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추억소설

15.다시 부는 바람

시인김남식 2013. 12. 24. 19:49

15. 다시 부는 바람

 

그해 겨울은 정미도 다녀갔고, 그이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나고 있었다. 겨울이니만큼 의례히 눈은 몇 차례 하늘로부터 흩어져
내렸다. 어떤 때는, 어떤 때는 감질이 날 정도로 눈이 장독 위를 살짝 덮은 날도
있었다. 저수지의 물도 얼어서 단단함을 확인한 곳에서 동네 아이들이
겨울놀이로 한나절을 보냈고, 개울가에 얼음도 두께가 두껍게 얼었다. 그 위에
쌓인 흰눈들은 밤이 와도 하얗게 푸른빛을 발하며 포옹을 한 채로 이 겨울을
지키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었던 겨울이었지만 유난히 따뜻하게 지낸 기억이
난다. 충식씨는 무척 건강한 모습으로 지낼 수 있었고, 겨울 내내 우리는 시집을
줄곧 사들였다. 짧은 시귀절에서 혹은 긴 글귀 속에의 한 단어 한 단어에
매료되어 난로가에 앉아 긴 겨울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구절을
암송하기도 했다. 우리는 많은 시들 중에서도 특히 "사랑 초서"라는 시를 자주
읽곤 하였다.
  그이와 나는 서로 좋아하는 시를 하나씩 골라서 커피를 마시며 시를 주고
받았다. 그는 특이한 저음으로 한 구절을 읊었다.

  평생에 그 하나
  손 안댄 죄를
  죄 지으려면 그대와 나눠야지.
  마른 날 불벼락이
  모진 천벌을 그대하고 나눠야지.

  사랑은 귀한 능력
  내겐 그 힘이 없다고
  허공에 낙서 쓴다.
  오늘 다른 진실은 없다.

  내가 웃으면 좋아하는 구절을 읽었다.

  마음에 대답하는 마음
  영혼에 산울림하는 영혼
  이를 생각만 해도 나는 운다.
  굶주렸고 바보인 아이처럼.

 

나는 그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그의 무릎 덮개에 얼굴을
묻었다. 누구나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나이를 먹고 인생이란 연륜을 대가로
얻듯이 그와 나에게도 지난 날의 어려움은 추억으로 퇴색되어만 갔다. 
새해를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고 개울가의 얼음장은 얇아졌으며,
군데군데 넓직한 구멍으로 물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빨랫줄에 널려 있는 옷들이
햇볕을 받고 있었다. 아직은 시샘을 하는 겨울 바람으로 옷소매 아래에 고드름이
달려 있고, 동네 어귀에는 쌓아둔 눈이 흙빛이 되어 남아 있었다.
  봄에 대한 성급한 기대가 어디를 가든 해맑은 색채로 자극해 왔다.
  기다림의 애틋함에서, 정녕 봄은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 같았다.

