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추억소설

3. 약혼식

시인김남식 2013. 8. 16. 10:06

3. 약혼식

 

떠날은 자꾸 지나갔다. 아니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자꾸 줄고 있었다.
명륜동 부모님들께서는 아들의 유학에 대한 대견함과 자랑스러움과 잘 견딜까
하는 걱정이었고, 그도 수속이 끝난 직후와는 달리 출국준비로 다시 바빠지면서

약간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긴장을 하는 듯했다. 난 점점 더 바보가 되고, 점점
더 성숙해지고, 울보가 되는 등 자꾸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8월의 폭염은 숨이 막히는 듯했지만 난 얼마 후의 그의 부재를 생각하면서
외로움에 한기를 느낄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모처럼 종환씨와 함께 자리를 했다. 종환씨는 이제 어엿한
사회인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예외없이 분위기가 활기를 띠었다.
 "임마, 남은 돈 번다고 더위도 모르고 뛰는데 공부한답시고 부모재산이나
축내고... 공부도 그렇지, 여기서 하면 어때서 미국까지 간다고 설치냐?"
충식씨가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 이왕 결정난 거 내 열심히 하고 돌아올게."
  종환씨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채 하면서 나에게 따스한 웃음을 보냈다.
  "윤희씨, 충식이 떠날 때 되니까 서운하죠?"
  "네."
  "그러면 못가게 잡아요. 저 녀석은 모질면서도 엉뚱한 데가 있어요.
윤희씨가 못 가게 말리면 '그래 안 갈게' 할 거라구요."
  늘 마음속으로는 '안 가면 안 되나요'라고 그에게 외치고 있던 나였다.
어리석게도 종환씨의 말을 믿고 내 마음을 입밖으로 드러내고 싶었지만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인가?
  그들은 레스토랑이면 몰라도 술만을 피는 곳에 갈 때는 늘 나를 일찍 돌려
보냈다. 그 날도 두 사람은 오랜만에 술을 하려는지 날 일찍 바래다 주었다. 날
바래다 주는 관계로 그의 단골집은 신촌에 있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두 삶의
술 마시는 모습을 떠올리며 일기를 쓰고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헤어진 지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역시 술이 취해 있었다.
  "윤희야, 내 말 잘 들어--. 그리고 내 부탁 들어줘야 해. 아냐, 이건
부탁이 아니고, 명령이야 명령. 알았어?"
  '이 사람은 이 밤중에 전화에 대고 무슨 말을 또 하려고 하는 걸까. 술은 취해
있고 목소리는 아주 급한 듯한데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있을 리도 없고--.'
  "윤희야, 나 말야 미국에 이대로 못가겠어. 우리 약혼하자! 약혼만이라도
해야 내가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겠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
  무슨 뜻인지 아냐고...? 마음 놓고 떠나? 그럼, 이 사람은 날 못 믿는다는
건가? 나보다 더 바보같은 사람! 왜 이런 말을 꼭 술을 마시고 전화로
할까...?
  내게 꼭 오빠와 같고, 운명이라 할 정도의 이제는 분명히 나의 남자인 그는
큰 체격에 성격이 당당하지만 때로는 어린아이 같은 여린점도 있었다.
  "지금 전화로 어떻게 대답을 하냐구요. 내일 얘기해요. 집에 일찍
들어가세요."
  "전화로 왜 말 못해. 바보야! 그렇게 하자 윤희야."
  그는 어린 동생이었고, 나는 그의 어리광을 들어줘야 하는 누나였다.


