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 있는 제과점에 도착하자 학생들은 일찍 나와 있었다. "선생님, 결혼 축하해요." "선생님, 신혼 재미 어떠세요?" 학생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았지만 그들과 농담을 주고 받을만한 여우가 나에게는 없었다. 축하 인사에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고, 신혼 재미를 묻는 말에 '좋아'라고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연습일을 일요일로 해야겠다는 말과 몇가지의 계획을 간단히 알려준 후 황급히 제과점을 나와 버렸다. 빈 택시를 붙잡고 성남으로 향했다. 가을이었지만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탓으로 차 안이 더운 듯하여 창문을 조금 내렸다. 창틈으로 살며시 들어오는 바람은 이제 막 시내를 통과하는 나에게 충식씨의 숨결을 실어다 주고 있었다. 그를 만나러 간다는 기쁨에 내 가슴은 종잡을 수 없이 들떠 있었다. 택시가 잠실을 벗어나 송파를 지나면서 들뜬 마음이 점점 '그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는 나를 어떻게 대해 줄까?'라는 걱정으로 바뀌었다. 결혼의 진행 경위야 어찌 되었건 나는 충식씨를 두고 엄연히 결혼을 했고, 오직 그를 바라보며 맹세코 간직해 온 순결도 이젠 그이 앞에서는 떳떳치 못하고 부끄러운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밤에 남편인 서민우가 내 옆에 다가올 때면, 그리고 얼마 후 그가 제자리로 돌아가 더듬더듬 담배를 찾는 소릴 들을 때면 폭행당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황급히 욕실로 들어가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집어 넣어 구역질을 하고, 비누를 칠한 몸에 계속해서 거품을 내어 씻어 버리곤 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해볼 때 지금 그를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 지독히도 뻔뻔스러운 일이었고, 또한 그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였지만 택시를 돌릴 마음은 전혀 일어나질 않았다. 차는 성남을 빠져나가 충식씨가 살고 있는 마을 입구에 멈추었다. 선뜻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청년시절에 고향을 떠난 탕아가 세상의 더러운 구석구석을 전부 구경하고 체험한 후, 다시 찾아온 고향 입구에서 차마 말을 옮기지 못할 때의 심정이 이보다 더할 수가 있을까? 그이의 숨결은 바람되어 내 가슴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그 바람은 다시 그가 살고 있는 집 쪽으로 살며시 불어가고 있었다. 저만치에서 마을 아낙네들이 밭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중 누군가가 내 쪽을 힐끔 쳐다보는가 싶더니 낯익은 노인네가 벌떡 일어나 나를 보며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충식씨가 어머니같이 따르고 있는 집주인 할머니였다. 항상 친자식 이상으로 그를 아껴주곤 하던 할머니는 시집간 딸이 처음으로 친정 나들이를 오는 것처럼 나를 반겨 주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덥썩 잡은 손이 거칠하였으나 백번 잡아도 좋을 손이었다. "아이구, 오긴 오는구먼. 그럼 안 오고는 못 베기겠지. 어떤 사이들이었는데 이러구 떨어져 살아야 되니..." 손을 어루만지며 끝내 눈물을 떨구고 계신 할머니의 모습을 보자 나 또한 그간의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북받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 별고 없으셨어요?" "아이구 그럼, 우리야 잘 있지만 자네 마음이 어떨까 하고 생각하니 밥도 넘어가질 않았어. 그럴 때면 밥을 먹다가도 수저를 놓고 먼데 산만 멍하니 쳐다보았지." 나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집으로 향했다. 그러자 밭에 있던 여자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 인사를 하였다. 그 여자들의 눈길은 예전과 다름없이 정겨웠으나 나는 죄인이 돈 것처럼 그들에게서 얼른 시선을 돌려 버렸다. 거의 가까와진 대문 사이로 그가 있는 방문이 보였다. "할머니, 그이는 어때요? 그동안 아픈 데는 없었어요? 술은요? 종환씨는 자주 들렀나요?"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디 내색을 하는 사람이라야지. 