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결혼으로 또 다른 아픔
경기도 신장에서의 어렵고 알뜰한 1년 동안의 생활 덕분에 풍족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적잖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의 새로운 거처를 마련키 위해 성남 쪽으로 넓은 방과 마음씨 좋은 나이가 지긋한 주인을 구하러 다니기에 바빴다. 그러던 중 어느날 노인 내외분이 조카와 함께 살고 있는 깨끗한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방 뒤쪽 가까이 개울이 흐르고 개울 건너 국민학교 운동장이 보이는 한적한 곳이었다. 방은 아주 넓었고 옆에 조그만 창고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허락을 얻어서 방과 창고를 막고 있는 벽의 한쪽을 헐어 문을 만들고, 창고에 정화조를 묻어 양변기를 놓고, 욕조를 만들고 항상 더운물을 쓸 수 있도록 가스 온수기를 설치했다. 의료기를 파는 곳에 가서 환자용 침대를 부탁하고 세운상가에 가서 전축을 사고, 주주인 할머니가 소개해 준 목수에게 부탁을 해서 한쪽 벽에 장식장을 만들고, 충식씨가 좋아하는 음악과 책 등을 수첩에 적어서 레코드 가게와 서점을 돌아다니는 등 우리의 가난하고 쓸쓸했던 신장의 생활을 없애기 위해 분주한 날을 보냈다. 방은 깨끗하고 훌륭했다. 한쪽에 환자용이긴 하지만 침대가 있었고, 장식장에는 책과 레코드 등이 충식씨가 휠체어를 타고 쉽게 꺼낼 수 있는 높이에 단정히 꽂혀 있었으며, 테이블에는 커피포트와 커피잔과 그리고 조금 비싸고 향이 좋은 커피병이 놓여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날 기쁘게 한 것은 전축이었다. 아직은 몇 장 안되는 레코드였지만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가 있었고, 아침 "페르귄트 조곡"도 있었으며,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도 있었다. 거기에다 할머니가 어찌나 잘 대해 주시는지 내가 성남에 들르지 않을 때도 큰 걱정은 되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쉽게 정이 들지 않는지 충식씨는 할머님을 꺼려했지만 어느새 충식씨는 마치 할머니의 친아들 같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모든 일이 이루어져 가고 마음의 평정도 새롭게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집안에서의 결혼 독촉이었다. 이때쯤 집에서는 아랫 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고 아직 결혼을 안 한 큰 딸이 부모님에게는 큰 부담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집안의 수치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침 출근하는 나의 등뒤에 어머니의 한숨이 자주 들렸고 맞선조차 안 보려고 하는 내게 부모님의 원망 섞인 꾸중은 늘 떠날 날이 없었다. 중매가 들어와도 학교 일이 바쁘다든가 이런 저런 핑계로 거절을 하자 아예 어머니는 일방적으로 날짜와 시간을 정해 놓으시곤 하였다. 그렇게까지 되자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고 충식씨의 일을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복잡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선을 본다고 해도 그것은 부모님 체면을 생각한 나의 시간 때움이었다. '충식씨 어떡하면 좋죠?'라고 물었으면 좋으련만 차마 말을 꺼낼 수도 없고 의논할 사람이라고는 종환씨 뿐이었다. 그런 일을 의논한다는 것이 웬지 부끄러운 일이기는 해도 가장 힘이 되는 사람은 역시 종환씨 뿐이었다. 신장과 성남에서의 생활을 하는 동안 종환씨는 결혼을 하여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의 고충을 다 듣고 난 후 종환씨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나에게 말했다. "부모님으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시죠. 중매가 들어오는대로 선을 열심히 보세요. 그러다가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결혼도 하고요. 충식인 걱정하지 마세요. 윤희씨 결혼하게 되면 그 녀석은 제가 맡겠습니다. 집사람에게도 이미 말을 해 놓았어요." 그의 뜻밖의 말은 나에게 심한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종환씨,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충식씨와 나와의 관계를 그렇게 밖에 생각을 안했어요? 좋은 사람 있으면 결혼을 하라뇨?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하면 그이를 맡겠다구요? 맡아요? 충식씨를 맡아요? 그 사람이 무슨 임자 잃은 물건인가요? 그럼 처음에 나를 약수동에 데려갈 때는 종환씨 결혼하고 안정될 때까지 충식씨를 맡아달라는 의도에서였나요?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설마 그 사람의 생각도 같은 건 아니겠죠?" 물론 종환씨의 마음을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그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나에겐 충식씨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의 사랑을 그들은 현실적 이유만으로 완전하게 이해해 주고 있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계속 꼬리를 잇는 외침들을 가눌 길이 없었다. 이제 의논할 사람마저 잃고 말았다. 가족들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결혼을 미루어 왔던 나에게 보이지 않는 독촉과 압력을 보내왔고 나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가족들간의 위기의식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출근길에 나를 불러 세우시는 아버님은 보통 때와는 달리 많은 얘기를 하시는 편이었고, 어머니는 학교로 어디로 나 자신보다 더 바쁜 것 같았다. 굳이 비밀로 할 필요도 없었지만 충식씨에게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지 않았다. 평소에 나의 결혼문제로 많이 괴로워하고 있는 그였다. 좋은 사람 나타나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람은 살아가면서 운명이라는 것을 몇 번 느끼고 삶을 마친다고 한다. 그와 나에게 있어서 우리는 서로가 하나의 운명이며 유일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그 자신도 그렇다고 여기면서 끊임없이 부인하고, 그럼으로써 나를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행복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그의 의무감이 항상 날 괴롭혔다. 가족들과의 마찰은 실상 나에게 큰 부담은 아니었다. 우리의 문제가 가슴 한복판에 자리잡은 채 무거운 납덩이가 되어 어떻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미 결정지어진 운명의 실로 이어진 우리라면 왜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인지? 그간의 고통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나로 인해 그는 이런 고통을 더욱 더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여튼 나는 충식씨에게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운명의 힘으로 우리가 묶여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스물일곱 살의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그의 유일한 여자로 인정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끊임없이 거부를 받고 있었다. 