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추억소설

16. 사랑이여 슬픔이여

시인김남식 2013. 12. 25. 19:50

16. 사랑이여 슬픔이여

 

아이는 엄마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때로는 서투른 딴전을 피우기도 한다.
아주 어려선 옹알이를 하려고 입을 방긋거리고, 걸음을 배울 쯤엔 카페트에 주저앉기도 하고,
물건을 잡고 일어서도 본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어디론가 가버려 엄마를 울리기도 한다.
나도 아이의 엄마가 된다면, 그이를 닮은 아이를 낳아 길러 볼 수 있다면--.
그러나 나에겐 극히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의무가 제외되었다.
아무리 쏟아도 채워지지 않는 내 사랑의 우물, 난 그 앞에서도 때로는 허하니 빈 그릇일 때가 있었다.
열아홉 살에 그이를 만나 졸졸 쫓아다니던 나는 이제 삼십의 중반을 막 넘어섰고,
그도 사십이 넘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그이를 보고 있노라면 대상도 없는 울분이 치솟아서
가슴을 치게도 하지만, 살아온 날들을 생각할 때 그 무섭고 마치 죽음과도 같았던
수많은 고비를 어떻게 넘겨 왔는지 우리 삶의 과정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우리의 사랑은 꺼질 줄 모르고 불길을 더해 갔다.
여느 부부와 사는 형태가 달랐을 뿐이지 분명 우린 부부였다.

그것도 서로의 확인되지 않은 사랑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리는 부부에 비하면,
사랑이라는 가장 소중하고 귀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더없이 행복하고 부유한 우리였다.
늘 정체를 알 수 없어 목이 타는 갈증은 있었지만 다른 여자들을 부러워한 적은 없었고,
내게 죽음을 가장하고 약수동 산비탈에서 침묵하던 그때 그이의 사랑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누가 사십의 나이를 불혹의 나이라 했지만, 그는 오래 전에 세상과 절교를 했으며,
나 또한 이미 세상 일에 미혹하지 않은 채 새삼스러울 것 없는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이젠 힘든 고비란 없을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평이했고 종환씨의 사회적 활동도 어려움 없이 잘 이루어졌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들었던 지난날 뒤에 감추어 두었던 고요한 정원이었다.
소슬 바람이 낯을 간질이며 담장 넝쿨이 키를 재며 올라가고,
진하지 않은 꽃향기가 섞여 열린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정원.
그런 정원 같은 날들로 우리는 또 한 계절을 넘겼다.
그이가 어느 날 아침 눈에 띄게 얼굴이며 몸이 부어 올랐다. 간혹 붓는 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별다른 증세는 아니라는 그의 말에 걱정은 되면서도 그대로 넘어가고는 하던 일이었다.
"충식씨, 병원에 가봐야겠어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괜찮아. 자고 일어나면 간혹 붓기도 하잖니."
"그래도 진찰을 받아보는 것이 좋겠어요."
"괜찮다니까.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신경 쓰지 말라구."
그 사람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속으로 애만 태웠다.
그때쯤 어떤 경우에는 며칠씩 자리를 비우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회사 일로 출장이라도 다녀오는 날이면 그의 걱정에 안전부절 못했다.
시간에 쫓기다가 일이 끝나면 그에게 가기를 서둘렀다.
급하게 서두르는 만큼 처음에 생각해 두었던,
이번에는 꼭이라는 계획을 지키지 못하고 그의 고집에 지기가 일쑤였다.
할머니께 자주 살펴봐 달라면서 심상치 않음에 걱정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붓는 증세 이외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눈치채게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붓는 것만을 의심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진찰을 받게 할 궁리만 하였다.
그이는 기분이 자주 가라앉았고 웬지 우울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짜증스런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이가 그러는 것이 전혀 그것과는 관련이 있으리라고 짐작도 하지 못한 나는,
혹시나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나 하는 생각에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늘어 놓는 등
그의 기분을 풀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때 나는 회사에서 집에 돌아오면 보통 아홉 시가 넘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이튿날 성남에 준비해 갈 것을 메모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마악 깊은 잠에 빠지려고 하는데 전화 받으라는 동생의 목소리가 날 깨웠다.
그 여자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순간 나는 불길한 예감에 손은 떨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어요?"
"저어, 아저씨가 많이 편찮으신가 봐요. 열이 심하고 온 몸이 퉁퉁 부었어요.
종환이 아저씨한테도 연락을 했는데 아무래도 아줌마가 오셔야 될 것 같아서요. 어떡하죠?"
"제가 갈께요. 지금 곧 가요. 그때까지 옆에 계셔야 돼요."
옷을 갈아 입는데 어찌나 떨리는지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가끔씩 얼굴이 붓는 것을 보고서도 괜찮다라는 말을 믿었던 내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이 나빠지는 것초차 몰랐던 내가 과연 그의 여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그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어딜 가느냐며 말리는 부모님을 친구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꼭 가봐야 된다며 뿌리쳤다.
주차장을 향해서 정신없이 뛰어갔다. 나는 그때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었고
회사에 나가면서 아버지로부터 승용차 한 대를 선물 받았었다.
그이의 불행이 자동차 사고였기 때문에 운전하는 것을 몹시 불안해 하였으므로
그이에게 갈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차를 운전하지 않았었다.
차고에 두 대를 주차시킬 수가 없어서 내 차는 집 근처에 있는 유료 주차장을 이용하고 있었다.
차에 올랐으나 침착하지 못한 내 성격으로 난 몹시 떨고 있었다. 시동키를 꽂는데도 한참을 더듬거려야 했다.
밤중에 여자가 차를 몰고 어딜 가려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리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보거나 나는 말거나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연기를 내뿜었다.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주차장을 빠져 나오자 엑셀을 힘있게 밟았다.
그러자 차는 전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도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절대로 집으로 전화를 걸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그이가 얼마나 심하면 연락을 했을까를 생각하니
성남으로 가는 길은 평소보다 몇 배 더 멀기만 하였다.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나는 운전을 하면서 중얼거리며 그를 불렀다. (충식씨, 내가 잘못했어요. 난 왜 이렇게 덜 됐죠?
많이 아프면 안돼요. 열은 식히면 되고, 붓는 건 빠지게 하면 돼요. 문제없을 거예요.
이제 우리에게 나쁜 일은 절대로 없어요. 오래오래 혈맹의 관계를 지켜야죠.)
침착하지 못하고 조금만 일이 생겨도 불길하게 방정스러운 생각을 갖고, 툭하면 울고,
비굴하게 눈치를 잘 보면서도 중요한 건 지나쳐 버리는 등 내 성격의 단점은 너무도 많았다.
마을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고 멀리 보이는 할머니 집만이 불이 환희 켜져 있었다.

