 몸이 익숙지 않아서 힘들었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이력도 생기고 몸이 단련 되어서 통학하는데 그리 힘들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면 열차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서 서너 시간 학교 도서관이나 또는 친구들과 시내를 배회하며 기다려야 했다. 혹여 연착이 되는 날은 밤 12시가 되어서야 집에 오는 일도 허다하였다. 어느덧 3학년이 되면서 학교생활도 익숙해졌고 이성에 눈이 뜨는 시기에 접어들었는지 여학생에게 눈길을 주며 새로운 세계를 공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를 처음 만나던 그 날은 들판에 보리 꽃이 파랗게 피어나는 5월 이었다. 따스한 봄이 기지개를 펴고 화창한 봄꽃들이 유희하는 어린이날과 일요일이 연휴라서 집으로 가는 길엔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잠시 쉬어 가려고 통학생들이 모여서 마을로 내려가는 산등성이에 여러 명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몸집이 아주 작은 여학생이 힘겹게 산등성이를 뒤 따라 올라오고 있다. 처음 보는 낯선 여학생이라서 관심 있게 바라보는데 마침 내 앞을 지나려는 순간 장난 끼가 있어서 길을 가로막고 말장난을 걸었다.

"저어 못 보던 학생인데 누구지"

"

"이름이 뭐지"

"송재희"

바로 뒤에서 누군가 내 말을 다른 사람이 막아서 대신 대답 해주었다. 그것은 같은 마을에 사는 강인숙 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와는 학교 친구였다. 그래서 우리는 풀밭에 어울려 앉아서 친숙하게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하며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 그날 그렇게 처음 알게 된 그녀 이름은 송 재 희 C여중 1학년으로 키는 좀 작았지만 갸름한 얼굴에 찰랑한 단발머리가 내 눈엔 참 예쁘게 보였다. 그녀는 우리 마을에 있는 서곡 초등학교에 새로 부임한 송민국 교장 선생님의 딸 이라고 인숙이가 말해주었다. 그런데 송민국 선생은 내가 졸업한 뒤에 새로 부임 해 왔기 때문에 그녀와 그녀 아버지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교장선생님이 새로 왔는데 딸만 넷이라고 어른들 대화에서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었지만 내 앞에 있는 그녀가 교장선생님의 큰딸이라는 것은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청주 외갓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주말에만 집에 온다고 했다. 아직은 수줍은 소녀티가 있었는지 묻는 말만 어렵게 대답 했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가 좀 더 친해지려고 풀싸움을 하자고 장난을 걸었다. 잔디 풀씨를 뽑아서 서로 엇갈려 잡아당기면 끊어지는데 이긴 사람이 꿀밤을 때리는 시골 아이들 놀이 깜이었다. 잔디 풀을 뽐 아서 얇게 문지르면 그냥 하는 것보다 질겨서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요령을 잘 아는 나와 그걸 잘 모르는 그녀는 매번 내게 지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가 빨갛게 부었는데도 싫지 않은 표정으로 재밌어 하고 있었다. 옆에서 보기가 민망했던지 인숙이가 그만 하자고 졸랐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왠지 기분이 참 좋아서 곧 친해질 것 같았다. 다음날 그녀를 보기 위해서 교장사택이 잘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 갔다.

사택은 우리 집에서 좀 떨어진 동산 아래쪽에 있었다. 사택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어도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볼 수가 없었다. 이름을 부를 수도 없어서 동산을 내려가 집 앞을 서성이었다. 누가 찾아 왔다는 신호로 휘파람을 불었다. 얼마 후 그녀가 우물가로 나오더니 지금은 나갈 수 없다고 해서 얼굴만 보고 돌아왔다. 그날 이후 어른들이 교장댁 이야기만 하면 솔깃해서 귀담아 들었다. 어머니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무엇 때문에 관심이 많은지 내 눈치를 전혀 알지 못 하였다. 주말이면 집에 오는 토요일 기차역에서 으레 그녀를 기다렸고 일요일에는 어떡하든 그녀를 보기 위해서 집 앞에서 항상 서성이곤 했다.

기차역에서 만나게 되면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뒤 늦게 천천히 걸어오면서 이야기를 했다. 마을로 들어오는 신작로 양쪽으로 모내기를 한 논에서 벼 이삭이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마을에서 아이스케이크를 팔고 읍내로 들어가는 아저씨를 만나면 하나씩 사먹기도 했고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서 먹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여름 방학이 되자 우리는 조금 더 친해 질 수 있었다. 저녁때가 되면 소꼴 먹이러 들판에 나가는 일은 집에서 내가 맡아서 했는데 그녀가 들길을 동행 해줄 때도 있었다. 시골 생활이 익숙지 않은 그녀는 풀꽃을 따며 내 뒤를 졸졸 따라 다녔고 참외밭 원두막에서 방학숙제도 함께 하였다. 아버지가 마을 이장 일을 하고 있어서 교장 댁으로 가는 심부름은 항상 내가 다녔다. 그녀도 보고 아버지 심부름도 해주고하니 나로서는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 아버지 교장은 이장 아들인 나를 공부 잘 하고 똑똑한 학생으로 후한 점수를 주었다. 혹여 식사 때가 되면 교장선생님은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였다. 그럴 때면 사양하지 않고 그 집 가족들과 같이 밥상머리에 앉아서 저녁을 얻어먹기도 했다. 저녁에 죽 아니면 국수를 해 먹었던 우리 집과는 달리 쌀과 보리가 반반 섞인 저녁밥은 아주 꿀맛 이었다.

일부러 가족들과 친 하려고 집안일도 가끔씩 도와주곤 했다. 그런데 그녀를 알게 된지 어느덧 서너 달이 지나자 어느 날인가 부터 조금씩 그녀를 생각하는 감정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그랬다. 아마 이성으로써 일찍 눈을 뜨고 성숙했던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공부가 잘 안 되는 것 같았고 그래서인지 책상에 앉으면 책을 펴기보다는 온통 낙서 장에는 그녀 이름과 얼굴 그림이 전부였다. 일요일이 되면 사택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가서 혼자 노래도 부르며 누군가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아버지 때문에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이학기가 시작되던 어느 날인가 학교를 끝나고 통학열차를 기다리기 지루해서 시골집 까지 걸어가기로 약속을 했다. 혼자 걸어가기 싫어서 조금이라도 친해지고 싶어서 순전히 내가 꾸민 일이였다.

역전에서 만나 출발 할 때 빵집에서 빵을 사서 도시락과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몇 시간을 걷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데 정말 걸어 갈 수 있는지 다시 확인을 했다. 갈 수 있다고 해서 우리는 출발을 했다. 빵집을 나와서 한 시간 걸으니 어느덧 시내를 벗어났다.

이제 포장도로는 벗어나서 뽀얀 먼지를 일으키는 신작로 길로 접어들었다.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고 이따금씩 먼지를 일으키며 자동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날씨가 더워서 그녀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집에까지 가려면 아직도 3시간 이상을 걸어야 했다. 통근열차를 타고 오는 것 보다 조금 일찍 먼저 집에 오려고 가끔 걸어오곤 했었다. 나는 여러 번 걸어 다녔기에 별 문제 없으나 처음 걸어 보는 그녀는 다리가 아프다고 한다. 우선 그녀의 가방을 내가 받아들었다. 초가을 날씨는 한여름과도 같이 뜨거웠다. 출발한지 2시간이 좀 지나자 얼굴엔 온통 땀으로 범벅 되었다. 다리가 아프면 쉬고 다시 걷다가 쉬고 하얀 교복도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여학생이 먼 길을 걷는다는 것은 힘든 일로 힘이 거의 소진된 상태로 기운이 없어 보였다. 길가에 있는 밭에 들어가 고구마를 캤다. 그것으로 목마름을 대신하였다.

무리하게 걷다가 탈이 나면 큰 걱정이었다. 출발한지 4시간이 지나서 이제야 마을로 들어가는 면소재지에 도착을 하게 되었다. 아직 한 시간을 더 걸어야 집에 갈수가 있다. 그런데 읍내에서 그녀의 아버지 교장선생님을 뜻밖에 만나게 되었다. 축 늘어진 재희를 보고 또 나를 다시 쳐다보더니 버스를 타고 올 것이지 하며 야단을 하신다. 그리고는 자전거에 그녀를 태우고 먼저 집으로 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떤 말도 하지 못 했다. 며칠이 지난 뒤 그 일로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었다. 혼자 걸어오지 왜 교장선생 딸과 함께 걸어 왔냐고 호되게 야단 맞았다.

교장선생님이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얼마 후 들으니까 그녀도 아버지에게 꾸중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웠지만 신작로 길을 걸어 온 것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먼 길을 걸어 봤다고 하며 어머니가 몹시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서울까지 가서 수술 했지만 별 효과가 없다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야기를 하니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하신다. 큰 걱정이라고 하는데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나는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있은 뒤 그녀를 만나기가 조금 어려웠다. 난 그녀를 보기 위해서 일요일이면 집 앞에서 또 서성이었고 식구들 보면 숨어야 했다. 어머니가 아파서 이런저런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어떤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만날 수 없었다. 서울에 있는 병원에 다시 입원 했다는 소리는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어디가 아픈지 몰랐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자궁암인 것 같았다. 한동안 기차역에서 기다려도 그녀를 만나기가 어려웠고 집 앞에서 기다려도 만나지 못 한 채 그렇게 한 달을 더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병석에 누워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 가셨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서 들어야 했다.

우리 마을 초등학교로 부임한지 일 년이 조금 넘었는데 불행한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술렁이었다. 학교를 지을 때 공동묘지를 허물어서 학교를 지었기 때문에 마귀가 있어서 학교에 재앙이 생겼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부임하는 교장선생님 모두 크고 작은 안 좋은 일이 발생했다고 수근 거렸다. 그녀의 어머니 장례식을 하던 날은 동네 사람들 모두가 슬퍼했고 나도 찾아 가서 심부름 하며 도와주었다. 핼쑥한 모습으로 연신 고맙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녀는 장녀로써 세 명의 어린 동생이 있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더욱더 슬퍼하였다.