어느날 밤이었을까. 그 여자는 사랑을 받기 위해, 아니 확실한 그의 여자가 되기 위해 먼저 잠자리에 든 남자 옆에서 조용히 불을 껐다. 그리고는 위태로운 사랑의 헌납을 위하여 옷을 벗어 내렸다. 여자가 침대에 올라오는 기색이 보이면 으레히 살아있는 팔 하나만을 뻗는 가엾은 남자였다. 여자로서는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었고, 더 이상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양퍄껍질을 벗겨내듯 조심스럽게 옷을 하나하나 벗어 내리는 여자는 받아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사고할 수 있는 두뇌와 오른팔 외에는 모든 기능이 마비된 남자에게 무얼 발랄 수 있겠는가? 여자는 어두운 방안의 공기에 몸을 부딪치며 훠이훠이 날았다. 방의 공기와 따스하게 여자의 몸에 와 닿았다. 춤을 추는 여자의 행복도 어둠은 외면하고 있었다. 관객인 한 남자마저도 눈을 감고 있으리라. 앞으로... 뒤로... 좌로... 우로... 몇 번을 쉴새 없이 날고 있었다. 여자는 나래를 접어 침대에 올라서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몸을 눕히었다. 그러자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팔을 옆으로 뻗으며 여자를 맞이했다.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누워 있었으나 의외로 오랜 침묵이 계속되었다. 얼마나 그대로 있었을까? '그는 자는 걸까?...아니면 자지 않으면서도 자는 척하는 걸까?...' 나는 그가 잠이 든 것으로 알고 옆으로 누워 그 사람의 목을 가볍게 끌어 안았다. 그러나 그는 잠이 든 것이 아니었다. 여자인 내 몸이 너무 많이 벗겨져 있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윤희야!" 그 목소리는 아주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다. "안 주무셨어요?" "너, 일어나." "네? 뭐 갖다 드려요?" "일어나!"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왜 그러세요?" 그가 왜 그러는지 알면서도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바보인 나는 역효과가 날 경우를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다. "충식씨, 그냥 자요. 우리." "너 안 일어날 거면 휠체어 이리 가져와. 내가 의자에서 잘테니까." "그냥 주무세요." "너 정말 말 안들을 거야? 너야말로 왜 이래. 빨리 일어나 옷 입지 못해?" 그는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발작이었다. 난 죽은 듯이 누워만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커지고 발작의 정도는 더욱 더 심해만 갔다. "너 남자가 생겼구나. 말해봐.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구. 왜 말 못해. 혹시 내가 널 놓아주지 않을까 봐서 말 안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얘기를 해봐. 내가 늘 말했잖아.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야 한다구. 내가 널 어떻게 붙잡을 수가 있어?" 침대에서 내려와 나이트 가운을 걸치는데도 여전히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난 말야. 너 잡지 않아. 이 몸을 해가지구 널 어떻게 잡아. 안 그래? 나 신경쓰지 말고 앞으로는 여기 오지도 마. 지금까지 나 돌봐준 것만도 고마운데...여기서 더 이상은 결국 날 괴롭히는 게 돼. 알았어? 이제 우리 끝이야. 오지 말라고. 알았지? 나에게 와서 그 남자 생각하고, 이제는 잠자리에서까지 말야. 너 이러면 나는 뭐고 넌 또 뭐야. 다 그만 두라구. 그동안 애 많이 썼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난 충식씨 밖에 없어요.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날 몰라요?" 말을 삼키며 그날 밤은 침대 아래 방바닥에 쭈그리고 누워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아침. 그의 무표정과 침묵 속에서 심한 부끄러움과 절망감을 느끼며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거의 두 달 후.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내 특유의 고집으로 충식씨는 어느날 알몸인 나에게 팔베개를 다시 건네주었다. 딸을 시집보내고 싶은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열망은 2, 3년 동안 여러 번의 맞선을 보는 데까지 이어졌다. 여기서부터 나는 몇 달간의 곤혼스럽고 부끄러운 나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주말이면 집에 차분히 붙어있는 적이 없고, 일주일이면 몇번씩 퇴근이 늦은데다가 가끔씩 은영이의 핑계를 대며 외박을 하는 딸에게 쏟는 어머니의 집념은 최고의 절정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혼담이 오가고 양가 집안 어른들끼리의 이야기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내가 싫다고 얘기한다 해도 귀를 기울여 줄 사람이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엉뚱한 남자 서민우--.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해 4월이었다. 식목일 전 날 수업을 끝내고 무용실을 나오는데 사환 아이가 학부형이 찾아 왔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교무실 앞 복도에 나이가 지긋한 여자 두 분이 서 있다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학부형으로 너무 나이가 많은 것 같아 의아해 하는 나를 보며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하여 운동장에 있는 벤치로 나갔다. "누구...신가요?" 궁금해 하는 나를 찬찬히 훑어보는 듯하더니 그중 한 분이 입을 열었다. "저어, 사실은 내 아들을 소개시켜 주려고 왔어요." 오랫동안 중매가 들어오지 않아서 나는 마음이 편해 있었고, 어머니의 조바심을 하고 있던 터인데 나로서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누가 김선생 얘기를 하면서 한 번 만나 보라고 하기에 찾아왔어요. 마침 내일이 공휴일이니 한 번 만나 보도록 합시다." 물론 나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이렇게 찾아오셨는데 죄송해서 어떡하죠? 내일 제가 시간을 내기가 좀 힘이 들 것 같은데요. 그리고 누구인지 제 얘기를 잘못 하신 것 같습니다. 전 결혼 안 할 건데요." 노인들은 서로 마주보며 웃고 계셨다. "어머니께서 결혼을 무척 신경을 쓰시나 보던데...우리가 너무 갑자기 찾아와서 그러나요? 내일 잠깐 이라도 시간 좀 내 봐요." 사실 나는 이튿날 공휴일이어서 아침 일찍 성남을 가야 했었다. "그렇다면 모레는요?" "그날은 학생들 과외 지도가 있는데요." "그럼 다음날은..." "그날도 좀 어렵겠어요. 죄송합니다." 서로의 말이 이런 식으로 되어 가자 그분들은 다시 연락을 할 테니 잘 생각을 해보라며 돌아갔다. 그날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께서 낮에 학교에 다녀가 분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학교에까지 찾아간 분들에게 그런 실례가 어디 있냐며 이튿날 오후 네 시에 코리아나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의논 한 마디 없이 약속을 해버린 어머니에 대해 크게 실망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나의 결혼문제가 걱정이 되어도 확실히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저렇게 까지 하실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엄마 마음대로 약속을 하시면 어떡해요. 