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추억소설

4. 유학과 비보

시인김남식 2013. 8. 26. 10:12
4. 유학과 비보    김남식 



 

9월 27일, 저녁 7시 30분. 김포 공항.
  (그에 대한 메모)
  * 환송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음.
  * 가끔씩 내 앞에 와서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날 바라보다가 '윤희야' 이름 한
번 부르고는 긴--한숨.
  * 그가 나의 어머니께 부탁--어머니, 윤희 얌전하게 기다릴 수 있도록 잘
부탁합니다.
  * 종환씨에게--윤희한테 전화 자주 해줘.
  * 출구를 나가기 전에 나를 로비 구석으로 끌고 가서는--임마, 난 이제 오빠가
아야. 너 약혼자야. 나 열심히 해서 빨리 끝낼께. 아--너 한참이나 못 보다니.
아침에 눈 떴을 때와, 밤에 잘 때 꼭 내 이름을 불러. 나도 그럴께.
  (나에 대한 메모)
  * 울고 싶었지만 울 수 없었음.
  * 웃어야 될텐데 웃을 수 없었음.
  * 무어라고 말을 해야 될텐데 아무말도 할 수 없었음.
  * 그가 손님들 틈에서 잠시 내게 다가왔을 때--오빠, 내 걱정은 말아요. 나 잘
있을께요.
  * 그가 출구를 나가자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 앞에서 눈을 크게 자꾸 더
크게 뜰려고 애를 썼음.

  (밤 11시경 동경에서 전화)
  "윤희야"
  "네!"
  "괜찮지?"
  "네!"
  "임마, 네가 벌써 보고 싶다."
  "..."
  "나 도루 서울 갈까?"
  "..."
  "왜 말 안해, 말해봐."
  "'...사랑해요...'"
  "윤희야, 나 비행기 안에서 후회되는 게 있었어. 약혼식 말야. 내가 너무
고집부린 게 아닌가 싶어. 사실 약혼식이 그렇게 중요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널 너무 묶어 놓고 온 것 같아."
  "아녜요, 하길 잘했어요."
  "그래, 우리 잘한 걸루 생각하고, 서로 열심히 하자, 응? 학교 잘 다니고
우리 집에 자주 가도록 해. 종환이도 자주 만나구, 도착하는대로 연락할게."
  "오빠, 안녕히 주무세요."
  "오빠 아니라구 했지? 이제 그렇게 부르지 마. 명령이야."
  "금방은 안돼요. 노력할께요."
  가을은 이미 깊어 있었고, 달과 별들이 외면해 버린 어두운 밤은 슬픔이 되어
내 방 안에 가득 머물고 있었다. 나는 이날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지, 어찌 잠이 올 수 있었겠는가? 지금도 가끔 날 괴롭히고 있는 불면증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제 그는 서울에 없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내 창가에 햇살이 찾아들고  9월의 신선한 바람은
나뭇가지를 희롱하고 있었다.
  그가 서울에 없이 맞이하는 아침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마냥 쓸쓸하기만
했다. 아직 깨어 있지 않은 가족들 몰래 커피를 끓이고, 볼륨을 낮추어
전축스위치를 넣고는 비발디의 "사계"를 올린 다음 바늘을 가을에 갖다
놓았다.
  괜한 헛수고였다.
  현악기의 소리는 이미 그와 함께 듣던 아름다운 선율이 아니었다. 커피도
그와 마시던 커피맛이 아니다. 무릎을 세워서 가슴에 끌어 안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이제 완연히 높아졌다. 아무리 구름이 가려도 가을하늘은
유난히 높은 것 같았다.
  '동경에서 아침 6시 40분네 출발이라고 했으니 지금쯤 그 사람은 하늘을 날고
있겠네. 무슨 생각을 하며 가고 있을까? 명륜동 어머닌 얼마나 적적하실까?
어머님이나 찾아 뵈러 갈까? 아냐. 잘 참고 계실 텐데. 날 보시면 더 생각이
나실지 몰라. 아--, 왜 이렇게 꼼짝을 할 수가 없지? 오늘은 강의도 빼먹고 싶어.
참, 은영이가 있어. 궁금해 할 텐데 가야지. 이젠 은영이하고 시간을 많이 보내겠네.'
  학교엘 가야 할 될 텐데 도무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고, 침대 위가 아니라
마치 공중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듯했다.
  누가 내 방을 노크했다.
  "윤희야. 학교 안 가니? 얘가 웬 잠을 이렇게 자."
  어머니는 밤새도록 잠을 못 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엄마, 나 벌써 깨어 있었어요. 근데 어마, 지금 꼼짝도 못 하겠어요."
  어머니가 책상 의자를 침대 가까이로 끌고 오셨다.


  "아유, 우리 큰 공주님 그러세요? 연애 거시느라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이러실까. 거기다 약혼식 치른 긴장도 안 풀리셨지, 장차 낭군되실 분은 멀리
떠나셨지, 왜 안 그러겠어요."
  "엄마. 나 또 놀릴려고 그러지? 그렇지 않아도 아빠랑 엄마랑 동생들 보기
쑥스러운데 툭하면 나 놀리드라 뭐."
  나는 입술 두 개를 연속 삐죽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엄마 팔을 잡아 당겨 내
볼을 비볐다. 얼마만에 엄마 팔에 매달려 보는지, 그를 만나는 동안 너무 엄마
옆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가책이 들었다. 부모님들 입장에선 어느 자식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큰 딸이기 때문에 유난히 사랑을 쏟으셨을 텐데, 이젠 다
자라서 남자를 만난다고 밖으로만 돌았으니 얼마나 쓸쓸하셨을까?
  "엄마, 그동안 매일같이 그 사람하고만 시간 보내서 내가 좀 섭섭했지?"
  엄만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무슨 소리야. 섭섭하다니. 사실은 말이다. 윤희야, 섭섭한 게 아니고 겁이
났었단다."
  "겁이 났어요? 왜요?"
  "충식이가 도둑이면 어쩌나 하고."
  "도둑?"
  엄마와 난 마치 친구같이 한참을 서로 붙들고 깔깔대며 웃었다.
  갑자기 공항에서 탑승구를 빠져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윤희야! 아-- 널 한참 못보다니...'하던 그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혼자서
외롭게 긴여행을 하고 있는 그를 생각하니, 비록 엄마와 함께지만 웃고 있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엄마가 시계를 보더니 놀라시며 벌떡 일어나셨다.
  "내 정신 좀 봐. 시간이 벌써 저렇게 됐네. 윤희야 너도 일어나라. 아침
먹어야지."
  전혀 식욕이 나질 않았다.
  "엄마, 나 생각없어요. 머리도 무겁고, 몸이 자꾸만 침대 밑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요."
  "너 충식이 떠난 게 섭섭해서 그러는구나. 그럼, 매일 그렇게 붙어 다녔으니
서운하겠지. 왜 안 그럴려구. 그래도 윤희야, 엄마 말 잘 들어야 된다. 혼자
멀리 가 있는 충식일 생각해서라도 학교 잘 다니고, 어른들 자주 찾아 뵙고, 또
이젠 다 큰 여자니 너 자신도 예쁘게 가꾸고 하는 게 네가 충식일 기다리면서
해야 될 일이란다. 그리고 꼭 명심할 건 보고 싶다고 눈물 흘리지 마라. 옛말에
먼 길 떠난 사람 두고 울며는 불길하다고 했다. 내 말 알아 듣겠지?"
  눈물은 안 돼. 울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가 불길하다니...어떤 일이
있어도 콧등이 시큰하는 일, 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일이 없어야 된다.
즐거웠던 일만 생각할 것...그러기 위해서 나나 하루가 빠듯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그동안 거절했던 후배들의 무용지도, 한 달에 두 가지씩 창작을 할 것. 저녁에
영어 학원 등...그날은 결국 침대 위에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심한 두통과 열에 시달리면서--.
  다음 날 아침. 그가 나에게 내주고 간 숙제(?)대로 아침 "페르귄트
제1조곡"을 듣고 있었다.
  어제보다는 머리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저난 계획했던대로 시간을
짜려면, 후배들도 만나고 무용실에 가서 음악 자료도 고르고 해야 되기 때문에
'페르귄트'를 들으며 등교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거실에서 전화 벨 소리가 났다. 엄마의 목소리가 좀 크다고 느꼈다.
  "아이구, 자넨가. 그럼 우리야 잘 있지. 윤희 바꿔줄게, 기다려요."
  난 이미 전화기 옆에 서 있었다. 수화기를 잡는 손이 떨리는 듯 했다.
  "오빠--."
  순간 엄마가 내 허리를 쿡 찔렀다. 오빠라는 호칭이 우습기도하고 마음에 안
드셨나 보다.
  "거기 아침이지? 너 뭐 했어?"
  "'페르귄트'요(오늘 아침은 너무 좋군요.)"
  "야아--! 근사한데? 짐정리하다가 너 생각이 나서 걸었어. 너도 함께면
얼마나 좋겠니? 그렇지? 윤희야, 넌 참 귀엽고 사랑스럽고 말야. 음--, 내가
언젠가 얘기했었지. 내가 널 사랑하는 것은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라고."
  "고마워요. 내가 두고두고 많이 갚을 거예요. 정말예요. 오빠. 몇 배로
갚는다니까요."
  그가 무어라고 말을 시작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손에서 수화기가 빠져
나갔다.
  "나다. 할아버지야. 안녕이고 뭐고 이 녀석아, 부모님이 준 학비를
국제전화로 다 날릴 셈이냐? 전화하지 마라. 편지로 해, 편지로, 알았냐? 이젠
전화해도 안 바꿔 준다. 끊어라. 그래, 공부도 중요하지만 몸조심하구."
  그날 만큼은 할아버진 우리 둘에 있어 큰 훼방꾼이셨다. 전화를 끊으신 후
할아버지는 내 손목을 끌고 별채로 내려 가시더니 무릎을 꿇게 하였다.