  그 이튼날 아침 일찍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미안했어. 꼭 전화로마 그런 말을 해야 하는지 나도 어이가 없다구.
오늘 우리 집에 오지마. 내가 연락을 할게. 끊어."
  뭐가 그리 급한지 혼자만 말을 한 후 전화를 끊었다. 어이가 없기도 했다.
궁금한 마음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바로 그때 벨 소리가 났다. 일하는 아이가
내게 일러 주었다.
  "윤희 언니, 명륜동 아저씨 오셨어요."
  깜짝 놀라 뛰쳐 나갔다. 대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마치 돌격대
대장 같았다. 날 보고 웃고는 있었으나 어딘지 긴장된 표정이었고, 무슨 결심을
하고 왔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어젯밤 얘기를 하려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웬일이세요? 전화 끊은 지가 얼마 안 됐는데 명륜동에서 날라 왔어요?"
  그가 집 안을 살혔다.
  "너하고는 의논할 일이 아냐. 의논 자체도 안 되고--. 할아버지
계셔?"
  이미 별채의 문은 열려 있었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현관에서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잘 있었어요? 공주님들."
  동생들은 일제히 '안녕하세요'하고 4중창을 했다. 우리 집에서 누구보다도
그를 반기는 사람은 동생들이었다.
  "어서 와요."
  "어머니, 이젠 말씀 낮추세요. 저희 어머니는 윤희보고 딸같이 말씀 막
하시던데요. 어른들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는데요. 역시 할아버지께 먼저
의논드려야겠죠? 윤희야, 같이 들어가자. 죄송합니다, 어머니. 앞장 서 주세요."
  그가 할아버지 앞에서 큰 절을 올리자 어머니와 나는 자리에 앉았다.
  "댁내 다 무고하시지?"
  "네. 할아버지."
  "수속은 다 끝났다지? 그래 언제쯤 떠날 건다?"
  "이제 비자 수속까지 끝났기 때문에 떠나는 일만 남았습니다. 될 수
있는대로 빨리 가서 그곳 생활에 적응을 해야겠죠. 할아버지 저 오늘 간청이
있어서 왔습니다."
  난 가슴이 마구 뛰어 차라리 어머니 등 뒤에 수고 싶을 정도였다.
  "간청? 무슨 일인데."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저 떠나기 전에 윤희하고 약혼식을 올리게 해 주십시오. 그래야만
가서 마음놓고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놀라시는 것 같았다. 한 참을 말씀이 없으시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뵙기가 송구스러워서 얼른 고개를 숙여 버렸다.
  "너희들끼리는 약속이 되었니?"
  "아닙니다. 어젯밤에 제가 전화로만 얘길 했습니다. 윤희가 어디 대답을
하나요. 할 수 없이 제가 먼저 청을 드리는 겁니다."
  할아버지가 허락을 안하시더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고, 또 내 예감이 틀림
없었다.
  "그건 좀 곤란하구나. 다른 이유는 아니고, 아직 쟤가 졸업도 안한데다가
이제 3학년밖에 더 됐니? 그리고 자네가 이곳에 있는 것도 아니질 않는가.
미국에 가서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면 되지. 둘이 만나는 것을 허락받고도 꼭
약혼식까지 올려야 되나? 앞으로 약혼얘기는 꺼내지 말게."
  그의 실망하는 모습에 나는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그가 한 번 더
할아버지께 애원을 했다. 날씨는 왜 그렇게도 더운지 선풍기 앞에서도 그는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더위 탓만이 아니겠지...라고 생각되었다.
  "할아버지, 제가 미국에 가서 마음이 변할까봐 반대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전 윤희를 대학입학 때부터 쭈욱 만나왔습니다. 물론 윤희도 미팅 한 번 안하고
저만 만나왔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떠나기 때문에 오히려 약혼이
아니라 아주 결혼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허락해
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그이가 너무 측은해서 난 차라리 방을 뛰쳐 나가고 싶었다. 그날 할아버지의
고집과 그의 끈질긴 집념의 대결은 결국 무승부였다.