난 내일 시간이 없단 말에요." 하고는 화를 벌컥 내버렸다. 학교에 다녀갔던 그분들도 시간이 없다는 핑계이긴 했지만 거절의 뜻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다시 집으로 연락을 취한 걸 보니 어머니들의 마음은 다 같은 것 같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대로 약속을 해버린 어머니께 심한 짜증이 났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나에게 어머니 역시 화가 난 듯 소리를 질렀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어머니의 약속으로 인해 준수한 외모에 가문과 학벌이 좋은 한 남자를 만나야만 했다. 집안에서는 단지 중매인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남자에 대해서 완전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약속 장소에 꼭 나가겠다고 말하고는 집을 나섰다. 충식씨한테 가고 있는 나의 마음은 다른 날과는 달리 무척이나 우울했다.
성남에 도착을 하니 집 앞에 낯익은 승용차가 서 있었다. 종환씨의 자동차였다. 방문을 열어보니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는지 꺼칠한 모습들로 날 바라보며 겸연쩍은 듯이 웃어 보였다. "종환씨 어제 오셨군요." "노는 날인데 좀 쉬지 않고 뭐가 급해서 이렇게 일찍 나타나요? 모처럼 둘이만 놀려고 했더니 다 글렀구먼." 종환씨의 짓궂은 말에 충식씨도 히죽이 웃고 있었다. "외박이 너무 잦다고 부인한테 미움 받으시는 거 아녜요? 종환씨 그러다 쫓겨나겠어요." 혈맹의 관계가 한자리에 모인 것만으로도 나의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다. 종환씨도 오랜만에 친구와 밤새워 지낸 것이 즐거운 듯 시종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발 쫓겨 나가기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여기 와서 이 녀석하고 음악이나 듣고 술이나 마시면서 한가하게 신선놀음이나 하게요. 윤희씨가 알아서 밥은 먹여 줄 테고 얼마나 좋아요. 괜히 재미없게 결혼은 해 가지구. 윤희씨도 결혼하지 말아요. 여자들도 매일 집에서 밥이나 하고 빨래나 주무르고 재미없는 것은 마찬가질 걸요? 안 그래요? 윤희씨." "결혼요? 아니 그럼 나보고 두 번씩이나 결혼을 하란 말에요? 나는 결혼한 유부녀라구요. 여기 제 남편이 있잖아요. 엄충식씨." 나의 말에 그 사람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것 같았는데 너무 신이 나서 그런지 종환씨의 빠른 눈치는 없어진 듯했다. "둘이 언제 결혼했어요? 두 사람은 아직 약혼 중이잖아. 나도 모르게 결혼식을 했나 보지? 윤희씨 언제 크냐고 이 녀석 투정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큰게 아니라 아주 늙은 것 같아요. 옛날 같으면 얼굴이 빨갛게 됐을 텐데 수줍어하기는커녕 한술 더 뜨고 있어요." 갑자기 그의 웃음이 걷힌 표정이 신경 쓰여서 나는 얼른 커피를 끓이는 척하며 딴전을 피웠다. 우리의 관계를 종환씨도 인정을 안하고 있는 건지--. 농담인 줄 알면서도 네 시의 약속 때문에 자꾸만 나는 충식씨의 눈치만 살폈다. '지금 종환씨의 말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가족들에게 충식씨를 어떤 식으로 밝혀야 되는지 이것만을 생각해야 돼. 무조건 부모님께 결혼을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까지 거짓말을 하며 지금과 같은 생활을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오늘만 잘 넘긴 후 좋은 방법을 찾아야 되겠어.' 모처럼 세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낸 후 종환씨가 서울로 가는 길에 동행을 하기로 했다. 갑자기 혼자 남게 될 그이가 허전해 할 것을 걱정하였으나 약속장소로 나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울로 오는 길에 "헌인능"이라는 유적지가 있는데 종환씨는 그 입구에 차를 세웠다. 왜 그러냐는 듯이 내가 쳐다보자 그는 말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카세트를 바꾸어 끼운 후 담배를 끄면서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윤희씨. 아까 내가 한 말 때문에 기분이 상했었죠?" "무슨 말요?" 알면서도 물어본 말이었다. "결혼 얘기." 역시 내 예감대로였다. "조금요. 딴 사람도 아니고 종환씨가 우리 사이를 왜 그렇게 보고 있나 하고 섭섭했어요. 농담이길 바랬는데 아니었어요?" "농담 아녜요. 내 말을 서운해 하면 안 돼요. 윤희씨와 충식이가 오래도록 함께 지내는 것이 내 바램이긴 하지만 지금 현실이 그러니까 어려운 상황이잖아요. 그 녀석은 누구도 만나지 않을 게 분명한데 언제까지 부모님을 속일 작정에요? 충식이와 난 사실 어젯밤에 윤희씨 얘기를 오랫동안 했죠. 충식이도 이미 마음을 굳혔드라구요." "충식씨가요? 어떻게 마음을 굳혀요?" "윤희씨 보내기로." "정말 어이가 없군요. 두 사람 다 왜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구 그래요? 물론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그러겠죠. 참 이상한 사람이네요. 종환씨, 전 말에요. 제일 이해할 수 없는 게 뭔지 아세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시시콜콜한 사람들이에요. 무슨 그런 해괴망측한 말이 있어요. 사랑하는데 왜 헤어지죠? 충식씨 엊그제 만난 사람도 아니고 열아홉 살에 만난 후 지금까지 11년이나 돼요. 이제 내 나이 삼십이에요. 조금만 더 견디면 부모님께서도 제 결혼문제 포기하실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충식씨는 제 남편이라는 거에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맞선을 보러 가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갑자기 텅빈 방에 혼자 남아 있는 그를 가슴 아파하며 서울로 돌아왔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코리아나 호텔에 도착하니 불안한 얼굴을 하고 어머니가 현관 앞에서 서성이고 계시다가 시간은 늦었지만 나타나 준 것만도 반가운지 금방 표정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커피숍에는 사람들이 꽤 많이 앉아 있었다. 나의 손을 잡고 있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에 이상하게도 가슴이 뭉클해 옴을 느꼈다. "엄마, 나 안 올까봐 걱정했지? 늦어서 미안해요." 조그마한 소리로 어머니께 말을 하자 웃으면서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왜 사람들은 맞선을 꼭 붐비는 곳에서 보려고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호텔 커피숍이 아닌 다른 곳에서 선을 보면 상대방의 얼굴이 뒤바뀌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날만 해도 몇 명의 예비 색시들이 곱게 차려입고 나와서는 어색하게 웃음을 짓고들 있었다. 남자들은 의젓해 보이려고 애를 썼고 여자들은 하나같이 얌전해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 같이 편안한 옷차림에 고개를 들고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을 하는 여자도 없었을 것이다. 전날 학교에서 뵈었던 어머님과 대학교수라는 아버님, 그리고 서민우씨. 그 가족들과는 처음으로 만난 자리였다. 인상은 좋은 편이었으나 일방적으로 약속을 해버린 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해서 나왔을 뿐이라서 아무런 설레임도 일어나질 않았다. 