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1418-1453)의 生涯 定理 솔새김남식 안평대군역을 맏은 탈랜트 이주석 어느날 안견에게 '그대가 내 꿈을 그려줘야겠어' 라고 말한 안평대군! 그는 兄 수양대군이 역모로 엮어서 강화도로 유배된 후 일주일만에 사약을 받는다 그의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 단종을 위해 세조와 맞서다 죽음을 맞이한 6명의 종친 육종영(六宗英)의 한사람 또한 풍류를 즐겨 수성궁을 지어놓고 아리따운 궁녀들을 거느렸으며 마포 강가에 담담정을 지어 시인 묵객들과 자주 놀았다고 한다 기질이 호탕하여 무사들을 이끌고 매 사냥을 나서기도 했으나 주로 문인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단종 즉위후 정치적 혼란속에서 안평대군 역시 수양대군과의 대결은 친형제 관계를 떠나 피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조정의 신료와 왕실 심지어 환관 나인까지도 어느새 두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한다. 수양대군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그리고 동생인 임영대군, 한명회를 가까이 두었고 안평대군은 혜빈의 아들과 금성대군을 가까이 두고 세력 견재를 하던 중 단종의 왕권에 위협이 될수도 있다고 판단한 김종서와 그를 따르는 대신들이 안평대군과 손을 잡게 되자 정치적 입지에 위험을 느낀 수양대군은 자신의 뜻을 뒷 받침해 줄 책사 한명회 ,신숙주, 권람, 홍윤성등이 주동이 되어 1453년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등을 사사하고 안평대군은 이복동생 계양군의 상소로 강화도로 유배되어 1453년10월 36살에 사약을 받게 된다 계유정난의 명분은 김종서등이 안평대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모반했다고 하는데 하지만 안평대군이 그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이다 결국 형의 앞 길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제거된 것이며 당시 계유정난은 수양대군과 그 주변 무리들이 왕권을 탐한 나머지 저지른 비윤리적인 역모라고 보는 게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8일만에 사사되자 성녕대군의 부인 성씨 또한 계유정난에 연루되었다하여 1453년 경주로 폐출되어 1457년 풀려난 후 친가에서 죽었지만 親庭도 화를 입어 生事記錄이 없다 그후 순조때 신원되어 단을 세워 성녕대군과 함께 지내고 있다. 안평대군은 1429년 11살때 병조판서 정연의 딸과 결혼 하는데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별거중 이었다가 안평대군이 사사 되던 그해 1453년 둘째 아들은 1월에 부인은 5월 병사를 하게 된다 큰아들 의춘군 역시 연좌제로 1454년 귀향지에서 사사되었고 의춘군의 아내와 안평대군의 딸은 권람의 노비가 되었다 친형의 쿠데타에 똑같이 반기를 든 금성대군은 유복자가 관노로 살아서 대를 이었지만 안평대군의 아들들은 일찍 誅滅되는 바람에 후사가 완전히 끊어젔다 어찌보면 不運이라 하겠지만 자신의 享樂에만 기울였지 풍전등화의 정치 혼란속에서 멀리 내다보지 못한 처사였지않나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그후 폐서인으로 이름은 지워져야 했고 소장한 서화도 가산과 함께 몰수되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된다 종친 육종영(六宗英) 중에서 유일하게 안평대군 혼자 後孫이 없는 관계로 전주이씨 파종회 명단에도 없고 제단은 물론 墓도 없으며 양자도 들이지 못 하였다 안평대군은 1747년 영조때 복관(復官)되었고 1758년(영조 34) 장소(章昭)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실렸을 뿐이다. 수양대군의 야심으로 세종의 20여 자녀들은 골육상쟁의 아픔을 경험해야 했지만 수양대군 자손들에게도 이후 惡業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평대군이 어느날 도성안 계곡 주변을 우연히 찾다가 꿈속에서 본 무릉의 풍경과 너무나 흡사한 곳이 바로 북악산 서북쪽에 위치한 부암동이었다 그는 이곳에 무계정사를 짓고 활을 쏘며 심신을 단련 시켰다 특히 당대 최고 문인들과 문학과 예술을 논하며 풍류를 즐겼던 예술적 공간이자 수양대군과의 권력 투쟁을 벌였던 정치적 무대였던 곳이다. 그는 서예, 시문, 그림에 뛰어나 삼절이라고 불리웠을 정도로 예술가적 기질이 풍부했고 또한 호탕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고 한다. 