  "윤희 너, 철이 없어도 한참 없구나. 충식이가 어디 놀러간 애냐? 부모 돈
받아 공부한다고 갔는데, 용돈이 그놈의 전화 요금으로 다 나가겠다. 전화하는
그 녀석도 녀석이지만, 그렇게 할말 다하구 끊게 하는 너도 참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충식이 그 녀석, 분명히 저희 집엔 전화 두 번씩이나 안했을 거다. 그
댁에서 알면 네가 미움을 산다는 걸 알아 둬. 앞으로 또 전화가 오면 비싼 전화
걸지 말고 편지로 하라고 잘 말해. 너도 용돈 아껴 쓰고, 요새 끼니 걱정하는
집이 꽤 있다고 그러드라. 없는 사람들 도와주진 못할망정 흥청거리지는
말아야지."
  그랬다. 그분 말씀대로 난 철이 없어도 한참이나 없는 모양이었다.
  그 후로 난 전화 벨 소리에 무신경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동안 학교생활에 소홀함이 없지 않았었다.
  강의만 겨우 빠지지 않았다 뿐이지 무용연습이며 도서관 이용은 거의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 사람은 공부만을 위해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내
곁을 떠났는데 마냥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방학을 맞이한
초등학생처럼 빠듯한 계획을 세웠다.
 

 

 

아침 7시경이면 도서관에 도착하는 걸로 시작해서 일 주일에 세 번씩
후배들의 기본동작 지도를, 나머지 날은 나의 작품을 구상하고, 저녁엔 영어학원
등 10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면 저만치 골목
입구에나 그리고 도서관 창 밖에, 어둠이 내릴 무렵에 무용실을 나서면 운동장
스탠드에 늘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일순간에 지나가고 그가
곁에 없는 현실이 나로하여금 무척이나 외로움을 느끼게 해 주었으나 그럴
때마다 즐거웠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혼자 피식 웃곤 하였다. 후배들은 깍쟁이
선배가 웬일이냐면서도 무척들 좋아하였고, 더구나 아침 도서관에는 은영이가
함께 나왔기 때문에 힘든 것을 못 느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늘 그의 생각이 떠나질 않았고, 그때마다 그의 사랑을
받기만 한 것 같아 미안하고 후회되는 일은 있어도 나쁜 추억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떠난 후 모든 사람들은 마치 우울증에 걸려 있는 듯하였다.
  명륜동 어머니는 늘 절에서 살다시피 하였고, 아버님께서도 목소리에 힘이
없으셨다. 바쁜 하루일과 중에서 명륜동 방문, 종환씨와 만나고 하는 동안 벌써
그가 떠난 지도 10일 정도가 훌렁 지났다. 편지가 도착할 때가 아닌 줄
알면서도 집에 들어가면 누가 그의 편지를 전해 줄 것만 같아서 식구들의
눈치만 보곤 했는데, 그날 방에 들어가니 책상 위에 항공봉투가 놓여 있지
않은가! 겉봉을 확인할 겨를도, 또 필요조차 없었다. 필적은 따뜻하고 부드럽게
나를 보고 미소 지으며 '내 귀여운 윤희야'하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 아직 긴장이 안 풀린 상태지만 곧 적응할 자신이 있다.
  * 짐정리는 다 되었고 당분간이나마 식사는 선배가 해결해 준다.
  * 책상에 너의 사진을 놓고는 시간이 있을 적마다 들여다 본다.(이것 때문에
선배한테 핀잔을 들었다.)
  * 너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
  * 명륜동에 자주 가고, 안 가는 날엔 전화를 걸도록 해라.
  * 필요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고 내 생각날 때에는 음악을
들을 것.

  내 기억으로는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옷을 갈아 입지도 않은 채 나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편지지를 꺼냈다.
  오빠!(아냐, 편지로까지 오빠라니...공항에서 이제는 오빠가 아니라고
말했잖아) 충식씨!...(오빠가 웃겠네) 겨우 호칭을 써놓고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슴속 깊은 데서 뜨겁게 뜨겁게 끓어오르는 그에 대한 감정이 도무지
표현이 되질 않았다.
  경우 안부와 이곳 소식을 몇 글자 적고는 내 '유치함'에 발동이 걸렸다.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헤아려 보죠.

  비록 그 빛 안 보여도 존재의 끝과 영원한 영광에 내 영혼 이를 수 있는
  그 도착할 수 있는 곳까지 사랑합니다.
  태양 밑에서나 또는 촛불 아래서나
  나날의 얇은 경계까지도 사랑합니다.
  권리를 주장하듯 자유롭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칭찬에서 돌아서듯 순순하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옛 슬픔이 쏟았던 정열로써 사랑하고, 내 어릴 적 믿음으로 사랑합니다.
  세상 떠난 성인들과 더불어 사랑하고, 잃은 줄만 여겼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한평생 숨결과 미소의 눈물로써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의 부름 받더라도 죽어서 더욱 사랑합니다.
  --브라우닝의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냐구요?"에서--

  

 

자기 말은 삼키고 내 마음과 같다는 핑계를 들어 남의 시나 베껴서 보내는
나는, 참으로 어리없고 형편없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는 나의 유치함까지도
사랑을 하고 아껴 주었다.
  이 시를 적어서는 책상 위에 붙여 놓았다고 다음 편지에서 알려 주었다.
  어느 날, 토요일이었던 것 같다. 종환씨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매일
그를 생각할 때마다 가고 싶은 곳, 추억의 장소인 "카사노바"에서--.
  그는 자주 전화를 했었지만 내가 밤 늦게야 집에를 들어가기 때문에 통화를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종환씨의 사무실에 전화를 해도 되었겠지만 여러번
밝혔듯이 나의 못난 성격 때문에 여러번 망설임으로만 지나쳤었다.
"카사노바"는 그대로였고 우리가 자주 앉던 테이블에 종환씨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종환씨 옆에 꼭 그 사람이 앉아서 날 보고 손을 드는 것 같아 빈
의자로 웃음을 보내며 걸어갔다. 종환씨의 눈치는 무서울 정도였다.
  "충식이가 내 옆에 있는 것 같아요?"
  "대단하시네요. 무안하잖아요."
  "하하하. 다음엔 모른 척 할께요. 그동안 아무일 없었죠? 왜 그렇게 늦게
들어가요? 충식이한테 일러야겠어요. 윤희씨 혼나는 거 오랜만에 보고
싶은데요."(내가 혼나면 자기가 도와줄 거면서)
  참 오랜만에 "카사노바"에서 웃어 보는 것 같았다. 종환씨는 언제나 다정한
우리의 친구였다. 그 사람도 얼마나 종환씨를 좋아했는가!
  "물어보나 마나겠지만 충식이 보고 싶죠? 그래도 윤희씨 많이 울어서 눈병
난 줄 알았는데 괜찮군요."
  대답조차 나오질 않았다.
  커피잔 속에 뜨거운 그리움이 가득했다. 난 그리움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는 뜨겁고 진한 그리움을 가슴속 깊이 삼키었다. 한 모금, 또 한
모금씩--.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종환씨는 긴 한 숨을 쉬었다.
무언가 답답한 일이 있는 듯했고, 표정도 어두워 보였다.
  "웬 한숨이에요?"
  "그냥요. 아무것도 아녜요."
  그러나 그의 말이 거짓임을 난 느낄 수가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손이 약간
떨리는 듯했고 눈은 초점을 못 잡고 있었다.


  "종환씨.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충식씨라 생각하고 말하면 안되나요?"
  그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윤희씨가 내 말을 어떻게 알아 들을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더구나
충식이한테는 더 못할 말이죠."
  나는 점점 더 궁금해지고 또 한편 걱정도 되었다. 저토록 자상하고 다정한
사람의 가슴속에 근심을 안고 있다는 것이 내 마음까지 아파지는 듯하였다.
  "종환씨. 사실 그동안 충식씨와 내 일에 얼마나 신경을 써주셨어요. 우린
뭐든지 다 털어 놓고 말하는데 이렇게 숨길 거예요? 우리 세 사람은 혈맹의
관계잖아요. 말씀하세요. 나도 인제는 어린애가 아니라구요."
  '혈맹의 관계?'하면서 한참을 껄걸 웃던 그의 얼굴에 갑자기 웃음이 걷히고
슴픔마저 보이는 것 같았다.
  "나 그동안 맞선 많이 보았잖아요. 좋은 여자들도 많았지만 다 거절을 한
것도 알고 있죠? 물론 그 전에도 여자를 일부러 피했었죠. 그 이유를 이제 말해
줄께요."
  종환씨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담배를 한 대 꺼내면서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었다.(아--여자 문제구나)
  "난 사실 얼마 전부터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말예요. 나
혼자였다구요. 저쪽은 통 모르고 있죠. 그리고 이제는 내가 내 마음을 정리할
때가 온 것도 같고요. 신중해야죠. 윤희씨도 내 형편을 알고 있겠지만 나는
홀어머니와 사는 가난하진 않지만 넉넉하지 않은 집의 자식이고 나 혼자
애태우며 바라만 보던 그 여자의 집안은 부유한데다 약간의 권력도 있는 집의
딸이죠. 말 안하길 잘했어요. 요사이 그 집에선 사윗감을 고르고 있는데 그
상대들이 모두가 대단하드라구요. 회장, 사장, 국회의원 등 내놓아라 하는
집안의 자식들이에요. 자신없는 도전은 하지 말아야죠. 시작부터 막힐 거
아녜요. 거절 당했을 때를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죠. 나 혼자 시작한 일이니 혼자
끝낼 수밖에 더 있어요? 어때요, 윤희씨. 재미없죠? 사랑하는 사람과 약혼까지
한 윤희씨라 짝사랑 얘긴 시시하죠? 그래도 난 심각하다구요. 그 여자 누군지
궁금할 거예요. 윤희씨가 알면 깜짝 놀랄텐데..."
  답답한 마음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누구예요? 내가 알면 놀라나요? 그럼 나 아는 사람예요?"