대문 앞에는 종환씨의 차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하룻만에 보는 그이에게 낯익은 것이라고는 목소리뿐 얼굴이며 손이며 발이 모두가 내게는 낯설었다.
종환씨는 나를 힐끔 쳐다보았을 뿐 어디엔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 피맺힌 한보다 더 뜨거운 열이 끓고 있었다.
"충식씨, 아픈 데는 어디에요?"
"아픈 데는 없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걱정하지 말라는 그이는 어찌 생각하면 나보다 더 한심한 남자였다.
"이제는 그런 말 하면 안돼요. 얘기해 보세요. 어디가 아픈지--."
"나 말야. 사실은 요즘 소변을 통 못 보고 있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을 쥐어 뜯고 싶었다. 그동안 이곳에 와서 나는 무엇을 하고 갔단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저 곁에 있는 것만 좋아서 눈이 멀어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불구의 남자를 돌본다는 허영에 들떠 그의 고통을 즐기고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나란 사람은 뭣하는 여자인지 되먹지 않아 제남자 하나 살피지 못했는가!
그저 갖고 있다는 건 쓰잘데 없는 감정뿐이니 멍청해도 한참 멍청한 대책 없는 여자에 불과했다.
나는 가슴을 짓누르는 죄의식에 감히 그의 손을 잡을 수도 없었다. 종환씨를 바라보았다.
담배를 피우며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는 그의 표정은 나를 질책하고 비웃는 것만 같았다.
"종환씨, 도와주세요. 병원엘 가야겠어요."
"서두르지 말고 침착해요. 앰블런스를 부탁했으니까--. 출발하면서 전화를 걸어 주겠다고 했어요."
그는 내게 담배를 건네 주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종환씨가 그에게 다가갔다.
"충식아, 힘 내라. 병원에 가면 곧 낫게 될 거야. 자아식, 시시하게 아프긴. 남이 하는 건 다 할려고 그러냐?"
"글쎄 말이다. 내일 윤희가 온다니까 그때까지 기다린다고 그랬는데
할머니가 괜히 전화를 걸어서 너희들 잠도 못자고 어떡하니."
종환씨가 그의 손등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임마, 병원에 가서 의사 앞에서도 시치미 떼라. 넌 뭐가 그렇게 맨날 괜찮냐?
앞으로 그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나한테 혼날줄 알아. 불편한 데를 전부 다 말야. 알았어?"
그는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밖으로 나왔다. 가슴을 치는 자책으로 나는 온몸을 떨며 서 있었다.
뒤에는 종환씨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윤희씨, 걱정하지 말아요. 병원에 갈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신부님에게 고해 성사를 하듯이 그를 잡고 모든 것을 사죄하고 싶었다.
"종환씨 보기가 너무 부끄러워요. 나는 오히려 저이에게 짐만 되었어요.
저렇게 눈치를 못 채었으니 말예요. 괜찮겠죠? 정말 괜찮겠죠?"
그는 내게 담배를 뽑아 주었다. 라이터 불을 건네 주는 종환씨의 손과 불을 붙이는 나의 손이 몹시 떨리었다.
"괜찮아야죠? 우릴 봐서라도 저 녀석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희망입니까?
우리들 삶의 목적이기도 하죠. 희망을 버리면 안돼요. 그러기 위해선 윤희씨가 먼저 힘을 내야 해요.
그렇게 많이 울고 살았으면서 아직도 눈물이 남았어요?
윤희씨 눈물 보면 저 녀석도 나도 주저앉고 말아요. 울면 안돼요, 윤희씨."
얼른 눈물을 거두었다. 안에서 종환씨를 찾고 있는 그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슬픈 얼굴은 스킨 냄새도 없었고 바람도 일지 않았다.
"종환아, 나 병원에 안 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자.
부기가 가라앉는 주사나 맞아보게 네가 차를 가지고 가서 의사를 데려와 줄래?"
"너 미쳤어?"
종환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임마, 우길 걸 우겨라. 이 지경이 되어 가지고 병원을 안 간다니 너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가기 싫어도 윤희씨 생각을 해서 아무 말 말고 가도록 해. 죽고 싶으면 안 가도 되지만 말야.
단, 네가 죽는다는 건 우리 모두를 죽이는 일이야."
친구의 화난 말에 그의 입에서 놀라운 탄식의 말이 신음소리 같이 새어 나왔다.
"그래. 죽고 싶다. 정말 이젠 죽고 싶어."
얼른 나는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안돼요. 그런 말 하면 안돼요. 정말 안돼요."
그이가 내 손을 잡았다.
"아아--, 너만 아니면... 너만 아니면--."
스물세 살 때 그의 사고 소식을 듣고는 울음을 참으려 가슴을 짓눌러야 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나 나는 그때보다 더 참을성이 없었다.
종환씨의 말대로 어디서 그렇게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때는 그이가 내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코끝이 시큰할 적이 있었다.
"울음은 불길하다. 눈물을 보여선 안돼." 그러나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윤희야!"
그가 나를 불렀다.
"네."
"너 우니? 네가 참 걱정이구나. 그렇게 눈물이 많아서 어떻게 살아가니?"
"내 맘이에요. 당신이 걱정해서 되는 일이 아니에요. 우리 각자 알아서 걱정하기로 해요.
당신은 빨리 나을 생각만 하라구요."
한심한 여자는 눈물이 뒤범벅되어 콧물에 섞이었다.
그러한 나는 그의 아픔에 부채질을 하는 격이었다.
"종환아, 우리 답답한데 음악이나 듣자. '운명' 1악장만 들었으면 좋겠다."
그날 듣는 1악장은 평소에 듣던 웅장함이 아니었다.
엉뚱한 소음으로 나의 귓속에 들어와 소용돌이쳤다.