  이윽고 봄은 곧 와 주었다.
  꽃샘 추위가 지나자 그이는 창문을 자주 열고는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거나, 방 문을 반 쯤 열고는 멀리 보이는 마을을 보면서 봄을 맞고
있었다. 그이가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나는 발을 꺼내어 방 문에 걸어
두었다. 혹시 마을 사람이라도 들어왔을 경우를 생각해서 방 문에는 반드시 발을
쳐 두어야 했다. 가느다란 대나무로 엮은 가리게 사이로 보이는 봄은 그에게
어떤 빛으로 와 닿을까. 그 빛은 누구에게나 보이지 않는 그만이 아는 색깔일
것이다.
  그해 봄은 나는 무척 바빴다. 익숙해진 회사 일로 정신이 없었으며, 어느 때는
그에게로 가서 세상 모르고 잠만 자다가 오는 날도 있었다.
  그즈음 종환씨는 사회인으로 완전히 기반을 잡고 있었다. 사십이 훨씬 넘은
중년 남자의 중후감도 풍겼고, 가정도 많이 안정을 찾아서 수유리에 꽤 괜찮은
집을 장만하였다고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순조롭고 빠른 속도로 승진을 한
종환씨는 점점 바빠지고 있었다. 일 주일에 한 번 정도 들렀지만 예전같이 오래
있지는 못했고,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갈 때까지 계속하곤 했다. 잘 참고
있던 그이는 가끔씩 혼자 마시는 술은 맛이 없다고 짜증인지 한탄인지 모를
소리를 혼잣말처럼 할 때가 있었다.
  친구가 찾아오지 않는 주말이면 그이는 유난히 심심해 했고, 나는 혹시나
하고 자꾸 밖을 내다보곤 하였다.
  그동안 종환씨의 힘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를 새삼 느낄 수가
있었다.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면서 종환씨의 여름 휴가가 가까워오자 우린 소중날을
기다리는 어린 아이들같이 날짜만 세고 있었다.
  나는 그때 심하지는 않았지만 자주 배가 아파서 진통제를 백에 넣고 다닌
정도였다. 더운 계절이긴 해도 식은 땀이 흐르고, 어느 때는 자리에 누울 정도로
배는 점점 심하게 통증을 일으키곤 했다.
  그에게 가서 통증을 감추고 있다가 서울에 올 때면 식을 땀을 하도 흘려서
집에 들어오면 기진맥진한 날이 점점 많아졌다. 어찌나 심해 가는지 허리를
펴기가 힘들 정도로 심상치가 않았다.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릴 무렵 나는 병원을 찾았다. 검사결과 급히 수술을
해야 된다는 진단이 내렸다. 우선은 급성맹장인 것 같지만 도중에 산부인과
수술까지 받아야 될지 모른다는 의사의 말이 있었다. 환자인 나보다 더 서두르는
의사에 의해 나는 그 자리에서 입원 수속을 한 뒤 바로 수술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수술대 위에 누워 수술 준비를 하고 있는 의사를 기다리는 동안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미처 그에게 연락조차 못한 것이 보통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부탁을 들어줄 만한 인상을 가진 간호원을 찾았다. 종환씨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후 간단한 맹장수술이니 걱정 말고 충식씨에게 잘 말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마취 주사를 맞고 나서 바로 긴잠에 들어갔다가 심한 아픔에 깨어났다. 나중에
들은 인턴의 말에 의하면 회복실로 옮겨진 나는 계속 그이만은 찾았다는
것이었다. 여섯 시간 동안 외과와 산부인과 의사의 집도로 대수술을 받은 나는
병실 생활을 시작했다.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너무
힘이 들어서 진통제만 찾았으며, 충식씨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도 침대에서
일어설 기력조차 일어나질 않았다.
  어머니는 그때 병실에서 처음으로 내게 팔자라는 말을 하셨다.
  "세상에 무슨 팔자가 그러나. 혼자 사는 것도 억울한데 그놈의 뱃속엔 웬 혹이
많았는지 모르겠구나. 자식 하나 낳을지도 않은 애가 복부 수술이라니 팔자도
기구하지. 언제나 좋은 날이 있을는지--."
  어머니는 병실에만 들어서면 침대 옆에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내색만 안하셨지 나로 인해 마음 고생을 무척이나 하고 계신 어머니는
대수술까지 받은 큰딸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르셨다.
  수술을 받은지 사흘 후.
  미음을 먹기 시작하면서 걸어도 된다는 의사의 말이 있었다.
  한 군데도 아니고 두 군데나 메스를 댄 상처 때문에 복대를 하고 겨울
일어나긴 했지만 걸음을 걷기란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그이에게 전화를 해야 될텐데 병 문안 오는 사람들로 병실이 조용할 순간이
없었고, 면회시간 이외에는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속만 태우고 있었다.
  전화 벨이 울리더니 어머니가 수화기를 내게 건네 주셨다.
  "누군데요?"
  내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수화기에서는 낯선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김윤희씨죠? 잠깐 기다리세요."
  잠시 후 종환씨가 나왔다.
  "윤희씨 나예요. 정말 맹장이에요?"
  종환씨의 걱정스러운 말보다 드디어 그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 무척
반가왔다.
  "맹장인 줄 알았는데 다른 데도 고장났었나 봐요. 지금은 괜찮아요. 친구분은 잘
계세요?"
  어머니가 계셔서 충식씨 이름을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 녀석 걱정할 때입니까? 수술은 잘된 거죠? 정말 괜찮은 거예요?"
  그럴 때 종환씨는 겁장이 같았다.
  "네, 괜찮다니까요. 친구는 어떻게 됐어요?"
  "걱정 말아요. 윤희씨 퇴원할 때까지 성남에서 출퇴근 할 거니까요. 충식이가
걱정을 여간 하는 게 아니니 빨리 일어나야 돼요. 나두 마누라가 보고 싶어
죽겠어요. 윤희씨 아픈 바람에 우리 부부는 생이별을 하고 있다고요. 알았죠?
빨리 나을 수 있죠?"
  사십이 넘은 남자의 마누라 타령에 웃음이 나왔으나 수술 자국이 당겨서 웃을
수도 없었다.
  "미안해요. 빨리 나을께요."
  "그래야죠. 괜한 걱정 사서 하지 말고 더운 날에 피서한다고 생각해요. 병실을
시원할 거잖아요. 언제 퇴원이죠?"
  "약 3주 후면 돼요."
  내 말에 그는 '야아--, 우리 마누라 큰일 났다'하면서 소리내어 웃었다.
  한 번도 종환씨의 우정을 잊은 적은 없었지만 새삼 그의 정다운 마음에 나는
감격하였다. 