허기야 내색 안한다고 모를 일도 아니지만 오죽하겠어. 남같이 바깥 출입을 할 수 있나, 그저 이 늙은이가 주는 밥이나 먹고 온종일 방안에 박혀 있으니... 멀쩡한 사람도 미칠 지경일텐데 잘 참고 있는 걸 보면 나긴 난 사람이야. 그래도 색시 시집간 뒤로는 매일 술을 마시고 있어. 낮에는 자고 날만 어두워지면 밤을 새고 마셔댄다니까. 오늘은 색시 오는 날이라고 방을 치우러 들어갔더니 여기 닦아라 저기 닦아라 하면서 한참을 들떠 있더구먼." 대문 앞에 다다르자 할머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할머니의 얘기를 듣던 나는 마당 안으로 성큼 들어서질 못하고 대문에서 그의 방 문만 쳐다보았다. (충식씨 제예요. 윤희가 왔어요. 들어가도 되나요? 예? 이젠 도리가 없어요. 모두가 용기없는 제 탓이긴 해도 전 감히 말할 수가 있어요. 충식씨를 떠나 있었던 건 제게 한 번도 없었어요. 그래서 꼭 다시 올 거예요. 저 들어갈 테니 그냥 예전처럼 대해 주셔야 해요.) 내가 대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자 할머니가 그의 방 문 가까이 다가가 '여보게 서울에서...'라고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저에 방문이 떨어져 나갈듯이 세차게 열렸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 쓸쓸하면서도 슬프게, 그러나 조금은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의 숨결과 함께 방 안에서는 "솔베이지송"의 선율이 흘러나와 나의 전신을 휘감고 맴돌았다. "윤희야." (웃지 않아도 돼요. 억지로 웃지 마세요.) "윤희야아--." (정말 저를 기다리셨군요.) "윤희야, 임마. 들어와." 살짝 웃어 보이며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라면 나뿐이었고 그래서 나는 불청객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그는 계속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윤희야, 어떠니?" 그냥 방바닥만 내려다 볼 뿐 나는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되었고 또 할 말이 많았는데도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윤희야, 어때? 서민우씨는 물론일 테고 시부모님도 네게 잘 해주시지, 응?" (왜 저런 걸 물어 올까? 왜 자꾸만 나를 아프게 할까?) 그저 부끄러운 마음에 말은 못하고 조용히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요. 모든 것이 다--." "괜찮아. 난 괜찮아. 네가 좋으면 나도 좋은 거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 앞에서 더 큰 죄인이 되어갔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그를 만나고 보니 나의 죄는 너무도 큰 것이었다. 마치 결혼 후 첫인사를 하러 들른 누이 동생을 반기듯이 그의 연기는 자연스럽고 훌륭했다. 휠체어 가까이 다가앉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척해진 얼굴에 머리까지 길어서 더욱 여위어 보였다. 나에 대한 끝없는 질책이 가슴을 후비고 지나갔다. 차라리 죽음으로써 그에게 사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방 안 가득히 베어 있는 그의 체취, 따스함 그의 숨결을 느끼며 나는 분명 죄인임을 깨닫고 있었다. 결혼식 날 그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에게 상관이 없는 결혼이라는 말을 해주었고, 또한 잘못된 결혼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동회의 서류와 서민우의 행동 등으로 충식씨와의 소망이 용기를 얻어 가고 있었지만, 이러한 소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가슴 아픈 순간 순간을 어떻게 견디어 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모든 것이 사람을 버린 죄의 대가였다. 그리하여 충식씨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극복해 가리라 다짐하였다. 언제 그가 전기 코드를 꼽았는지 커피포트에서 물끓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커피를 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냥 있어, 내가 할께." "제가 할께요." 커피포트에서는 그의 아픈 침묵이 콸콸 요동을 쳤다. 이제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다. 