쿵쿵거리는 스피커의 울림을 따라 내 가슴을 마구 뛰고 있을 뿐이었다.
그이의 두 번째 신청곡을 종환씨가 바꾸고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이 모두 좋아하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였다.
마악 1악장이 시작되고 있는데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우렸다.
앰블런스가 출발한다는 전화였다.
통화를 끝낸 종환씨는 그이에게 옷을 갈아 입히고 휠체어에 옮겨 앉히는 등 갑자기 부산한 손놀림을 하였다.
그 사이 1악장이 끝나고 2악장이 시작되면서 피아노의 선율은 애조를 띄우며,
감미롭게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조금 후 피아노 소리는 우리에게 희망을 전해 주면서 뒤이어
방안을 쿵쿵 울리는 오케스트라가 우리의 바쁜 행동을 도와주고 있었다.

 

 

새벽과 함께 온 여명이 창가에 빛을 드리울 때가 되어서야 앰블런스는 도착을
햇다. 하얀색의 자동차에는 낯이 익은 병원 이름이 빨갛게 새겨져 있었다.
서울로 가는 동안 그이는 애써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나 지금 한양 가는 길이냐? 촌놈 서울 가는데 꽤 큰차 타고 가네. 그것도
누워서 말야."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차가 병원 응급실 앞에 멈추자 그이는 간호원을 불렀다.
 "간호원, 나 부탁이 있소. 보다시피 내 얼굴이 말이 아니잖소. 난 이게 낯선
사람 앞에 나서는 첫 번째 외출이요. 얼굴을 좀 가렸으면 좋겠는데--. 내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 얼굴이오."
간호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종환씨와 나를 보고 있었다.
종환씨가 그이를 내려다 보았다.
 "바보같은 자식. 지금 이 시간에 보는 사람도 없어. 설령 있다 하더라도 뭐가
어때서--. 정 그렇다면 내가 널 가려 줄게. 어때, 됐니?"
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밤에 아팠던 사람은 충식씨뿐이었는지 응급실은 텅 비어 있었다. 당직
의사들은 그의 몸을 살피었다. 그의 팔에 두 개의 자사 바늘이 꽂히고, 그의
소중한 그곳에 호스가 이어졌다.
젊은 의사가 보호자를 부르자 종환씨는 황급히 대답을 하였다.
 "환자와 어떻게 되십니까?"
 "이분은 부인이고 저는 친굽니다."
종환씨가 대답했다. 그러자 의사가 다시 물어왔다.
 "얼굴을 왜 그랬습니까?"
순간 침대 쪽에서 그이의 짜증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하고는 상관없는 병 아니오? 십오 년이 넘은 얼굴이니 내 얼굴에는
신경쓰지 말아요. 아셨어요?"
고맙게도 젊은 의사는 그의 호통에 기분 나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응급실이란
곳이 그렇듯이 그이는 응급조치만을 받은 채 다른 의사들의 출근을 기다려야
했다.
회사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종환씨는 공중전화에 매달려 이런저런 업무를
지시하고 누구에겐가 죄송하다며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밤에 급히 오느라 반팔
티셔츠 차림에 한 손에는 담배를 놓지 않는 그의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양손에 꽂혀 있는 주사 바늘이 그의 손을 잡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바보같이 앉아 있었다.
응급실 당직 의사들이 바뀌면서 병원 업무는 시작되는 것 같았다. 얼마 후
나이가 지긋한 의사가 들어오더니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충식씨를 한참 내려다
보다가 몇 마디를 물어본 후 응급실에서 기록한 진료카드를 펼쳤다.
그리고 나를 불렀다.
 "부인이세요?"
 "네."
의사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었다.
 "부인도 참 딱하십니다. 이제야 병원을 오면 어떡합니까?"
 "부끄럽습니다."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이가 소릴 질렀다.
 "의사 선생, 그 여잘 탓하지 말아요. 내가 숨겼오. 앞으로 선생님이 날 맡을
겁니까?"
 "예."
갑작스런 그의 말에 의사는 얼떨결에 대답을 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얘기를 하겠습니다. 내 얼굴을 똑바로 봐요. 이 얼굴에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른 팔 하나뿐입니다. 저 여자 스물 세살에 난 이렇게 됐죠. 이제
서른 여덟인 된 저 여자는 지금까지 나 하나만 돌봐 왔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오? 그러니 내 일로 인해서 저 여잘 나무라는 일이 없도록
해요. 부탁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의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인,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나는 부끄러웠고 또 부끄러워 모두로부터 숨어 버리고 싶었다. 충식씨에게도
부끄러웠고, 종환씨와 의사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부끄러웠다.
 "우선 엄선생을 중환자실로 옮겨야 됩니다. 그동안 부인은 원무과에 가셔서
입원 수속을 하세요."
의사의 입에서 중환자실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나는 심한 현기증을
일으켰다. 응급실을 나가는 의사를 황급히 뒤쫓아 나갔다.
 "선생님, 중환자실이라뇨?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어느 정도길래...?"
의사의 눈길은 인자해 보였으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남편은 중환자예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언제 나왔는지 종환씨가 내 팔을 부축해 주었다.
 "완쾌될 수는 있겠죠?"
종환씨가 의사에게 물었다.
 "아직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자세한 검사를 해야 되요. 나중에
뵙도록 하죠. 전 회진을 돌아야 하니까요."
의사가 가버린 뒤에도 종환씨와 나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그가 저렇게까지 된 것은 모두 내 탓이었다. 그저 보고 싶은 마음에 달려가
그에게 매달려 괜찮다는 말만 믿었다니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한심한
일이었다.
 "종환씨, 그이가 날 필요로 할 때 나는 항상 멀리 있었어요. 처음으로 사고를
당했을 때 그리고 지금 일도 말이에요. 그이는 왜 나에게 숨겼죠? 내가 얼마나
가슴 아파할지 몰랐나요? 아녜요.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종환씨,
저이를 어떡하죠? 중환자라뇨. 말도 안돼요."
걷잡을 수 없이 후회의 눈물이 솟구쳐 흘렀다. 머릿속에는 순서도 없이
들썩이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 종환씨가 나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윤희씨, 약해지면 안돼요. 아무래도 입원 기간이 꽤 길어질 것 같은데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된다구요. 윤희씨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윤희씨가 기운을 차리지 못하면 충식이도 나도 주저앉고
말아요. 기운을 내요. 자--, 원무과에 갑시다 입원 수속을 해야죠."
 "잠깐만요. 그이를 보고 오겠어요."
종환씨의 손을 뿌리치고 입원실로 들어갔다. 그이는 잠든 듯이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다시 가슴을 치는 죄책감이 세차게 일어났다. 나는
분명 부기가 있는 그의 얼굴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왜
그냥 지나쳤는가? 그이가 뭐라 하든지 왜 당장 진찰을 받게 하지 못했는가?
아픈 사람의 괜찮다는 말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왜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인가! 그것은 고통을 참아낸다는, 그리고 참을 만하다는 걱정이었다. 말
그대로 괜찮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
나에게 아무리 중대한 일이 있었다고 한들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지 못할 만큼
급한 일은 없었다. 아무리 그이가 철저하게 할머니 가족들에게 감출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만은 허용할 수 가없는 일이었다. 몸은 자꾸만
휘청거리고 머릿속은 복잡하여 터질 것만 같았다. 입원 수속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든가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끝없는 질책과 의혹
때문이었다.