그가 남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는 안평대군의 죽음이 예언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대가 내 꿈을 그려줘야겠어.” 안평대군을 본 안견은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였다. 방금 전에 들떠서 무릉도원을 얘기하던 사람한테 그 어둠은 가당치도 않아 보였다 아마도 내가 헛 것을 보았으리라 생각하며 안견은 “그리하겠습니다.” 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몽유도원도는 1447년 4월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3일 만에 그린 산수화로써 안견의 그림과 안평대군의 글씨 그리고 집현전 문사들의 서예와 시 문장이 세심하게 어우러진 종합 미술품으로 중요문화재 제1152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당시 日本이 그림을 약탈해 간 것으로서 현재 일본 덴리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다 무계정사지(武溪精舍址) 안평대군집터 창의문에서 인왕산을 오를때 마다 이 부암동 골목길은 가끔 이용하던 코스이다 前에는 그냥 무심코 지나첬지만 오늘은 兄수양과 어정쩡하게 맞서다가 제물로 사라진 안평대군을 생각하며 역사를 돌아본다 안평대군의 집터 무계정사는 자하문 터널 입구에 있는 부암동사무소에서 인왕산 자락으로 10분 정도 올라가면 있다 이곳은 안평대군의 집터와 현진건 집터가 서로 이웃하고 있으며 한동안 폐가로 남아 있어서 여름이되면 빈터에 잡풀이 장대처럼 자라있던 곳이다 지금은 새주인을 맞이하여 뜰에 나무를 심는等 오래전 부터 리모델 중이다 당시 이곳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이 당대 최고 문인들과 문학과 예술을 논하며 풍류를 즐겼던 예술적 공간이며 수양대군과 보이지않는 권력 투쟁을 벌였던 정치적 무대였던 곳이다. 하지만 안평대군이 역모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은 뒤 왕의 기운이 서린 땅이라는 이유로 모두 철거 되었고 역모의 집터 또는 흉가의 집터라 하여 폐허가 된 채 누구도 살기를 꺼려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수백년을 이어 내려왔다고 하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지금은 안평대군의 자취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흔적은 바위에 새겨진 무계동(武溪洞)이 유일하다 지금도 인왕산 기슭에 올라서면 복숭아나무 사과 배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무계정사 터는 지금부터 500년전 1450년 쯤에는 정말 무릉도원이었을 것 같다 그간 주인이 없던 안평대군과 현진건의 집터가 2015년 10월 34억에 개인에게 경매로 낙찰 되어 소유권이 이전 되었다. 개인소유로 넘어간 뒤 현재는 출입및 관람이 자유롭지 않으며 일반인들이 접근 하기에는 좀 어렵다 하지만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유형문화재가 있어서 역사·문화적 가치 때문에 개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데..... 2017년 지금은 정원수를 심고 울타리 돌담을 쌓는 공사를 하고 있어서 혹시 다음에 찾아 왔을때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사뭇 궁금한 지역이다. 안평대군과 현진건 집터에 찾아 오면 특별히 구경할 것도 볼 것도 없으나 이곳을 찾은 風客은 수양대군과 맞서다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안평대군의 삶과 인생을 瞬間 돌아 보는 역사의 현장이다 폐가, 흉가, 망가에는 살기를 꺼려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그래서 아주 아주 오랫동안 주인을 잃은채 빈집이었다고 한다 무계정사를 탐색하고 그 옆 길을 따라가면 개발금지역 팻말과 인왕산으로 오르는 작은 오솔길이 있다 골목을 지나 구릉에 올라서면 텃밭이 있고 몽유도원도에 나오는 그림같은 풍경을 보면서 인왕산으로 오르면 된다 그나저나 안평대군, 수양대군, 금성대군, 문종은 형제들끼리 용서를 빌고 서로 화합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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