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그의 고통은 이제 사라졌다. 영안실로 옮겨 분향대가 마련되었다. 세상에 그를 위해 향불을 바칠 이가 누가 있단 말인가. 나는 혼자서 조문객이 되기도 하며 자꾸자꾸 향을 꽂았다. '윤희야, 미안하다' 그의 마지막 목소리는 마구 내 귀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살이라니... 나를 두고 스스로 가다니,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럼 지금까지 내게 준 사랑은 무엇이었는가. 위선, 지독한 위선이다. 그는 내가 걱정이라고 했다. 걱정? 무엇이 걱정인가?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의 죽음은 배신이었다. 18년 동안 지켜온 내 꿈에 석유 불을 지르는 무서운 배신이었다. 나는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그에게 받은 배신감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 그를 두고 신열을 앓았던 내 열정을 그에게 희롱 당한 것이었다. 그의 죽음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때 입구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종환씨였다. 그의 걸음은 휘청거리다 못해 절룩거리는 것 같았다. 그가 내 앞에 섰다. "윤희씨." 나의 눈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난 저 나쁜 사람 다시 안 만났어. 난 충식씨에게 희롱 당한 거야. 모두가 너 때문이야. 내 남은 인생은 네가 책임져야 돼.) 종환씨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슬펐다가는 화가 나서 울다가 다시 웃는 등 내 머릿속은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신은 잠시 동안 우리에게 목장과 샘과 소근대는 넓은 숲과 깊은 부동의 바윗굴과 푸른 하늘과 호수와 평화를 주시고 그리고 거기에 우리의 마음과 꿈과 사랑을 안겨 주신다.
이윽고 모든 것을 거두어 가고 신은 우리의 불꽃을 불어 끄신다. 우리가 불빛 밝히는 등불을 신은 어둠 속에 잠기게 하신다.
그렇다. 신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기쁨을 내게 주셨다. 아주 잠시 동안, 정말 잠시 동안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을 받아들이는데 내게 무슨 큰 잘못이 있었단 말인가. 차라리 다른 걸 내게서 빼앗아 가면 안 되었던가. 하필이면 이 사람을, 충식씨를, 내 남편을, 아니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편, 엄충식씨가 떠난 지 이틀이 지났지만 영안실에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혈맹의 관계인 종환씨와 오랫동안 그의 뒷바라지를 해주신 성남 할머니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할 일이긴 하지만 그 쓸쓸하고 무서움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옆에 있는 영안실에서는 문상객들이 어찌나 많이 찾아오는지 텐트가 두 군데나 설치가 되고 음식과 술이 배달되는 등 한 인간의 죽음이 너무 슬퍼서, 아예 술에 취해 괴로움을 잊으려고 하는 듯 온종일 북적대도 있었다. 세상에는 많은 이별이 있다 다시 만날 수 있는지에 따라 헤아려 보자면 수도 없이 다양하다. 그러나 누구나 겪는 이별의 한, 그러면서도 가장 큰 것이 생과 사의 이별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 생명이 세상을 떠나면 의례히 유족들이나 조문객들이 모여들어 죽은 이의 넋을 기리고 성격이나 삶에 대해 떠들어 대며 나름대로 자신의 남은 삶을 정돈하기도 한다. 또 그들은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죽지'라는 생각으로 먼저 간 사람을 위로하고 자신의 죽음을 감춘다. 그들의 말 속엔 언제나 상반된 뜻이 있는 것 같다. 누구나 죽는다는 그 말엔 체념과, 생병에 대한 숭배가 끈적인다. 조문객에게 감사를 표하느라고 상주가 되는 사람은 울음도 멈추어야 한다. 그들의 그런 부자유와 산 사람과 죽은 사람과의 경계가 지어지는 소란함이 우리 두 사람 옆에서 어색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아--, 우리는 조용한 걸 좋아했었지.) 나는 이틀을 그저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줄담배만 피워 대며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더해도 그이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그런 일이 그에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쁜 사람. 