꽃상여가 떠나 갈 때 그녀는 우리 엄마를 붙잡고서 한없이 울고 있었다. 세상을 일찍 떠난 그녀의 엄마 나이는 아마 마흔 살이 조금 넘은 것 같았다. 아직은 어머니가 더 있어야 할 나이인데 하며 어린 것을 두고 어찌 그렇게 갈 수 있을까 하며 마을 어른들이 모두 울고 말았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보다도 더 슬프게 나도 눈물이 나왔다.

 

 

아버지가 마을 일을 보고 있어서 교장 댁과는 왕래가 잦았기에 엄마는 애틋하게 생각하며 간간이 돌봐 주었다. 장례를 마치고 겨울 방학이 시작될 무렵 오랜만에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예전보다 얼굴이 마니 핼쑥해졌고 더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한 달 후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우는 그녀를 위해서 괴산에 있는 산소에 같이 가기로 했다. 하얀 국화꽃 다발을 사서 버스를 타고 그녀의 아버지 고향이 있는 괴산으로 갔다. 산속이라 그런지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나뭇가지를 꺾어서 빗자루를 만들어 눈을 쓸고 그 위에 꽃다발을 놓아드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같이 동행 해 준 것에 대한 감사 표시로 오빠라 부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전엔 교장선생님이 무서웠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동생들 때문에 그녀가 집에서 통학을 했다. 매일같이 자주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이어서 겨울방학 되었다. 그녀는 큰 마을에 잘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되고서 부터는 한층 외로워 보였고 쓸쓸해 보였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특히 교장선생인 아버지가 완고해서 큰 마을에 나오지 못하게 했다. 겨울방학인데도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그녀가 보고 싶으면 아무리 추워도 그녀의 집이 내려다보이는 동산으로 올라가 뒷모습이라도 바라보고 와야 공부가 되었다. 노래를 불러 내가 와 있다는 것을 알리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그녀에 대한 관심이 날로 더해가고 있었다. 겨울방학이 끝나 갈 무렵에 저녁때쯤 그녀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삽과 낫을 빌려가고 있었다. 얼른 사립문 밖에서 나가서 기다렸다. 그리고 저녁에 친구들과 놀기로 했으니 꼭 우리 집에 와주기를 바랬다.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기로 했는데 올 수 있겠지?”

"알았어요.”

그녀와 함께 마을 친구들과 우리 집 사랑방에서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사랑방은 아버지와 같이 쓰는 내 공부방이었다. 저녁에 쇠죽을 쑤면서 큰 장작을 한 아름 아궁이에 넣으면서 방을 아주 따뜻하게 해 놓았다. 책상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방은 쓸고 닦고 먼지하나 티끌하나 없이 해 놓고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는 표어를 써서 붙이고 내가 그린 풍경화도 꺼내서 모처럼 책상 앞 벽에 붙였고 방을 깔끔하고 청소 하였다.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받고 싶었다. 이윽고 어두워지자 친구들이 하나둘 모였고 그녀는 좀 늦게 도착 했다.

"와서 정말 고마워

"집에 아빠가 계세요. 일찍 돌아가야 해요

"걱정 마

방으로 들어온 그녀가 여기저기 내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이를 같이 하였다. 이때가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그녀의 반대편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눈빛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정지시키려 했다. 눈빛이 맞으면 그녀는 피하고 그러면 다시 주시하고 친구들은 그런 모습을 알고는 슬슬 골리기도 했다. 우리는 둥그렇게 앉아서 박수를 치며 번호 부르기 깨임을 했다. 상대편을 공격하면 받는 사람은 다시 그 사람을 공격을 하는 것으로 지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벌칙을 받아야 한다.

특히 번호 부르기 깨임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벌을 받게 하는 것으로 그녀와 내가 서로 번갈아 상대를 지목했다. 야식으로 어머니가 국수를 해왔다. 그녀가 부엌으로 나가서 어머니와 같이 야식 준비를 도와주었다. 그런 모습에 기분도 좋았고 그래서 재희가 더욱 더 마음에 들었다. 한참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동네 사랑방에 가셨던 아버지가 돌아 오셨다. 문 밖에서 기침하자 친구들이 모두 일어났다. 아버지는 신발이 많아서 방에 누가 있는가하고 문을 열어 봤다면서 그냥 놀고 있으라고 했지만 사람들이 우루를 방에서 몰려 나왔다.

"왜들 이러니? 그냥 앉아 놀아라. 난 다른 방으로 건너가마.”

오랜만에 동네 친구들 앞에서 다정한 모습을 보여줬던 시간은 아버지 때문에 아쉽게 모두 끝나 버렸다. 집에 가는 길을 밝혀 주려고 건전지를 찾았으나 건전지에 약이 없었다. 캄캄한 밤길을 혼자 보내기 미안했다. 그녀를 챙기느라고 다른 사람들이 가는 것은 뒷전 이었다. 길이 멀어서 그녀를 집까지 배웅 해주어야 했다. 안마루에 걸쳐 있는 석유 등불을 들고 나왔다.

"재밌었는지 모르겠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간직 할게요.”

"힘들지?"

"조금"

"어머니 생각은 이제 잊어야지"

",,,,,,,,,"

집안일을 도우려고 이모와 할머니가 집에 자주 들린다고 했다.

"열심히 공부 해야지 동생들에게 모범이 되고 아버지도 그렇고"

어른이 된 것처럼 그녀를 위로했다.

"그리고 착하고 예쁘게 자라야 해. 나한테 시집오려면"

",,,,,,,,,,,,"

그녀는 내 짓궂은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다가 팔을 툭 친다. 그리고는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가 충격을 벗어나기 위해서 다른 학교로 전근 갈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마 교장선생님이 아내를 잃고 학교와 동네가 싫어서 다른 곳으로 전근 신청을 한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자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조금 놀라면서 걱정도 되었다. 또 불길한 느낌이 다가왔다. 우리 마을을 떠나면 만날 수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악수 한 번 해야지"

"그래요"

그녀의 집 앞에서 재희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훗날의 어떤 약속은 아니었지만 처음 이성으로서 손을 잡아 보고 싶었다. 어둠속이라서 서로에 얼굴은 확인 할 수 없었다. 따스한 그녀의 체온이 첫 이성으로써 밀려오는 체온을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주 잡은 손을 놓으면서 그녀는 내개 이렇게 말 했다.

"아직 결정 된 게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마."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왔다.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아직 할 수 없었다.

순수한 생각뿐이었고 마음속에 담아 두 것이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 저녁은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책상에 쭈그리고 앉아서 낙서만 밤새도록 하고 말았다. 동그란 얼굴의 단발머리에 수줍은 정말 보고 싶은 소녀 어느덧 그녀가 그렇게 내속에 들어 와 있었다. 봄방학이 끝나고 새 학년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도 모르게 주말이면 그녀를 기다리는 버릇이 다시 생겼다. 그래서 그가 집에 오는 날 우연히 그를 만나서 반가워했다. 어느덧 따뜻한 봄이 지나도록 한 동안은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러던 5월 토요일 이였다. 기차 역전에서 그녀를 오랜만에 만났다.

요즈음 만나기 힘들다

시험기간 이예요

누구는 시험 안보나. 얼굴 좀 보여 주고 지내야지

"시험 끝났어요?"

"아니"

어떤 애틋한 감정은 없었지만 그녀 보다 내가 더 어른이니까 내가 더 그녀를 생각했던 것은 확실했다. 고갯마루에 앉아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땀을 식히고 있었다. 오월이 지나고 6월로 접어들었다. 7월로 접어들자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다시 어느덧 가을로 계절이 접어들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친구들과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그녀가 나를 찾아 왔다. 짓궂은 동네 친구들이 우리를 놀리고 있었다.

"얼래얼래 누구누구는 누구하고 연애한대요."

우리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러지 말라고 야단하지만 소용없었다. 더 이상 놀림을 하지 않기로 약속 하고 학교 앞 가게에서 빵과 과자를 사 줘야 했다. 마을 친구들이 시샘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녀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더 해가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세월은 어느덧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었다.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많았다. 개교할 때 심었다고 하는 나무는 여름이 되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가을 운동회 때는 마을 쉼터가 되었다. 그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고 또 한쪽으로 날려가는 모습은 정말 운치가 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만났다. 시커멓게 물든 플라타너스 나뭇잎을 하나씩 주우며 오랜만에 다정하게 이야기 할 시간이 있었다. 곧 이사를 갈 것 같다는 이야기를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준호 오빠"

오빠란 말을 잘 하지는 않았지만 기분 나거나 무엇을 부탁 할 때만 사용하는 것 같다.

""

"그냥 한 마을에 살면서 친하게 지냈던 거 그것으로 난 흡족해. 그거면 되 잔아 뭐?

아직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야"

"아무튼 헤어져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돼."

"내일 가는 거 아닌데 자꾸 왜 그래?"

"이사 가지마라 응?"

"아버지가 다른 학교로 전근 가니까 나는 어쩔 수 없지 뭐?"

"재희야 너라도 이사 가지 않으면 안 될까?"

엉뚱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가득했다. 이제 며칠 있으면 그녀와 헤어져야 한다. 플라타너스 나뭇잎으로 헤어지는 아쉬움에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면 나뭇잎이 이리저리 운동장을 힘없이 뒹굴고 있었다.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플라타너스 나뭇잎을 줍는 일을 마침 하고 있었다. 나뭇잎은 날씨가 추워지면 방에 군불 피울 때 장작 태울 불쏘시개로 사용 했다. 재희가 부지런히 주워 주면 긴 나뭇가지에 꼽아서 집으로 가져왔다. 불길한 생각으로 그날 밤은 엎치락뒤치락하며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사를 못 가게 할 수 있을까 생각 했지만 내게는 별다른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날짜는 다시 12월 초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를 몇 번 만났지만 이사를 못 가게 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우리 마을에서 이사를 떠나면 곧 헤어져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치 헤어질 것을 미리 예견하듯이 하나씩 모든 것을 순차적으로 준비하는 것 같았다. 우리 마을 떠나면 자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앞섰고 서로 편지왕래 한다는 것도 아직은 공부를 해야 할 학생이기에 그때는 더욱 그러했다. 한마을에 살았고 매일 통학을 같이 하니까 자주 볼 수 있어서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곳을 떠나게 되면 만나는 것도 힘들고 편지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 정이 멀어진다는 어른들 이야기도 생각났다.