 


3주일은 무척 길었다. 가시지 않은 통증과 충식씨 걱정에 신경까지
날카로와져서 간호하는 가족들도 무척이나 애를 써야만 했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날이 가고 퇴원하는 날이 되었다. 언젠가 추운 겨울 날,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 되살아 났다. 신경과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하던 그때에도 아버지는
차 안을 따뜻하게 해놓고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딸을 기다리고 계셨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이번에는 무더운 여름날 대수술을 받고 퇴원하는 큰딸을
기다리고 계셨다. 차 안은 냉방이 잘 되어 있었다. 차가 흔들릴까봐 지나가는
차들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운전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강한 부성애가
깃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너무나도 편했다. 숲을 연상케하는 거목들이며 테라스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꽃들이 그간의 고통을 조용히 위안해 주고 있었다.
  동생들은 마침 방학 중이라 모두들 나를 환영해 주었고, 아직도 상처 때문에
꾸부정하게 걷는 나를 부축해 주었다. 제일 먹고 싶었던 것은 커피였다. 막내가
끓여주는 커피 맛은 기가 막혔다. 동생들이 각기 자기 방으로 흩어지자 재빨리
전화 코드롤 꼽았다. 우선 그이의 목소리라도 들어야지 마음이 놓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딱 한 번, 그것도
아주 잠깐 통화를 했을 뿐 그와 나는 소식이 끊긴 상태였다. 신호가 울리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예요. 퇴원했어요."
  "그래? 고생 많이 했지?"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는 그에게 향한 내 열정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젠 괜찮아요. 당신은 어때요? 잘 계신 거죠?"
  "그럼. 나야 나쁜 게 뭐가 있었겠니. 야아, 이제 됐다. 퇴원했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미안해요. 난 일도 잘 저지르죠? 이제 건강할께요. 그리고 모레 병원에 갔다가
들르겠어요. 더운데 전기 아끼지 말고 에어콘 틀고 계셔야 돼요."
  "내 걱정을 말라니까. 너무 보고 싶어서 모레 온다는데 말리지 못하겠다. 그래도
많이 힘들면 더 있다가 와도 돼."
  "아녜요, 꼭 가요. 마음은 지금 당장 가고 싶어요. 지금 참고 있는 게예요. 그날
꼭 갈께요."
짧은 통화였지만 이젠 아무 걱정이 없는 것 같았다.