엄충식, 엄--충--식. '미안해, 정말 미안하구나. 널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난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윤희야, 네가 걱정이 된다. 잘 하겠지만 정말 걱정이 된다구'--평소에도 자주 하던 말이라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것이 이제는 그 사람이 생전에 했던 유언 중의 하나로 뒤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 속에 그이가 하고 싶었던 말 하나하나가 담겨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반복되는 말 속에 그이가 나와의 이별을 알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남편의 죽음을 방조한 죄인이 되었다. 날 위해서...? 내가 걱정이라구? 잘 할 거라고? 그럼 이 사람의 죽음은 나에 대한 사랑의 표시인가, 아니면 내 사랑에 대한 거부의 표시인가? 마음 한구석에 일어나는 그에 대한 의문은 진정 내 자신에 대한, 그리고 죄책감에 대한 용서의 포장이었다. 그가 나를 위해서 이런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다니...환상 속을 맴도는 그의 최후의 신음소리가 가슴을 후비는 아픔과 함께 귓전을 울리었다. 휠체어를 탄 남자와 그의 아내가 스쳐 지나간다. 아내는 언제나 그의 휠체어 뒤에서만 걷고 있다. 남편은 그녀가 함께 걷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녀는 그의 발이요, 손이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며, 남편은 따뜻한 미소로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행복에 겨워 눈을 감았다. 눈을 뜬 순간 빈 휠체어 앞에 서 있음을 알았다. 나는 그가 내 곁에서 떠났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충식씨의 죽음은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냐. 충식씨는 절대로 날 두고 죽을 리가 없는 사람이야. 어이없이 혼자서 오해를 하고 잠시 동안 내 곁을 떠나간 것뿐이야. 며칠 기다리면 돌아오겠지. 그래, 꼭 돌아올 거야.) 그렇다. 충식씨는 내가 많이 힘들어 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일 주일에 한 번씩 나오는 많은 액수의 입원비 청구서에 며칠씩 집에 못 들어가는 일, 무엇보다도 내가 마냥 지쳐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는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억울한 일이었고, 가엾은 그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으리라. (그래요. 사실 나는 힘이 들었어요. 그러나 당신의 고통에 비하면 내가 힘든 것은 오히려 당신에게 미안할 정도예요. 이제 오해를 풀어요. 난 억울하니까요. 제발 오해를 풀라구요. 풀어요 제발.) 도무지 정리할 수 없는 엉망인 생각으로 넋을 잃고 있는데 관리실 직원이 독촉을 하러 왔다. 그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입관 절차에 전혀 협조를 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 이렇게 앉아만 계시면 어떡합니까! 오늘 결정을 짓지 않으면 우리가 곤란합니다. 이제 그만 정신차리시고 입관하실 준비를 하셔야죠. 원 세상에, 이렇게 아무도 없단 말인가. 아주머니 외에는 아무도 없으세요? 정말 혼자세요? 친구분이 있는 것 같던데--."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직원이 돌아서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저러다 돌지, 돌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은데..." 입관이라니..., 아니 그럼 그이에게 수의라는 걸 입히고, 네모난 나무 상자에 넣고--. (안돼, 안돼! 그이를 관에 넣다니--." 나는 내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 두 사람이 나누어야 할 이별의 의식이란 말인가. 나에게 왜 이런 일가지 시키는지 그에게 섭섭한 마음뿐이었다. 문앞에서 서성거리면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직원이 보였다. 나는 곧 준비를 하겠으니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을 한 후, 영안실을 나와 버렸다.