한 손으로 커피를 타고 있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었고, 굳게 다문 입언저리 역시 가느다란 경연이 일고 있었다. 그가 커피잔을 내게 건네 주었다.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받아 들었다. 그것은 커피가 아니고 그의 사랑이었으며, 그의 슬픔, 절망에 가까운 그의 고독이었다. 방 안에는 커피내음과 함께 브람스의 선율이 울려 퍼졌다. 우리는 서로의 아픔과 한을 한 모금씩 들이켰다. 그것을 한 모금 삼킬 때마다 눈물이 한 방울씩 커피잔에 뚝뚝 떨어졌다. 이제 훌륭한 그의 연기는 끝이 났고, 내가 참을 수 있는 시간도 더 이상은 지속되지 않았다. 나는 감히 그의 손은, 그의 얼굴을, 그리고 그의 넓은 가슴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휠체어 앞으로 바싹 다가가 그의 무릎 위에 얼굴을 감히 묻었다. 예전 같았으면 의례히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거나 등을 토닥거려 주었을 텐데 그날 그의 손은 나를 멀리 하고 있었다. "윤희야, 이제 집에 가봐야지." 아직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는데 그는 날더러 가라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직 시간 있어요. 더 있을래요." 어떻게 해서든지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될텐데 아무리 혀를 깨물고 또 깨물어도 나는 벌써 그의 무릎을 적시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의 머리 위로 그의 한숨소리가 지나갔다. 그는 휠체어를 뒤로 밀어 나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다. "충식씨." 그는 대답 대신에 휴지를 뽑아 내게 건네 주었다. "난 충식씨를 너무 몰라요. 정말 난 말예요, 충식씨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갑자기 무슨 소릴..." "충식씨의 소망이 무언지, 절망의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충식씨를 제일 슬프게 하는 건 누구인지 또 무엇인지, 난 정말 너무도 몰라요. 난 그냥 나 만큼인줄 알았어요. 우린 똑같은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냐?" "네, 나보다 더 많이--." "그렇지 않아. 윤희가 더 많이야. 윤희가 더 많이 아파하고 있어." "아녜요." 그가 휠체어를 돌려 내게 등을 보였다. 흉터 투성이인 그의 얼굴보다 한없이 넓은 그의 등은 나를 더욱 슬프게 만들고 있었다. "이 세상에 날 용서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용서받을 일이 없으니까..." "나의 이중 성격은 누구도 못 따라와요. 나 스스로도 무척 놀라고 있어요." "자기 비하야. 그것도 아주 사치스러운--." "제가 잘못했어요, 충식씨." "난 괜찮아. 이제 너만 괜찮으면 돼." 그는 여전히 '괜찮아'였다.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우리는 조금도 예전 같지가 않은데 시계 바늘만이 신이 나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가운의 목자락까지 닿고 있는 그의 긴 머리가 보였다. "충식씨, 머리 잘라야겠어요." "아직은 괜찮아." "준비할 테니까 이리 오세요." "괜찮다니까. 할머니나 종환이 보고 해달라면 돼." "충식씨 머리만은 제가 했잖아요. 할머닌 못하세요. 종환씨도요. 안 해본 걸 어떻게 해요." "괜찮다니까." 그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의 반응이 무척 섭섭하다는 생각에 나의 죄의식은 조금씩 약해져 갔다. '괜찮아'라는 말에 짜증이 일어나면서 그에 대한 죄의식이 더욱 약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심한 울분이 가슴 깊은 곳에서 들끓었다.
분명, 충식씨에 대한 울분이 아니었는데도 그에 대하여 터뜨릴 울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형편없는 여자였다. "괜찮다는 말좀 안할 수 없어요? '괜찮아, 괜찮아' 이젠 그 소리 듣기도 싫어요." 그가 휠체어를 다시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놀라면서도 슬픈 눈을 보고서도 나의 발작은 멈출 생각을 잃고 있었다. "내 결혼만 해도 그래요. 청첩장은 이미 알 만한 사람들한테 다 돌려졌고 충식씨는 절대로 가족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완강히 말했어요. 사람들에 아니 그보다 우선 부모님께 결혼할 수 없다는 얘길 하려고 해도 이해시킬 만한 핑계가 있어야죠. 