이틀 후, 병원에서 치료가 끝나자 약속한대로 그에게로 갔다. 날씨는 왜 그리도
더운지 땅의 열기로 인해 얼룩처럼 증기가 꿈틀거렸다. 복대를 두른 상처는 마치
단단한 끈으로 엮어 놓은 것 같이 걸음을 걷거나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팽팽하게 당겨왔다.
  여름 해는 지칠지도 모르는지 성남에 도착할 때까지 끄덕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이럴 땐 옷이라도 훌훌 벗고 수영이라도 했으면 싶었지만, 내 형편은
두터운 복대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 아니었다. 오겠다는 연락은 했었지만
뜻밖에도 충식씨는 마당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는
사람들이 오가는 시간에는 바깥에 얼굴을 비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이가
지금 나를 위해 마당에 나와 있는 것이었다. 멀리부터 내가 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와라. 상처 아프겠다."
  그의 걱정은 끝이 없었다. 놀라움에 말문이 막혔다. 천천히 그의 휠체어를 따라
방으로 들어서자 괜한 서러움이 일었다.
  "윤희야, 이리 와. 어디 상처 좀 보자."
  "흉해요. 아직 아물지도 않았구요. 겨우 실밥 뽑고 복대를 감고 있어요."
  "어때 임마, 이리 와봐."
  따뜻한 그의 손이 나를 이끌었다.
  "이것 보요. 흉하잖아요. 챙피하게--."
  그는 대답 대신 나의 상처 위에 입을 맞추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와 나, 우리는
그렇게 울고 있었다.
  "이젠 아프지 않아요. 나 때문에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요. 나는
사고뭉치라니까요. 뱃속에 혹은 왜 넣고 다녔는지."
  나는 그의 뒤로 가서 그의 머리카락에 긴 입맞춤을 했다.
  "수고했다. 이젠 사람 놀라게 하지 마라, 알았지."
  그는 목을 감고 있는 나의 손을 토닥거려 주었다. 종환씨가 궁금했다.
  "종환씨가 그동안 애 많이 썼어요. 내가 한턱 내야지."
  "말도 마라. 열 시가 넘어서야 와가지고는 마누라 보고 싶다고 별 소릴 다
하면서 웃기더라."
  그이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병실에 전화 걸어 가지고 절 보고도 그랬어요. 마누라 보고 싶으니까 빨리
나아야 된다면서 자기도 웃던데요. 종환씨 이젠 좋겠네. 마누라랑 같이 있게
되어서--. 우리 종환씨한테 전화해볼까요."
  그이가 다이얼을 돌리고 종환씨를 부탁하였다.
  "나다. 바쁘니? 윤희가 와 있다."
  "뭐? 윤희가 왔다구?"
  "걱정했던 것보다 괜찮구나. 그런데 윤희 큰일 났더라. 오리걸음을
걷드라구. 어기적어기적 하면서 말야."
  나는 그의 팔을 꼬집었다.
  "아아, 아야. 제 흉봤다고 꼬집잖아. 그래 바꿔 줄게."
  그이가 정말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며 나에게 수화기를 건네 주었다.
  "종환씨."
  "여어, 이제 살은 거예요?"
  "네, 살았어요. 종환씨도 살았죠?"
  "내가요? 내가 언제 죽었었나요?"
  "마누라 보고 싶어서 죽겠다고 했잖아요."
  종환씨 특유의 웃음소리가 수화기 속에서 크게 울리었다.
  "말 말아요. 매일 사내 녀석하고 잘려니 어디 무드가 잡혀야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더라구요."
  "세상에--. 하여튼 애 많이 쓰셨어요. 다음에 뵙겠어요."
  전화를 끊었다. 그이는 휠체어를 냉장고 쪽으로 밀고 갔다.
  "윤희야, 너 커피 마시면 안되지?"
  "괜찮아요."
  "내가 시원한 냉커피 타줄까?"
  세상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설레임이 상쾌하게 와 닿았다. 그의 한 손으로
타주는 냉커피 맛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나에게 퇴원을 했어도 워낙
대수술이었고, 수술은 그 뒷처리가 더욱 중요하다며 꼼짝도 못하게 하였다.
  이것저것 먹을 것을 권하기도 하고 앉은 자리가 불편하지 않을까를 줄곧
살폈다. 상처 부위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고 어린 아이 다루듯 겁을 주었다가는
이젠 괜찮을 거라고 위로도 하는 등 난리를 피웠다. 저녁 상 위에는 할머니의
정성이 애틋했다. 그의 밥위에 찬을 놓아 주면서 마주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이
그토록 큰 기쁨인 줄은 그날에야 알았다. 내게 있어서 평생을 두고 사랑하는
이는 하나뿐. 그로 인해 늘 목이 타는 사랑만으로도 나는 행복할 수
있었다.