7월의 날씨는 지독히도 무더웠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겨우 뚫고 주차장 쪽으로 발을 옮겼다. 차 안은 마치 뜨거운 물을 분무기에 담아 뿌려놓은 듯 뜨겁고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액셀을 힘있게 밟고 변속기를 바로 4단으로 옮겨 버렸다. 차는 잠시 땅위로 솟는 듯 심하게 흔들리더니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고속버스 터미날 앞을 지나 반포, 동작동, 그리고 노량진 입구에서 강변도로로 들어섰다. 속력을 내고 계속 앞 차들을 추월하자 여기저기서 요란하게 경적을 울려 댔다. 엄충식. 엄...충...식, 엄--충--식. 나는 그 사람의 영원한 부재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어디로 갈 곳이 없다는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나는 강변에서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가 없으므로 내가 혼자이듯, 내가 없는 그는 혼자였다. 그를 차가운 영안실에 있게 한 채 도망치듯 나와 버린 나를 걱정하고 있을 그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그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아직 그는 죽지 않은 채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눈물을 닦고 시동을 걸었다. 나는 차를 돌려 남자 기성복 가계로 갔다. 검은색 양복을 샀다. 흰 와이셔츠와 하얀 실크 넥타이 그리고 검정색 양말을 샀다. 신사화가 진열된 코너에 멈추었다. 그에게 구두가 없음이 늘 가슴 아팠다. 그러나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가끔 종환씨가 새 양복을 맞추어 입고 오면 그이는 친구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었다. "야아--, 근사한데? 아쭈, 넥타이도 새거잖아. 오늘 착복식 해야겠네." 그럴 때면 나는 종환씨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서운함을 참지 못하고 종환씨에게 불평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양복을 사들고 착복식을 하기 위해 전속력을 내었다.
"엄충식씨 가족 준비되었으니 들어오세요." 의사의 방에 있는 진찰대 같은 침대 위에 그이는 하얀 이불을 덮고 단정히 누워서 자고 있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자기 여자가 들어와도 모르고 잠에만 취해 있었다. (저 사람을 깨워야 돼. 바보같이 잠만 자고 있으면 어떡해. 그만 자게 해야지. 깨워야 돼.) 하얀 천을 살짝 젖혀 보았다. "충식씨, 저예요. 윤희라구요. 그만 자고 눈 떠보세요. 저 왔다니까요. 당신 정말 이럴 거예요?" 아무리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는 내 남자의 고집이 하얀 천 속에 있었다. 그이는 차가운 체온으로 자기의 죽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나를 그로부터 떼어 놓은 인부들이 재빨리 그의 흰 덮개를 완전히 젖히었다. 그리고 하얀 탈지면에 무슨 물인가를 적시더니 그의 얼굴과 몸을 닦아 주었다. 내 팔을 잡고 있는 종환씨의 손이 심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내가 늘 목욕시키던 저 사람인데--.) 두 남자 중에 한 사람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주머니, 정말 수의를 양복으로 입히실 겁니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허--참, 내 이짓 시작한 지도 꽤 오래 되었지만 신사복 입고 저승가는 양반은 처음일세 그려." 저승을 보내기 위한 단장은 아니었다.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그에게 새로운 방문지에서 좋은 인상을 받도록 아내로서 준비를 해줄 뿐이었다. 나는 남편의 여행지를 알고 잇다. 이제 나는 남편을 만나러 집이 아닌--숲이 있고, 이웃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안식하고 있는--곳으로 갈 수 있다. 그곳에선 아마도 남편을 제일 당당하고 멋진 남자겠지. 얼굴 때문에 걱정을 하게 되진 않을 거야. 오랜만의 여행으로 그에게 가져다 줄 홀가분함이 방 안에 가득했다. "아가씨, 옷 잘 입혀 드려야 돼요. 제가 도와드릴께요." 내가 가까이 가려 하자 내 팔을 잡아 다녔다. 그리고는 내 귀에 대고 작은 소리지만 힘있게 말을 하였다. "윤희씨, 정신 차려요. 