이럴 수 있냐고 엄마한테만 화를 내고 하니 무슨 소용이 있었겠어요. 혼자 애태우고 힘들어 하는 동안 충식씨는 내게 뭐라고 하셨어요. --괜찮아, 난 괜찮아--그래요. 계속 '괜찮아'였어요. 내가 진실로 충식씨를 사랑한다면 식장엘 나가지 말아야 된다는 마음도 가져봤지만 음식 장만한다고 모여든 친척들이며 아버지 손님들, 특히 교사분들과 학생들에게 신부가 나타나질 않는 수라장이 된 모습을 보여줄 용기가 없었어요. 모두가 다 내탓이라도 해도 나 혼잔 너무 힘들었어요. 충식씨만 날 도와주었어도 이런 실수는 안 저질렀어요. 내 결혼은 크나큰 실수예요. 설령 충식씨가 아니더라도 잘못된 결혼이라구요. 충식씨가 나에 대해서 아는 게 뭐가 있어요. 어제 내가 어땠고, 여기 올 때 내가, 또 지금의 심정이 어떤지 아세요? 아시면 말해 봐요. 내 결혼은 나뿐이 아녜요. 다들 전부 다들 잘못한 일이에요." 얼굴은 눈물 투성이었고 나는 거의 이성을 잃어 가다시피 그를 향해 어처구니 없는 투정을 퍼부었다. 그는 누이의 불행을 눈치 챈 오빠같이 불안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윤희야, 진정해라. 이젠 그만 해. 그리고 말해 봐.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네 결혼이 실수라고? 내가 아니었더라도 너의 결혼은 실수라고 했지? 왜? 무엇 때문에? 얘기를 해. 왜 그러는 지..." 나는 결혼의 실수보다 더 큰 실수를 저지를 뻔하였다. "무슨 일은요. 아무일도 없어요. 충식씨가 날 피하는 게 화가 나서 그런 거예요. 실수란 말은 하기 싫은 결혼을 했다는 얘기구요. 정말 아무일 없어요." "너 거짓말 아니지?" "아녜요." 그가 안심하는 빛을 보였다. "윤희야, 이리 와. 나한테 와봐." 나는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리 와'라는 말을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일어서지도 않고 무릎을 끌며 그의 앞으로 바삭 다가갔다. 휠체어 앞에 앉아 그의 무릎에 얼굴을 대었다. 그는 나의 손과 얼굴을, 그리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살며시 눈을 감은 채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지난 날들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신촌 "복지다방"의 신나는 크리프 리챠드의 노래와 이태리 가곡, "카사노바"의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기타와 노래소리, 기찻길에서 충식씨의 휘파람 소리, "화계사 숲속"의 나무숲 스치는 소리, 그리고 쓸쓸했지만 너무도 행복했던 수안보 "수옥정폭포"의 물줄기 소리--. 우리의 사랑을 더욱 감미롭게 해주었던 그곳의 아름다운 소리들이 그의 손길을 따라 내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다. 아-- 생각나는 지난 날의 추억들. 그 모든 것이 하나하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슴 벅찼던 우리의 사랑은 헛된 일이 되어 버린 것일까? 지금 그곳엔 어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을지... 모두가 그리웠다. 언제 우리는 서로의 근심을 떨쳐 버리고 우리의 사랑만을 생각할 수 있을까! 나의 소망은 정말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그의 무릎은 더없이 따뜻하고 그의 손길을 나를 잠재울 듯이 부드러웠다. 우린 언제나 완전한 만남을 이루게 될지 끝없는 소망 속에서도 나는 현실을 붙잡고 오열하는 여인이 되어갔다. 그의 손길은 점점 떨려오고 나 또한 서러움과 그리움에 온몸이 저려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하는 이 짧은 순간마저 시샘을 하는지 시간은 우리의 헤어짐을 독촉하고 있었다.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충식씨, 저 부탁이 있어요."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나는 그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하였다. 매주 토요일이면 그를 찾아올 테니 말리지 말라는 것과, 술을 조금씩 마시되 될 수 있으면 종환씨와 함께 있을 때 외에는 마시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잘하고 있으니 걱정을 하면 안된다는 말도 해주었다. 대답 대신 그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 인제 갈래요. 머리는 다음 주에 손질해드릴께요."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백을 집으려 하는데 그가 불렀다. "윤희야, 잘해야 된다. 