그리고 겨울방학이 시작 된지 며칠 후 드디어 이사를 가게 될 날짜가 결정 되었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아버지 고향 괴산에 있는 풍산 초등학교로 전근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서운함이 핑 돌았다. 황순원의 작품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처럼 정말 맘이 뒤숭숭하고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공부하는 것은 물론 밥도 입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랑에 열병이라고 하기엔 아직은 이른 나이지만 이것으로 그녀를 영영 잃어버리는 게 아닌지 걱정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 그토록 내가 그녀에게 마음이 이렇게 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사랑은 아직 설익은 나이지만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게 분명 틀림없었다. 아버지의 전근과 함께 이사 가는 것은 확실하기에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기쁘게 보내기 위해서 서서히 이별 준비를 해야 했다. 토요일 학교가 끝나고 그녀에게 줄 하이네와 괴테시집 두 권을 영재서림에서 샀다. 그동안 그녀에게 썼던 편지글과 함께 예쁘게 포장을 했다. 그리고 이사 전날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도 언제 만들었는지 밤색 털장갑을 떠서 답례로 주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순리대로 해야 하는 것이기에 막을 수는 없었다. 서로 편지 연락 자주하자고 했다. 아무튼 그녀와 이별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마치 세상을 다 잃은 듯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밥 먹기도 공부하기도 싫었다. 드디어 이사 가는 날 헤어지는 게 싫어서 그녀의 집에 가지 않았다. 그래서 집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벌써 학교 선생님들과 마을 사람들로 이사 준비에 분주했다. 커다란 자동차가 와서 이삿짐을 싣고 있었다.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했다. 한참 후 그녀가 우리 마을을 떠나는 것을 멀리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동네 사람들은 아내를 잃고 그렇게 쓸쓸히 떠나는 교장선생님이 불쌍하다며 눈시울을 붉혔고 재희를 붙잡고 우는 사람도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6개월 만에 이사를 떠난 것이다.

이삿짐이 떠난 뒤에도 마을 사람들은 교장선생님이 살던 집에서 오랫동안 서성거렸고 이런저런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잠시 후 사람들이 아무도 보이지 앉자 그녀가 살던 텅 빈 집으로 들어갔다. 혹시 그녀의 어떤 채취가 남아 있지는 않을까하고 마구 돌아 다녔다. 하지만 방마다 쓰레기만 구석구석 널려있을 뿐 어딜 보아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집 공터 한쪽으로 누군가 쓰레기를 태우는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를 떠나보내는 아픔은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혼자 삭혀야 했다. 이성에 막 눈을 뜬 내게는 참으로 커다란 실망이었다. 그녀의 집을 늘 바라보는 즐거움이 없어진 것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었다. 다시는 쉽게 찾아오지 않을 인연을 단단히 묶지 못 한 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교장사택에서 어머니를 읽고 우리 마을을 쓸쓸하게 그렇게 떠나야 했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진송남이 부른 노래를 속으로 부르며 아픈 맘을 다스렸다. 그 당시 이 노래가 한참 유행이었다.

"그렇게 그렇게 사랑을 하면서도 바보처럼 바보처럼 말 한마디 못한 채 바보처럼 그님을 잃어버리고 고까 짓 꺼 해보건 아무래도 못 잊어서 바보처럼 울었다."

마치 귀중한 무엇을 잃어버린 것처럼 아니 세상을 다 산 것처럼 삶에 의미를 잃은 채 허망한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은 사랑이 떠나가면 그 추억을 그리워한다고 했지만 떠난 빈자리에는 쓸쓸하고 허황한 바람 뿐 이였다.

겨울 방학이 끝날 때 까지 밖에 나가지도 않고 줄곤 방에 있었다. 친구들이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친구들은 내 마음을 아는지 어쩌다 보면 고연히 놀리기만 했다. 밥만 먹으면 공부를 한담시고 방에 들어가 쓸데없이 낙서만 하였다. 부모님은 내 이상한 모습에 어느 정도 눈치 챈 것 같지만 별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난 후에야 내가 그녀에게 마음 준 것 내가 너무 마음을 뺏겼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철없는 나이었지만 뭔가 알 것만 같았기에 어쩌면 내가 더 그녀를 좋아했던 게 닌가 생각해보았다. 그해 겨울방학은 무척 지루했다. 뒷동산에 올라가면 앞으로는 마을이 보이고 뒤쪽으로는 초등학교가 있다. 그리고 그녀가 살던 집이 보인다.

그 언덕을 자주 올라가 그녀가 살았던 빈집을 매일같이 바라보는 습관이 언제 부터인지 그 긴 겨울 방학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우리 마을에서 이사를 간지 보름이 지났지만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이사 간 주소를 알지 못하니 편지도 보낼 수 없었다. 연락할 수 없는 일이 있겠지 하며 바쁘게 며칠을 보내고 있는데 그녀가 중학교 졸업한다는 날짜를 알게 되었다. 우선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C여중이 있는 사직동으로 내려갔다. 난 그녀를 찾으려고 사방으로 정신없이 돌아 다녔다. 가족들과 같이 사진을 찍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졸업 선물로 예쁜 손지갑을 주었다. 어른들 때문에 연락 못 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재혼을 할 것 같다고 한다. 동생들이 어려서 아버지가 빨리 재혼을 결정 한 것 같았다. 그리고 C여고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틈틈이 편지 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가족 있는 곳으로 곧 돌아갔다. 더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 했다. 계절은 다시 겨울 방학이 끝나고 나는 고3 그녀는 여고 1학년으로 새 학년이 시작 되었다. 그녀도 제법 여자로써의 모습을 보이는 이제 성숙한 나이가 되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 후 몇 번의 편지가 왕래 했다. 그런데 봄이 다가도록 웬일인지 답장이 오지를 않았다. 답장 없는 편지를 몇 번씩 보내는 동안 또 몇 달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연락이 되지 않는 소식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용기 있게 여고를 찾아갔다. 남자가 좀 창피한 일이지만 여학교 교문 앞에서 서성대며 기다렸다.

어쩐 일인지 여러 번 학교를 찾아 갔으나 만날 수 없었다. 매일같이 학교 앞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좋은 일도 아닌 것 같아서 학교 앞에서 만나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녀를 만나 안 사실이지만 학교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영문도 모르고 밖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계절은 이제 여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지 내게도 그녀 생각이 차차로 퇴색해지고 있었다.

이제 대학입시의 관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 때였다. 매일 그녀 생각으로 공부를 더 이상 미룰 수도 보류 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편지 한통이 배달되었다. 겉봉투에 편지를 보낸 사람의 주소가 없었다. 편지를 받아 든 나는 급히 편지를 개봉했다.


준호씨 에게

제삼자인 제가 펜을 들게 된 것을 무한히 미안하게 생각하며 재희 이모로서 이 글을 씁니다. 조카는 아직 그런 것에 눈뜰 나이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시골에 있을 때 잘해 준 것 조카를 통해서 알고 있지만 무엇 보다는 조카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형부의 뜻을 이제는 거역 할 수가 없기에 이 편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일거예요. 이제는 망각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냥 좋은 추억으로 생각하고 잊어 주었으면 하고 조카에게 더 이상 부담 갖지 않도록 해 주세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만날 수도 있잖아요. 죄송하게 생각하며 앞으로 편지는 절대 보내지 마세요. 정말 미안해요. 조카를 대신해서 용서를 빌게요. 이 편지는 조카가 모르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더욱 고마울 뿐이고 그것도 조카를 위해서이고 또 한편은 준호씨를 위한 일입니다. 정말 미안해요. 나쁜 뜻으로 받아 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럼 이만. 재희 이모가



.

그녀가 큰 언니처럼 따르는 대학에 다니는 막내 이모가 보낸 편지였다. 한참을 멍하니 생각해보지만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어른들이 가로막는 장벽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가 없지만 그녀에게 보냈던 수많은 답장 없는 편지는 이모가 그랬던 것으로 확인 되었다. 교장 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했을 것 같았다. 아직은 공부를 해야 할 학생이기에 부담스러운 사실이었지만 그런 이유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며칠 고민하며 실의에 빠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그녀 생각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조바심이 가득하였다. 답장이 오지 않을 것 알면서도 몇 번의 편지를 다시 또 부첬다. 초조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더 그녀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학교에 찾아가 자초지정을 듣고 싶었지만 혼자 끙끙 고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이모가 보낸 편지로 인하여 결국 병석에 앓아눕게 하였다. 갑자기 온 몸으로 열이 올라서 학교에 결석까지 해야 했다. 그런데 보통 몸살은 이삼일을 앓고 나면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는데 그러하지 못 했다. 사 일째 되던 날 부터는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 질 듯이 아프고 소변이 자주 나오고 대변보기가 거북했다. 화장실을 여러 번 계속 다녀서 마을에 있는 의사를 불러 진찰 하고 약을 먹었지만 차도가 없었다. 이번에는 가슴에 통증까지 수반했다. 학교에 결석한지가 여러 날 되었다. 너무 아파서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꾸만 수렁 속으로 밀려가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로웠다.

가슴이 쓰리고 숨이 차서 엎치락뒤치락 엉망이었다. 이유 없이 왜 내게 이런 아픔이 있는 것 일까 혼자서 자문자답을 하면서 그녀 때문에 우연히 생긴 병이 아니기를 바랐다. 일주일이 지나자 가슴이 더 찢어질듯 아파오자 그때서야 부모님을 따라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게 되었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심장이 움직이는 모습을 기계로 보는 초음파 검사와 피검사, 오줌 검사까지 했다. 진찰 결과 의사는 폐와 심장이 나쁘다고 했다.