그 후 서민우씨는 학교 앞 "산마을"이라는 다방에 와서 자주 내쪽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결혼 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는데도 그 남자는 그냥 웃기만 하였다. 회사에서 그렇게 일찍 나올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어쨌든 학교 앞까지 와서 전화를 거는 그에게 약간의 불쾌감과 부담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날 다방에서 함께 나오다가는 학생들과 교직원들 눈에 띄어서 남자가 있다는 소문이 학교 안에 좌악 퍼지게 되자 나는 서민우씨에게 철저한 독신주의자라고 선포를 하였다. 그런 후로는 이따금씩 집으로 전화를 했지만 만나지는 않았다. 그러기를 얼마 후 나의 생일날이 되었다. 그 집에서 큰 케익과 옷감 한 벌을 보내왔다. '돌려 보내요' '안된다'하면서 어머니와 심하게 다투기도 하였다. 이러면서 그와의 관계는 석 달을 끌어오게 되었고 나의 결혼이 나와는 별개의 일이 되어 버렸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왜 그러냐는 질문엔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것이 원인이 되었는지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날 교장실에서의 호출을 받고 불려간 내 앞에는 뜻밖에도 청첩장과 나의 사직서를 갖고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마침내는 부모님의 일방적인 약속으로 결혼날짜가 정해져 버린 것이다. 9월 11일 오후 1시, 장소는 코리아나 호텔 21층이었다. 나는 이날 무슨 일이 있어도 웨딩드레스를 입고 그 장소에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따라서 더욱더 부모님의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충식씨에게도 한 시간 이상을 있지 못하고 잠깐씩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집에는 집대로 충식씨에게는 또 그대로 온통 거짓말만을 늘어 놓기에 바빴다. 청첩장을 친척들에게 돌리고 나서야 어머니의 감시는 소홀해졌다. 어떻게 이러한 결혼식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함이 오는 날짜를 통보 받고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성남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주체할 길이 없었다. 방문을 열자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대로 그에게 달려가 매달려 울고 싶었지만 방 입구에 그대로 앉아 버렸다. "왔니? 피곤하가 보구나. 오늘은 참 좋은 날이구나. 이렇게 이른 시간에 네가 오니...우리 커피 마시자." "충식씨 있잖아요." "그래 말해봐." "..." "말해봐. 돌아갈 시간이 급하지 않으면 천천히 이야기하자." 찬찬히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벌써 그는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내 자신도 갑작스런 일을 그가 미리 알 리는 없었다. '충식씨, 어떡하죠? 이제 아니라는 거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이럴 수는 없는 거에요. 하지만 말에요. 그래요. 하지만요. 당신을 아무에게도 밝히고 싶지가 않아요. 정말 어떡하죠?' 그를 향해 내 마음속 밑바닥의 그 응어리진 것을 꺼내어 모두 헤쳐 보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가져다 줄 그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 등을 생각하면 차라리 아무 얘기도 그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기 위해 말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것 같지가 않았다. 자신 때문에 나는 항상 어떤 일정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던 그였다. 이제와서 그런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럴 수 없다고 그 앞에서 울고 매달리며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이제 까지 말로만 해왔던 나에 대한 그의 부담은 모두 사실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충주에서나 신장에서 내가 어렵고 힘이 들었다면 그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가 힘이 들었고 어려웠던 것이다. 나 때문에 네가, 너 때문에 내가라는 생각을 어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 사람은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더욱 외롭고 힘이 들었을 것을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커피 물 좀 끓기겠니? 윤희야, 옷 편하게 갈아 입으렴. 거기 쭈그리고 앉아있지 말고. 응?" "네."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방바닥으로 떨어진 눈물을 손가락으로 길게 늘이며 조그맣게 대답을 하였다. 눈물은 이제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하며 지내왔던 날들이었다. 손끝을 따라온 눈물 자욱은 이내 팽팽하게 모양이 만들어졌다. "윤희야, 뭐하니? 왜 그래. 속상한 일 있니?" "충식씨 저 결혼해요." 그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울먹이면서 그동안의 경위를 다 말해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한참동안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는 내 어깨에 그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참 잘 됐구나. 축하한다, 윤희야. 좋은 일 갖고 울긴 왜 울어. 임마. 그래야지 진작 그랬어야 했어. 너는 아마 잘 살 거야. 울지마 윤희야. 내가 걱정되어서 그러지? 난 할머니가 잘 해 주시잖아. 내 걱정하면 안 되는 거야. 날 위하는 게 어떤 건지 아직도 몰라서 그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잘된 일이라며 축하한다고 말하는 그 사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쩌면 나를 원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나의 결혼은 충식씨에 대한 배신행위와 마찬가지였다. 단지 몸이 불구인 것 하나만으로 여자를 보내야 한다면 세상에 결혼한 불구자들은 하나도 없단 말인가? 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청첩장이 모두에게 돌려졌다 해도, 말을 하면 되지 않을까? 어떻게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머리는 이런 저런 생각들로 꽉 차 있어서 마치 터질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충식씨를 떠나서도 안 되고, 그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커피를 끓여서 그의 앞에 놓았다. 넋이 나간 사람 모양 멍하니 있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억지로 웃어 보였다. "충식씨, 오늘 집에 가서 우리 얘기 다 해버릴래요. 난 이미 충식씨하고 결혼한 거에요. 제가 놀라서 최선의 방법을 찾고 있는 동안 시일이 너무 지나기는 했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이건 잘못된 일이었어요." 그가 커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요란했다. "너 미쳤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거야? 