  가을 가지 위에 내리는 풍요의 은혜와 기나긴 휴식으로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작업이 한창인 때에 우리는 그렇게도 원했던 종환씨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이는 자주 친구의 가정을 보고 싶어했다. 종환씨의 부인은 두어번 본
적이 있었지만 아들에 대해 말을 할 때는 그이의 표정은 진지할
정도였다. 수유리에 아담한 집을 구했다는 말을 듣고, 몇 번이나 가볼려고 계획을
세웠다가는 그이의 자신 없어하는 마음의 변화 때문에 포기하곤 했었는데
드디어 외출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이의 첫 번 외출에 할머니까지도 눈물을 글썽이며 좋아하셨다.
  토요일이라 일찍 퇴근한 종환씨와 함께 우리는 설레임으로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 밤이 서서히 시작되자 우리는 차에 올랐다. 종환씨는 잠실 쪽으로
들어서자 그이를 불렀다.
  "내가 왜 여태까지 이 생각을 못했지? 가끔 밤에 드라이브라도 할 걸
그랬다. 충식아 시내 한 번 나가 볼래?"
  "전혀 생각 없다."
  그이는 단호한 목소리로 친구의 권유를 거절하였다. 차창 밖으로는 눈길 한 번
안 돌리는 그이를 보며 소외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으며, 이 외출을 반대할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였다.
  차가 보문동을 지나 돈암동으로 접어들자 그이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삼양동
종환씨 집이나 화계사, 그리고 우이동을 가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이 지나던
길인가. 그러나 그날들을 그리워하는 일은 현실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 화계사 입구를 지날 때 종환씨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충식아, 아무 생각도 하지 마라. 누구에게나 다 추억은 있고, 또 힘든 현실도
갖고 있는 거야. 서로 힘들어 하는 일이 다를 뿐이지 사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이니. 그래도 우리 세 사람이 모이면 부러울 것이 없잖니. 말 좀 해. 임마,
자아식."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 세 사람을 생각하면 나도 행복하단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종환씨 집 앞에 도착을 하였다. 손님을 맞기 위해서인지
대문에는 외등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부인이 반색을 하며
나왔다. 종환씨는 그이를 휠체어에 옮겨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을
들어서자 거실의 꽃꽂이가 눈에 띄었다.
  저녁 식사가 아직 준비 중이라며 부인은 식당으로 들어가고 종환씨는
이곳저곳 우리를 안내하기에 바빴다. 나는 그이의 표정만 살피면서
따라다녔다. 서재 겸 거실로 꾸며진 방 안에는, 졸업식 날 학사모 차림의 건장한
두 청년의 기념 사진이 확대되어 걸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명륜동 아버님의
사진이 작은 액자에 담겨 있었다. 종환씨가 아버님을 무척이나 따르고
존경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이는 사진을 보더니 '자아식'하며 종환씨를
툭툭 쳤다. 두 사람은 그 사진 앞에서 지난 날을 회상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집 안 구경이 끝나자 종환씨는 도착할 때부터 실랑이를 벌이던 아들을 데리고
들어와 그이에게 인사를 시켰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종환씨의 어렸을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이 사내아이는 아빠를 쏙 빼어 닮아
보였다.
  "그래. 아저씨 얼굴이 흉해서 미안하구나. 내가 누군줄 아니?"
  "네, 아빠 친구에요. 저기 사진에 있는 사람이 아저씨잖아요."
  그이는 혹시라도 얼굴 때문에 아이가 놀랄지도 모른다며 안 만나겠다고 오는
길에 부탁을 했었으나 종환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이를 보자 그이는
조심스럽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고 있었다. 그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평상적인 몇 마디를 더 묻고는 아이를 내보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종환씨 부부는 하루만이라도 묵고 가라고 붙잡았지만
우리는 성남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이는 종환씨의 생활이 여유가 있어 보이는 것이 자기의
일이라도 되는 양 기뻐하고 있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공부하여 성공한
종환씨를 자랑스러워했다.

 

 

친구의 잘된 모습에 그토록 좋아할 수 있는 우정이
내게는 막연한 슬픔과 뿌듯함을 자아내게 했다.
  "윤희야, 종환이 사는 것 보니 참 좋더라. 그렇지?"
  "네."
  "너에게 미안하구나."
  "뭐가요? 종환씨 잘 사는 게 왜 저에게 미안해요?"
  그이의 말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빠와 엄마가 도어서 아이를 기르며 사는 가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윤희 너에겐 할 말이 없구나."
  "충식씨,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엄마가 되어 아이를 길러보지 못했다고 해서
불행한 건 아녜요. 그것 못지 않게 당신이 절 사랑해 주시고, 저 역시 당신을
사랑해요.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딨어요."
  "고맙구나."
  늦게 도착한 우리는 종환씨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그이의 팔베개를 하고 체취를 들이쉬며 평온하고 깊은
잠에--.