 

.
원무과에 입원 수속을 끝내자 그이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출입이 금지된
상태에서의 초조한 사간은 차라리 내 숨통을 끊는 것만 같이 고통스러웠다.
몇 년이 된 것 같은 지루한 시간이 지나자 중환자실의 문이 열렸다. 그 문을
통하여 침대 하나가 의료진들에 의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다가갔더니 그이였다.
 "충식씨!"
침대를 따라가며 자꾸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충식씨, 저예요."
또 대답이 없었다. 무서웠다.
 "이분 지금 말을 못 하나요? 어디로 가는 거예요. 왜 제 말을 못 알아 듣죠?
네? 말 좀 해주세요."
엘리베이터 앞에 침대가 멈추었다. 그이가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침대를 밀고 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여자 좀 비키게 해요. 아주 참을성이 없는 여자에요."
그리고 다시 그는 눈을 감았다. 파아란 색의 수술복 차림인 젊은 남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부인이세요?"
 "네."
 "검사가 아직 안 끝났습니다. 지금은 척추와 요추 검사를 하러 가는
중이에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병실에서 뵙게 될 테니 그곳에서 기다리십시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그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이가 내 뒤에 서 있는 종환씨를 불렀다.
 "종환아, 얘 좀 어떻게 해줘. 윤희를 어떻게 좀 하라구."
그 지경이 되어서까지 나를 챙기려는 그이는 바보가 아니면 지독하고 철저한
위선자일지도 몰랐다.
병실로 올라갔다. 새벽에 잠자리에서 보이는대로 옷을 주워 입고 나온 나의
모습은 실로 가관이었다. 간편한 티셔츠 차림의 종환씨와 내 모습은 몇 시간도
안 가서 초췌해 있었다.
두 사람은 말도 하지 않은 채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자 종환씨와
내가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침착하지 못한 건 나뿐이 아니었다. 내가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여기 비뇨기과인데요. 보호자 되시는 분 내려오세요."
지극히 사무적인 간호원의 목소리가 끝나자 급히 비뇨기과로 내려갔다. 의사가
부른 것이었다. 그 의사는 우리가 흔히 종합병원에세 대하기 어려운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이웃에서 쉽게 부딪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그러면서도 중년을
막 넘어선 듯 자상한 인상을 가진 분이었다.
 "부인께서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우리를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인사인지 모르지만 나는 의사의 말에
반감을 갖고 대답을 피하였다.
 "그이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방광, 요도가 모두 말이 아닙니다. 방광에는 종양이 있는 것 같은데 양성인지
악성인지는 자세한 결과가 나와야지만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이 시작된 지 꽤
오래 되었을 텐데 통 몰랐습니까?"
의사의 말이 채찍이 되어 나의 가슴을 때리는 것 같았다.
 "악성이라면 암이란 말입니까?"
종환씨가 다급히 물었다.
 "악성이면 그렇죠."
나는 이제 더 이상 지치면 안 되었다. 어금니를 깨물었다. 쥐가 나는 것 같은
손에 힘을 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의사는 다시 신경외과로 가보라고 말했다.
신경외과 의사는 종환씨보 더 더 젊어 보였다. 젊은 의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많이 서툴고 딱딱하였다.
 "엄충식 환자 보호자입니다."
종환씨가 말했다.
 "아-- 네, 그렇습니까?"
의사가 간호원을 불러 진찰카드를 가져오라고 하자 잠시 후 간호원이 다시
들어왔다. 차트를 훑어본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교통 사고라고 했는데 언제였죠?"
종환씨가 햇수를 셈하는 듯하더니 '16년 되었오'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동안 병원 치료는 받았었나요?"
 "아뇨."
내가 벌받는 학생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의사의 눈의
'저런 무식한 여자 같으니라구'하는 것만 같아 고개를 숙였다.
 "무척 고통스러웠을 텐데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척추보다 요추가 더 문제였습니다. 치료를 쭈욱 받았으면 다리는 움직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깜짝 노라서 '뭐라고요?'하며 눈을 크게 떴다. 종환씨가 의사의 말을 막고
나섰다.
 "됐습니다. 나중에 저하고 얘기 했으면 좋겠군요... 지금은 그만 듣겠습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종환씨가 부축해 주었다. 어찌나 내 어깨를 세게
잡는지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이 아팠다. 굳게 다문 그의 턱에 경련이 일고
있었다.
 "나갑시다."
나는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으나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정말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나요?"
 "제 의견일 뿐입니다."
종환씨가 나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가요. 빨리 나가자니까--. 더 알려고 하지 말아요."
의사의 방을 나오면서 종환씨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지금은 늦었나요? 이제라도 어떻게 안 될까요?"
 "네, 지금은 어려워요."
 '크윽'하는 소리와 함께 종환씨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복도로 나오자
종환씨는 나를 놓아 주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힘없이 걸어가는 우리의 고문 이종환--. 우리의
든든한 울타리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뒤를 흐느끼며 따라갔다.
입원실에는 아직도 그이가 와 있지를 않았다. 자신의 몸을 내팽개치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히며 종환씨가 눈물을 닦는 것이 보였다.
그이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소리내어 흑흑 흐느껴 울었다. 신에게도
용서를 받을 수 없는 나는 큰 죄인이었다.
종환씨가 눈물을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자식, 지독한 자식, 이렇게 골탕을 먹일 수가 있단 말야."
 "아녜요, 종환씨. 다 내가 잘못한 거예요. 난 그이가 웃으면 그저 기분이 좋아서
웃는 줄 알았어요. 시무룩해 있으면 무엇 때문에 화가 났을까라는 생각만
했어요.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정말 중요한 눈치는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이는 왜 고통을 참는 거죠. 왜?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지나온 시간이 마냥 죄스럽고 후회스러웠다. 도대체
그 사람은 몇 년을 두고 참았단 말인가. 그가 참았을 고통에 비하면 내가 겪는
이러한 죄책감은 어림도 없는 것이었다. 서서 걸을 수도 있었다고 의사는 똑똑히
말했지 않는가? 그가 자기 힘으로 걸을 수 있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어느날 간지럼을 태워 보라던 그-- '야 간지럽다'하며 감각을 느끼던 그의
목소리에 나는 탄성을 지르지 않았던가! 왜 그대 치료를 받지 않았던가. 왜 한
번이라도 진찰을 받게 하지 않았던가! 그가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
그땐 우리가 너무 가난했다는 것--이러한 것은 이제와서 아무런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이제서야 내가 그의 여자로서 얼마나 부족한지 지금의 상환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16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가 저지른 숱한 잘못을 용서받는다
해도 이것만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그의 웃음으로 내가 행복해 할
때 그의 웃음 뒤에 감춰진 혼자만의 고통으로 쓸쓸해 했던 것이었다. 함께
있어도 늘 혼자였던 것이었다.
병실 문이 활짝 열렸다. 그이가 침대에 실린 채 들어오고 있었다. 얼굴의 부기는
조금 빠진 듯했으나 무척 피곤해 보였다. 젊은 남자들에 의해 입원실 침대에
옮겨지는 충식씨는 줄곧 눈을 감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가고 성남을 떠나온지 반나절이 지나서야 우리 세 사람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침대 옆에 서서 그이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던 종환씨가 한참 뒤에야
말을 하였다.
 "충식아, 자는 거 아니잖니? 눈 좀 떠라. 날 봐. 임마--."
 "귀찮다. 담배나 피우게 해줘."
 "괜찮을까?"
 "폐는 건강할 거다. 공기 좋은 데서만 살았잖니?"
종환씨가 담배에 불을 붙여서 그의 입에 물려 주었다. 그이는 담배 연기를
핑계삼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나는 곁에서 그의 다리를 주물렀다.
 (이 다리를 움직일 수가 있었다니--. 당신은 걸을 수가 있었대요, 걸을
수가. 그러나 이젠 늦었대요. 날 용서해 주세요. 아녜요, 절대로 용서하면 안돼요.)
 "윤희야, 이리 와."
그이 앞으로 가자 종환씨가 비켜 주었다.
 "내 말 잘 들어라. 고집 부리지 말고 명심해야 된다. 너희들이 하도 부탁을 해서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난 오래 있지 않을 거야. 며칠 있다가 퇴원할 테니 그런 줄
알고 있어. 날 여기 묵어 둘 생각은 하지 말라구. 알았어?"
종환씨도 나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해. 그러겠다구."
 "임마, 너 어째 점점 그 모양이냐. 주사 꽂고 누워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냐?
너야말로 내 말 명심해라. 의사 허락 있기 전에는 절대로 여기서 못 나갈 줄
알아. 성남 방이나 병실이나 다를 게 뭐가 있어? 시키는대로 잠자코 있으라구."
그이는 다시 눈을 감았다. 침대 옆에 늘어져 있는 호스와 연결된 작은 원형의
비닐통, 기둥에 매달려 있는 두 개의 주사약은 그가 앉을 자유마저 완전히 빼앗고
있었다.
막상 그이가 병실에 들어오고 나니 필요한 물건이 너무도 많았다. 타원,
세면도구, 물컵 등과 소형 카세트 라디오라도 있어야 했다. 물건들을 챙기려면
내가 먼저 다녀오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병실을 나왔다.