손에 힘을 주어서 주먹을 불끈 귀고, 눈을 크게 떠서 저 녀석을 똑바로 쳐다봐요. 아주 건방진 자식이에요. 저렇게 건방질 수가 없다구요. 우리 울지 맙시다. 나쁜 자아식--." 그러나 종환씨는 나보다 더 울고 있었다. 우리의 눈물이 도와주는 것을 방해하였다. 인부 중 한 사람이 옷을 입히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자식이 없으슈?" "네." "원 세상에 자식이라도 하나 남기고 갈 것이지, 보아하니 나이도 젊으신데 혼자 어찌 살려누." (아아--. 정말 혼자 어떡하나. 누구의 머리를 깎고, 누구의 목욕을 시키며 누구를 위해 음악을 틀어야 하나. 난 못해. 저 사람을 따라가야지. 그래, 따라가는 거냐. 아, 이제 편하구나. 따라가면 되는 걸 괜히 그랬다.) 그이가 정장을 하였다. 그렇게도 입혀 주고 싶던 양복이었는데 저승의 길에서나 새 옷을 입게 되다니--. 그 사람의 양복을 입은 모습은 약혼식 이후 16년만에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에게 다가갔다. "충식씨, 섭섭해요. 얼마나 섭섭하다구요. 이런 식으로 날 혼내주면 어떡해요."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내 말은 목에 걸려서 겨우겨우 기어나오고 있었다. 그이의 손을 만져 보았다. "내 손을 꼭 잡아 보세요. 자아, 어서요. 잡아 봐요." 자꾸 손에 힘을 주어 보았다. 그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당신 이제 괜찮은가 보죠? 부기가 많이 빠졌네요." 눈물이 자꾸 그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다. 가슴에 얼굴을 가마니 대어 보았다. "아아, 당신 정말 갈 거예요? 아니죠? 그만 주무시고 일어나요. 빨리요." 눈물이 그의 새 양복을 적시고 있었다. 종환씨가 내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이는 여행을 떠나기 위해 다시 장소를 옮겼다. 나무로 만든 작은 배에--. 테이프 몇 개를 그의 가슴에 올려 놓아 주었다. 그리그의 "페르귄트". "아침에 꼭 들으세요. 저도 그럴께요."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종환씨랑 나랑 생각날 때 이 곡을 들으세요." 파헬벨의 "카논 D장조". "이건 제가 좋아하는 곡이잖아요. 선물이에요." 남자들이 못질을 하기 시작했다. 내 가슴에도 자꾸 못이 박히었다. 그 남자들은 자꾸자꾸 내 온몸에 못을 박아 댔다. 종환씨에게 끌려 밖으로 나온 나는 뒤뜰로 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낮 동안 더위와 습기를 빨아들인 땅은 밤을 틈타서 후덥지근한 지열을 내뿜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말할 때 하늘나라로 갔다고 하지. 그럼, 저 곳인가? 영혼은 정말 있을까? 아마 없을 거야. 아냐, 있다고 믿어야지. 나는 자꾸자꾸 하늘만 쳐다보았다. 성남시 쪽으로--. 서울에서도 볼 일을 보다가도 그이가 생각날 때면 자꾸 성남 쪽 하늘을 바라보곤 하였다.
이제 우리는 지난 날의 회상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사랑은 헛된 것이었단 말인가? 가엾은 사람. 행복했던 나.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뒤섞이고 몸은 어디고 눕기만 하면 금방 잠이 들것만 같았다. 종환씨가 커피를 뽑아 왔다. "미안하오." "..." "난 죽은 저 녀석 생각보다는 윤희씨 당신이 걱정이 돼요. 오래전, 정말 죽은 걸로 했는데, 내가 그 약속을 어기고 약수동으로 당신을 데리고 가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앞으로 윤희씨가 불행해 진다면 그건 모두가 내 탓이오. 정말 미안해요." "종환씨는 툭하면 그 소리예요? 재떨이가 없어서 불편했는데 빈 컵이 생겨서 잘 됐네요. 종환씨 담뱃재 여기다 떨어요." 재떨이 타령이라니, 말을 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잘 해왔듯이 우선 무얼 좀 먹고 기운을 차리도록 해요. 산 사람은 살게 마련이라는 말도 있잖소." 나는 아무 말없이 일어나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종환씨의 걱정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산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할 시간은 너무도 많았다. 내 뒤를 쫓는 종환씨의 발소리가 신경을 거슬렸다. 둔탁하게 머리를 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없는 것이 꼭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어딜 가려고요?" 