  아이는 엄마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때로는 서투른 딴전을 피우기도
한다. 아주 어려선 옹알이를 하려고 입을 방긋거리고, 걸음을 배울 쯤엔 카페트에
주저앉기도 하고, 물건을 잡고 일어서도 본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어디론가
가버려 엄마를 울리기도 한다. 나도 아이의 엄마가 된다면, 그이를 닮은 아이를
낳아 길러 볼 수 있다면--.
  그러나 나에겐 극히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의무가
제외되었다. 아무리 쏟아도 채워지지 않는 내 사랑의 우물, 난 그 앞에서도
때로는 허하니 비 그릇일 때가 있었다.

  열아홉 살에 그이를 만나 졸졸 쫓아다니던 나는 이제 삼십의 중반을 막
넘어섰고, 그도 사십이 넘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그이를 보고 있노라면 대상도
없는 울분이 치솟아서 가슴을 치게도 하지만, 살아온 날들을 생각할 때 그
무섭고 마치 죽음과도 같았던 수많은 고비를 어떻게 넘겨 왔는지 우리 삶의
과정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우리의 사랑은 꺼질 줄 모르고
불길을 더해 갔다.
  여느 부부와 사는 형태가 달랐을 뿐이지 분명 우린 부부였다. 그것도 서로의
확인되지 않은 사랑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리는 부부에 비하면, 사랑이라는 가장
소중하고 귀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더없이 행복하고 부유한 우리였다. 늘 정체를
알 수 없어 목이 타는 갈증은 있었지만 다른 여자들을 부러워한 적은 없었고,
내게 죽음을 가장하고 약수동 산비탈에서 침묵하던 그때 그이의 사랑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누가 사십의 나이를 불혹의 나이라 했지만, 그는 오래 전에 세상과 절교를
했으며, 나 또한 이미 세상 일에 미혹하지 않은 채 새삼스러울 것 없는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이젠 힘든 고비란 없을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평이했고 종환씨의 사회적 활동도 어려움 없이 잘 이루어졌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들었던 지난날 뒤에 감추어 두었던 고요한 정원이었다. 소슬 바람이
낯을 간질이며 담장 넝쿨이 키를 재며 올라가고, 진하지 않은 꽃향기가 섞여
열린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정원. 그런 정원 같은 날들로 우리는 또 한
계절을 넘겼다.
  그이가 어느 날 아침 눈에 띄게 얼굴이며 몸이 부어 올랐다. 간혹 붓는 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별다른 증세는 아니라는 그의 말에 걱정은 되면서도 그대로
넘어가고는 하던 일이었다.
  "충식씨, 병원에 가봐야겠어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괜찮아. 자고 일어나면 간혹 붓기도 하잖니."
  "그래도 진찰을 받아보는 것이 좋겠어요."
  "괜찮다니까.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신경 쓰지 말라구."
  그 사람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속으로 애만 태웠다.
  그때쯤 어떤 경우에는 며칠씩 자리를 비우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회사 일로
출장이라도 다녀오는 날이면 그의 걱정에 안전부절 못했다. 시간에 쫓기다가
일이 끝나면 그에게 가기를 서둘렀다. 급하게 서두르는 만큼 처음에 생각해
두었던, 이번에는 꼭이라는 계획을 지키지 못하고 그의 고집에 지기가
일쑤였다. 할머니께 자주 살펴봐 달라면서 심상치 않음에 걱정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붓는 증세 이외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채게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붓는 것만을 의심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진찰을 받게 할 궁리만 하였다. 그이는
기분이 자주 가라앉았고 웬지 우울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짜증스런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이가 그러는 것이 전혀 그것과는 관련이
있으리라고 짐작도 하지 못한 나는, 혹시나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나 하는
생각에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늘어 놓는 등 그의 기분을 풀어 보려고 애를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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