대문을 들어서자 할머니는 마루 끝에 허탈하게 앉아 계시다가 나를 보자 달려
나왔다.
 "어때?"
 "심해요. 한두 군데가 아녜요. 할머니 그이가 그렇게 아팠으면서도 우리 앞에서
참았던 거예요. 필요한 게 있어서 가지러 왔어요."
할머니는 어쩔줄 몰라 하셨다. 충식씨를 친자식같이 보살펴 주시며 정이
들대로 들었던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셨다.
방으로 들어갔다.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침대 옆에 있는 빈 휠체어가 저 혼자
방 안을 빙빙 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면도구를 챙기고 필요한 물건들을 큰
가방에 넣었다.
나는 일어나 휠체어에 앉아 보았다. 아직 그의 체온이 거기에 남아 있는
듯했다. 외출한 그이를 기다리는 환상이 잠시 나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장식장 구석의 서랍을 열었다. 낯익은 노트가 보였다. 가끔씩 그
노트를 볼 때마다 펼치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외출이 정지된 그이 앞에서
감히 펼쳐볼 시간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노트 속에는 그의 정겨운 필적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의 일기였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이는 일기에서 나를 아내로 부르고 있었다.


 "X월 X일"
오늘은 아내가 이틀의 외박에서 돌아왔다. 무엇인지를 한아름 안고 돌아와서는
정리를 하면서 입을 잠시도 쉬지 않는다. 술이 나오고, 담배가 나오고, 초콜릿,
과일, 책과 카세트 테프 몇 개--. 그녀는 요술을 하는 여자같이 봉투에서
자꾸만 새로운 걸 꺼낸다. 입은 여전히 바쁘다. 우리가 젊은 시절엔 전혀 상상도
못했던 그녀의 변신이 슬프고... 나로 인한 것이기에 더욱 슬프다.