  종환씨는 신음을 하듯 '정미'라고 짧게 나의 장래 시누이 이름을 불렀다.
일순간 놀라움과 당혹함에 몸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그야말로 "충격"바로
그것이었다. 상대가 '정미'라는 것. 지금 종환씨의 그런 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또한 더없이 미안했다.
  충식씨의 미안함까지도 난 더더욱 미안해서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러게 놀랬어요?"
  "네, 놀랬어요. 그리고 종환씨 미안해요. 전혀 눈치도 못 챘어요. 충식씨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요?"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자신없는 도전은 안한다고, 그 녀석 미국으로 간 후
편지로 고백을 할까도 했는데 역시 그만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윤희씨도 요즈음 정미 결혼시킬려고 어머님이 애쓰고 계시는 거 알고 있죠?
후보들이 얼마나 경쟁을 합니까. 충식이 어머닌 날 친자식처럼 대해 주시지만
사윗감으론 아니거든요. 아시면 기절하실 걸요. 난 사실 그동안 두 사람이
얼마나 부러웠다구요. 윤희씨를 동생같이 귀여워하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고
결국 결혼약속까지 하게 되니 얼마나 좋아요. 정미를 한 번 만나서 얘길
해볼까도 생각했었지만 그 애가 당황할 생각을 하면... 어쨌든 아닌 거예요.
안 되는 일이고요. 잠깐, 아주 잠깐 꿈을 꾸었다 생각하면 돼요. 그 애한테는
내가 오빠의 친구일 뿐이지 결코 짝은 아니죠. 신경쓰지 말아요. 윤희씨."
  그는 몇 번씩이나 안 들은 걸로 해달라며 부탁을 했지만 내 생각은 꼭
그렇지가 않았다.
  서로의 다른 환경이 뭐 그리 문제가 되는지도 이해가 안 갔지만, 정미에게 말
한 번 못하고 혼자만 삭이려는 종환씨를 도와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정미씨를 만나서 넌지시 말을 비쳐 볼까요?"
  순간 그는 펄쩍 뛰었다.
  "절대로 안 돼요, 절대로."
  그리고는 손을 저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할 수 없이 "카사노바"를 나왔지만 내 머릿속에는
일어나 편지지를 찾았다. 내가 들은대로 그리고 종환씨의 심정이 어떻겠나를
헤아려 볼 때 우리 두 사람은 친구에게 부끄러울 정도로 잘못한 거라며, 결국은
충식씨가 도와 주어야 될 일일 것 같고, 또 반드시 도와 주어야 될 거라는
내용의 글을 적었다. 편지를 써놓으니 마음은 좀 놓이는 듯했다.

  종환씨를 만난 이튿날은 일요일이라 명륜동을 가기로 마음먹고 아침 일찍부터
서두르고 있는데 거실에서 어머니의 전화 받으시는 소리가 드렸다.
  말씀하시는 걸로 보아 명륜동에서 온 듯했다. 절에를 가는데 마침 일요일이니
나를 데리고 갔으면 해서 연락을 주신 거였다.

 


  어머니는 혹시 내가 실수라고 할까 봐 스님께 인사를 드릴 때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해야 되며 법당에서 불공을 드릴 때 절하는 법을 자세히 일러 주셨다.
아들을, 더구나 외아들을 먼 외국에 보내신 어머니로서는 절이라도 가야지만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정도로 무척 공허하셨으리라.
  경기도 여주로 가는 길목은 아직 시들지 못한 코스모스가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지만 벌써 10월이어서 가을이 가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차 안에서 어머니는 염주만을 돌리고 계실 뿐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 마침
함께 가는 정미도 어머니의 표정이 너무 침울해 보여서인지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살며시 웃을 뿐 차 안은 너무 적막했다. 여주 읍내로 들어선 차는
다시 우측으로 방향을 돌려서 얼마 가지 않아 다리를 건너 강둑을 따라 달렸다.
그러자 "신륵사"라는 절이 나왔다. 전부터 어머니는 이 절에 자주 오셨던지
스님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늙은 스님께 나를 며느리라고 소개를 하셨다.
  잠시 후, 스님을 따라 세 사람은 법당으로 들어갔다. 스님의 독경이 시작되고
엎드려 절을 하시는 어머니의 옆에서 정미와 나도 부처님께 합장을 했다.
  아마도 그때 세 사람은 오직 충식씨만을 위해서 똑같은 마음으로 불공을
드렸을 거다. 한참이 지나자 어머니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너희는 이제 나가도
된다. 저 앞에 있는 탑아래 가서 강바람이나 쏘이렴'하셨다. 10월 하순의
강바람은 차갑게 가슴을 때리는 듯했지만 오랜만에 서울을 벗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니 그가 떠난 뒤의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정미
옆에서 나는 어제 들은 종환씨 일로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를 몰랐다.
  "종환씨 말예요."
  "종환이 오빠? 근데요?"
  아무리 보아도 갑작스레 듣는 종환씨의 말에 그녀의 표정은 달라짐이 없었다.
초조했다. 실수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되고--.
  "참 좋은 사람이라구요. 오빠 만큼이나요."
  갑자기 뚱단지 같은 내 말에 깔깔대고 웃는 정미의 웃음소리는 탑 아래
흐르고 있는 강물 만큼이나 맑고 고왔다.
  "윤희씨도 싱겁기는! 누가 그 오빠 나쁘대요?"
  나의 서투른 말솜씨는 정말 못 말린다. 이왕 말을 꺼냈으니 계속은 해야
될텐데 시작이 분명 잘못이었다. 말꼬리를 얼른 돌렸다.
  "정미씨, 신랑감들 만나보니까 어때요?"
  정미가 날 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어떻긴요, 잘 모르겠어요. 선을 본다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지 윤희씨는 잘
모를 거예요.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순전히 결혼만을 조건으로 만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거기다가 부모님들까지 나오셔서 안 그러는 척하면서 약점
하나라도 캐낼려고 훑어보죠. 그런 생각하면 참 재미없는 자리예요."
  "정미씨, 반드시 부잣집 남자라야지 돼요?"
  정미가 내게 눈을 흘겼다.
  "윤희씨는! 그렇지 않아요. 없는 것보다야 있는 편이 낫긴 하겠지만 꼭은
아녜요."
  "그렇다면 정미씨 가까운 주위에서 찾아 보세요. 있을 것도 같아요."
  '주위에?'하면서 정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 주위에'라고 말할려고
하는데 어머니께서 법당을 나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후에 그의 답장은 이러했다.

  종환이와 내가 처남 매부 사이라? 아주 근사한데? 아직은 어머님께
말씀드리지 말고 정미와 직접 부딪쳐 보라고 종환이에게 편지 보냈다.

툭하면 우리에게 훈계를 하던 녀석이 그렇게 용기가 없으니 어이가 없고  

모르고 있었던 것이 네 말대로 정말 미안하다.

 

 

 

 



그가 떠난 후 얼마간은 남아 있는 듯한 그의 흔적은 이제 서울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카사노바", "화계사" 숲길, 신촌의 "복지"와 "왕자"다방,
그리고 우리집 근처의 기찻길 등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아무 곳에도 그의 흔적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잘 되지 않는 '헤맴'의 시간, 끊임없이 날 쓸쓸하게
하는 그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몇 차례의 편지, 전화, 명륜동 방문, 종환씨와의
만남 등. 이러는 중에 벌써 11월의 마지막이 되고 있었다.
  떨어져 있는 동안의 그리움은 쌓여서 아픔이 되고 또 다시 아픔은 가슴속
깊이 박혀 우리의 사랑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에 서울을
떠난 그 사람은 찬 바람이 불 때까지 몇 줄 안 되는 짧은 편지를 계속 보내
주었다.
  '윤희야' '임마'라고 부르면서 아주 짧은 말로 어느 때는 날 웃기기도 하고,
어느 때는 울리기도 하였다.
  내게 편지를 보낼 때는 반드시 할아버지나 부모님께로도 문안편지를 드렸고,
나에게보다는 몇 배로 길게 쓴 그의 편지에 어른들께서도 무척 흐뭇해 하셨다.
  오늘은 도무지 공부가 안 되는구나. 온종일 네 생각뿐이었다. 너도 그럴까
하고 생각하다가, 안 그럴지도 몰라 라는 결론이 나오자 아예 책을 덮어 버렸다.
나의 졸렬함은 순전히 너 때문에 생긴 거다. 너 책임지도록--.
  어젯밤에는 너를 만났다. 잠은 네 시간 이상 안 잔다는 결심이었는데 너하고
노느라고 무려 여섯 시간이나 잠을 자게 되었다. 두 시간은 나중에 돌려 주어야
한다. 알았지?
  임마! 그만 추근대라. 여기까지 따라와서 남 공부도 못하게 귀찮게 구냐?
무슨 여자가 욕실까지 따라 들어오니. 그런데 윤희야, 서울에도 내가 있니? 아!
네가 참 보고 싶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그리운 지난 날들이다. 누가 날 이토록 사랑해 줄
것인가! 나는 지금도 하루에 수없이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또 그의 이름을
부른다. 엄충식, 엄--충--식.