그리고 폐에 물이 고였으니 입원해서 주사기로 물을 빼야 한다고 최종 진단을 내렸다. 자세히 알지 못한 채 아직 어린나이에 나쁜 병이 찾아 온 것이 틀림없었다. 매일 아픔은 지속되고 통증이 심하니 너무 슬퍼서 울고 싶었다. 부모님과 의사의 상담이 있었다. 세상이 어지러워서 머리가 핑 돌았다.

요즈음 거의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몰골이 아니었다.

좀 더 정확한 진찰을위해서 부모님은 다른 몇 곳의 병원을 더 돌아 다녔다. 흉수를 주사기로 빼지 않고 약으로 고칠 수 있다는 가톨릭 메리놀병원을 찾아 갔다. 거기서 진찰을 받고 3개월 이상 치료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치료비로 일반 병원보다 상당히 저렴했다. 우선 학교에 결석계를 제출 했다. 그리고 열심히 약을 먹고 영양을 보충하면서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병명은 늑막염이었다. 얼굴은 핼쑥해지고 예전보다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다. 내 몸이 아프게 되니까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게 되었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검사도 받고 약도 열심히 복용했다. 이주가 지나자 차도가 곧 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슴 통증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숨도 편안히 쉴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식사를 할 수 있어서 좋았고 건강이 회복되는 것 같아서 무척 기뻤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빌었다. 무엇보다도 여름 방학이 끼어 있어서 결석하지 않고 치료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에 대한 내 관심이 도를 넘어서 내가 아팠던 것인지는 자승자박하며 그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덧 치료한지 두 달이 되자 건강은 예전처럼 돌아왔지만 학교를 여러 날 결석해서 성적은 하위로 떨어졌다. 그래서 예비고사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그녀가 찾아 왔다.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문안 오겠다고 하는 것을 건강이 회복되면 만나고 싶다고 했었다. 중학교 졸업하던 지난 2월에 만나고 다시 7개월 만에 보는 얼굴 이었다.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에 반가운 기색을 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 그간 많이 보고 싶었기에 내 속 마음은 무척 반가웠다.

이제 고등학생이 되어서인지 예전과는 달리 무척 숙성했고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어서인지 예쁘장한 모습이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 반면에 창백해진 얼굴, 핼쑥한 내 모습이 그녀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 질까 걱정되었다. 주위환경 때문에 쉽게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방에 오래 앉아 있기 답답해서 인숙이랑 셋이서 밖으로 나왔다. 매일 그녀를 바라보았던 뒷동산으로 올라가면서 이모가 보낸 편지 이야기를 먼저 하였다.

그녀는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아버지와 이모가 보낸 것이라 하며 미안해하며 내 건강상태를 걱정해 주었다. 재희가 이사 가던 날 언덕에 올라와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언제나 시간 나면 동산에 올라 와서 옛 집을 바라본다고 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고맙고 미안한지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제 더 이상 같이하기 힘들다는 판단이 얼마 전 부터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서로를 위해서 잠시 떨어져 있자고 했다. 편지 하는 것도 공부에 방해가 되니까 학생 본연의 신분으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자고 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대학생이 되면 다시 꼭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네가 생각나면 언제든지 이곳에 올라와서 펌프 샘에서 일 하고 있는 네 모습을 그리워하며 추억을 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짐짓 내 뜻을 알았는지 당황하는 눈치였다. 언덕을 내려와서 읍내로 나가는 마을 앞 신작로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아직은 이르지만 그 감정을 갖기엔 충분한 나이였다. 가을이 짙어가는 마을 큰 길에는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있었다.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 상태라서 오래전부터 그녀를 보내기로 생각 했었다. 한마을에 살았을 때는 자주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는데 이젠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 마음에 동요가 있었지만 태연하기로 했다.

설령 보내고 싶지 않더라도 아니 보내고 싶지 않지만 보내야 한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언제 다시 시골에 와 달라든가 언제 만날 수 있을까하는 의미 없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한때 우정과 사랑 속에서 방황하던 그녀와의 짧은 인연은 세월이 지난 뒤 생각 해 보면 그때가 마지막이 되리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그녀가 여고 1학년 그때가 정말 마지막 작별 이였다면 그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핼쑥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 뿐이고 대학에서 또는 사회 구성원으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의 작별이 그후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짧은 여운이 아쉬움 속으로 흩어지고 지금의 헤어짐이 마지막이 아닌 어른이 되어서 다시 만나는 이별이길 원했지만 그 인연은 오랫동안 이어주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기위해 읍내까지 걸어가야 한다, 그녀와 마지막 헤어지던 날 읍내까지 바래다주고 싶었지만 여운을 남겨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마을 앞 신작로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길가 코스모스 꽃을 몇 송이 꺾어 건네주며

"재희야 나중에 더 예쁜 모습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어.“

오빠 얼른 건강해야 돼요

우리 마을에 살았던 것 죄다 잊지 않기"

""

예전에 내가 말한 것도 잊지 않았지

뭔데요

나중에 커서 나한테 시집오는 거

피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조신하게 공부 열심히 해 알았지

오빠도 꼭 대학에 합격하세요.”

고마워

이젠 아프지 마

알았어.”

당시 내 건강상태와 진학문제로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았다. 지금은 마음에 상처가 있겠지만 지금 여기서 마무리를 하는 게 좋을 듯 했다. 3년간 6개월간 한 마을에서 같이 살았던 그녀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준 그녀가 내 곁을 떠나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이 되어서 만나자는 것도 욕심일 뿐이다.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재희야 잘 가

그녀는 길을 가다가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천천히 가고 있었다. 어서 가 라고 손짓을 해주었다. 서서히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신작로 길 모퉁이에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서 사랑 한다고 사랑 한다고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얼마 후 읍내까지 배웅했던 인숙이가 돌아왔다. 건강이 안 좋은 것을 보고 울먹이며 많이 걱정 하더라고 한다. 그해 가을 그녀가 그렇게 왔다가 쓸쓸히 돌아갔다.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그 현재 위치를 잘 알기 때문에 웃으면서 보내기로 했다. 내가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어떠한 조건도 지금은 하나도 없었다. 내 욕심을 채워두기 위해서 그녀를 잡아 두기 위해서 지금 문지방에 앉아서 안절부절 하는 꼴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내 속마음을 그녀는 모를 것이다. 누가 남는 것이고 누가 떠나보내는 것이 아닌 나중에 지금보다 더 큰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서 지금 떠나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그것을 실행 할 뿐이다. 혹여 어떠한 인연이 있다면 어느 길목에서 우연히 만나겠지 했다. 이제 어떤 아쉬움도 모두 접기로 했다.

그녀가 떠나던 11월 가을이 지나고 한 달 쯤 더 지난 초겨울이 다가오자 건강은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었다. 그런데 대학에 진학 할 수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파서 학교 결석을 많이 했고 그에 따라 성적이 떨어져서 진학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비고사에 원서도 내지 않았다. 집안 형편이 예전보다 많이 나빠져서 재수 할 형편도 못 되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 할 것 같아서인지 편지할 생각도 없고 편지가 와도 답장도 하지 않았다.

그녀와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특히 대학진학을 포기하자 그녀와 사귈 용기도 없었고 마음까지 퇴색해 지고 있었다. 학교를 찾아 가면 충분히 그녀를 만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말았다.

그녀의 집안은 교육자였기에 어딘가 모르게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수척해진 내 모습에서 자신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한해가 지나고 다음해로 이어지는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친구들이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에 심기가 좀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느덧 겨울 방학이 끝나고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식에 그녀가 찾아 왔지만 대학을 가지 못 한 것에 대한 자존심 때문에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꽃다발 선물과 그녀의 안부가 적인 쪽지 편지를 인숙이가 대신 들고 왔다.

그렇게 12년의 정든 학창시절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여고 2학년이 된 셈이다. 대학생이 되었다면 그녀를 자신 있게 만나러 갈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난 가을에 그것이 그녀와 마지막 작별이 되고 말았다. 이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되었다. 졸업 후 내게도 여러 가지로 변화가 생겼다. 집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다가 4월쯤 서울로 올라 왔다. 지인의 소개로 작은 중소기업에 입사를 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하지 못한 공부를 다시 계속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바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조금은 힘들지만 목표가 있었기에 열심히 했다. 마음이 바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서 연락을 모두 끊고 말았다.

그래서 떠나간 사람으로 생각하고 관심에서 멀어지기로 하고 소식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굳은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갈 길을 스스로 개척 하는 게 우선이었다. 무엇보다도 회사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자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묻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은 한해 두해 그리고 어느덧 세월은 강산이 변하듯이 몇 번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잊혀 진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빛바랜 일기의 한 페이지로 조금씩 묻혀가고 있었으며 어쩌다 고향에 내려가면 그녀가 살던 옛터를 바라보며 추억에 잠기곤 했지만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같이 학교를 졸업했던 인숙일 어쩌다 만나서 안부를 가끔 물어 보면 어디에 사는지 잘 모른다고 했다.

남자들은 결혼을 해도 직장을 따라 객지로 나 가는 경우는 있어도 고향을 등지는 일은 거의 없지만 여자는 결혼해서 만나는 남자의 직업과 사는 곳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흩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여자 친구들은 졸업 후 연락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내 일기의 한구석에 그녀를 그리워하는 글로 가끔은 떠올려 보기도 하지만 모두가 다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속을 태우며 청년기를 보냈고 그리고 여러 곳의 직장을 옮겨 다녔다. 다시 얼마의 세월이 1020년 시간이 흘러갔다. 성수동에 있는 세일전자로 직장을 옮기면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가졌다. 가끔 생각났지만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으로 기억 되었다. 완전히 내 인생에서 잊혀 진 사람으로 각인 되었다. 첫사랑이니 뭐니 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가정생활에 충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향에 내려가서 어쩌다 언덕에 올라가게 되면 그녀가 살았던 빈터를 바라보는 취미는 있었다. 펌프 샘 우물가에서 그녀가 손 흔드는 것 같은 생각을 하면서 쓴 웃음을 짓기도 했다. 어느덧 시간은 그렇게 3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녀에 소식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이제 세월이 너무 지나갔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손만 내 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그녀가 내 이웃에 살고 있었다니 기막힐 일이 생기고 말았다. 정말 보고 싶은 그 소녀 재희가 정말 내 이웃에 살고 있었다. 영화나 소설 속에 있을 뜻한 일이 내게 생기고 말았다. 정말 어찌 이런 일이 내게 있을까 얄미운 운명의 장난이 이제 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3.