서민우씨는 물론이고 시부모님께도 말야. 알았지? 알았어?" (알았지? 알았어?) 그를 처음 만난 후 '일 주일 동안 열심히 해야 돼. 알았지? 알았어?' 하던 그의 건강하고 당당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처음 같이 생각하자. 일 주일 동안 열심히 나의 소망을 준비하고 매주 토요일이면 충식씨를 만나기로 하자. 그때처럼 '네 알았어요'라고 대답을 해야지.) "네 알았어요." 그를 보고 웃으며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 같이 또박또박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이도 마음이 풀어진 듯 얼굴이 조금은 밝아진 표정이었다. 휠체어 뒤로 가서 나는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됐어. 늦었으니까 빨리 가봐." 그가 한 손으로 나의 손등을 톡톡 두들겨 주었다. 나는 더 힘껏 그를 껴안았다. "충식씨, 나 할 말이 있어요. 꼭 이 말만 하고 진짜 갈께요." "또 말이 남았어? 아까 같이 막 퍼붓는 거 아냐?" "아깐 잘못했어요. 충식씨가 나 온 걸 반가와 하지 않으니까 약 올라서 그런 거예요. 이젠 안 그래요. 나쁜 건 생각 안할께요. 내 잘못까지두요." "할 얘기가 뭔데" 나는 귀 까까이에 입을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는요, 난 말예요. 충식씨 곁을 떠난 게 아녜요. 정말 떠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아직도 충식씨만을 사랑해요." "고맙구나." "우리 둘의 일은 변한 게 없는 걸루 해요. 술 마시고 싶고 짜증이 나더라도 윤희가 알면 속상해 할텐데 하고 참으세요. 예전엔 그러셨잖아요. 저두 그런 마음으로 일 주일 보낼께요. 저 가요." "그래, 잘 가." "네 갈께요." 좀체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꾸만 돌아갈 것을 재촉했지만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서 있었다. 시건방 떨지 말고 시간을 지키라던--차디찬 서릿기운을 머금은--서민우의 말이 나의 머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방 문을 미치고 밖으로 나왔다. 문턱까지 휠체어를 밀고 와 나를 바라보는 그의 힘없는 미소 뒤에 허무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자 '잘 해야 한다. 윤희야, 내 걱정을 하면 안돼'하는 충식씨의 목소리가 한없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제부터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아야지.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려고 안간힘을 쓰며 찻길로 향했다. 정말 그 순간만은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이 일지 않았으면 싶었다. 생각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도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어느 곳이라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뒤를 돌아 보아도 이제 우리가 만난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나를 떠나 보낸 그의 심경은 어떠할까? 차창 밖에서 그가 미소짓고 있었다. (그는 나를 다시 보고 싶은 거야. 나를 또 보고 싶고, 내가 더 오래도록 머물러 주기를 바라면서도 '나의 결혼'이라는 형식의 울타리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거야. 그를 다시 찾아야 돼.) 나는 그래도 햇살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키고, 바람 속으로 우울한 마음을 날려 보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다 마음의 웅어리를 풀며, 어느 곳에서 고통과 절망과 허무를 위로받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차 안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충식씨, 우린 괜찮아질 거예요. 혼자일 때는 우울하고 괴로운 날뿐이에요. 서로가 떨어져 있을 때는 울음으로 가득찰 수밖에 없어요. 슬프거나 괴로워도 그런 것만은 아니예요. '우리'가 되었을 때만 웃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어요. 비록 눈물이 감추어지 웃음일지라도--.)