  11월 30일
  실기 시험이 끝나는 날이었다.
  학기말 고사를 앞두고 실기 시험을 치루게 되었다. 시험기간은 이틀이었지만
각자가 작품을 만들어서 발표를 해야 됐기 때문에, 창작을 하고 연습을 하느라
거의 열흘 정도는 보통 분주한 게 아니었다. 시험 결과야 어떻든지 일단 시험이
끝이 났다는 게 무척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시험이 끝나는 날같이 홀가분하고 즐거운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며칠 후면 학기말 시험이 있긴 하지만 실기만이라도 끝난 것이
큰 짐을 덜어버린 느낌이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이튿날에는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명륜동에 갈 수 있고, 또 그의 방을 들여다 볼 수가 있기에 더욱
즐거웠다.
  그 날은 은영이와 시간을 보내기로 시험 전부터 약속을 했었다. 무용
연습복과 슈즈 등을 넣은 큰 가방을 둘러 메고 은영이와 나는 교정을 나왔다.
눈이라도 내려 줄 것 같아 찌푸린 하늘은 사람의 마음만 초라하게 만들었다.
눈에 대한 기대에 우리 둘은 자꾸만 하늘을 쳐다보았다.
  "은영아. 근데 우리 어딜 가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갈 데가 없었다. 실컷 돌아다니며 놀기로 했는데...
  "글세 말야. 작년까지만 해도 갈 데가 너무 많았었는데, 이젠 우리도 늙었나
보다 얘. 별로 재미있는 데가 없어."
  은영이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말을 했나 본데 난 늙었다는 말이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뭐야! 늙어? 징그럽다 얘."
  내가 깔깔대고 웃는 것이 이상한지 쳐다보다가는 자기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는 길 한가운데 서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는 서로가 '얘, 그만 웃어,
창피해. ...너부터 그만 해'하고 말도 아니고 웃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낄낄거렸다.
  늘 웃다보면 내 옆에 찾아와 있는 그 사람.
  "휴--우, 웃고 나니 허무하다 얘. 충식씨한테 미안하고."
  "또 시작이구나. 연애 한 번 못 해본 사람은 어려워서 알아듣지도 못하겠네.
웃는 게 뭐가 미안해. 충식씨가 아무렴 네가 울고 있길 바라겠니? 안 그래?"
  "물론 그런 뜻은 아니지만 웃다가 보면 괜히 좀 그래. 아-- 너 같이 사랑을
안 해본 사람은 지금 내 마음 몰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은영이의 옆구리를 간지럽히자 그 아이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움츠렸다. 우린 갈 데를 못 찾고 계속 길에서
시시덕거리기만 하였다. 갑자기 은영이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놀라서 쳐다보는
날 보고 말했다.
  "얘, 윤희야. 나 좋은 생각이 있어. 나도 들으면 좋아할 걸?"
  "어디 좋은 데 생각 났니?"
  "응, 충식씨하고 잘 가던데 나 좀 구경시켜 줘. 두 사람의 추억의 장소 말야.
여러 군데겠지만 우선 춥고 배도 고프니까 명륜동 '카사노바'부터 데려다 줘."
  너무 뜻밖의 좋은 제안이었다. "카사노바"에 가면 그가 날 기다릴 것만
같았고, 또 그가 빙그레 웃으며 들어올 것만 같았다.
  은영이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얘, 두 사람은 어디에 잘 앉았었니?"
  내가 '여기, 이 자리'라고 대답을 하자 '응, 그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기다리는데 바로 옆동네에 있는 그의 집이 생각났다.
내일이면 들르긴 하겠지만 지금 와 있는 곳이 명륜동이라 생각하니 전화를 하고
싶었다. 신호가 울리기 무섭게 정미가 나왔다.
  "저예요. 누구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뇨. 왜요?"
  그녀의 가라앉은 음성이 꼭 낯선 사람만 같았다.
  "전화를 급하게 받으시는 것 같아서요. 어디 아파요? 전화받는
목소리가..."
  "윤희씨, 거기 어디예요?"
  확실히 다른 날과는 달랐다.
  "오늘 일단 실기시험이 끝났잖아요. 바로 학기말 고사가 있긴 하지만
친구하고 '카사노바'에 차 마시러 왔어요. 친구랑 집이 같은 방향이라서 그냥
집에 갔다가 내일 갈께요. 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시죠?"
  그때 저쪽에서 누가 정미를 부르는 소리가 났고 손으로 수화기를 막는 것
같았다.(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다시 정미가 나왔다.
  "여보세요. 아! 미안해요., 윤희씨. 옆에서 말을 시켜서요."
  "정미씨, 무슨 일 있어요?"
  "일은 무슨 일요. 윤희씨 친구하고 재미있게 놀다가 가요. 또 연락하구요.
끊어요."
  억지로 태연한 척하는 목소리. 더구나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평소와
다른 정미 때문에 무척 궁금했지만 '일이 있으면 날 오라고 그랬을 텐데 혼자
기분 나쁜 일이 있겠지'하는 생각에 테이블로 돌아왔다.

 


은영이와 계속 쉬지 않고 떠들면서도 신경은 그의 집에, 아니 정미에게
있었다. "카사노바"를 나오니 바람은 더 세차게 불고 하늘은 아예 잿빛이었다.
나는 정미의 전화가 마음에 걸렸지만 신경을 안 쓰기로 했다.
은영이와 버스를 타고 우이동 쪽으로 가서 화계사 숲길을 거닐면서
충식씨와의 추억을 얘기하고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나의 인사 (특히 귀가 인사)는 요란했다. 때문에 들어서자 마자 큰 소리로
'할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엄마 나야' '큰 언니 왔다'하면서 수선을 떨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아무도 내다보질 않았다. 정미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나를 우리집 분위기마저 긴장시키고 있었다. 부모님들은
별채에 계신 것 같았다. 신을 벗으며 '할아버지'하고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자
방문이 열리고 무표정으로 앉아 계시는 어른들의 모습이 보였다. 늦는다고 미리
허락을 받았는데 나 때문은 아닐 테고 전혀 예감이 서질 않았다.

거기에다 아버지까지 평소보다 일찍 들어와 계셨다.
  "엄마, 왜 그래요? 우리 집 무슨 일 생겼어요?"
  어머니는 대답도 없이 할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리셨다. 마치 '아버님
어떡하죠'하시는 듯이--.
  "아빤, 오늘 왜 일찍 들어 오셨어요?"
  아버지 역시 침묵이었다. 분명 무슨 큰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침울한
표정으로 할아버지께서 날 부르셨다.
  "거기 앉거라."
  세 분의 얼굴을 보면서 난 자꾸 겁이 났다.
  "윤희야,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절대로 경솔한 짓 하지 말고,
아주 침착하게 들어야 돼."
  할아버지의 길고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의 눈이
벌겋게 충열된 것 같고 또 아버지의 굳은 표정은 처음이었다.
  "네, 할아버지."
  "명륜동에서 연락이 왔는데 충식이가 말이다."
  "충식씨가요? 할아버지 충식씨가 왜요?"
  경솔하지 말 것, 침착할 것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너 이러면 말 못한다. 조용히 들어."
  "네, 알았어여. 할아버지."
  나는 가슴이 막히는 것만 같았고 방 바닥은 자꾸만 아래로 꺼져가는 것 같았다.
  "윤희야, 놀라지 마라. 충식이가 글세 많이 다쳤단다. 사고가 났다는구나."
  "네에??..."
  뭐라고 할아버지는 계속 말씀을 하고 계셨지만 내 귀엔 하나도 들리지가 않았다.

가슴속에서는 방망이 소리가, 귓속에서는 벌떼가 나르는 것 소리가
나고 목이 갑자기 막히는 듯하였다.
  "엄마! 엄마가 말해 줘. 크게 말하라구. 할아버진 답답해. 아--아 답답하단
말야. 충식씨가 어떻다구?"
  허우적거리는 내 손목이 엄마에게 꽉 붙잡혔다.
  "그래 그래, 윤희야 정신차려. 내 말해 줄게. 놀리는 김에 아주 다 알고나
있어라. 교통하고가 났단다."   

"예? 교통사고요? 엄마, 얼마큼이래?"
 "아주 심하단다."
엄마는 나보다 먼저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명륜동엘 가야지'하며
일어서려는데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엄마, 언제 연락 받았어요?"
 "아까 낮에..."
 '그랬었구나.' 정미가 왜 그렇게 전화를 받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나는 우선 그의 집을 가봐야겠다는 마음으로 내 방으로 올라왔다.

동생들이 거실에 모여 앉아 울상들을 지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방문을 여는데 도어 손잡이를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에 맥이 빠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그이가 한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고 히죽이 웃고 있었다.
아니, 내가 그의 한 팔에 안겨서 생글거리고 있었다.
  '우린 잘 있잖아.'
  그리고 우린 서로 잘 있어야 했다.