 

 

 

그 다음날 그는 내게 처음으로 심한 짜증을 부렸다.
사실 그를 사랑하는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내 진실이었지만, 학교에서
재학 중 약혼이나 결혼은 금지 사항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만난 지 한 시간 가량 그는 말도 없이 계속 줄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윤희 너부터 결심을 해. 너의 결심이 없이는 할아버지께 아무리 떼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걸 몰라? 마치 너는 약혼을 바라지 않는데 나 혼자 설친다고
생각하실 게 아냐?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우리 사랑을 확인해야 되는 게
유치하지 않니? 넌 내가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헤매는 게 좋아? 그런 건
아니잖아. 그렇지? ' 널 사랑해' '너도 날 사랑하지?' '사랑 사랑...'이런
감정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하게 만들어. 내가 어느 정도로 유치하고, 기가 죽길
바라는 거야. 도대체 넌 어떤 아이야? 나혼자만 펄쩍 뛰게 만들고 넌 입다물고
구경만 하고--. 할 수 없군. 또 확인을 할 수밖에. 너 날 좋아해?"
  제발 그만 했으면 하고 바랄 뿐 난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것 봐. 너도 이제 이런 말에 대답하기도 싫지? 네 생각도 그럴 거야.
툭하면 저건 무슨 소린가 하고 말야. 물어보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답답하겠어. 넌 이제 아이가 아냐. 3학년이야 3학년. 나이는 어떻구. 날 좀
도와줄 수 없어? 넌 내가 우리 관계를 좀 더 확실하게 해놓고 가겠다는 게
우습게 보여? 임마, 너 땜에 난 머저리가 된 것 같아. 그래, 내가 시원하게
말해주지. '결혼까지 할 정도로 사랑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지? 화
안 낼께, 말해. 어서 말해 봐. 화 안 낸다니까."
  어떻게 나 같은 형편없이 막힌 성격의 소유자를 저같은 사람이 좋아할 수가
있을까? 이것은 나의 행운이었고 그로서는 큰 불운이었다.
  명륜동엘 갔더니 어머니께서 안방으로 날 부르셨다. 어머니는 함께
들어가려고 하는 그를 이층으로 보내고는 나만을 잠깐 보자고 하셨다.
  "윤희야, 충식이 때문에 나 속이 상해 죽겠다. 성미가 보통 급해야지. 어젠
들어와서 윤희 네가 도와주면 허락을 받아낼 텐데 꼼짝 안하고 있다고 어찌나
짜증을 내던지, 내 싫은 소리 좀 했다. 나는 네가 꼭 딸같이 여겨지기도 하고,
또 널 두고 다른 며느리감을 구할 생각은 없단다. 어찌 생각하면 두 사람이
서로 좋아만 한다면야 떠나기 전에 약혼이라도 하는 것이 멀리 가는 사람이나
남아있는 사람이나 훨씬 마음이 안정될 것 같기도 하고... 아침에 아버지하고
잠깐 의논을 했지만 저녁에 들어오시면 결정을 지어서 우리가 너희 부모님을
만나 뵙고 청혼을 할려고 그런다. 이런 일이야 어디 '나 약혼식 하겠습니다'하고
나설 일이니? 더구나 넌 아직 재학중인데--."
  얼마나 속상해 하시는지 나는 민망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까지
우리의 관계를 확고히 하고 떠나길 원하는데, 나는 남의 일같이 그의 급한
성미를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이가 내게 주는 사랑에 대해 나는 아무런
보답을 하지 못했다는 가책에 이층을 향하는 내 발걸음은 마치 지구의 온
중력을 모두 흡수한 듯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는 내가 들어갔는데도 꼼짝 안하고 창밖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누가 이토록 사랑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눈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그의
넓은 가슴은 그리움이 되어 내 가슴 속 깊이 번져가고 있었다.
  "오빠."
  오빠 이외의 아직 다른 호칭은 자신이 없었다. 그가 뒤돌아 섰다.
  '아--. 사랑해요.'
  목 안에서 끓고 있는 신음을 꿀꺽 삼켜 버렸다.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가 나를 가까이 불렀다. 그리고는 가만히 안아 주었다.
  "울리 말라고 그랬지. 윤희가 내 맘을 알아 차리고 적극적으로 나섰더라면
난 또 야단을 쳤을 거야. 여자가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 말야. 난
구제불능이라니까. 내가 잘못한 거야. 이제 그만 그쳐."
  그가 내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아녜요. 오빤 잘 못한 것 하나도 없어요. 나 왜 이렇게 형편없죠?"
  그이가 안고 있던 팔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난 말이야, 요즘 내가 갖고 있는 이런 감정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괴로워할
줄은 몰랐어, '내가 왜 이래,너무 지나친 소유욕이잖아'하면서도 너를 생각하면
지나친 것 하나도 없어. 어떤 때는 널 사랑하는 것이 잘못하는 일이 아닌가 할
때도 있어. 그만큼 널 사랑해. 윤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야, 더
마--안--이."
  그이가 내 이마에 입술을 댈려다 말고 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자꾸만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나는 그의 품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한없이 그의 가슴이 그립기만 한 것이었다.