이제와서 우리 얘기를 한다구? 집어치워. 말도 안되는 소리야." "그럼 충식씨는 정말 내 결혼을 축하하는 거에요? 그건 아니잖아요. 나는 다 말할 거에요. 엄마, 아빠 모시고 올께요. 무엇 때문에 숨어 살아요? 우리 이제 사람들 앞에 나타나요. 충식씨. 그렇게 해요, 제발." 거의 정신을 잃었다 싶을 정도로 울면서 매달리는 나를 달래주는 충식씨도 울고 있었다. "윤희야, 이러면 안돼. 어머니께서 그동안 너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파 하셨고 또 고생은 얼마나 심하셨겠니? 날 못 잊어서 네가 결혼을 안하는 걸로 생각하셨을 꺼야. 오죽하면 너도 모르게 청첩장까지 돌리셨겠어? 부모님 생각도 해야지. 난 누구든지 만나지 않을 거야. 몸을 못 쓰는 것만도 아니고 이 얼굴을 가지고, 정말 이 얼굴로는 아무도 만나기 싫어. 너도 이해를 해 주었던 일이잖아. 그리고 윤희야, 너 결혼도 하지 않고 나 때문에 나이만 먹는 걸 보고 있으면 어떤 때는 내가 차라리 빨리 죽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 너를 볼 때마다 느껴야 하는 양심의 가책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넌 아마 모를 거야. 윤희 너는 분명히 내 여자이지만 난 너의 남자는 될 수 없어. 이걸 분명히 알아야 돼." "그런 모순이 어디 있어요? 조금만 더 충식씨가 힘이 되어 주세요. 화를 내세요. 그럴 수가 있느냐고 날 심하게 꾸짖어 봐요. 내 결혼문제니까 내가 싫으면 안하는 건데 그까짓 청첩장 다 돌린 걸로 인해서 난 지금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충식씨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해 보지만 그건 아니에요. 절대로 그건 아니라구요. 정말 당신을 얼마나 사랑한다구요. 당신도 알고 있죠? 우린 남이 아니에요. 식만 올리지 않았다 뿐이지 아직 우리는 약혼 중이에요. 충식씨는 내가 옆에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 가 있으나 괴로워하는 거 다 알아요. 그래도 날 옆에 두고서 괴로워 하는 것이 나아요. 이미 나의 결혼식 날짜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취소를 통보 할 수도 있지만, 며칠 안 남은 결혼식날 신부가 행방불명되어 겪어야 될 부모님들의 고역을 모른 척할 수도 없고..., 그래서 당신을 떠날 생각을 하면 마치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에요. 아-- 정말 난 어떡하죠? 충식씨 내일 집을 나와 버릴까 봐요. 여기서 이렇게 살면 아무도 날 찾지 못해요. 이젠 당신뿐이 아니라 나도 함께 숨어 살래요." 울먹이며 정신없이 지껄이고 있는 나의 어깨를 충식씨는 토닥거리고 있었다. "윤희야, 너 정말 자꾸 이러면 안돼.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널 못 본다 하더라도 절대로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 보고 싶던 많은 사람들을 아주 힘들게 내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어. 어떤 때는 내 얼굴이 정말 숨어 살 정도로 흉하게 되었나 하고 거울을 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거울조차도 보기가 무서웠다구. 이제와서 널 보내기 싫다고 '내가 그때 충식입니다. 사실은 그동안 이렇게 살아 있었습니다.'하고 너의 가족 앞에 나타난다면 과연 그분들이 청첩장까지 다 돌려진 너의 결혼식을 취소하면서까지 날 반갑게 맞아 주시겠어? 만약 날 예전의 사윗감으로 받아주신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불편해질 거야. 윤희 니가 찾았듯이 진실로 날 위한다면 결혼을 하도록 해. 늘 너를 기다리면서 윤희를 어떡하나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는 남편에게 사랑받고 있을 너의 모습을 떠올리며 대견해 하고, 그러면 오히려 내 마음은 안정이 될 것 같애. 그리고 이건 정말 현실적인 얘기야. 너에겐 미안하고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동안 니가 준 돈이 꽤 많이 모아져서 약 석달 정도는 이곳 주인 할머니께 드릴 수 있을 거야. 그 후에는 종환이랑 의논해서 조금씩만 도와줘. 예전같이 날 오빠로 생각해. 몸이 불편한 오빠가 있어서 가끔 연락이나 해봐야 된다고 생각하고 이따금 전화를 하라구. 일단 결혼을 하면 나에게는 절대로 오면 안돼." 여기까지 말한 후 그는 눈을 감고 계속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연기를 내뿜을 때마다 그는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나는 휠체어 옆에 무릎을 세우고 쭈그리고 앉아 있을 뿐 도무지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얼마쯤 지났는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윤희 너, 잘 살 거야. 니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일단 결혼을 하면 너는 또 그 속에서 충실하게 잘 견디러 낼 수 있으리라 믿어. 나는 널 믿고 있어.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마. 어차피 선택을 해야 된다면 반드시 결혼을 택해야만 되는 거야. 널 사랑한다든지 아니라든지 이런 감정을 떠나서 하여튼 나는 널 담담히 보낼 수가 있어.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서 잘 살고 있을 너를 생각하면 어쩌면 나는 더욱 행복한 웃음을 지을지도 몰라. 꼭 널 잡아야만 사랑하는 건 아냐. 정말이지 잘된 일이고 조금은 내 마음이 더 편해질 것도 같애. 나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 윤희야 내 말 알겠지?" 어이없는 생각일지 몰라도 (그 사람이 나의 결혼을 반대하고 내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을 기다렸기 때문에) 어쩌면 쉽게 날 보내 줄려는 그 사람의 마음이 섭섭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이의 내 결혼에 대한 생각은 어머니의 집념보다 더 강한 것 같았다. 그는 때로 눈물을 글썽이며, 또 어느 순간에는 쓸쓸해 보이기는 했지만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나를 설득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아무런 말도 더 이상 하질 못하고 있다가 퉁퉁 부운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9월 11일은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충식씨는 성남에 찾아오는 것을 이제부터 삼가라고 말은 했지만 아무래도 머리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서 하루종일 서성이며 충식씨를 생각하다가 견딜 수 없을 때는 잠깐씩 다녀오거나 그에게 전화를 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성남을 다녀온 날이나 그와의 통화가 끝나는 날이면 가슴에서 한없이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말을 해야지. 충식씨와 나의 이야기를 해야지.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고 말을 해야 돼. 도저히 난 이런 결혼은 할 수가 없어. 나의 사정 얘기를 들으면 이해할지도 몰라.' 몇 번이고 용기를 내서 결혼 상대자에게 말을 하려다가는 이미 다 돌려진 청첩장이 생각났다.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걸까?' 마치 내 일이 아닌 듯했다. 적어도 내 일이라면 이렇듯 철저히 나 자신이 제외되어 있을 수가 있는 걸까? 집안의 부모님과 동생들은 그 사람에 대해 꽤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께선 쉽게 하지도 않은 칭찬까지 서슴지 않고 하시는 편이었고 어머니는 결혼식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나의 결혼식으로 들떠 있는 분주한 집안 분위기와는 달리 나는 너무도 태연해져 있었다. 