차는 벌써 성남을 지나 시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을을 맞이한 하늘은 한결 드높았다. 그 아래 도시의 숨겨진 쓸쓸함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골목길에서 가을 바람에 흙먼지가 뽀얗게 나의 스커트 자락을 휘감고 맴돌았다. 멀리 시댁의 대문이 보이자 나의 걸음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곧바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주변의 집들에서는 저녁 준비를 하는 따스함이 풍겼다. 저 지금 알 수 없는 사람들의 귀가와 가족들을 위한 식사 준비--모든 것이 나에게는 소망이었다. 그러자 멀리서 어렴풋이 충식씨의 바삐 퇴근하는 모습과 장바구니를 들고 조금은 힘겨워하면서도 웃음에 찬 나의 모습이 다가왔다. 그러나 아쉬움과 아직도 다 흐르지 못한 눈물만이 내 안에 남아 있었다. 발길을 돌려 어디라도 가서 혼자 마냥 앉아 있고 싶었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사이엣 조용히 머물고 싶었다. 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아침에 남편이 시건방 떨지 말라며 빨리 들어오라고 못을 박았던 시간까지는 꽤 여유가 있었다. 다시 골목을 되돌아 나왔다. 어린 아이가 아빠의 품에 안겨서 그의 엄마와 다정스럽게 미소 지으며 귀가하는 모습이 보였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오두막집 같은 셋방에서 매일처럼 행복을 만들어 내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구중궁궐 같은 집에 살면서도 불화가 끊이지 않고 다툼을 일삼는 가정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행복한 여자였다. 비록 충식씨와 다정스럽게 우리의 아기를 안고 귀가하지는 못할지라도 일 주일 후면 다시 사랑하는 그를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현실을 두터운 벽이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 홍익대학교 근처에 있는 작은 찻집에 들어갔다. 커피잔을 들어 올릴 만한 기력조차 내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피곤함이 온몸을 감싸고 몰려들어 눈만 감으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현기증이 일었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렸으며--.) 찻집 구석에 앉아 죽음을 생각하다가 충식씨의 모습이 떠오르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수척해진 얼굴, 밤새워 술을 마신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아른거리고, 갑자기 종환씨가 보고 싶어졌다. 아직 퇴근 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예측했던대로 수화기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종환씨는 나의 전화에 놀라면서도 반가운지 안부를 묻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윤희씨! 어때요?" "뭐가요?" "뭐긴...? 결혼생활 말이지." 왜들 이렇게 나의 결혼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려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떨 것 같은지 몰라서 물어요?" 종환씨는 한참이나 말을 못하고 망설였다.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싶었다. 충식씨와의 일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잘못되어 버린 나의 결혼과, 나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숨막힘을 호소하고 싶었다. 답답하고 억울한 심경으로 가슴 속에 누적 되고 있는 응어리를, 그를 붙잡고 털어놓음으로써 조금이나마 풀고 싶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이 어떨지 몰라서 묻느냐는 퉁명스러운 나의 말에 종환씨의 가느다란 한숨이 수화기를 타고 전해져 왔다. 나는 할 말을 머뭇거리다가 끝내는 수화기를 놓고 날았다. 그를 다시 부르고 싶었지만 나의 발길은 이미 그곳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어슴푸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그러나 부지런히 집을 향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