 

 

명륜동 어머니의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는 우리 사는 것도 보일겸 저녁식사나
같이 하게 집으로 초대를 하라는 할아버지의 분부가 내렸다. 어머님 아침부터
시장으로 미장원으로 정신이 없으셨고, 전기가 아깝다고 특별한 날 외에는 틀지

못하게 하는 분수꼭지가 종일토록 열려져 있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기쁨보다는 긴장뿐인 가족들 중에서도 그래도 즐겁기만 한 것은 동생들이었다.
  약속시간에 정확히 명륜동 가족들이 찾아왔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다고
하더니 난 할아버지께서 조금만 부드럽게 대해 주셨으면 하고 속으로 계속
그분을 원망하며, 명륜동 부모님께서 어려워 하시는 모습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충식씨와 나, 동생들은 내 방에서, 어른들께선 안방에서 식사를 했다. 얘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할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동생들과
장난을 치기에 정신이 없었다.
  얼마 후 거실에서 차를 마시는 듯하기에 살며시 내다 보았더니, 할아버지께선
안 보이고 부모님들만이 남아 계셨다. 표정들이 매우 밝으시고 간간히 큰
웃음소리도 들렸다. 웃음소리를 들으며 충식씨는 날 보며 이제 됐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나 기대는, 그분들이 돌아가신 후 나의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도 충식이를 손녀사위로 생각하고 있으니, 서로들
믿고만 있으면 되지 꼭 약혼식을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할아버님의
결론이었다.
  꼭 그분을 미워하게만 될 것 같아 난 아예 집안에서 별채를 피해 다녔다.
명륜동 부모님께서 집을 다녀가신 후 모두들 체념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고집
만큼은 더 끈질기게 변했다. 아예 난 명륜동에 오지도 못하게 묶어두고 대신
그가 매일 우리 집으로 와서는 주로 별채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드디어 그가 농성을 풀고는 최후의 성명(?)을 발표했다. 아주 힘없이--.
  "할아버지, 정말 안 되겠습니까?"
  어떤 분이신데 '허락하마'하실 분이 아니었다.
  "너, 참 답답하구나. 허락은 이미 했는데, 또 무얼 허락을 하란 말이냐?
약혼식만은 안된다. 식만은 말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니?"
  할아버지께선 무척이나 답답해 하셨다.
  "알았습니다, 할아버지. 이제 저 안 올께요. 그동안 심려만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유학 포기하고 취직이나 해야겠어요. 취직해서 돈이나 벌면서
윤희 졸업때까지 기다리죠. 뭐."
  할아버지의 눈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졸업까진 1년 반 정도 남았으니 그때까지 윤희도 만나지 않겠습니다.
할아버지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윤희 졸업 때가 되면 그때 찾아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가 큰 절을 올리려는데 할아버지께서 말리셨다. 할아버지께선 유학을
포기하겠다는 이유를 물으셨고, 그는 약혼식만을 고집하는 것이었다. 방 윗목에

앉아 있는 나에겐 생각나면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겨 놓은 채 잡을 틈도 주기
않고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의 표정에선 웃음이 있었던 것도 같고,
여하튼 난 표정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뒤쫓아 나선 나를 잠시 뒤돌아 보고는
이내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원망스러운 것은
할아버지였다. 일부러 별채를 피해 가려는 나를 할아버지께서 불러 세웠다.
  "할아버지 이젠 됐잖아요."
  걸음을 멈추지도 않은 채 대답을 하는 날 보며 할아버지께선 껄껄 웃으실
뿐이었다. 할아버지께선 충식씨가 도착했을 즈음에 명륜동에 전화를 해서 바꿔
달라는 말씀을 하시곤 별채에 드시는 것이었다. 나는 이 생각 저 생각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 마음에 음악을 크게 하고서는 바닥에 누워버렸다.