 "X월 X일"
아내가 하룻만에 들어왔다.
아직 봄은 올까말까한데 아내의 옷차림은 매우 화사하다. 봄은 내 아내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오고 있었다.


 "X월 X일"
TV 뉴스 기간에 사치 외래품 사용이 늘고 있다고 했다. 아내는 그 말을
들으면서 저렇게 까지 허영을 부릴 수 있냐고 흥분한다. 그러는 그녀는 내게 올
때 심심찮게 외제 물건을 잔뜩 사오곤 한다. 미제 커피, 양주, 초콜릿...
오늘 내가 입고 있는 가운만 해도 일제 상표가 붙어 있다. 하도 흥분을 하기에
내가 말을 걸었다.
 "그만 흥분해라. 이 방에만도 네가 사온 외제 물건이 지천으로 놓여 있다."
 "충식씨는 괜찮아요. 대신에 내가 안 쓰잖아요."
그녀의 어이없는 억지말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윤희는 나의 아내지만 난
그녀의 남편이 못되고 있다. 영원히 약혼자일 뿐--.


 "X월 X일"
예전의 아내는 그저 '알았어요. 그럴께요'라는 말 외에는 별로 말이 없는, 꽤나
수줍음을 많이 타는 여자였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종환이와 내가 따를 수 없게 말도 잘하고 때로는 수다
보따리를 열어 놓기도 한다.
나이가 서른 세살이나 된 그런 그녀가 나의 팔베개 하나만으로 곤히 자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가없고 미안하다.


충식씨는 거의 매일매일 스물네 시간 속에 채워 나가고 있었다. 그의
일기장에서는 그동안 나 자신도 잊고 있었던 지난 날의 나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서른이 넘어 마흔을 바라보는 나에게 그때의 내 모습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거울을 보는 듯이 생생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거울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방 안에 거울을 두지 않았다. 내가 그의
거울이었으며 나는 지갑에 챙겨넣는 손거울이면 되었다.
그날따라 나는 손거울조차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막연히 그때의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흘러버린 시간 속에 묻혀버린 나의 모습을 덮었다.
남편--. 나의 남편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육신 중에 유일하게 자유스러운 오른손으로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나의 모습을 새겨 넣고 있었다.
아내가 이틀의 외박에서 돌아왔다는 그의 일기는 뼈가 저렸을 것 같은 그의
고독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가 날 기다린다는 생각에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언젠가는 이
일기를 다 볼 수 있겠지. 우리가 더 나이를 먹고 노부가 되었을 땐--.)
그가 돌아올 것을 생각해서 제자리에 일기장을 넣고 혹시나 손을 댄 흔적이
남을까 살피었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나는 그의 엄청난 사랑에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번씩이나 차를 세우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병실에 있는 두 사람은 내가 나왔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이는 눈을
감은 채였고 종환씨는 우두커니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종환씨가 가방을 받으면서 식사를 하자는 말을 하였다. 전혀
내겐 밥 생각이 없었거니와 그이를 두고 끼니를 챙긴다는 것이 싫었다.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그이가 나를 불렀다.
 "가서 먹고 오도록 해. 나는 괜찮으니까."
 "아녜요. 전혀 생각이 없는 걸요. 정 배고프면 그때 먹을께요."
그러나 종환씨가 신경이 쓰였다.
 "종환씨, 잠깐 나갔다 오죠. 시장하시겠어요."
 "나도 생각은 없어요. 그러나 먹어야 돼요. 먹고 기운 차려야지만 이 녀석
'괜찮아'라는 병을 고쳐준다고요."
그이에게는 미안했지만 종환씨를 따라서 병실을 나왔다. 지친걸음으로 식당엘
들어갔으나 결국 두 사람은 식사를 포기하고 맥주 두 병을 주문했다.
종환씨가 기운을 차리지 못한 채 하루 사이에 많이 초췌해진 것이 나는
불안하였다. 그래도 그 사람이 버티고 있으며 나도 기운을 차릴 것 같았는데
이번 일에는 자꾸 내 눈치만 보고 있는 듯했다.
잔이 넘쳐 거품이 흘러내렸다. 종환씨가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나 역시
넘치는 잔을 보기만 하면서 탁자 모서리 위에 맥없이 지친 팔을 얹었다.
앞으로 그의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웬지 그이는
괜찮다거나 얼마나 입원 치료를 받으면 될 거라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반드시
의사의 무거운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괜한 불안감에 지레 기운이
빠졌다. 종환씨까지 왜 그렇게 지쳐 있는지 조금은 이해를 하면서도 걱정되었다.
항상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종환씨가 뿜는 담배
연기가 잠시 앞을 흐려 놓았다. 따라 둔 맥주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줄담배만을 피웠다.
갈증이 났다. 한 모금 들이키자 나를 위로하는 나의 음성이 들렸다.
 (그래. 그동안 우린 너무 아무일 없이 평온했어. 그래서 약간의 어려운 시기가
있는 거야. 이런 것쯤은 문제가 안돼. 충식씨는 이겨낼 거야. 꼭 이겨낼 거야.)
잔을 두 손으로 꼬옥 감싸 쥐었다.
 "종환씨, 힘 내세요. 병실에서는 그이에게 큰소리 치더니 뭐예요? 그이는 정말
괜찮을 거예요."
그는 대답 대신 웃으며 재떨이로 손을 가져갔다. 그도 목이 타는지 단숨에
잔을 비웠다.
 "미안해요, 윤희씨. 그 녀석 놔두고 우리가 이렇게 약해지면 안되는 거죠. 힘
내야죠.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지 모르겠어요."
 "저에게 미안하긴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미안해. 괜찮아'라는 말밖엔 서로에게
한 말이 없는 것 같아요."
그가 담배갑을 내밀었다. 식당에 들어와서 새로 산 담배는 몇 개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가 그것을 벌써 연기로 날려버린 탓이었다.
가슴 깊숙이까지 숨을 들이마셔 뿌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충식이 기다리겠어요. 그만 일어납시다."
 "네."
자리를 뜨려니 수북히 쌓인 꽁초더미가 무색하게 보였다. 그리고 종환씨의
눈길도 잠시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허탈한 웃음을 주고 받았다.