가족들은 이런 나의 태도가 알 수 없다는 듯 제각기 한 마디씩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사실은 아니었지만 그러한 우리 가족들의 모습에서 충식씨는 이미 잊혀져 버리고 있었다. 아무도 충식씨와 나와의 일을 기억하고 마음을 써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가족들에게 지금의 나의 괴로운 마음과 충식씨가 살아있다는 것을 털어놓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얼마나 바보스럽고 모순된 일인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왜 말을 못하는 걸까? 어쩌면 나는 철저한 이중성격의 여자일지도 모른다 함이 들어오는 날 아침부터 집안은 술렁거렸다. 친척 어른들이 모이고 음식을 만드느라 온 집안에 기름 냄새가 꽉 차 있는 가운데 모두들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 저녁 골목이 떠들썩하더니 몇 명의 남자들이 함을 지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며칠 후면 나의 법적인 남편이 될 사람과 그의 친구들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낯선 사람들 같았다. 서민우-- 도무지 그 남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직접 결혼문제를 당사자의 뜻으로 결정지은 것도 아닌데 어른들이 하라는대로 남자가 순순히 따를 수가 있는 것일까? 그 남자와 나와의 결혼은 옛날에 서로 얼굴도 모르고 하는 결혼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의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위인 서른한 살 이었고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어느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키는 보통이었으나 외모는 아주 훌륭한 편이어서 아버지가 인물이 수려하다는 극찬까지 할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모 대학 음대교수였는데 정년을 1년 앞두고 있었으며 역사가 꽤 오래된 어느 교회의 성가대를 지휘가로 계셨고, 어머니는 과거에 여고까지 다니신 분이었다. 다음날 나는 미장원에 다녀오라는 어머니의 독촉을 여러 번 받고서도 침대에 멍하니 누워서 충식씨와 자주 듣던 파헬벨의 "카논 D장조"를 계속 듣고 있었다. 반복되는 현악 4중주의 음을 따라 우리의 가슴아프면서도 행복했던 지난 날들이 자꾸만 되풀이 되면서 떠오르곤 했다... '나 몰라? 엄충식이야. 너는 김윤희고...' 이렇게 말하며 다가온 그는 얼마나 당당하고 멋진 남자였는가? 그리고 얼마나 극진히 나를 아껴 주었던가? 바보같이 맹하기만 했던 나는 그의 사랑을 한없이 받기만 했다. 나는 그의 사랑을 받는 동안 비로소 여자로 성숙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사랑에 대한 보답은 아직도 다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제 그 길이 끊기고 있는 것이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팔베개를 해주던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을 간다는데 그는 자신이 불구의 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아무런 망설임 없이 놓아주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사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괜찮아'라는 그의 말은 내게 들려준 많은 사랑의 말 중에서 절정의 표현이었다. 파헬벨의 "카논 D장조"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틈도 주지 않고 자꾸만 슬프게 반복되고 있었다. 누군가 방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였다. "아니 애좀 봐. 지금 몇 시인데 아렇게 한가하게 누워 있니? 어서 일어나." 침대 가까이 와서야 나의 눈물을 보는 듯했다. "윤희야, 너 왜 그러니? 좋은 날 눈물은 왜 흘려?"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손을 잡고 날 일으켜 주었다. '엄마, 나 결혼 못해요. 충식씨가 살아 있어요. 그동안 은영이에게 간다고 했던 것, 무용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다녀왔던 것, 모두가 거짓말이었고 충식씨한테 갔었던 거에요. 엄마, 내 결혼 취소해 주세요.' 아무리 말을 하려고 애를 써도 어머니의 근심스러운 얼굴 모습이 나의 용기를 빼앗아 가고 있었다. "윤희야, 너 혹시 엄마를 원망하고 있는 건 아니니? 엄마도 결혼문제를 너하고 의논해서 결정지었어야 했겠지만 너 눈치만 보다가 놓쳐버린 좋은 사람이 하나 둘이라야지. 중이 제머리 못 깎는다고 엄마로서는 강권을 쓸 수밖에 없었단다. 엄마가 그동안 몇번이고 말을 했지만 여자는 그저 저 좋다고 하는 사람과 사는 것이 제일 행복한 거란다. 내가 결혼을 서두른다고 해서 아무데나 자식을 보내겠니? 시아버지가 대학 교수이니 억울한 시집살이는 안할 테고 자식도 신경 써서 교육을 시켰겠지. 내 사람이다 하고 살다 보면 정은 들게 마련이다. 괜히 딴 생각 하지 말고 어서 미장원에나 다녀오도록 해라. 집안 어른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시겠다." 어머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충식씨의 사고 소식을 들은 후부터 한시도 내 걱정을 안하신 날이 없었으리라. 더구나 허약한 몸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었고, 다행히 서울로 다시 올라와 마음 놓을 만하니 나는 자꾸만 집 밖으로 겉돌기 일쑤였으며, 혼기가 지났는데도 전혀 결혼할 생각을 안하고 있는 딸 자식 때문에 얼마나 가슴을 태우며 많은 밤을 지새웠으랴! 며칠씩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거의 실신상태에 있던 그때의 딸을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아파 끄집어 낼 수 없어서 차마 말을 안하고 있었을 뿐이었으리라. 가족들을 속이고 충식씨에게 다니는 것을 아마 어머니는 그 사람을 못 잊어서 헤매는 걸로 분명 생각하고 계셨으니 어찌 애가 타지 않으셨을까? 인제 어머니의 고집이기는 해도 나이가 삼십이 다 된 딸을 시집 보내게 되었으니 그 기쁜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충식씨에 대한 얘기를 하고 결혼을 취소하므로써 벌어질 뒷일들을 생각하면 무서움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부모님께서 그의 살아 있음을 진실로 기뻐하실지도 의문이었고, 만약에 부모님께서 반가워한다 해도 가족들 앞에 마치 죄인 같이 나타날 충식씨를 생각하면 나도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머니는 나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윤희야, 뭘 그리 생각하고 있니? 결혼이 얼마나 큰 경사인데 나쁜 생각은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윤희야. 아빠가 얼마나 좋아하시는 줄 아니? 너 시집가게 되어서 이제는 아무 걱정이 없다고 그러시더라. 너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부모 마음도 생각해 줘야지. 안 그러니? 자아, 일어나서 빨리 서둘러라. 그쪽에서 사람들 올 시간이 거의 되어간다." 나는 더 이상 어머니 앞에서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미장원엘 간다고 집을 나섰으나 혼자 있을 충식씨 생각에 마음은 자꾸만 성남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도무지 나의 일이면서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건지 꼭 정신병자라도 될 것만 같았다. 