구미 출장길에서 박동수가 무언가 아내에 대한 실마리를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현명한 판단을 해야 되겠지만 접근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의 심술이 슬슬 올라오고 있었다. 그날 이후 왠지 이상하고 찜찜한 생각에 동수의 부인이라는데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동수 그 사람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이후부터는 회사에서 서로가 좀 껄끄러웠다. 사무실에서 만나게 되면 은연 중 자리를 피하는 것 같았다. 벌써 부터 물과 기름처럼 회사생활이 예전 같지 않았다.

서로 터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눈치만 보고 있다. 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을 마치 친구에게 뺏긴 기분이었다. 정말 보고 싶은 소녀가 내게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지만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상 모든 것은 순리대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남자끼리 이실 직고를 해서 술 한 잔으로 오해를 풀어야 할 숙제는 더욱 아니었다. 둘 다 서로 말 안하고 있으면 되는 줄 알고 속 좁은 밴댕이처럼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대로 모르는 게 좋은 거고 그렇게 하는 게 편하다는 논리였지만 도저히 마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한 달이 자나갔다.

내가 알고 있는 이상 그녀도 괴로울 것 같았다. 그녀의 집에 여러 번 전화를 돌렸다가 용기가 없어서 그냥 끊고 말았다. 어찌 되었던 정말 보고 싶은 소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게 되었으니 추억의 재회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재회의 만남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모른 체 해야 하는지 망설이며 여러 날 밤잠을 설쳤다. 그렇게 찾고 싶었는데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도 궁금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보고 싶다.

'사랑도 세월이 지나면 다 부질없는 거야'

하며 내 자신을 꾸짖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만나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정말 보고 싶은 궁금증에 마음에 정리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눈만 뜨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말 오랫동안 참았다. 구미 출장을 다녀 온지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녀와 어렵게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여보세요."

"........"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듣고 있어? 나야. 얼마나 변했는지 보고 싶어요

"어디예요. 잘 계지죠"

"한번 만나야 하지 않을까"

"만나고 싶지 않아요."

"어디 사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럴 수 없잖아"

"전 이대로가 편해요"

나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게 몇 년 만에 들어보는 그녀의 목소리인가. 여고 시절의 예쁜 목소리는 어딜 가고 아줌마 톤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음성도 떨리고 있었다. 이 목소리를 들으려고 얼마를 기다리고 참았던가 말이다.

"하지만 회사에서 남편과 보이지 않은 신경전야. 그래서 나도 불편해"

"............."

"아무튼 만나야해. 알았지?"

".............."

딸까닥. 그녀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마 보지 않아도 당황스러운 표정일 것 같았다. 지금은 혼란스러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다시 걸지 않았다.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아 미안했다. 한참을 멍하니 공중전화 부스에 서 있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났다.

다른 사람이 받을 것 같아서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전화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몇 달에 날짜가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서 뜻밖의 전화가 왔다. 내일은 학교 개교기념일 이라 하루 쉴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월차 휴가를 냈다. 그래 당당하게 만나는 거다. 나의 옛 사랑을 만나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정말 보고 싶은 그 소녀인데 하며 자신을 다독이었다. 욕심이 있다면 아니 찾을 수만 있다면 내 것을 도로 찾고 싶었다.

199810월 가을 해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아침 좋은 내 기분을 아무도 모른다. 동수로 부터 정말 보고 싶은 소녀가 동수의 아내라는 사실을 안지 6개월 만에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헤어진 지 꼭 30년 만에 길동 사거리 쉘부르 찻집에서 해후를 하게 되었다. 그날은 드라마 한편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어도 그 이상 이었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서 찻집은 조용했다.

정말 오랜만에 힘들게 그녀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약속 시간이 조금 지나서 문이 소심스럽게 열리더니 두리번거리는 사람을 보고 쉽게 알 수 있었다. 옛 모습은 쉽게 기억 할 수 없었지만 이 시간에 찻집에 들어오는 사람은 느낌으로 그 사람이었다. 우선 손을 번쩍 들어서

"재희씨 여기"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수줍은 모습의 그녀는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청했고 나도 일어서서 그녀를 맞이하며 가벼운 목례를 했다. 어릴 때의 옛 모습을 기억 할 수 없도록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요즈음 옛사랑을 찾아주는 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 처럼 설레는 가슴이었다. 용기 있게 손도 내 밀었다. 그녀도 엉겹 결에 내 손을 잡았고 정말 오랜만에 따스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찻집에 손님은 우리 두 사람 뿐 이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건강하죠?"

"고마워, 나와 주어서 참 아버님은?"

"괴산 고향에 계세요"

"사리면에?"

""

"어때 이렇게 만나는 거"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게 참 감회가 있네요."

"아마 그게 인연이 아닐까?"

비록 지금은 남의 아내가 되어있는 그녀이지만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우리는 편하게 말을 이어갔다.

"회사 생활 재미있으세요"

"그냥 그렇지 뭐 참 남편이 잘 해줘"

""

"난 한 번도 잊어 본적이 없어"

"왜요"

"나도 모르겠어쓸쓸히 떠나던 그대의 뒷모습은은 세월이 지났어도 지금도 생각나."

"........."

"난 고향에 가면 지금도 늘 동산에 올라서서 재희가 살던 옛집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지"

"지금은 흔적도 없을 텐데"

"응 묵정밭이 되었지만 내 젊은 날 소중한 추억이 있던 곳이지"

"저도 가끔은 생각나곤 해요."

"정말 보고 싶었다. 옛 모습이 아니어도 그냥 정말 보고 싶었어."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또 덥석 잡았다. 그녀는 곧 바로 내 손을 제 자리에 갖다 놓았다.

"아마 우린 인연이 아닌가 봐요"

"그럴까?"

"몇 학년 담임이야."

"3학년"

"힘들지"

"아직 할 만해요. 애들과 싸우다 보면 하루가 금새가요"

찻잔이 거의 비워갈 무렵 이렇게 보낼 수가 없었다. 재회의 추억이라도 만들고 싶었다.

"우리 춘천으로 드라이브 가자"

""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찻집을 나왔다. 커피가 아직 찻잔에 절반이 남아 있었지만 그냥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에서 누군가를 만날 것 같은 느낌에 불안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자동차에 올랐다. 차는 어느새 춘천 가는 큰길로 접어들었다. 가을바람에 나무 가지가 힘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사랑은 무심한 세월을 다시 돌려놓고 있었으나 이미 때늦은 시간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소녀를 어렵게 만나서 지금 춘천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한 시간쯤 달려서 강변역 부근에서 차를 세웠다. 차안에서 내려다보이는 강물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고 산천초목의 산야도 온통 단풍으로 예년처럼 곱게 물들어 있었다. 다만 변함이 있다면 지금에 우리 마음이었고 쪼그라진 우리에 자화상 이었다. 그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서 이제야 회포를 푸는 듯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차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남편과 같은 회사에 근무한다는 것을 야유회에서 남편과 같이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서 알게 되었고 그리고 총무과에 확인 했다고 한다. 그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집들이 하던 날 서로가 알기 때문에 집에서 하는 것을 반대 했으며 위기를 잘 피해 갔다고 한다. 그날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누군가 한사람이라도 다른 곳으로 회사를 옮겼으면 했다고 한다.

그 후 얼마 지나서 남편이 시골집에 조문 갔다 왔다는 말을 듣고는 조금 아는 사람이라고 했을 뿐 다른 말은 없었다고 했다. 혹시 남편이 이제껏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닌지 다시 물어보았다. 그녀 남편은 다혈질 성격이라서 좀 힘들지만 특별한 것은 아닐 거라고 한다.

어머니를 여의고 혼자 자라온 그간의 이야기도 물어 보았다. 15살에 나이에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고 아버지의 재혼으로 동생들과 외갓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는 그녀 눈가에서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어머니에 사랑을 받지 못하고 동생들과 힘들게 살아온 그녀가 불쌍했다. 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내가 잘 모르는 무언가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듯 했지만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시흥초등학교 근무할 때 하숙집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때는 혼기를 놓쳐서 서둘러 결혼했다고 한다. 자녀는 11녀로 모두 고등학교에 다니며 성남에 있는 대진초등학교 3학년 담임이라고 한다. 내 이야기는 하나도 궁금한 게 없는지 물어 보지 않기에 어쩐지 서운한 생각에 시샘하는 말을 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늦은 점심을 하기위해서 식당으로 들어섰다. 내가 바보같이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그녀에게 원하고 있지는 않았나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면서 질투하는 꽁한 마음을 모두 내려놓았다. 그런데 정말 보고 싶은 소녀 재희를 만났지만 왠지 덤덤한 느낌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기에 만나면 멈추었던 가슴이 뛰고 그 많은 말들이 줄줄이 나와서 이야기가 끝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렇게 보고 싶고 그리워했고 내 일기의 전부를 채워준 그녀였지만 지금은 사십이 넘어선 아저씨 아줌마로 서로 마주 앉아 있었다.

사랑의 꺼진 불꽃이 되 살아날 줄 알았지만 뜨거움은 이미 식은 것 같았다.