그날 저녁 종환씨는 돌아가고 나는 집에 전화를 걸어 능숙한 거짓말로 억지
허락을 받아냈다.
저녁에 회진을 온 의사에게 그이가 몇 가지 부탁을 하였다.
 *식탁(환자용)을 문 가까이 둘 테니 식사를 가져오는 사람은 병실 안으로 깊이
들어오지 말 것.
 *필요하면 호출 벨을 누를 테니 주사를 맞는 일 외는 간호원도 들어오지 말 것.
사람 출입을 막는 부탁이었다.
아침에 그이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던지 의사는 쉽게 승낙을 해주었다. 그이는
음악도 듣지 않았고, 말도 하지 않았으며 간간이 그의 자은 한숨소리만 들리
뿐이었다.
밤이 깊은지 오래 되었지만 그이를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를 회상하고 또
하고 몇 번을 되풀이해도 밤은 물러갈 줄 몰랐다.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지만 잠든 것 같지는 않았다.
 "충식씨."
가만히 그이를 불러 보았다.
 "음--."
 "눈 뜨고 날 좀 보세요. 자는 것도 아니잖아요. 네? 어서요."
 "피곤할 텐데 눈 좀 붙여라."
 "당신 나한테 화났어요?"
 "싱겁긴--."
 "아녜요. 당신이 화를 안 내도 내 잘못은 너무나 커요. 날 절대로 용서해 주면
안돼요."
 "아--, 답답해."
그이가 깊은 한숨과 함께 탄식인지 말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았다.
 "네 생각만 하면 난 답답해. 널 어떡하니? 윤희야, 널 어떡하면 좋으니?"
나는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서 나의 뺨을 비볐다.
 "아직도 날 몰라요? 난 당신만 있으면 끄떡 없어요."
 "만약에 내가 없어지면 어떡할래?"
그이의 얼굴에서 우리의 눈물이 섞이고 있었다.
 "몇십 년 후의 일을 지금 걱정할 건 없어요. 그건 아주아주 나중의
일이잖아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주무세요."
그의 젖은 눈에 나의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날부터 나는 충식씨의 팔베개를
할 수가 없었다. 대신에 왼팔을 뻗어 내가 나의 팔을 베고 누웠다.

 

.
이튿날 종환씨는 새벽녘에 병실로 다시 와주었다. 그는 그이의 침대 옆에
앉아서 가끔씩 '임마, 자아식--'이라고만 할 뿐 별로 말없이 있다가 회사에
출근을 해야겠다고 했다.
현관까지 내려간 나를 보며 검사 결과가 오후에나 나올 테니 두 시쯤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회사 일을 걱정하는 나에게 종환씨는 3일간만 결근 허락을
받아야겠다며 쓸쓸히 웃음 지었다.

그의 하얀 와이셔츠가 아침 햇살을 받아 눈이 부셨다.
오후가 되도록 우리를 찾는 연락은 없었고, 나는 자꾸 수다를 떨었지만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목소리도 안으로 안으로만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오후에 두 시가 좀 지나서 종환씨가 나타났다. 그는 3일간 같이 있어 줄 테니
날더러 교대를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검사 결과 때문에 듣는둥 마는둥 하였다.
우리 세 사람 중에 누구 하나만이라도 기운을 낸다면 좀 나을 텐데 두 사람의
침묵보다 세 사람의 침묵은 더 큰 무서움마저 느끼게 하였다.
저녁 회진을 들어온 의사는 나가면서 나를 불렀다.
 "삼십 분 후 제 방으로 오세요."
의사의 방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나의 피를 마르게 하였다. 담배를
물었다. 종환씨가 라이터 불을 대어 주면서 '골초가 다 되었군'하고
중얼거렸다. 저만치에서 낯익은 흰 가운의 무리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담배를 끄고
일어섰다.
 "들어오시죠."
두 사람은 의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는 머뭇거리다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많은 환자들 중에서도 유난히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엄선생도
그렇군요. 검사 결과는 몇 시간 전에 나왔는데 부인께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까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택했습니다. 다행히 친구분도 계시고 하니
부인 걱정은 안하겠습니다. 검사 결과는 아주 비관적입니다. 문제가 생긴 부분이
하나둘이 아니에요.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난감할 정도예요. 방관의 종양은
아닌 것 같지만, 그밖에 기타 조직이 모두 말썽이라서 힘이 들겠고, 제 소관은
아닙니다만 요추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간의 기능도 형편없고--. 그동안
고통이 심했을 텐데 견딘 생각을 하면 참으로 답답하군요. 물론 우리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나마 하는 말은 믿지는 마시되 각오는 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기간은 삼 개월입니다. 신경외과에서는 수술기간이
지났으므로 오 개월로 잡고 있습니다."
 "잠깐만요. 삼 개월 오 개월이라뇨? 뭐가 남았단 말씀인가요?"
 "그 후에는 기대를 걸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부인."
 "선생님 전혀 방법이 없나요?"
종환씨의 목소리는 알아 듣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떨고 있었다.
 "우리가 힘을 쓰고 있는 중이니 앞으로 2__3일 더 지켜봐야겠죠. 하지만 기대는
갖지 마십시오."
나는 의사가 정확한 답변을 함에도 불구하고 전부가 동문서답으로
들렸다. 답답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지금 나의 말을 못 알아 듣고 있는 것이었다.
방에서 나오자 우리는 뒤뜰로 나갔다. 땅바닥으로 내렸던 더위가 가히 질식을
할 만했지만 나갔을 땐 이미 저녁무렵이었다. 직선 방향으로 반듯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건물 자체보다는 문으로 드나드는 여인네들의 옷차림이 선뜻
다가왔다. 소복이었다. 저곳이 영안실이구나. 불길하고 무서웠다.