 

골목에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가 도착했을 시간을 기다리느니 내가 그의 집으로 가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려는데 별채의 문이 열렸다.
  "너, 어디 가느냐?"
  "명륜동에요."
  "거긴 왜?"
  "걱정 마세요. 약혼식은 안한다고 그랬잖아요."
  "당장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넌 왜 그리 눈치가 없냐? 약혼식 하도록
허락해 주마."
  한 시간이 왜 그리 긴지... 도무지 시계바늘은 마음만큼 움직여 주질
않았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렇게 가면 어떡해요. 정말 미국 안 갈 거예요?"
  "이 바보야! 안 가긴 왜 안가. 할아버지 앞에서 연극한 거야, 쇼를
한거라구."
  난 하마터면 할아버지 앞에서 웃음을 들킬 뻔했다.
  "할아버지께서 통화하시겠대요. 기다리세요."
  "잠깐만, 왜 그러시는 것 같애? 대답만 해. 허락하신대?"
  "네."
  그의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깨뜨릴 것만 같았다.
  "빨리, 할아버지 바꿔줘. 야 성공이다. 성공!"
  그렇게 좋아하다니 그의 사랑은 완벽했고 이젠 나의 보답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드디어 그의 고집과 나의 꿈에 할아버지가 항복을 하시고 말았다. 항복의
조건은 그리 힘든 것이 아니었다.

  * 약혼식은 부모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할 것.
  * 결혼이 아니라 약혼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
  * 결혼은 내 졸업 직후가 아니라 그라 미국에서 공부를 마칠 때 할 것.
  * 집에는 9시까지 꼭 들어올 것.
  * 될 수 있는대로 밖에서 만나지 말고 양쪽 집안에서 만날 것.

  그는 할아버지 앞에서 좀 참을 것이지 계속 싱글벙글 무엇이든지 '네,
고맙습니다' '네, 알았습니다' '네--네'였다. 웃지만 않아도 좋겠는데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그이 때문에 난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사실 나도
속으로는 그랬지만--.)
  할아버지의 허락도 고마웠지만 모든 일을 할아버지 말씀대로 따라주시는
명륜동 부모님들이 무척 고마웠다.
  양쪽 어머니들께서 몇번의 전화 연락과 만남 끝에 약혼 날짜가 9월 15일로
정해졌다. 어머니는 내가 당장 시집이라도 가는 것처럼 아침, 저녁으로 내
방으로 들어와서는 내 손과 머리를 만지곤 하였다.
  "요 녀석이 보통이 아니라니까. 대학 3학년에 약혼식을 할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 그래도 어떻게 생각하면 잘 된 일이지. 완고하신 할아버지
밑에서 컸기 때문에 결혼 문제가 늘 걱정이었는데 저 알아서, 그것도 좋은
집안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한시름 놓은 거야."
  어머니께서는 기뻐하시는 눈치면서도 가끔씩 내게 농담섞인 핀잔을 주시고는
했다. 그와의 만남은 내 운명이 되었고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방학 동안 내
마음은, 아니 우리 사랑은 여름날의 태양보다 더 뜨겁게 타올랐다.

 

 

 