손만 닿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던 그녀인데 차만 타면 갈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살고 있었는데 마치 어느 환상 속에서 깨어난 느낌 이었다. 내가 너무 기대를 하지 않았나 생각해보았지만 그냥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와 같이 식사하는 그런 것 외는 아무것도 느낌이 오지 않았다. 첫사랑은 가슴에 숨겨 있을 때가 아름답다는 말이 문득 생각이 났다. 우리에겐 첫사랑의 설렘은 이미 막차를 타고 떠난 뒤였다. 그냥 어디에 사는지 모른 채 지내는 것이 어쩌면 더 아름답지 않을까 그런 게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그리워하고 그녀가 불쌍해서 혼자 가슴 아파하고 그런데 보고 싶어 하고 애태워 하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아직도 그에 대한 연민에 정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 혼자 그렇게 바보같이 왜 보고 싶고 그리워했는지 말이다. 그런 것들은 어쩌면 산산이 조각처럼 부서지고 세월은 우리를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어차피 인연이 없었던 것이기에 흘려버릴 수밖에 없으며 누구를 원망해도 소용없고 무엇을 탓해도 부질없는 일이었다.

한참 동안은 서로 말이 없었다. 너무 오래 않아 있기 미안해서 식당을 나왔다, 산길을 돌아 구비치는 강물은 무심히 바라보다가 강변 아래로 내려와 돌을 주워 강물 위로 멀리멀리 날려 보냈다. 그러나 지금에 내 심장에는 그리움 보다는 심술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녀에게 그냥 심통을 부리고 싶었다. 첫사랑을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나보다 더 잘살면 배 아프고 못 살면 심통이 있어서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바보겠지 하지만 현실은 항상 멀리 있는 것이기에 길바닥에 돌 뿌리라도 있다면 툭하고 차 내고 싶었다. 아스팔트 위의 차들은 어디론가 분주하게 달리고 있다. 산야의 붉은 나뭇잎들이 가을바람에 날리고 있었고 늦 시월 오후 햇살이 엷어서인지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큰길 언덕에 있는 작은 카페로 들어섰다. 카페에 들어서니 최성수의 해후 노래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커피 잔에 설탕과 프림을 적당히 섞어서 그녀가 내 밀었다. 거짓말 같지만 지금껏 한 번도 잊어 본적은 없다고 하면 그녀는 잠시 깊은 상심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다.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이렇게 만난 거 어떻게 생각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니 한번은 만나야겠죠."

"만날 생각은 있었어"

"만날 생각보다도 사실은 만나기가 두려웠지요."

""

"되돌아 갈 수가 없는데 만남 자체가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럴까"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어렵게 힘들게 지냈을 거 같았고"

"그게 무슨 뜻이지"

"불안하게 지냈을 거 같아요."

""

"그렇지 않아요. 남편이 다 알고 있는데"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내 몸은 그녀에게 가까이 가고 있었다. 불끈 무언가 내 몸을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지금 불륜을 생각했다면 아니 동수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키스라도 하고 싶었다.

"재희야"

""

"옛 일 생각나지"

"그럼요. 생각나 아주 또렷이."

"철없던 그 시절 지금은 돌아 갈수 없겠지"

"흐르는 세월이 그렇게 만들었죠."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어.“

"어떻게 변했을까 저도 궁금했죠."

"키 작은 단발머리 소녀가 어른이 되어서 내 옆에 있으니"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잘 모를 거 같죠?"

"으응! 하긴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

"그렇게 왜 몰랐을까. 남편하고 같이 15년을 근무 했는데"

"오래전 알고 있었지만 겁이 나서 혼자서 애만 태웠어요."

"재희가 먼저 연락했다면 일이 쉬웠는데"

"만나는 게 부담되기 때문에 연락하지 않았을 뿐 이예요."

"이렇게 만나려고 그랬나?"

"지나보면 그때가 좋은 거 같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거시에서 오래 살았을 테고 그리고 우린 더 가까워 질 수 있었겠죠"

"하긴 인연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지"

나는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재희야"

", 부인이 잘 해 주세요"

""

"행복 하세요"

"누구나 사는 거 그냥 그렇지 뭐"

"어쨌든 자네는 행복해야 돼"

그녀는 친정 때문에 한 걱정을 한다. 90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퇴직하고 고향에 있는 양로원에 있다고 했다. 두 번째 재혼한 새 어머니가 재산을 모두 갖고 집을 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맏딸인 그녀가 아버지의 생활비를 보내 준다고 했다. 퇴근길 차가 밀릴 것 같아 카페를 나섰다. 그리고 서울로 차를 돌렸다. 그녀의 손을 내내 자동차에서 꼭 잡고 있었다. 한 손은 핸들을 잡고 한 손은 그녀에 마음을 잡고 있었다.

따스한 손이 전신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초조해서 할 말이 없었다. 이제 와서는 되돌릴 수없는 일이다. 마음이 자꾸 불안하고 무엇에 쫒기는 느낌이었다. 만남이 만남으로 끝내야 하는 현실을 착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 했다. 첫사랑의 그리움은 현실에선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어떤 말도 아무런 도움 없기에 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곤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차는 부지런히 서울로 가고 어느덧 양수리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변 양쪽으로 무수한 차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녀 마음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해가 질 때 까지 있고 싶었다. 이대로 헤어지기가 너무 싫었다. 양수리 강변 두물머리 유원지에서 차를 세웠다.

강물위로 저녁의 뽀얀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해는 서쪽 산등성을 얼마 두지 않았고 바람이 쓸쓸하게 등골 속으로 내려온다. 낙엽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힘없이 뒹굴고 있었다. 강물위로 낙엽이 힘없이 떨어지면 파문을 일며 뱅그르르 물위에서 헤엄을 친다. 일요일이면 사람들로 한창이던 가게들도 한가하게 썰렁했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다면 얼마나 삶이 삭막하고 적막할까 생각해 보았다.

강바람이 휭하니 달려 나왔다가 돌아가고 다시 달려 나오고 그렇게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산한 유원지가 을씨년스러워서 그냥 가는 게 좋다고 했다. 간이 찻집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싶었지만 그냥 그 곳을 빠져 나왔다. 양수대교 아래로 북한강이 흘러 내려오고 강물 위에는 저녁 햇살이 그 위에 있었다. 힘차게 4차선 자동차 전용 도로에 올라섰다. 서울이 가까워 오면서 차가 더욱 밀리고 있었다. 몇 번이나 두리번거리며 그녀 얼굴을 자꾸 여러 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손이 내 얼굴 쪽으로 향하더니 앞을 똑바로 보라고 고개를 돌려준다.

"재희야"

"왜 그래요"

"자꾸 그러지 마세요. 저도 불안해요."

"미안해"

그녀 손을 세계 꽉 잡는다. 사랑한다는 말 따위는 어울리지가 않았다. 열차가 떠난 지금은 소용없어서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차는 팔당대교를 건너 하남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차는 하남 시내를 벗어나 어느덧 서울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진 것이다. 차는 점점 더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움이 가득 쌓여 있을 뿐 어떤 위로의 말도 필요가 없다. 그냥 만남으로 행복을 느껴야했고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기에 아무 할 말이 없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첫사랑 소녀를 만났지만 그냥 담담할 뿐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아쉬움만 가득했다. 담고 또 담아도 부어도 또 부어도 모자란 사랑 살아온 내 삶에 일부였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난 세월이 활동사진 영상으로 머릿속을 스친다 하여도 환상으로 남아야 했다, 모든 게 끝나는 작별의 순간이다.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한다면서 내 마음은 미련을 놓지 못 하고 있었다.

"꼭 한번은 부담 없이 다시 만나고 싶다."

"만남이 잦으면 안돼요. 위험해서

"그렇지만 여기서 접기엔 너무 아쉬워"

"추억으로 가슴에 남아 있으면 되잖아요.“

"그래도 보고 싶을 때 한 번씩 연락 할지도 몰라"

"미안해요. 자꾸 그러면 멀리 할 거예요.“ -

"재희씨"

"남편이 더 이상 알면 곤란해요"

"그건 나도 알아

욕심이 화를 키 운데요.”

그게 욕심일까

"우리 그냥 여기서 헤어져요. 전 지하철 타고 갈게요"

"아쉽다. 조급만 더 있다가자. "

어쩌면 철없는 바보 같았다.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 그녀 마음을 시험하는 것처럼 마치 엄마 곁은 떠나는 어린아이 같았다. 아쉬움에 두 손을 꼭 잡았고 놓지를 못하고 있었다.

"년 말쯤에 한번 연락할게"

"안돼요. 정말 그러면"

""

"한번 만나면 또 만나자 할 거잖아요."

"그런데 보고 싶으면 어떡해"

"이제껏 잘 지냈잖아요. 참아야 해요. 이렇게 자꾸 보채면 곤란해요"

"미안해 내가 바본가"

"집에 사모님도 있고 저도 남편 있어요."

"그런 걸 모르는 내가 아니잖아."

"자꾸 그러면 혼란스러워요"

"그냥 미안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내 얼굴 지금 실 컨 보세요.“

그리고 그녀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얼굴에서 눈물이 고이더니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이제 헤어지기 싫은지 그녀도 눈물을 보였다. 자동차는 어느덧 지하철역에 도착을 하였다. 정말 보고 싶은 소녀였지만 이제는 보내야하는 순간이다. 그냥 그렇게 잊혀 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에겐 있었지만 현실을 외면 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한마을에서 3년을 같이 살았고 그래서 처음으로 이성이 뭔지 알게 했던 여자이다. 그리고 세월은 세 번을 훌쩍 뛰어 넘어서 30년 만에 직장 동료의 아내가 되어있는 그녀를 만났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야 돼

"건강하세요. 그리고 한때 좋아했던 동생이 있었다고 기억해 주면 그것으로 전 감사하고 그리고 행복해요"

"재희야"

"오늘 정말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어딘가 살아 있다면 다시 꼭 만나겠지"

나 때문에 술 많이 하지 말고 예전처럼 그냥 잊으세요."

"재희야 정말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알았어요. 조심해서 가요."

쓸쓸한 미소가 길어지지 않도록 정신을 차렸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는 듯 태연하게 그녀와의 작별을 해야 했다. 어떤 여유의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그렇게 헤어지고 있었다. 이 손을 놓치면 영영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저어 내릴게요.“

"그래 잘 가"

그녀가 자동차 문을 열고 내렸다.

