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제1 詩冊

홍시

시인김남식 2017. 10. 27. 15:37

 

홍시 솔새김남식

안마당 한쪽 귀퉁이
그리 많지도 않은 고추며
무말랭이를 말리시던
쪼글쪼글한 어머니의 손

속바지 주머니에서
꼬기 작 한 돈
내 손에 꼭 쥐어주며
그저 열심히 살라 하셨는데.

겨울 오기 전에
서울 간 아들 보고 싶다며
기다리고 기다리다
문 여는 소리에 쫑긋하더니

이제는 되었다는 듯
눈 감으실 제
입 닦던 손수건
똘똘 그 손에서 떨어지고

감나무에 달려 있던
홍시 하나
아들오면 준다 하셨는데
바람에 그만 떨어지고 마네 

 

 

 

홍시 詩作 노트  

 

나훈아의 노래 홍시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 엄마의 생각이 절로 묻어나는 곡이다.

홍시가 열리는 가을이 되면 라디오에서 여러 번 들려주는 노래이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눈이 오면 눈 맞을 세라 비가 오면 비 젖을세라

험한 세상 넘어질세라 사랑땜에 울먹일 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도 않겠다던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홍시에 대한 눈물 나는 추억의 한토막이 내게도 있다.

먹을 게 그리 흔치 않던 그때 그 시절 우리 집 뒤 곁에 서 있는 감나무 하나 가을이 되면 주렁주렁 달린

땡감나무에서 하루에 두 세 개 씩 홍시가 열렸다. 대가족 시대인 당시는 어느 집이나 조카를 비롯하여

형제들 사이에서 먼저 따 먹는 사람이 곧 주인이었다.

또한 어느 정도 홍시가 될 무렵이면 서로 자기 것이라고 먼저 찜을 해 놓기도 했다. 홍시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장대로 따는 경우도 있지만 익어서 저절로 떨어 질 때도 있다.

땅에 덜어지면 터져서 먹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이전에 따서 며칠 보관했다가 먹으면 꿀맛 같은 맛을 볼 수가

있어서 간식으로는 으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것이라고 찜 했던 홍시가 다른 사람이 따 먹는 경우는 서로 싸우기도 했다.

특히 엄마가 빗자루를 들고 동생 것을 따 먹었다고 형을 때리려고 쫓아다니거나 또는 조카 삼춘사이도

그때는 서로 다투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세월은 10년이 지나갔다. 엄마는 할머니가 되고 삼춘은 학교를 졸업하고 아니 아들은

서울로 돈 벌러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추석 명절 시골에 내려오면 어디다 숨겨놨는지 알 수 없는 곳에서

홍시를 서너 개 꺼내 주면서 조카들 몰래 먹게 하였다.

 

과일이 흔하지 않던 시절 홍시가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엄마는 그 홍시를 아들 주려고

수건에 감을 쌓아서 장롱 깊숙이 넣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홍시가 너무 물러 어머니에 옷을

그만 망가지게 되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다음해도 홍시를 장롱에 넣어 두었다.

홍시를 찬장위나 실겅에 바구니에 담아 이곳저곳 숨겨 놓았지만 누군가 꼭 찾아 먹었다.

그래서 장롱이 제일 안심이었다. 아들은

'어머니! 조카들에게 주고 다시는 장롱에 넣지 마세요.' 했지만 어머니는 한동안 홍시를 계속 장롱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고향에 다녀 갈 때면 어머니는 속곳주머니에서 쌈짓돈 한 뭉치를 꺼내 주시며

어떤 일이 있어도 건강해야 한다며 그저 열심히 살라고 동구 밖 버스정류장까지 눈물로 배웅 하셨다.

그리고 또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어느덧 아들 나이 37세 어머니 나이 80세 엄마는 이제 노쇠하여

더 이상 감나무 홍시를 지킬 수가 없었다. 그해 여름 동산 건너에 있는 아버지 곁으로 어머니는 가셨다.

 

어느 어머니인들 자식 키울 때는 그러하지 않을까마는 늘 미안함을 갖고 평생 지내야했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될 8남매의 막내로 불혹의 나이에 낳았다. 어려웠던 그 시절 문제는 내가 어려서부터

이상하게 잔병으로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는 여러 가지 합병증이 생겨서 더욱 더 힘들게 하였다. 그러다보니 병원비 때문에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그럴 때 마다 외톨이가 되었고 쓸쓸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내가 서울에서 시골에 다녀가는 날이면 버선발로 사립문 밖까지 마중 나 오셨다. 결혼해서 살게 되니까

양념장. 간식거리등 형수 몰래 먹을 것을 미리 감추었다가 버스 정류장으로 먼저 나가셔서 기다리던 어머니였다.