 '거짓말이었으면...꿈은 아닐까? 거짓말이라고 꿈이라도 이건 너무해. 오빠.
충식이 오빠, 충식씨, 죽지만 말어. 알았지? 알았지? 다친 건 괜찮다구. 죽지만
말라니까. 죽지만 않으면 돼. 내가 지금 왜 이래. 죽다니, 나는 이 방정 때문에
안 된다니까, 조금 다친 사람보구 죽지 말라니...너무 불길해. 그런
생각하지마. 불길하다니까. 하지마. 하지마. 하지 말라고--.'
내 생각이 너무 무서워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 쥐었다. 그러나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죽으면 안돼 죽지마'라고 소릴 지르며 두 생각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일단 명륜동에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에 거실로 나가는데 어머니의 부축을
받고서도 무릎에 힘이 없어 자꾸만 주저 앉으려고만 했다. 소파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내게서 가까워졌다가는 멀어지면서, 심한 현기증이 일어났다.
전화기의 다이얼은 마치 바람개비가 돌고 있는 듯해서 숫자를 찾을 수가
없었고, 내게서 수화기를 빼앗는 어머니의 손도 몹시 떨렸다.
 "여보세요, 접니다. 지금은 무어라 아무런 말씀도 못 드리겠습니다. 윤희가
왔어요. 네, 다 말을 했습니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괜찮습니다. 윤희 걱정은
나중에 하세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쪽 어머닌 내 걱정을 하고 계시나 보다. 고마운신 분. 도대체 지금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하실까? 충식씨가 떠난 후 거의 매일이다시피 불공을
드렸는데 부처님도 모두 다 소용이 없는 것일까...?'


생각을 여기까지 하다가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부처님께서 보살피시어 큰 부상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에 속으로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치며 합장했다.
 "윤희를 그리 보내겠습니다. 아녜요. 당연히 가야죠. 저희가 잘 일러서
보내겠습니다."
정말 당연히 가야 하는데, 내 걱정을 하시어 못 오게 말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수화기를 내려 놓다 말고 다시 귀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아--네, 기다리세요."
 어머닌 내게 수화기를 건네 주면서 '울지 말고 얘기해'하셨다.
 "어머니!"
 난 그리 침착한 편이 못 되었다.
 "윤희야!"
어머니의 음성은 벌써 울다 지친 듯한 목소리였다.
  "어머니, 어떡해요. 충식씨 어떡해요. 혼자서 얼마나 아프겠어요. 어머니."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만 나는 아주 경솔하기 짝이 없었다.
  "윤희야. 우리 울지 말자. 네 말대로 그 아인 혼자 얼마나 힘들겠니. 충식이
생각해서 우리 울지 말자꾸나. 그리고 연락할 때까지 집에서 기다리도록 해라.
나야 좋지만 부모님들 걱정하신다."
  "어머니만 좋으시면 됐어요. 지금 곧 떠날께요."
어떻게 해서든지 정신을 차려야 했다. 지금 아무도 없는 먼 나라에서 혼자
고통을 겪고 있을 그를 생각해서. 그리고 내게 좋은 남자를 사랑하게 해주신
그의 어머니, 아-- 나의 가엾은 시어머님을 위해서.
바지에 반코트 차림이었던 나는 명륜동에 가기 위해 투피스로 갈아 입었다.
옷 입는 것을 도와주시는 어머니 얼굴은 온통 눈물 투성이었다.
 "너 명륜동 어른들 앞에서 울면 안 된다. 눈물이 나도 꾹 참고 정 못
참겠다면 어디 눈에 안 보이는 곳에 가서 울도록 해라. 너도 물론 마음
아프겠지만 자식 일인데 오죽 하시겠니? 더구나 외아들 아니냐. 엄마 말
알아듣겠니?"
어머니의 말씀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집을 나섰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친구와 웃으며 왔던 길을 나는 눈물을 쏟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해서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도대체 그 사람은 어느 정도일까? 어른들이 심하다고 하면 정말 많이
다친 것일 텐데 고통이 얼마나 심할까? 그리고 그 고통을 참느라 얼마나
외로울까? 외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의식이나 있는 건지. 어떡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택시에서 내려 골목을 들어서다 말고 멀리 혜화동 로터리 쪽을 바라보았다.
불과 얼마 전 은영이와 차를 마시며 그의 얘기를 하던 "카사노바"의 불빛이
보였다. 그 사람이 앉아서 날 기다릴 것만 같았다.
골목에서는 바람이 세차게 빠져 나오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골목을
나오고 있는 바람을 타고 그가 잘 바르던 상쾌한 스킨 냄새가 다가왔다.
  '나는 그 이후 조금만 바람이 불라치면 그때의 스킨 향기가 섞인 바람이
생각난다.'
  한발 한발 그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난 계속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오빠, 충식이 오빠. 아! 충식씨--.

 

  집 앞에서는 승용차가 몇대 서 있고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정원과 집
안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다 말고 이층의 그가 쓰던 방을
올려다 보았다. 커튼이 양쪽으로 단정히 묶여져 있었다. 그 가운데 남자가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전혀 낯설지 않은 그 남자에게 나는 하마터면 손을 마구
흔들 뻔했다.
  그는 종환씨였다. 고개를 들 수가 없어서 현관 바닥만 내려다 보았다.
  "윤희씨."
  그도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어느 정도에요?"
  "심하대요. 아주 많이. 들어갑시다."
  그가 뒤돌아 서려고 하는데 내가 불렀다.
  "종환씨, 나 물어볼 게 있어요. 미안해요."
  "말해봐요."
 "오빠가 그렇게 많이 다쳤대요? 의식은 있대요? 종환씨, 그 사람 아,
아녜요."
생명에 지장이 없냐고 물어 보려다 그만 두었다. 종환씨는 날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몇 사람이 앉아 있거나 서성거리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집안은 너무
조용해서 흡사 빈집 같았다. 종환씨가 안방 앞에서 문 손잡이를 잡은 채 날
보고 있었다.
  '울지 말아야지. 울면 안돼, 절대로 안방에서 울면 안돼.'
안방에는 어머니께서 비스듬히 누워 계시고 아버님과 약혼식 때 한 번 뵌 적이
있는 작은 아버님, 정미가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날 쳐다보았고 어머닌 '아이고 잴 어떡하니?'하시며 울음을 터뜨렸다. 난 울음을
참으려고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감히 그분들 앞에서 울 수가 없거니와
그들의 슬픔에 비해 나의 슬픔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를 기르시며
얼마나 많은 꿈을 가졌을까? 아들을 떠나 보낸 후 거의 시간을 절에서
보냈지만, 사실 속마음은 얼마나 허전하고 아들이 그리웠을까? 또한
아버님은...?
남자분이라 일일이 감정을 밖으로 표출시키지 못하고 혼자 억누르느라
무척이나 힘드셨으리라. 아마도 잠 못 이루시는 밤이 여러날 되었겠지.
정미는 또 어떠했으랴! 단, 남매뿐인 형제.

 그 오빠가 누이 동생을 얼마나 귀여워했는지는 내가 너무도 잘 안다. 정말
그분들에 비해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아주 작은 것이었으리라.
잠시 후, 전화 벨이 울렸다.
통화 내용을 보아서 미국에서 온 듯하였다.

 

 

아버님께서는 한 손에 수화기,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계셨는데 두손이 몹시 떨으시며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전화를 끊으신 후 아버님은,
 "마음들 단단히 먹고 있어. 지금 상태로는 가망이 없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를 지경이래. 내가 내일 미국으로 가야겠어."
라고 말씀하시더니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윤희야!"
목이 메이시는 듯했다.
  "아직은 이른 얘기지만 네가 걱정이구나. 집에서 걱정하실 텐데 일찍 가도록
해라. 지금은 너에게 해줄 말이 별로 없단다."
아버님은 종환씨 더러 날 바래다 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밤 내가 있을
자리는 명륜동인 것만 같았는데 모두 내가 집으로 가기를 원하고들 계셨다.
  "아녜요, 아버님. 저 오늘 여기 있게 해 주세요."
 "안 된다. 지금 갔다가 내일 다시 오렴. 늦었다. 빨리 일어나도록 해라.
종환이가 바래다 주는 거 거절하지 말고."
나는 혹시나 하고 어머니를 쳐다보았으나 그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윤희야. 아버님 말씀대로 따라라. 가망이 없다는 것은 아직은 작은
희망이 있다는 얘기다. 우리야 자식 일이지. 너는 아직 나이도 어린데 벌써
절망하면 안 되지, 어른들 시키는대로 하고 종환일 따라 나서거라."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어서 인사를 드리고 안방을 나왔다.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나오려다 말고 이층으로 가는 계단을 보았다. 그의 방엘 가보고 싶은
마음에 계단을 올라갔다. 종환씨도 뒤따라 오는 듯했다. 그의 방문은 열려
있었고, 그곳에서 정미가 울고 있었다. 그이가 쓰던 책상에 앉아 사진을 보며
울고 있는 정미를 보자 그동안 참아왔던 울음이 왈칵 솟구쳐 나왔다. 문가에
서서 창문을 보니 거기에 그이가 서 있는 것만 같았고 날 오라고 손짓하는 것도
같았다. 저 창가에서 날 안아주며 '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야'하던 그였다.
그의 넓은 가슴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정미는 계속 울고 있고, 종환씨는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난 창문만 바라보고 어 있었다.
종환씨가 정미에게로 가까이 갔다.
  "정미야. 그만 진정해."
정미가 고개를 들고 종환씨와 나는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종환이 오빠, 우리 오빠 괜찮겠죠?"
 "그래 괜찮아야지. 울음을 참고 서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자구. 그 녀석은
절대로 나쁘게 되질 않을 거야. 워낙 좋은 녀석이라서, 난 믿어. 그리고
부모님들께서 얼마나 애타시겠니? 우리만이라도 정신차리고 있어야지. 윤희씨도
오늘 여기 있고 싶어 했는데 부모님 생각해서 집으로 가는 거야."
 정미가 눈물을 닦으며 날 바라보았다.
  "윤희씨, 오빠가 미국으로 떠나기 싫어한 거 모르죠?"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또 있단 말인가.