언제 다시 볼 수 없는 그녀를 이렇게 보내선 안 되는 것인데 하며 요동치고 있었다. 마음이 순간 동요되어서 것 잡을 수 없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자신을 다스리며 채찍 해야 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어도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안녕히! 가세요.”

"재희야

기쁘게 보내기 위하여 억매인 가슴을 다스려야 했다. 그녀가 가던 발길을 다시 와서 손을 잡는다.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서운한 마음에 서로가 울컥했다. 사랑은 그저 보잘 것 없는 하나의 흉물인데 사랑 때문에 속상해하고 아파 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이었다.

"준호 오빠.”

"재희야"

아니 어떤 말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운전 조심해요"

"잘 가 내 생각 많이 하고"

이게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길게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라고 하는 내 작은 목소리는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얼마 후 그녀는 내가 꼭 쥔 손에서 힘없이 떨어져 나갔고 지하철역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는 총총히 걸어 내려갔다. 올림픽공원역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까만 머리끝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목이 메고 이런 게 사랑일까 잠시 생각하면서 한동안 자리에서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를 천천히 돌려서 출발하였다.

내개 사랑이 무언가를 처음으로 느끼게 한 여인과 오랜만에 재회를 하고 차후에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집으로 가는 올림픽 도로 길가에 핀 늦가을 코스모스가 바람에 멋대로 흔들리고 거리의 나뭇잎들도 지나간 사랑처럼 가을빛에 누렇게 바래있었다.

 

 



 

4.

다음날 아무렇지 않는 듯 즐거운 마음으로 회사를 출근했다. 이제 누굴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당당하게 하려 했다. 박동수에게 어떤 나쁜 감정이나 질투심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런 이유로 그를 미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또 하나의 여자 아내가 내 곁에 있는데도 마음 한쪽이 텅 비어 있었다. 그렇게 세월은 나를 바보처럼 만들었고 겨울이 끝나도록 그녀에게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 잊을 수 있을까. 내가 그녀와 결혼해서 같이 살았다면 행복했을까 그 생각을 문득 하고는 혼자 픽씩 웃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비로소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요 며칠 사이에 하나에서 또 하나를 덤으로 얻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내게는 장난감이 두 개 있는 것이다. 하나는 온전히 내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잠시 빌려준 것이다. 다른 사람이 싫증나서 쓰다가 버리면 찾아오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내게 조그만 힘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살아가는 삶이 재미없고 무료하면 누군가를 사랑해보라는 말도 생각이 났다. 예전보다 회사 생활에 충실했다.

가능한 업무로 인하여 박동수와 부딪히지 않으려 했다. 이유 없이 미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감정이나 질투심을 보이지 않기로 다짐 했다. 그런데 어두운 그녀의 그림자가 마음에 걸렸고 잘 웃지 않던 얼굴과 먼 산을 바라보던 모습에 한동안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그 깊이를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그 사람의 행복은 그 사람이 찾아야 하기에 더 이상 관여할 사항이 아니라 생각했다. 세월은 나를 바보로 만들었던 그해 가을을 지나서 겨울은 보냈고 이듬에 봄이 돌아 왔다.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 그를 잊을 수 있을까하며 생각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보고 싶은 생각이 가슴속으로 가득했다. 섣불리 전화해서 남의 아내를 다짜고짜 만나자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해서는 안 된다고 자책을 했다.

마음 한쪽으로 뭔가 비어있는 외로움을 술로 달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집념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회사에서 해외 공장에 나갈 연수사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해외 나가면 모든 잊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신청 했더니 다행히 선발이 되었다. 가는 곳은 중국 텐진 공장으로 출국 날짜가 4월초로 결정 되어 있었다. 그래 사랑도 미움도 세월 속에 그렇게 묻혀 가는 것이기에 모두를 잊고 싶었다.

현실에 충실하며 내 삶을 열심히 살아야지 하며 바삐 출국 준비를 서둘렀다. 장기 근무라서 출국 전 한번은 그녀를 보고 싶었다. 만날 수 없다는 현실에 불안하며 그리운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출국 며칠 전에 용기를 내서 전화를 하였다. 2년간 해외 연수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가기 전에 한번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 그녀는 이미 남편에게 해외근무 소식을 들었다고 하며 잘 다녀오라는 말과 함께 냉정하게 거절하려는 눈치였다. 그래서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며 돌아 올 때 까지 잘 있으라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 했다. 그쪽 사정을 잘 알지도 모르면서 일방적인 욕심이 어쩌면 그녀를 갈등 속으로 몰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더 이상 치근대지 않기로 했다. 혼자서 출국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출국하는 날 공항에 도착하니 같이 갈 일행들은 벌써 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가족이 나와서 뭔가를 챙기고 있었지만 괘념치 않고 정신은 다른 곳에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비행기 출국이 시작 되었다. 아쉬움에 안 오는 게 아닐까 하고 자문자답하며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대합실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그녀를 그래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보고 싶은 소녀 그녀가 저쪽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얼른 그 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냥 행복감이 잠시 전율을 타고 내려와 앉았다. 늦게라도 나와 주니 고맙고 반가움에 가볍게 포옹을 하였다. 보는 사람이 있을까하는 생각에 장소를 급히 피했다. 마음이 몹시 편해지고 따스함이 몰려왔다. 그녀가 갑자기 선물을 불쑥 내 민다. 일행들 땜에 긴 시간의 이야길 나눌 수 없어서 그냥 고맙다는 애길 몇 번씩 하고 말았다.

"고마워 나와 줘서"

"안 올까 하다가 나왔어요."

"미안해. 나 오라고해서 이렇게 보고 가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

"지난번 춘천 갔을 때 미안 했어요"

"뭐가"

"아녜요 좀 더 편하게 해야 했는데"

"걱정마 다 알고 있으니까"

"잘 다녀오세요. 건강하시구요"

"출장 다녀와서 우리 한번 꼭 보자."

"알았어요."

"보고 싶으면 어떡하지"

"얼른 들어가세요. 다른 사람들이 찾겠어요."

"그래 잘 갔다 올게"

건강 하세요

재희야

오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지난번처럼 또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그만 두는 것 같았다. 갑자기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잘 들어가라고 그녀에게 악수를 건네고 일행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 왔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기분 좋게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선물 가방을 열어보니 속옷과 양말 이였다. 목적 없이는 개인적으로 갈 수없는 나라 중국 공산국가에 여행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다.

그 만큼 세계가 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서울올림픽 이후 중국과 수교해서 지금은 여행이 자유로워졌다. 서울에서 2시간 거리의 중국은 국내 인건비 상승에 따라 한국 기업들의 새로운 투자 대상국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우리 회사도 텐진에 공장을 갖고 있다. 모든 문화의 전래는 중국에서 부터 우리에게 전해졌고 또한 역사의 시작도 중국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중국을 대국으로 섬겼던 과거 역사에서 그들에게 좋은 인상은 없었다.

중국은 12억의 거대한 인구와 공산주의 체재로 생활이 풍족하지 못했다. 얼마 전 우리가 일본 기술의 영입에 의지했던 것처럼 중국도 주변국가의 기술투자를 받아 들여 그들과 삶을 같이하고 있다. 비행기는 서해 바다를 지나더니 어느새 텐진 공항에 내려놓았다. 국제공항 청사는 비좁고 초라했다. 우선 달라진 말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출국장에서 간단한 입국검사를 마치고 나오니 회사 직원이 마중을 나왔다.

고생이 많지요?”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하며 반갑게 악수를 청 한다. 대합실을 나오니 무수한 한문 글자 간판을 바라보니 지금 내가 중국 땅에 서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였다. '아 이게 거대한 중국이구나.’ 하고 바라보니 그 옛날 역사책에서 보았고, 그리고 TV에서 보았던 거리 모습과 차량들이 내겐 무척 초라하게 보였다. 회사로 가는 자동차에서 비치는 거리 풍경은 마치 60년대의 우리나라 시골의 면 소재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차가 지날 때 마다 뿌연 먼지가 차를 뒤 따라 왔다. 서청개발특구에 자리 잡은 세일전자는 새로 신축한 건물로 깨끗했다.

텐진은 중국에서 상하이, 베이징 다음으로 1000만의 대도시라고 한다. 시야로 산이 보이지 않은 막막한 평원 위에 시가 자리하고 있었다. 땅이 넓어서 그런지 도로 사정은 비교적 잘 되어 있었다. 시내를 중심으로 하여 3개의 외곽 순환선이 있으며 땅의 지표가 4m라 거의 물이 흐르지 않는다고 먼저 와있던 회사 직원이 묻지도 않는데 열심히 자랑처럼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 말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온통 조금 전에 헤어진 그녀 생각뿐이었다. 세찬 바람과 함께 오가는 사람이 없어서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공산국가의 특이한 빨간 벽돌집,

그리고 건물에 달린 한문 간판과 오성기가 무심하게도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때문에 양파 망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 모습에서 측은한 느낌까지 들었다.

년 강수량도 500mm 정도로 매우 건조 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자동차가 지날 때 마다 길에서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해외근무를 시작 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저녁에 일이 끝나면 한국식당이나 무도장에 찾아가면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일요일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중국내 여행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월급은 한국에서 집으로 보냈지만 이곳에서 주는 수당은 유흥비로 모두 탕진하였다.

70년대 일본 사람들이 한국 와서 돈을 물 쓰듯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랬다. 신흥경제국가로 올라선 우리나라와는 달리 문화생활에 들어가는 비용은 거의 같은 물가 수준이었다. 이제 한국을 떠나 온지 어느덧 수개월 지났다. 그 사람이 보고 싶어도 참아야 했으며 연락 할 수도 없었다. 어느덧 근속 일 년을 보내고 휴가차 잠시 귀국하게 되었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 가 보니 뜻밖에 박동수가 사표를 내고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이직한 다른 곳을 알려 주었지만 이곳을 떠난 사람에게 이유 없이 찾아 갈 수는 없었다.