  9월로 들어서자 2학기 개강이 되어 나는 다시 학교에 나다니게 되었고 그는
놀랄 정도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였다. 아침 7시 반부터는 학원에 나가고, 집에
가서 아침식사를 한 후, 오후 1시까지는 전공 서적을 탐독한다고 했다. 내 강의
시간표를 늘 수첩에 적어놓고 있는 그는 내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꼭
학교 앞으로 나와 주었다.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하면서 학교 앞에서 내 수업이 끝나길 기다려 주었다. 어느 날은
우리집에서, 어느 때는 명륜동에서 두 집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와의
약속도 있었지만, 그이 자신이 떠나기 전에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고 싶었고, 또
나를 명륜동 식구들과 더 친숙하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약혼식 시간은 오후
3시, 장소는 조선호텔로 정해졌다. 나는 그날 입을 한복을 맞추고 나니 특별히
내가 해야 될 일은 없었다.
  그저 학교에 나가고 오후엔 그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9월말로 다가온
그의 출국 때문에, 약혼식 허락 직후에 느꼈던 기쁨의 감정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학교엘 가면 늘 은영이와 같이 다니게 되는데 그 아일 보면서 난 심한 갈등에
시달릴 때가 있었다. 아무리 주위에, 특히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부탁도 있었지만 은영이에게조차 약혼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친한 친구로서의 도리가 아닌 듯 싶고 은영이에게 보통 미안한 게 아니었다.

아이의 눈치는 그 중에도 내 마음을 읽는 눈치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은영이는 내가 자기를 피하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학교외에는
서로 얘기를 할 시간조차 가지질 못하고 있던 터라 충식씨에게 부탁을 했다.
  "저 있잖아요. 은영이하고 밖에서 시간 보낸 지가 꽤 오래 됐어요. 내일은
은영이하고 시간 좀 보내게 우리 하루 걸러요. 네?"
  "아 참. 그랬구나. 널 섭섭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 내가
밉겠는데?"
  친구와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 어찌나 즐거운지, 은영이와 나는
오랜만에 함께 차를 마시는 건데도 이왕이면 분위기 좋은 집엘 가자며, 몇
군데나 문을 열고 다니며 분위기를 살피고 하는 철없는 짓까지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클래식 음악이 있고, 작지만 아담한 장소를 찾게 되었다. 은영이는
가끔 날 보고는 '윤희야, 널 보면 사람이 곱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 것
같아'라고 말을 했지만 난 그 친구를 보면서 외모와 마음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은영아, 미안해. 나 참 못됐지?"
  "뭐가?"
  "충식씨 만난다고 너하고 집에도 같이 가지 못하고 말야. 너 수업 끝나면
심심했지?"
  은영이가 웃음을 띄운 채 날 보며 눈을 흘겼다.
  "그래, 심심했다. 깍쟁이, 알고 있긴 했구나. 농담야, 가끔 섭섭할 때도
있었지만 좋은 사람 만나는데 내가 양보해야지 뭐, 안 그래?"
  "고마워. 오빠도 너한테 참 미안하다고 그러더라. 다음에 같이 나오래."
  결국 나는 한참을 괴롭히던 인내와 망설임을 무너뜨려 버렸다.
  "은영아, 나 너에게 그동안 숨긴 게 있어."
  은영이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 얘긴 너만 알고 있어야 돼. 나 있잖아, 15일 날 약혼식해. 너 정말
친구들한테 소문 안 나게 해야 돼. 약속해 우리."
  난 방학 중에 있었던 그와의 일들을 숨김없이 다 말을 해 버렸다. 은영이는
마치 자기일 같이 너무 좋아하면서 '축하한다'는 소리만 했다.
  "은영아, 15일날 널 초대 못해서 미안해. 내가 나중에 사진 보여줄게."
  "괜찮아 얘. 집에서 그렇게 비밀로 하자고 그러시는데. 내게 말해준 것만도
고마워. 나 아무에게도 말 안할게."
  내 주위에는 모두가 좋은 사람들뿐이었다. 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사랑만큼
나는 도저히 그들에게 베풀 수가 없을 정도였다.

9월 15일. 오후 3시 조선호텔 1층 룸 운명이 우리를 인도하는 길에

잠시 '만남의 의식'을 위해 행하게 하였다.
참석자 중에서 할아버지의 눈에 보인 유일한 불청객(?)은 이종환씨뿐.

완벽한 비밀 약혼이었다.

이 환희의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 주었으면.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그대가 베풀어준 사랑에 대해 사랑으로 사랑하고, 보답으로 사랑하리라.
나는 이제 바라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영원히 운명이 바라는대로 할 것이다
  --그 날의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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