  "괜히 가기가 싫다고 나만 보면 말했어요. 윤희씨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냐고 내가 놀렸지만 꼭 그것 만도 아닌데 괜히래요. 웬지 괜히래요."
  지금 그의 사고를 슬퍼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 중에서 나는 자격상실이었다.
부모님들을 뵈어도 그렇고, 묵묵히 집안을 지키고 있는 종환씨, 그리고 정미
앞에서 난 어떤 방법으로도 슬픈 내색을 할 수 없었다.

  대문을 나서면서 그의 방을 올려다 보았다. 창가에서 그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자꾸만 뒤를 돌아다 보면서 골목을 간신히 빠져나와 택시를 잡으려는
종환씨를 말려서 창경원 담을 끼고 비원 쪽으로 걸었다. 이젠 완연한 겨울
바람이었다. 내 얼굴을, 그리고 가슴을 때리는 바람에건 그의 아파하는
신음소리가 들렸고, 또 그의 스킨 냄새가 내 코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걷다 보니 비원 앞이 보였다. 그때서야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종환씨, 왜 사고가 났대요?"
종환씨의 대답은 한참 뒤였다.
 "윤희씨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아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어요. 직접
운전하던 차가 충돌했고, 중태라는 것밖에는--. 한 비서가 급히 수속을 하고
있으니 내일 오후엔 아버지께서 떠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곧 알게
될 테죠."
담배를 꺼낸 그가 불을 붙이려 하자 바람이 자꾸 방해하고 있었다. 나의 두
손까지 빌어 겨우 불을 당긴 그는 길게 한숨 섞인 연기를 내어 뿜었다.
  "종환씨, 이럴 땐 난 아무것도 할 게 없나요? 그냥 이렇게만 있으면 돼요?"
  "지금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종환씨. 우린 혈맹의 관계잖아요. 그 사람은 우릴 안 떠날 거예요. 그렇죠?
내 말이 맞죠?"
  "지금 그 녀석 생각하면서 슬프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난,
나는 말예요. 윤희씨가 제일 걱정이 돼요."
  밤이었지만 그의 침통한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제 걱정할 게 뭐 있나요?"
  "그래도 내 생각은 그렇지가 않아요. 기말고사는 언제죠?"
  "일주일 남았어요."
  종환씨는 발을 멈추어 나를 바라보았다.
  "윤희씨, 시험을 보도록 해야 돼요.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은 아무도 충식일
위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시험 공부야 안 되겠지만 하여튼 시험은 꼭
봐야 돼요. 알았죠?"
지금 시험 걱정을 해야 되다니...
시험이 그리 중한가?
지금은 그 사람의 일 외에는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었다.

 

 


택시 안에서도 종환씨는 '정신차려라. 울지 말라. 식사는 꼭 해라. 잠을 자야
된다'등 내 걱정을 해 주었지만 그의 눈에도 가끔씩 눈물이 고이는 것이 불빛에
보였다.
집앞까지 바래다주고 골목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저 사람의 마음을 아무도 위로해 주시 않았구나...친구, 친구가 뭘까?
저토록 진하고 따스한 우정의 친구도 또 있을까?'
 "종환씨!"
큰 소리로 그를 부르며 골목을 뛰어갔다.
  "왜 그래요?"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골목을 후비고 있는데도 내
얼굴은 뜨거워져 있었다.
  "종환씨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녜요. 두 분이 얼마나 가까웠어요.
종환씨 마음을 미처 걱정 못한 게 미안해요. 잘 참고 시험도 잘 볼께요."
이 말을 하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 참, 윤희씨두. 그런 것까지 미안해 하면 어떡해요. 난 괜찮아요. 울지
말아요, 괜찮다니까요. 우리 서로 잘 참기로 해요. 시험 얘긴 마음이
놓이는군요. 들어가세요."
종환씨에 대한 그의 우정이나 나에게 주는 배려는 그 후에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만큼 다정다감한 사람도 아마 세상에 드물 것 같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사람이었다.

집에 들어와 보니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불꺼진 방은 하나도 없었고, 내가
오는 소리에 모두들 거실에 보여 들었다. 근심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 중 누구 하나도 내게는 힘이 되질 않았으며 못되게도 이유없이 짜증이
났다.
  "그 댁은 어떻드냐?"
  할아버지께서 물었다.
  "모르겠어요."
  모르다니 더구나 할아버지께 들릴 대답은 아니었으나 퉁명스럽게 대답을 해
버렸다.
  "미국에서 또 연락이 없었니?"
  "몰라요."
  "도대체 사고는 어째서 난 거라니?"
  "몰라요."
  끝까지 참으실 어르신네가 아니었다.
  "너 이 녀석, 할애비가 궁금하고 걱정이 돼서 물어보는데
모르다니...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 나 때문에 사고가 났다니? 나쁜 녁석
같으니라구. 식구들이 지금 얼마나 걱정들을 하는 줄 알기나 알아? 충식이야
물론이지만 사실 우린 니 걱정을 더 안할 수가 없어. 어쩐지 약혼을 반대하고
싶더라니. 막말로 더 큰 변이나 일어나봐. 아휴, 생각도 말아야지. 결혼 안한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지."
  "할아버지."
  하고 소리를 지른 내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온 식구들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결혼 안한 게 다행이라뇨.
그럼 만약에 그 사람이--. 아--, 그만 두세요. 어떻게 내 걱정을 더 할 수
있죠? 그런 걱정은 고맙지도 않아요."
  난 그 후로 할아버지와는 충식씨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안했다. 그리고
예전같이 할아버지를 따르는 일이 없어져 버렸다.
  내 방에 들어오니 여전히 그와 나는 책상 위에서 웃고 있었다.
  편지질 꺼내어 그의 이름 석자도 다 못 쓰고 난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윤희야--, 윤희야--."
  밖에서는 문 열라고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누구든지, 오늘 나한테 귀찮게 굴면 나 죽어 버릴래."
  하고 나는 큰소리를 질렀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행패였는지 모르지만... 난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지는 눈물에 젖고 나의 오열은 그칠 줄 몰랐다.


  충식씨와 난 이름을 알 수 없는 절 마당에 서 있었다. 높은 계단이 보였고, 그
계단 끝 아주 높은 곳에 법당이 있었다. 열린 법당 안에서 부처님이 인자한
웃음을 띄우고 아래를 내려다 보시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충식씨는 내게 무슨 말인가를 하며 내 손을 잡기도 하고,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때 스님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충식씨는 날 보며 조용히 하라고 말을 한 후 두 손을 모아 스님께 합장을
했다. 나도 따라서 합장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스님과 한참이나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날 보고 기다리라고 하고는 스님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나를 데려가도 될텐데 왜 혼자 올라가는 것일까라는 생각에 조금은 섭섭해
하며 법당 쪽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뜻밖에도 명륜동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날
보고는 모두들 모른 척하고 그 사람만을 부르다가 법당 안으로 이내 모두
들어가는 것이었다.
  서운한 마음 꽉 차 오는데, 한 번 뒤를 돌아다보고 앉아 그가 올라간
계단만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리 올려다 보아도 법당 문은 열리지 않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계단에
올라섰다.
  첫째 계단에서 위를 쳐다보니 마당에서 보았던 때와는 달리 어찌나 높은지
계단의 끝은 하늘 끝을 닿아 잘못 본 것 같이 느껴졌다. 숨이 찰 정도로 많이
올라 갔건만 제자리 걸음이었다.
  결국은 지쳐서 계단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길게 한숨을 쉬고는 마당을 내려다 보니 내려갈 생각에 아래가 무서울
정도였다. 아득한 계단 끝에는 법당은 보이지 않고, 그곳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난 갑작스런 무서움과 외로움에 무릎에 얼굴을
묻고는 소리내어 울어 버렸다.

  꿈이었다. 깨어난 후에도 나를 모른 척하던 명륜동 가족들이 서운했다.
  편지를 쓰다고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의 고통에 그렇게도 괴로워하더니 잠깐이라도 잠을 잘 수가 있는 내가
이상했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지를 애써 곱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힘을 주어 그의 이름의 마지막 자를 쓰고는 편지를 우리의 사진 앞에 놓았다.
  온 몸에 마치 전류가 흐르는 듯한 전율이 느껴졌다. 옷은 그대로 외출복
차림이었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부어 올라 있었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여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대로 앉아 한 곳 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는 차츰차츰 커져갔다. 이제는 마치 나의 머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옷을 갈아 입고는 방을 나왔다.