그녀가 근무하는 초등학교를 찾아 가고 싶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꼭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편하게 해주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2주간 휴가를 마치고 쓸쓸한 발길로 다시 중국으로 출국했다. 중국에 들어와서도 왜 그들이 내 곁을 떠났는지 여러 가지 궁금했으나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정말 보고 싶은 그녀를 만나서 그냥 좋았는데 그래서 가끔은 보고 싶을 때 한번 만나서 친구처럼 차 한 잔으로 추억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솔직한 욕심 이였다. 그냥 옛날 소꿉친구로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내 곁은 떠났기에 그런 소박한 꿈은 모두 사라졌다.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먼저 다른 곳으로 떠나서야 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이 먼저 떠났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

 

 

5.

그 후 마지막 1년의 해외 연수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우리나라가 이제껏 생각지못했던 경제혼란 IMF가 터지자 세상이 많이 변해가고 있었다. 복잡한 경제 불황속에 그녀를 찾아 볼 생각은 전혀 하지 못 하였다. 그리고 애써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냥 모른 체 하는 게 그들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3년 후 회사에서 명퇴라는 올가미에 밀려나서 나도 결국 퇴직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새로운 국내정세 외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창업이나 재취업에 관심을 갖는 복잡한 경제 환경에 부딪치면서 서로가 경계를 하게 되니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이런저런 회사들이 부도났다고 뉴스에서 연일 보도를 했다. 창업을 한 친구들도 얼마 못가서 가게 문을 닫고 경제가 한동안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아는 모든 사람들도 치열한 삶의 경쟁 속에서 하나둘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보고 싶은 소녀는 내 마음속에서 잊혀 가고 세월은 다시 또 몇 년을 더 흐르고 있었다항상 늘 소년처럼 꿈을 같고 그리워했던 첫사랑 소녀를 만났지만 내게 얻어진 것이라곤 하나 없었다. 오히려 그리움으로 한동안 더 머리만 복잡해졌다보고 싶다는 그리움도 세월에 장사가 없듯이 천천히 그렇게 잊혀 가고 있었다. 그녀와 어렵게 만남을 했지만 어떤 인연도 만들지 못한채 멋쩍게 두 번씩이나 이별을 한 셈이 되었다.

첫사랑이란 어쩌면 그리움이라는 그것 하나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다만 어딘가에서 나처럼 그 옛날을 그리워하며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고 같은 하늘 아래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겠지 하며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꼭 만나리라는 생각하며 그렇게 또 다시 4년이란 세월의 망각에 강을 바라보며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를 잊혀 진 세월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 7년을 다시 보내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비보가 들려왔다. 얼마간의 바쁘게 삶을 이어오던 20071월 겨울 어느 날 인숙에게서 한통에 전화를 받았다. 재희와 초등학교에서 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 졸업을 했고 중간 중간 심부름을 잘 해주던 그녀였다.

시골서 자랄 때는 잘 따라 다니며 함께 놀러 다니기도 했던 인숙은 결혼 후에는 사는 방법이 달라서인지 만나기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이런저런 안부를 묻던 그녀가 뜻밖에 소식을 내게 알려주었다.

"저기 있잖아 재희

"응 갑자기 게는 왜"

"오빠 놀라지마"

"뭔데"

직감에 그녀가 남편과 이혼을 하지 않았나하고 혼자 지례 짐작을 했다.

"있잖아"

"으응"

"재희가 죽었대요. 얼마 전에"

""

"다른 친구에게 나도 들었어. 암으로 죽었대. 취장암 이래. 강남 삼성병원에서 아파 보지도 못하고 고생 없이 지난 가을에 그냥 그랬었나봐. 안됐지 그치"

그녀 혼자서 지껄이고 나는 듣기만 했다. 전화기를 잡은 내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저기 성남에서 용인 가는 쪽에 있는 공원묘지에 있는데 한번 가 봐야지"

그러면 그때 김포공항에서 핼쑥한 그녀 모습이 마지막 이었다.

행복해야 하는데 어찌 이런 애련한 일이 생기다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어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가슴이 울컥 메여왔다.

"인숙아 그렇다. 좋은 얘기도 아닌데 지금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잖아."

"그래도 예전에 오빠가 좋아 했잖아"

"그거야 다 지난 일이지 옛날이고"

나도 모르게 애써 인숙에게 내 속마음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냥 할 말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지금 전화 해주는 건데"

가슴이 또 다시 메여오고 있었다.

"안됐구나."

"게 이야길 들어 보니까 참 불쌍해"

30년 만에 재희와 다시 만난 것을 인숙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또한 재희 남편과 한 회사에서 같이 근무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게 아버지도 얼마 전에 돌아 가섰대. "

"듣고 있어?"

"이야기해 듣고 있으니"

"이런저런 마음고생 많이 했나봐.“

게는 왜 그렇게 복이 없지 응

글쎄 말이야

얼마 후 전화를 끊고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갈 수가 있나 정말 보고 싶었던 그녀였는데 두 번의 만남에서 정겨운 시간을 갖지 못 했고 따뜻한 가슴을 그녀에게 안겨주지를 못 했다. 그냥 모든 게 그냥 미안했다. 한동안 마음의 갈등으로 예전처럼 며칠 잠을 이루지를 못했다. 그러나 마음은 어느새 그녀에게 천천히 가고 있었다. 봄이 막 시작되는 3월 마지막 일요일 한식을 며칠 앞둔 주말 그날따라 햇볕이 참 따스했다. 아무래도 가슴을 열고 와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쓸쓸히 혼자서 살고 있는 성남공원묘지를 찾아 갔다.

작은 비석에는 學生宋在姬支墓 20051012日卒 이라고 씌어 있었다. 겨울을 보낸 그녀의 안식처에는 아직 잔디가 푸르게 나오지 않았지만 산 아래 멀리 바라 볼 수 있는 아담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문득 이런 글이 생각났다. 피천득의 '인연' 에서 그가 흠모하던 여인을 30년 만에 일본서 세 번을 만난 이야길 쓰고 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그토록 흠모했던 여인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것을 안 피천득은 아니 만났어야 했다고. 그래서 심란한 마음을 소양강에서 풀어 보려는 심통 난 남자들 마음을 그린 글이다. 중학교 때 만났던 정말 보고 싶은 소녀와 헤어진 후 세 번을 만났으니 처음부터 아니 만났어야 했는지 모른다. 녀를 30년 만에 처음 길동에서 만났고 그리고 이듬해 중국 출장을 갈 때 공항에서 두 번째 만났다. 그리고 다시 한동안 소식이 끊어진 후 다시 10년이 지나서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되니 정말 얄궂은 운명이었다. 이제는 말문이 막혀서 다른 어떤 말로도 표현 할 수 없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언제나 좋은 만남이어야 한다. 하지만 세 번째 40년 후의 만남은 인생의 허무함을 안겨주는 것으로 우리는 만나지 않았어야 할 사연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행복해야 하는데 죽음의 끝에서 이렇게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니 가슴이 메어지도록 아파왔다. 한참 재미있게 살아갈 지천의 나이에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듯 아이들이 아직 다 자라지 않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녀도 어머니처럼 세상을 일찍 등지게 되었다. 어머니가 당신의 몫까지 주어야 했는데 세상은 참으로 야속했다.

그녀에게 무어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후레지아 꽃을 한 아름 크게 사서 그녀의 집을 온통 노란 꽃으로 장식해 주었다. 잘 가라고 좋은 곳에 가라고 눈물을 보였고 내 팔로 다 역을 수 없는 아직 잔디가 돋아나지 않은 그녀의 집을 한 아름 얼싸안아 주었다. 그녀와의 만남의 이렇게 끝이 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만나지 않고 내 기억의 추억 속의 한 페이지로 간직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를 해도 이제는 소용이 없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잠시의 순간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그녀가 아파 할 때 병원에 한 번도 찾아가지 못 했으며 이런저런 부담을 그에게 안겨준 채 내 욕심만 채웠다. 참 인연 이라는 게 그런 거구나 하면서도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되면서 40년 전 추억이 아련하게 머릿속에서 활동사진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내 젊은 시절을 푸른 마음으로 이어주었고 지금까지 첫사랑을 동경하게 만들어 주었고 늘 그리워하며 지내도록 해 주었다. 참으로 어렵게 다시 만나서 첫사랑이라는 것을 잠시 느끼게 해주었지만 그것을 행복하게 오래도록 이어 주지는 못 하였다. 만남과 인연은 하늘의 뜻이려니 내 의지와는 다르게 가는 것, 결국 이렇게 헤어지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그녀는 잠시 추억을 안겨주고는 떠나기에 어떤 이야기도 이여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랑 이라는 게 이루어지는 사랑과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어느 사랑이 더 소중하다고 그 어느 사랑이 더 가슴 깊이 각인된다고는 말 할 수가 없었다. 즉 그 귀중함의 가치를 따지기도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일단 상대의 마음이 내 것이 되고 정말 내 사랑이 되었다고 느끼게 되면 너무나 가볍게 그 가슴을 쉽사리 떨려하며 간절히 이루어지는 사랑이 되어 달라고 눈물짓던 일들은 쉽게 잊어버리게 한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 더 오랜 기억나게 하는 게 틀림이 없다. 누구나 이루고 싶었던 첫사랑 이지만 결국 헤어짐으로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은 첫사랑을 그렇게 가슴깊이 아련히 색인하게 만들고 있다.

십년 이십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영원함의 존재를 위해서 어쩌면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사람들이 원했는지도 모른다. 왜냐면 정작 이루어지게 되면 너무나 쉽사리 사랑의 소중함을 곧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루어 질 수없는 사랑이 있어서 조금은 힘들더라도 아주 오래도록 애절함의 아쉬움이 심장을 타고 흐르는 것으로 더 위안을 받고 살아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사랑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정말 보고 싶은 소녀는 그렇게 내 곁에서 멀리 떠났지만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그리워 한다는 것, 자기 자신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참 좋은 일이다. 그 사람이 나를 생각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 사람을 기억하고 떠올려 주면 내게도 분홍빛 추억이 있었던 가 스스로 흐뭇해 질 것이다. - -


 긴글 읽어주어서 고맙습니다.

풀레이 누르면 'All for the love of a girl' 음악이 들려옵니다.

 솔새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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