요즘 같으면 시내 곳곳에 자동시외전화가 설치되어 있어서 아무데서나 쉽게 장거리 통화를 할 수가 있지만 그때만 해도 밖에서 시외전화를 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미장원에 도착하자마자 시외통화를 부탁했다.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너무도 목이 메어 나는 수화기를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하는 그의 말이 '윤희야 괜찮아. 나는 괜찮다니까'로 바뀌어 나의 귓속을 파고 들었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여보세요." 그가 곧 전화를 끊을 것만 같았다. "충식씨 저에요." "..." 아무 말도 없었다. "지금 뭐하고 계셨어요? 심심하시죠?" "..." "충식씨, 왜 말을 안하세요? 화났어요? 나 지금 갈까요? 충식씨, 대답해요. 어디 아프세요?" 나는 그이가 왜 말을 하지 않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윤희야, 전화 자주 하지 말라고 그랬지? 이제 전화하면 끊어버린다." "그러지 말아요, 충식씨.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하다니, 뭐를 잘못해?" "뭐든지 다요. 다 제가 잘못했어요." "너 몇 번 얘기를 해야 알아 듣겠니? 다른 건 생각하지도 마. 내가 괜찮다고 그랬잖아. 내가 괜찮으면 너 일은 다 괜찮은 거야. 난 말야. 지금 마음이 아주 편해. 너 결혼하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이 말은 정말 믿어야 돼. 그러니 자꾸 딴 생각하지 말라구. 알았어? 오늘 매우 즐거운 날이잖니? 도대체 지금 어디서 전화를 하는 거야. 이건 나한테도 잘못하는 일이고 서민우라는 그 남자한테도 얼마나 잘못하는 일인지 알기나 하는 거니? 난 심심하지 않아. 오늘 종환이가 온다고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이제 전화 끊어." "충식씨!" 전화는 끊어지고 말았다. 그 사람에게서 떠나고 있는 내 생각은 하지 않고 마음이 편하다는 충식씨의 말이 섭섭하기만 하니 나도 무척이나 한심한 여자였다. 그러나 아무도 원망할 수 없는 나였다. 충식씨를 두고 나의 용기 없음을 탓할 뿐이었다. 청첩장이 돌려진 것이 또한 큰 문제거리였다. 결혼식 전날이 되었다. 영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던 신부의 도피를 생각하기도 하고 이제라도 이야기하자고 온갖 궁리를 해 보았지만 생각에만 그치는 일이었다. "충식씨 잘 지내요?" "그럼." "내일이면 신부가 될 사람이 이렇게 전화하면 돼? 나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잘 될 거야." 그의 말은 대상도 없이 공허하게 퍼지는 소리가 되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잇지 않았다. 그는 '괜찮아'라는 말 외에는 나에게 줄 말이 없는지 계속 '괜찮아'였다. 어떻게 통화를 끝내게 되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음식 냄새가 집 안을 메우고 어머니는 미장원에 가야 되지 않느냐는 등 독촉을 하시며 걱정스러워 하셨지만 그렇게까지 준비할 나의 마음은 아니었다. 미장원에 간다고 집을 나섰다. 양장점에 가서 내일 입을 웨딩드레스를 입어 보았다. 남의 옷을 입고 서 있는 것 같았고 거울 속의 나는 꼭 다른 여자 같았다. 미장원에 전화를 걸어 맛사지 취소를 하고는 성남으로 향했다. 마치 마지막으로 그를 찾아가는 길인 것만 같은 마음에 택시 안에서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벌겋게 부은 눈으로 방문을 열었다. 방 안은 전혀 상상도 못한 나의 미련한 마음을 비웃는 듯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가 집어 던진 듯한 책, 레코드, 커피포드, 그리고 깨어진 술병 등이 방바닥을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엎질러진 술 냄새가 가득했고 그 사람은 곤히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너무 놀라서 할머니를 찾았으나 집에 계시질 않았다. 얼마 후에 상기된 얼굴로 들어온 할머니는 무서워서 방에 못 들어오시고 밖에 나가서 종환씨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이 일을 어떡하면 좋은가? 저 사람을, 가엾은 충식씨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골에서 올라오신 외갓집의 어른들, 하루 종일 집안에 번지는 음식냄새, 친구들의 전화, '처형 결혼하게 되어서 인제는 우리도 마음이 편해질 것 같습니다'라며 벙글거리던 나의 제부, 그리고 는 결혼식 전날 충식씨의 이런 모습들이 나의 이성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방을 치우면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어린아이 같이 '심심해, 아--심심하다'라는 말을 하면서 '이젠 정말 살기 싫어. 이러구 사는 거 정말이지 지긋지긋해'하고 소리소리를 지르며 손에 잡히는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고 했다. 황급히 달려온 종환씨는 방 안의 상황에 놀라기보다는 내가 와 있다는데 더 놀라는 듯했다. "윤희씨, 정신 나갔어요? 내일이 무슨 날인데 여길 와요. 빨리 가세요. 충식이 깨기 전에 빨리 가라구요. 이 녀석 걱정은 하지 말아요. 자기 여자가 결혼한다는데 이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깨어나서 윤희씨 있는 거 보면 더할지 모르니까 그냥 가세요. 그리고 가끔씩 전화만 하고 여기 오진 말아요. 충식씨, 윤희씨 결혼하는 걸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구요. 지금 충식이 이러는 거 신경 쓸 만큼 큰 일은 아니에요. " 종환씨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그냥 그의 옆에 앉아만 있었다. 여름 내내 결혼문제로 신경을 써온 나는 사실 그때 너무도 지쳐 있었다. 누구를 이해하고 를 떠나서 대상이 충식씨라 하더라도 이해하고 어쩌고 할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결론이 나질 않는 일로 늘 두통을 앓았고, 심한 불면으로 현기증 때문에 눈만 감으면 쓰러질 것 같았었다. 우두커니 눈만 껌벅이고 앉아있던 나는 종환씨에게 끌려 밖으로 나왔다. 주인 할머니께선 눈물을 흘리며 서 계셨지만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오겠다는 생각에 충식씨는 부탁하지 않았다. 종환씨는 나를 창에 태워 서울까지 바래다 주면서 무어라고 나를 달랬지만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난 그때부터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고, 그것도 상대방이 물어오는 말에만 겨우 대답을 할 뿐 입을 다물어 버렸다.