  거실에는 어머니께서 앉아 계셨다. 문 여는 소리에 놀라셨는지 표정이 굳어
보였다. 엄마를 보는 순간 또 다시 눈물이 났다.
  "엄마, 왜 안 주무시고--."
  "응, 잠이 안 와서. 나도 방금 나왔다. 넌 왜 나왔니?"
  방금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거짓임을 난 알고 있었다.
  걱정으로 뒤늦게야 잠자리에 든 가족들...어머니께선 차마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던 것이었으리라. 아마 충식씨와 나의 일을 똑같이 가슴 아파하고 계셨을
거다.
  '화장실에...'하며 살짝 웃어 보이자 어머니께선 욕실에 불을 켜 주시며
문앞에서 말없이 웃어 보였다.
  엄마는 늘 엄하신 시아버님 밑에서 눈치만 보시느라 자식 앞에서 마음 놓고
엄마로서의 역할도 못 하시던 분이다.
  충식씨가 처음 집에 왔을 때나, 약혼식 문제로 집안이 복잡할 때나, 그리고
오늘 일만 해도 어머니는 홀로 계신 시아버지 뒤전에서 눈물만 흘리고 계셨다.
  내가 다가가서,
  "엄마, 여기 추우니까 내 방으로 가요."
  하며 어머니의 손을 잡자,
  "그럴까?"
  하시고는 내 손을 꼬옥 잡았다. 방에 들어오자 어머니는 침대 시트를 젖히며
말씀하셨다.
  "윤희야 눈좀 붙여라."
  침대에 걸터 앉아 있는 내 앞에 어머니는 의자를 가져왔다.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술이 발달한 내과이니 괜찮을 거예요. 이젠
저도 울지 않을께요. 할아버지 때문에 제 일에 일일이 간섭 못하시는 거
속상하죠? 엄마 마음 다 알아요. 내가 알고 있으니까, 서운해 하면 안돼요.
약속해요, 엄마."
  어머니는 어느새 온통 얼굴이 눈물 투성이었다.
  "윤희야, 그래 윤희야. 엄마는 참 든든하단다. 네가 어느새 이렇게 커서 엄마
마음도 헤아려 주고, 또 이번같이 놀라운 일이 생겨도 침착하게 잘 행동하니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모르겠다."
  말씀하시는 어머니와 나는 똑같이 울먹였고 끝내 나는 어머니의 목에 메달려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어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머릿속은 온통 그의 생각뿐이었고 얻어맞은 듯한 두통으로 끝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창가엔 완전히 아침이 찾아왔다. 어둡고 무거운 나의 마음과는 달리 날씨는
꽤 맑을 것 같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커피를 끓이고는 전축에 아침 "페르귄트
조곡"을 틀었다.
  가슴만 두근거릴 뿐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도저히 명륜동이 내가
있을 자리이지 내 방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아침을 먹고 식탁에서 일어서면서 어젯밤의 일을
할아버지께 사죄하고는 곧바로 명륜동에 갈 준비를 했다.
  거울 앞에 서서 옷 매무새를 정리하려던 나는 그대로 서서 자꾸 다짐을 하고
있었다.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밖의 나는 계속해서 다짐을 해 두는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사람 생각을 하고 눈물은 흘리지 않기로, 나쁜 생각은
안하기로...

  명륜동 가족들은 모두들 밤을 새운 듯했고, 마침 일요일이라 종환씨가 와
있었다. 잠시라도 눈을 붙였던 나는 그분들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안 방에서 인사를 드리고 나오자 종환씨는 무척이나 피곤한 모습으로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간 밤에 눈 좀 붙였어요?"
  내가 웃었다.(어찌 웃을 수가 있을까?)
  "네 잤어요. 미안해요."
  종환씨도 힘없이 웃어 보였다.
  "잠잔 것도 미안해요? 잘했어요. 서 있지 말고 앉아요."
  마악 앉으려고 하는데 안방에서 아버님이 오셨다. 눈물도 안 흘리고 나쁜
생각도 말기로 하 나 자신과의 약속이 밤새 수척해진 아버님을 보는 순간
무너질 것만 같아서 입을 꼬옥 다물었다.
  "윤희야, 집에서들 걱정하시지? 네가 여기 오는 동안 아버님하고 통화를
했다. 충식이 사고야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너희 부모님과 우리는 네가
무척 마음이 쓰이는구나. 이럴 때일수록 너 자신이 기운을 내서 우리에게 또
다른 걱정을 안하도록 해야 된다. 그래도 어제 널 보니 내 마음이
든든하더라."
  자꾸만 약속이 흔들렸다.
  "아버님,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래, 그러마."
  그리고는 담배를 꺼내시며 종환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종환아, 피곤하지? 우리 윤희가 끓여주는 커피 한 잔 마실까?"
  라는 아버님의 말씀에 종환씨는 '좋죠, 아버님'하고 대답했다.
  난 부엌 쪽으로 갔다. 부엌엔 정미가 식탁에 앉아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말을 하다 말고 나를 보자 '왜요?'라고 물었다.
  "아버님께서 커피 드시겠대요."
  물주전자를 찾으러 싱크대 쪽으로 돌아서는데 아직껏 보지 못한 정미의
차가운 눈초리를 느낄 수 있었다.
  '잘못 본 거겠지. 정미씨가 왜 나를...'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커피잔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정미의 통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근데 말야. 내가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조선호텔에서 몇 달 전에 뭐했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너 그것도 어떡해서 하게
된 줄 아니? 매일 가서 사정하고 매달려서 겨우 허락 받은 거야. 아니 무슨
죄졌니? 그렇다고 우리 집보다 나은 것도 아니고 조그맣게 사업하나 봐. 이건
완전히 거꾸로 된 거라구. 처음부터 난 맘에 안 들었는데 이런 일이 있구 보니
정말이지 쳐다보기도 싫다니까..."  물을 끓고 있는데 스푼 하나 들 기력이
없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분명히 내 얘기야, 아닐 거야'하는 긍정과 부정의
두 생각이 날 멍하니 서 있게 만들었다.
  "물 끓는 소리 안 들려요? 설마 전화 엿듣는 건 아니겠죠?"
  처음 듣는 그녀의 가시 돋힌 목소리는 두 가지의 갈등 중에 한 가지의 선택을
가능하게 했고, 그쪽으로는 확신을 갖게 했다.
  "엿듣긴요, 아녜요."
  내 자신이 스스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가슴을 그럴 리는 없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진정시키며 거실로
커피잔을 가져갔다. 등뒤에는 정미의 차가운 시선이 계속해서 따라오고
있었다.
  "윤희야, 네 것도 가져오지 그랬니?"
  아버님께서는 커피를 한 모금 드시더니,
  "야! 맛있구나. 종환아, 우리 윤희가 커피를 맛있게 타지?"
  하고 말씀하셨다.


난 혹시 어머님께서도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 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안방은 출입금지였다. 어머니께서 혼자 조용히 염주를
돌리시겠다고 하여 모두들 나왔던 거다. 부엌에서 정미가 나오더니 나를 잠깐
훑어보고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몇 시간 후 아버님의 비서가 와서는 출국수속이 잘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버님만 미국엘 가시면 그 사람은 금장 나을 것만 같았다.
  가족들 모두 나름대로의 불길한 생각들을 했을 테고 그런 마음이 아버님의
출국으로 인해 어느 정도는 기대와 희망, 그리고 안도의 마음으로 바뀌었을
거다. 오후 내내 회사 사람들과 아버님 서재에서 회의를 하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시는 아버님과 함께 집안은 몹시 분주하였다.
  약간 이른 저녁을 드신 후 우리를 안방으로 불렀다. 모두라야 부모님, 정미
외에 종환씨와 나뿐이었다.
  내 옆에 앉은 정미를 신경쓰며 난 어머니의 눈치만 살폈다. 아버님께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탁을 하셨다.
  "나도 없는데 당신이 기운을 차려야 돼요. 식사는 꼭 하고, 우리가 힘을 내야
나머지 사람들도 약해지지 않는 거요. 우선은 내가 가니 이젠 자세히 알게
될 테고 충식이도 나를 보면 의지가 생길 거 아니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의 혼잣말로,
  "나를 알아보기나 할려는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정미를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정미야, 엄마 잘 보살펴 드려라. 윤희한테도 신경 쓰고, 전에 말했듯이
친자매처럼 서로 의논하고 가깝게 지내도록 해."
  정미의 대답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버님께서는 날 쳐다보며 자상한 웃음을
지으셨다.
  "윤희야, 넌 내 날 부디 명심하도록 해라. 어렵긴 하겠지만 매일 오지 말고
전화를 해라. 시험공부 해야지. 절대로 시험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네가
우리 앞에서 눈물을 삼키고 있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다만 무척 가슴 아프단다.
너희 집 어른들 앞에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알겠니?"
  "네, 아버님."
  그런데 이 말을 하기가 어찌 그리 힘이 들던지 마치 가슴과 목이 무엇에 틀어
막혀 잇는 듯했다. 종환씨를 바라보는 아버님은 가슴 아프도록 슬픈 얼굴을
하고 계셨다. 아마도 아들의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으리라.
  "종환아, 너에게 미안한 부탁을 해야겠다. 내가 연락할 때까지 여기서 출근할
수 있겠니?"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이곳 걱정은 마세요."
  "그래, 고맙구나. 너에게는 일일이 부탁 안하겠다. 어머니, 정미, 윤희 세
사람 신경 써다오."
  아버님께서는 아무도 나오지 못하게 말린 후 한 비서와 둘이서만 공항으로
떠나셨다. 아버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눈을 더 크게 떠보고, 입술을
깨물어도 보았지만 시야는 흐려지기만 했다.
  다시 안방은 출입금지가 되었다.


종환씨, 정미와 함께 그의 방으로 올라갔다. 나의 추측이 아니더라도
분위기는 아주 어색했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일단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아래층 부엌으로 내려갔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설거지를 하고 있다가는 '뭐 드릴까요?'라고 물어왔다.

난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식탁 의자에 앉았다.
  이 집에서, 장차 내가 살 집안에서 갑자기 나는 불청객이었고, 이방인이었다.
그가 중학생이었을 때부터 함께 살았다는 가정부 아주머니의 부엌에서의 울음이 부러웠다.

 

 

잠시 후 안방에서 날 찾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 향이 타고 있는 냄새가
그윽했고 어머니께서는 계속 염주를 돌리고 계셨다.
  "이제 됐다. 집에 가거라."
  난 자꾸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 더 있다가 갈께요."
  "날이 어두워졌잖니, 노인네 걱정하신다. 혼자 가지 말고 종환이와 같이
가거라."
  할아버지의 호칭이 노인네로 바뀌었다. 말씀이 다른 때와 달리 약간은
딱딱하신 듯했다. 다행히 정미와 비슷한 눈초리는 아니었다. 지금 이런
상태에서 더 이상의 배려는 없지 않은가?
  집에 가겠다는 인사에 정미는 대답은커녕 내게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쌀쌀한 표정이 나의 걸음마다에 떨어지는 듯했다.
  택시 안에서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집근처에서 내린
후 우리는 가까운 다방엘 들어갔다. 종환씨와 단 둘이 있게 되니 기다렸다는
듯이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도 나와 같았는지 맺혀 있는 눈물이 곧 떨어질 것 같아 보였다.
  내가 손수건을 얼굴로 가져 가면서 입을 열었다.
  "종환씨, 나 궁금한 게 있어요."
  종환씨는 무엇이냐는 듯이 나를 보았지만 난 곧 후회를 하였다.
  "아녜요. 아무것도 아녜요."
  "말해 봐요. 나한테 말 못할 거 있어요?"
  "됐어요. 나중에 아주 나중에 말할께요."