그이의 팔베개를 못한 지 이 개월 동안의 병실 생활. 그의 고통, 그의 침묵을
더 이상 옮기지 못하겠다는 것을 여기에서 밝혀둔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몇 번이고 내가 쓰는 글을 멈추려고 하였다. 이미 출간이 된 상권을
도구 거두어 들이고 싶었고 그런 후 먼길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약속이 되어진 일이니만큼 나의 방황과 후회는 계속될 수
없었다. 또한 나머지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믿으며 이 개월 동안
그와의 마지막 추억을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나의 용심을 이해해 주길 바라면서
그 부분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다--.


그이가 입원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나서 종환씨는 출근하기 전화 점심 약속이
없는 날은 낮시간까지 하루에 두 번씩 다녀갔고 퇴근후에는 거의 들르질
못하였다. 중책을 맡은 직장이 있고 아내와 아들이 있는 그가 그의 의무와
책임까지 투자하는 걸 우리는 진심으로 원치 않았다.
종환씨와 나는 그이가 입원한 지 두 달이 되어오자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병실 출입은 그의 부탁을 받은 의사의 지시로 철저히 통제되었다. 저녁
회진이 끝나면 바로 주사를 맞은 후부터 아침 회진까지 아무도 들어오질
못했다.
그날 저녁에 그이는 제발 집에 가서 푹 쉬고 볼 일도 다 본 다음에 다음날
늦게 오라는 부탁을 여러 번 하였다.
 "내 말 들어라, 윤희야. 그래야 내가 편하단 말야. 제발 오늘은 집에 들어가."
 "알았어요. 집에 갈께요. 대신에 불편한 일 있으면 벨을 누르셔야 돼요. 벨을
누를 때는 주사 바늘 조심하셔야 되고요."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나는 집으로 오기 위해 일어섰다.
 "윤희야."
 "네."
 "윤희야."
 "네, 충식씨."
 "미안하다."
그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저두요."
 "십 분만 있다가 갈래?"
 "그럴께요."
그는 계속 '윤희야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였고 나는 '저두요'하면서 그의
얼굴을 자꾸자꾸 쓰다듬었다.
 "이제 가봐. 내일 올려고 하지 말고 오후 늦게 천천히 와야 된다."
문을 막 열려고 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임마."
 "네."
 "내 방에 가면 서랍에 일기장이 있다. 그 안에는 우리의 일만 적혀 있단다. 내가
왜 일기장을 너에게 보여 주는지 그 이유는 내일 가르쳐 주마. 됐다. 잘 가라,
잘가. 윤희야."
너무도 고마워 눈물이 나왔다.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병실을 나왔다.

 


아무리 한여름의 날씨라 하지만 더위는 해도해도 너무했다.
1984년의 여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의 폭염은 생각하기도 끔찍할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찾는 곳은 욕실이었다. 찬물을 끼얹을 때
뿐이었다. 가족들은 내게 의심에 찬 눈길을 피해 일찍 불을 껐다.
삼 개월? 오 개월?
벌써 2개월이 지났다.
가슴속에서는 죽음을 쫓는 굿이 한창이었다. 잠을 잔 것인지 아니면 밤새
꿈속을 헤맨 것인지 아침의 머리는 너무나 아팠다. 안방에 불려가 한바탕 꾸중을
들은 후 휘청거리는 걸음을 끌며 다시 내 방으로 왔다.
여기저기 몇 군데 전화를 걸고 외출 준비를 하려는데 도대체 몸이 움직여
주질 않았다. 심한 통증은 멈출 줄을 몰랐고, 편도선은 부어서 침을 삼킬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았다.
벌써 12시를 넘고 있었다. 서둘러 방을 나왔다. 성남으로 바삐 차를 몰았다.
한때 우리의 사랑을 더욱더 다짐하게 해주었던 시를 그에게 읽어주기 위해
시집을 몇 권 가지고는 할머니와 얘기 할 틈도 없이 다시 차를 돌렸다.
 (삼 개월? 오 개월? 말도 안되는 소리야. 우리에게 두 번 다시 그런 형벌은 안
내릴 거야."
하마터면 병원 정문의 기둥을 들이받을 뻔하였다.
엘리베이터 앞은 많은 문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병실
문을 노크 할까 하다가 그냥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되돌아 나오려고 하는데 창가에 내가 꽂아둔 안개꽃이 보였다.
 (잘못 들어온 게 아닌데. 이이는 어딜 갔지?)
엘리베이터 맞은편에 있는 안내 창구로 뛰었다.
 "여보세요. 엄충식씨 어디 갔어요?"
다리가 어찌나 떨리는지 무릎이 자꾸 꾸부러지는 것 같았다.
 "어머, 그럼 모르셨어요?"
간호원의 눈이 놀라고 있었다.
 "뭘요?"
 "빨리 중환자실로 가보세요."
 "중환자실이 어디에요? 아, 아녜요. 알아요."
나는 계단에서 몇 번을 주저앉았다.
 "충식씨, 안돼요. 안돼요, 충식씨."
계단을 올라오던 어느 여자가 날 부축해 일으켰다.
 "아주머니, 저 좀 도와주세요. 걸을 수가 없어요. 중환자실로, 중환자실로요."
중환자실의 문을 열었다. 푸른 가운차림의 여자가 날 못 들어오게 막았다.
 "여긴 들어오시면 안되는 곳이에요. 나가세요."
 "엄충식. 엄충식씨 여기 있죠?"
 "그분 가족되세요?"
 "네. 제 남편이에요."
 "어머 어떡하지. 안치실로 가보세요."
 "안치실?"
 "네. 시간이 꽤 되었는데--."
 "거기가 어딘지 난 몰라요. 데려다 주세요."
간호원은 잠시 망설이더니 내 팔을 잡았다. 계단을 내려가고 병원 뜰을
지나면서 간호원이 말을 건넸다.
 "왜 병실을 비우셨어요?"
 "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자살을 생각하셨겠어요."
 "자살...? 자살요? 그럼 그이가--."
 '욱'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어디론가 뛰고 있었다. 복도를 오가는 하얀 가운에
내 머리가 부딪치기도 하고, 낯선 문병객들에게 나의 몸이 마구 부딪쳤다.
발 밑에서는 크나큰 건물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어둠뿐이었다. 무서운
천둥소리가 쉴새없이 으르렁거렸고, 짧은 번갯불이 실성한 한 여자를 희롱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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