어쩌다 서울에 오시면 보따리가 여럿 이었고 오래 계시다 가라 하시면

 '아니다 오래 있으면 느이 형수가 아예 서울서 살라고 할게다. 느그 아버지가 죽으면서 어디든 가지 말고

큰형한테 있으라고 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면서 줄곤 막내아들만 걱정 하셨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위급한 상황에서 잘 벗어

날 때면 늘 어머니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어머니는 인정이 많으셨다. 손님이 와서

밥을 먹으면 꼭 반찬을 새로 만들어 주었고 밥은 다 먹으라고 먹던 밥에 덥석 물을 말아 주었으며

이불은 꼭 새 것으로 내 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모자라 그것을 늘 가슴에 안고 있다.

어느 자식인들 내 어머니가 감사하고 고마울까 마는 나 때문에 고생했기에 더욱 생각나게 한다.

살아 계실 때 효도하지 못하면 돌아가신 후 후회한다는 말이 맞다.

어느 해인가 보너스를 탔는데 어머니께 처음으로 현금이 아닌 10만원 수표 한 장 드렸더니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나신 뒤 장 농을 뒤져 보니 그 수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쓰실 줄 몰라서인지 또는 아까워서인지 손수건에 1년을 고스란히 쌓여 있었는데 그걸 보고 눈물이 고였다.

보너스로 받은 수표 한 장을 드렸더니 써 보지도 못하고 가신게 몹시 아팠다.

내 생각으로는 어머님 성격에 아마도 아까워서 쓰지 않으신 것 같다.

 

요즈음 우리 세대는 자식들에게 처음으로 버림을 받고 부모님에게 마지막으로 효도하는 세대라고 한다.

그래서 더욱 더 부모님에 대한 효도가 더욱더 필요 할 때이다.

그러나 바쁘게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조금은 덜한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이제는 내 어머니 내 아버지를 기억하고 생각해야 하는데 세상은 자꾸만 이기주의적이고 배려가 부족해서 걱정이다.

부모 입장은 세월이 변해도 한결같이 언제나 똑 같다. 그저 나보다 더 좋은 삶을 살아 주기를 바라는 부모들이다.

요즘 자식들은 부모 마음을 알지 못해서 속상 할 때가 종종 있어서 아무리 가르쳐도 모른다.

자식들도 또 부모가 되어야 마음을 알아주겠지만 그때는 아무 소용이 없다.

가신 후에는 소용 없으며 반듯이 꼭 후회하니 자주 찾아뵙고 가끔은 늙으신 어머니에 손도 잡아 보고

어루만지며 핏줄기 불거진 까칠한 손이 오늘에 나를 만드신 우리 어머님들이기에 감사를 해야 한다.

혹시 바쁘다는 힘들다는 핑계로 어머님을 잊지는 않으셨는지요?

 

고된 삶의 여정에 지치고 세월의 무게에 마음마저 연약해진 늙고 병드신 힘없는 어머니에 손이 있을 뿐이다.

아내와 자식들 손을 잡았던 내 손으로 이제는 내 어머니에 손을 잡아 보고 어머니를 위해서

나를 사랑하신 내 어머니가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라고 말을 해야 한다.

그래서 어머님을 뵈 오면 며느리는 시어머님에 손을 남편은 장모님의 손을 덥석 잡으며

'어머님!' 하고 어리광 한번 부려 보세요. 아마 그 어떤 선물보다도 더 값지고 좋아 하시며 아주 흡족하실 겁니다.

"나도 자식을 키우니까 이제야 엄마 마음을 알겠다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그렇게 말하면 먹을 것을 하나 더 내 주시며 어머니가 많이 우실 겁니다.

부모님은 마음에 등불 정신적인 지주이기 때문에 제일 어려울 때도 생각나고 행복 할 때도 생각이 납니다.

살아생전에 효도를 못하면 돌아가신 뒤에는 반듯이 후회를 한다.

 

나훈아가 부른 홍시 그 노래에서 가을이 되면 어머니 생각을 더하게 해준다.

대 가수 나훈아가 노래는 참 잘 만들었다. 작곡과 작사 능력을 갖춘 대표적 싱어 송 라이터로 자리 매김한 그는

가요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서정적이며 애절한 노래를 많이 불렀다.

 

 

 

 

 

 

 

 

'습작 > 제1 詩冊'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0) 2017.10.30
모과  (0) 2017.10.29
은행잎이 지천으로 내립니다  (0) 2017.10.24
가을이 되면  (0) 2017.10.16
가을 소묘   (0) 2017.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