  결국 말을 안한 채 종환씨와 헤어졌다. 이튿날부터 아침에 어머님께 전화를
드린 후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는 명륜동으로 갔다가 밤 늦게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버님께서 도착했다는 첫 번째 전화가 온 뒤 얼마 후에 '충식일 봤는데
아직은 뭐라고 말할 단계가 아니니 기다리고들 있으라'는 두 번째 연락이
왔다고 종환씨가 알려 주었다. 어머니는 무표정에 여전히 염주만 쥐고 계셨고,
정미의 쌀쌀함은 더욱 노골적이 되었다.
  오직 한 사람 종환씨만이 큰 의지가 되어 주었다. 그때 종환씨는 사촌형이
되는 사장님께 부탁을 해서 일주일간의 결근을 허락 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집안에서 종환씨 옆에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난 그저
거실에서 멍하니 앉아만 있었는데 그 외로움이란 얼마나 날 지치게 만들었는지
집에만 오면 쓰러지곤 했다.

  아버님이 떠나신 지 나흘 후 그의 어머니는 내게 명륜동 출입을 금지시켰다.
별 다른 이유도 없이 너무도 단호히 말씀하시는 어머님이 하도 무서워 하마터면
소리내어 울 뻔했다. 당분간은 더 이상의 소식을 듣기 어렵고 하니 이쪽에서
연락을 할 때까지는 집에 오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그 자리에는 정미도 함께 자릴 하고 있었다. 정미는 아예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었는데 내가 '어머니, 매일 오고 싶어요'라고 말을 하자
'윤희씨가 매일 온다고 오빠가 낳는 건 아니잖아요. 엄마가 오지 말라고
하시잖아요'하며 날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미씨, 왜 그래요?'라는 말이 속에서
치밀었지만 때가 아닌 것 같아서 참아 버렸다.
  안방을 나오니 거실 저편에서 종환씨가 창밖을 내다보고 서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그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더해만
갔다.
  뒤에서 종환씨는 날 부르며 계속 따라오고 있었지만 아젠 누구하고도
말하기가 싫었다. 차라리 완전한 고립이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충식씨 날 봐서
기운을 내세요.'
  큰 길이 나오자 혜화동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흐르는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난 자꾸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카사노바" 앞까지 걸어갔다.
  '충식씨 안에 있어요?'
  저녁이라 손님이 많았다.
  낯익은 웨이터가 인사를 하려다 말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구석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내가 의자에 앉는 것과 동시에 종환씨도  이미
나의 맞은편 의자에 앉고 있었다. 그는 내게 묻지도 앉은 채 쥬스와 맥주를
시켰다. 컵에 가득해지는 맥주거품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역시 그의 눈치는 빨랐다.
  "윤희씨. 한 잔만 할래요?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자 받아요."
  "종환씨. 그 사람은 지금 어떡하고 있을까요? 아버님께서는 뭐라 하세요?
자세하게 얘기 좀 해 보세요."
  그는 맥주 컵을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고만 있을 뿐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제 심정이 어떤지 아세요? 무인도에 혼자 갇힌 기분에요. 거기서 오직
충식씨만을 기다리고 있다구요."
  "알아요. 지금 윤희씨가 어떤지 다 알아요."
  "저어... 혹시 어머님과 정미씨는 충식씨 사고를...아, 아녜요. 아닐
거예요. 설마 그럴 리가 없어요."
  종환씨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또 다시 컵을 돌리고 있었다.
  "윤희씨. 그런 오해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 풀리게 되어 있어요. 당장
괴롭더라도 참으세요. 그리고 충식인 수술을 여러번 받아야 된대요. 수술을 한
군데 하고, 며칠을 쉬고 또 하고, 또 쉬고 하는 과정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일인데다가, 중요한 건 자꾸만 의식을 잃는 거예요. 그래도 그 녀석 아버님이
옆에 계시니 힘을 내겠죠."
주위에 사람들만 없다면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그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
외에는 어떤 감정도 받아들여서는 안 되었다. 그는 지금 고통의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어머니나 정미의 섭섭함은 문제가 아니었다.
잠시나마 서운해 하고 그래서 그를 그리워한 내 좁은 마음이 부끄러웠다.

시험이 시작된 지 둘쨋날.
시험을 잘 치를 리는 없었다.
그의 사고 소식을 들은 지 꼭 십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전날 종환씨가 시험
잘 보라는 전화를 걸었을 뿐 며칠간 명륜동과는 소식이 끊겼다.
몇 번이고 수화기를 들었다가도 그대로 있는 것이 최상의 내가 할 도리였으며
그를 향한 그리움과 고독감에 난 완전히 지쳐 있었다. 어찌나 가슴은 뛰는지
식사를 안했으면 좋겠는데 가족들을 생각해서 식탁의 자리에는 빠지지 않았고,
몇 숟갈 떠먹은 뒤에 몰래 토하기가 일쑤였다. 소화제와 신경안정제는 필수
휴대품이 되어 버렸다.
학교를 나와도 집에는 일찍 들어가기 싫고, 그렇다고 명륜동에도 갈 수가
없어 교문 앞에 서성이고 있었다. 사소한 일에까지 나의 일을 걱정하고 어는
때는 심할 정도의 충고도 아끼지 않던 은영이는 며칠째 입도 열지 못하고 나의
눈치만 살피면서 그냥 조용히 내 옆에만 있어 주었다.
발길을 멈추고 멍하니 서 있는 내게 은영이가 말을 걸었다.
 "윤희야, 우리 어디 가서 차 마시자."
 "시험 기간인데 너 공부해야지."
은영이가 눈을 흘기며 살짝 웃어 보였다.
 "얘는, 지금 시험이 문제니? 널 보면 꼭 쓰러질 것 같아. 너무 엄청나서
너한테 말도 못하겠어. 내가 아무런 도움이 못 되는 게 얼마나 미안한지 몰라.
날씨도 추운데 따뜻하게 우리 차 마시자. 응?"


학교 앞은 아는 얼굴이라도 만나서 나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서 할
수 없이 우리는 신촌을 향해 걸었다. 결국 "복지"에 들어갔다. 대학입시 준비
때 무용 연구소에서 잠깐 본 후, 그를 다시 만난 내게는 너무도 고맙고
추억 어린 곳이다. 남학생의 인기를 받던 카운터의 언니는 나를 보자
오랜만이라며 반색을 하며 맞아 주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음악뿐이었다. 차를 주문하자 은영이가 내게 물었다.
 "윤희야, 요새 명륜동에 안 가니?"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응."
 "왜 안 가? 매일 찾아 뵈어야지."
 '은영이에게 털어 놓을까?'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혼자만 겪기에는 너무 힘들어서 은영이에게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은영아, 명륜동에서는 충식씨 사고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나봐."
  "뭐라고? 아니 그게 어째서 너 때문이니? 이해가 안 간다. 얘, 자세하게 말
좀 해봐."
 나는 그의 사고 소식을 들은 다음날 갑자기 돌변한 정미와, 아버님이
미국으로 가신 지 얼마 후 명륜동에 출입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대해
자세한 얘기와, 그래서 난 종환씨의 전화 외에는 그쪽과 연락이 거의 끊긴
상태가 되었다는 데까지 다 말을 해 버렸다.
  "세상에 기가 막혀. 아니 그러니까 그분들 생각으로는 윤희 니가 재수없는
여자라서 충식씨가 그렇게 됐단 말이구나. 얘, 약혼이니 망정이지 결혼이라도
올렸다면 아예 쫓겨났을 거 아냐. 어떻게 그런 희안한 생각들을 할 수가 있니?
그리고 충식씨 어머니는 노인네라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정미라는 여자 말야.
젊은 여자가 사고방식이 왜 그 모양이니? 오빠가 교통사고라는데 하루만에
머릿속이 그렇게 한가해질 수 있는 거니? 사람이나 잡고 있게. 아유, 무서워서
시집은커녕 약혼두 못하겠구나."
은영이의 흥분한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나는 말을 하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와 충식씨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미안해. 괜히 말했어. 너무 엄청나고 이해 안 가는 일이라 그런 생각들을
했을 거야. 누구나 내 가족은 나쁜 일이 없는 걸로 믿고들 있지. 갑자기, 그래
이번 일은 너무 갑자기 너무 엄청난 일이야. 그래서 내 자식이...왜?...내
오빠가...왜?...나 왜...왜? 하며 계속해서 생각하다 보면 무엇 때문이라는
답이 나올 수 있어. 지금 명륜동이나 우리집 사람들 중에 냉정한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서로들 웃게 될 거야. 한쪽은
너 때문이라고 한 것이 미안하고 한쪽은 그 말에 섭섭해 한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그래도 종환씨가 많은 힘이 되어 주고 있어."
  나의 말에 은영인 다소 수그러지기는 했어도 여전히 화가 나는지 뾰로통해
있었다.
  "그래서, 너는 누구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니? 그 사람들은 너 때문이라고
그러는데 넌 누구라고 생각해. 말해봐, 왜 말 못하니?"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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