9월 11일, 마침내 내가 불행의 터널로 들어가는 그날이 왔다. 나는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새 울음으로 결혼식 아침의 내 얼굴은 엉망이었다. 누가 나를 신부라고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행복한 웃음으로 식장을 나서는 한 쌍을 떠올리며 충식씨와 나를 생각했다. 아침 일찍 은영이와 함께 미장원에 가기로 했다. 미용실에 도착하자마자 성남에 전화를 걸었다. 푹 가라앉은 그의 음성이 들렸다. "저 윤희예요. 나 오늘 결혼해요. 내 결혼은 우리하고는 상관없다는 걸 말하려구요. 이따가 저녁에 전화할께요. 식사는 꼭 해야 돼요. 충식씨가 안 먹을 거다 하고 생각이 들 때는 윤희도 굶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밥은 꼭 먹자구요. 알았죠? 전화하고 며칠 후에 서울에 오면 들를께요. 신혼여행 다녀와서 인사 드려야죠. 인제는 오빠 한다구 그랬잖아요. 나 오늘 잘 할께요. 걱정하면 안 돼요. 알았죠? 알았어요, 충식씨?" "그래 알았어. 못 가서 참 섭섭하구나. 여행도 잘 다녀오고, 밥 꼭 먹을게. 너도 굶으면 안 돼. 나 걱정하지 마. 윤희야, 정말 내 걱정하면 안 된다. 난 괜찮아, 괜찮다고 윤희야." 괜찮아... 괜찮아? 그 사람은 정말 얼마나 괜찮치 않을까? 신부 화장을 하는데 눈물 때문에 화장을 다시 고치게 되자 미용사는 짜증이 나는 듯했다. 결혼식날 나는 미용사에게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라고 계속 사과의 말을 해야 했다. 신부 대기실에 있는데 친구들과 학생들이 어찌나 몰려들면서 한 마디씩 하는지 충식씨 생각을 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 사람들의 말은 귀에만 머물고 머릿속은 온통 성남 생각뿐이었다. 신부 입장을 하는 내 앞에 말쑥한 예복 차림의 충식씨가 웃으며 나를 맞이하는 듯했다. 신랑의 오른팔을 잡고 있는 내 손이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신랑이나 신부나 똑같이 불행한 결혼식이었던 것 같다. 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미용실에서 나오는데 심한 현기증으로 발을 딛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침부터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던 은영이가 나를 부축해 주었다. 내 팔을 잡고 있는 은영이의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고, 나와 얼굴이 마주치자 금방 눈물이 고였다. 우린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화장실 구석으로 가서는 아무 말없이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 나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은영이가 말했다. "미안해 윤희야. 좋은 날 눈물 흘려서. 여행 잘 다녀오고 꼭 전화해야 돼. 그리고 너 건강이 너무 나쁜 것 같아. 몸조심 해." 은영이는 목이 메어 있었다. "은영아, 내가 잘 못하고 있다는 거 넌 알지? 난 어쩌면 좋으니? 나 떠난 후에 충식씨 한테 전화 좀 걸어 줘." 은영이와 화장실을 나와 현관으로 나가는데 저만치서 종환씨가 서 있다가 나를 보자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급히 현관 밖으로 나갔다. 그날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신혼 여행지가 제주도에서 도고 온천으로 바뀐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까지 가서 관광을 할 자신이 없던 나에게 가까운 곳에 2박 3일로 변경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미안해, 미안해'하는 서민우씨에게 난 '괜찮아요, 괜찮아요' 하면서 충식씨의 흉내를 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교회의 성가대를 집으로 초청하고 어머님 친구분들, 직장 사람들이 다녀가는 등 며칠간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하루에 한 번씩 시장에 가는 길에 신촌 우체국에 가서 충식씨에게 전화를 걸었을 뿐이다. 그저 담담하게 안부만 주고 받는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은 똑 같았으리라. 여행에서 돌아온 지 닷새쯤 되던 날 시아버님과 서민우씨가 출근을 한 뒤 방을 청소하고 있는데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 벨소리만 나면 황급히 뛰어나오곤 하던 시어머니는 그날 딸집에 가시고, 집에는 큰 딸이 미국에서 낳았는데 당분간 데리고 있다는 다섯 살 난 지연이라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여보세요, 거기 서민우씨 댁이죠?" "네, 그런데요?" "저어, 혹시 이번에 결혼하신 부인 되시나요?" 별안간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네, 저예요. 누구시죠?" "서민우씨는 출근하셨겠죠?" "네." "그럼은요. 서민우씨 들어오시면 결혼 축하한다고 전해 주세요. 물론 부인에게도 축하드려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시라고 전할까요?" "저는요, 박혜영이에요. 박--혜--영." 이름 석자를 또막또막 끊어서 말하고는 전화를 찰칵 끊었다. 웃음이 나왔다. 그 남자에게도 여자가 있었다니...지나치리만큼 완고한, 아니 완고하려고 애쓰는 듯한 그에게도 여자는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그렇게 웃음이 나올 수가 없었다. 저녁에 퇴근을 한 서민우씨에게 전화 얘기를 해 주었다. "이제 보니까 괜찮은 사람이에요. 여자한테서 축하전화도 오고..." 그러자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는 재빨리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그 이튿날 전해 주었냐는 확인 전화가 왔다. 다시 또 며칠 후 역시 그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자꾸 확인, 확인을 하는 걸까? 단순히 결혼 축하전화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꾸 전화해서 미안해요. 이젠 다시 안할께요. 오늘은 부인께 부탁을 드릴려고 전화한 거예요. 우리 지연이 잘 부탁드려요." '지연이라니? 미국에 있는 누님의 딸이라는 저 아이 말인가? 아닐 거야.' "지연이요?" "네 지연일 잘 부탁드린다구요. 서민우라는 사람, 이젠 그 버릇 고쳤겠지만 오죽하면 백일을 앞둔 자식을 두고 이혼했겠어요. 다신 전화 걸지 않을 테니 우리 지연이 잘 부탁합니다. 많이 컸죠? 벌써 다섯 살이니 전 알아보지도 못해요. 예쁜가요? 제가 공연히 쓸데없는 것만 물어보네요. 전화 끊겠습니다." 잘못된 건 나뿐이 아니고 모두가 다 잘못하는 결혼이었다. 지연이를 앞에 두고 아무리 바라보아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확인을 해야 될 일이었다. 은영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신촌에서 약속을 했다. 오후 늦게 만나자는 은영이의 말에 '나 결혼 정말 잘못된 것 같아'라고 말하자 오히려 날 보고 빨리 나오라고 하였다. 전화 내용을 들은 은영이는 '빨리 가자'하고 말하며 날 재촉하였다. "어딜 가려고?" 내가 의아해 하자 그녀가 말했다. "동회에 가서 확인을 해봐야지. 우선 주민등록 등본부터 떼어 보자구." 그리하여 바삐 우리는 동회에 들어갔다. 동회에서 등본을 기다리는 시간이 왜 그리도 지루한지 몰랐다. 주민등록 등본을 받은 은영이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는 듯 하더니 나를 와락 껴안으며 울음을 떠뜨렸다. "윤희야, 윤희야, 이럴 수가 없어, 아무리 잘못된 결혼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잘못될 수는 없는 일이야. 널 어떡하니?" 이상하게 나는 등본 내용이 그다지 궁금하기가 않았다. 겨우 은영이를 떼어놓고는 등본을 펴 보았다. 박혜영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세대주와의 관계는 자부로 되어 있었고 그 이름 아래 서지연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어른들의 말대로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아니었다. 죄의 대가가 아니고 신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어떤 암시였다. 서지연이라는 다섯 살 된 아이의 이름 밑에 동거인으로 되어 있는 김윤희--.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지... 김--윤--희, 나의 이름은 아주 어색하게 타인들 틈에 끼어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 계속
여기서 상권은 마감하고 하권으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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