종환씨가 볼멘 소리로 물었다. 나는 두 남자가 다 미웠다. "집에요. 졸려 죽겠어요. 이틀이나 집에도 못들어갔어요." "택시를 타도록 해요. 지금 운전은 안돼요." 종환씨의 손을 뿌리치고 차에 올랐다. 그는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려요. 말 들어요, 제발." 그는 급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소년 같았다. "내일 아침에 올께요." "왜 이래요. 택시를 타라니까." 종환씨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웃음을 그에게 보내면서 시동을 걸었다. 그가 재빨리 차 앞으로 돌아서 내 옆자리에 앉았다. "윤희씨, 이대로 운전은 안 된다니까요. 고집 부리지 말고 택시를 타요." "종환씨는 마음도 참 한가하군요. 지금 나 챙겨줄 여유가 있어요. 하기야 나도 졸리니까. 참견하지 말고 내려요. 빨리 가서 자야겠어요." 종환씨가 핸들을 잡고 있는 내 손을 잡았다. "윤희씨, 충식이하고 내가 밉죠?" "그래요. 미워요. 난 서민우라는 남자가 내 인생에 훼방꾼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진짜 훼방꾼은 엄충식, 이종환 두 사람이었어요. 이래도 되는 거예요? 이렇게 떠날 수 있는 거예요?" 나는 핸들에 얼굴을 묻고 흑흑 소리내어 울었다. 나의 고집을 잘 알고 있는 종환씨는 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빨리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잠이 올 것 같다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밤새도록 꿈속에서 충식씨와 다투고 나니 벌써 아침이 오고 있었다. 보통 날고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페르귄트"를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페르귄트'는 노르웨이 전설 속에 나오는 인물이야.)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페르귄트'가 누구든 알게 뭐예요. 이젠 아침에 이 곡을 듣지 않을 거예요.) 전축을 끄고 마시다 만 커피잔을 밀어 버렸다. 샤워를 하고 나오다가 거실에서 엄마와 마주쳤다. "엄마, 오랜만예요. 화났어요?" 나는 뒤에서 어머니의 목을 껴안으며 '엄마 미안해요. 엄마, 죄송해요'라는 말을 했다. "얘가 왜이래. 이거 놔라. 또 얼렁뚱땅 넘어 갈려고 그러지? 암만해도 니가 무슨 큰 일을 저지르고 다니지. 허구헌 날 외박에 집에 들어오기 무섭게 새벽이면 나가고, 이러다가 집안 망신당할 일 생기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엄마, 아침예요."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다. 아침이라고 말 못하게 하고, 밤에는 피곤하니 다음에 얘기하자고 그러고, 도대체 언제 얘길 하자는 거냐. 분명히 내 배 아파서 난 자식인데도 속을 통 모르겠으니, 어휴--. 나무관세음보살." (엄마. 충식씨가 죽었어요. 오늘 그이를 산에 묻어요." "엄마, 죄송해요. 나쁜 일은 없어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머리의 물기를 터는 척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건 그렇구. 요새는 왜 옷도 신경을 안 쓰고 그래? 좀 밝은색의 옷 좀 입어. 얘가 왜 점점 그러니." "네, 엄마 그럴께요." (아아, 그렇지. 오늘은 화려한 색의 옷을 입자. 화장도 하고--. 오랜만에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 속의 나를 보았다. 얼굴은 누렇게 떠 있고 눈두덩은 푹 들어간 것이 몇 일 심하게 앓고 난 사람 같았다. 먼저 젖은 머리를 잘 다듬은 후, 분을 바르고, 눈썹을 다듬고, 아이라인, 마스카라, 그리고 빨간 루즈를 발랐다. 피곤한 기색은 화장 속에 완전히 숨겨져 버렸다. 빨간색의 마지로 된 원피스에, 흰색의 구슬백과, 하얀 하이힐을 준비하는 등 우리 두 사람이 이별의 식장에 가기 위한 준비가 끝이 났다. 약혼식 때는 기쁨의 화사함이, 지금은 화사한 슬픔이 소리없이 퍼졌다. (원해서 가는 길이니 축하를 해줘야지. 그리고는 나도 따라가는 거야.) 생각이 여기까지 마치자 나는 그 사람이 죽음의 방법으로 나를 배반한 것 같아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자기의 죽음 뒤에 내가 어떨 거라고는 왜 생각을 못했나. 잘 견딜 거라고? 나 혼자 무얼 어떻게 견뎌. 배--신--자. 엄--충--식. 아주 멋있게 축하해 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