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추억소설

2. 사랑과 오해의 여울

시인김남식 2013. 8. 1. 10:26
2. 사랑과 오해의 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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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마침 볼 일이 있어 외출에서 돌아온 나는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러 할아버지

방으로 갔다. 그때 할아버지 방은 별채에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이었다.

내가 별채로 가려고 하자 어머니가 급한 걸음으로 내게 오시면서 들어가지

말라는 손짓을 하셨다. 그때 무심코 내려다 본 댓돌 위에는 낯익은 구두가

놓여 있었다. 바로 그 사람의 것이었다. 내가 그의 구두를 몰라볼리가 없었다.

신중하게 생각하겠다던 사람이 그래, 하루 사이에 신중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

어머니에게 끌려 안채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할아버지 방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죄인이나 된 듯이 고개도 못 들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방을 들여다 보니 할아버지의 표정은 의외로 밝아 있었고 충식씨도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서 있는데

할아버지가 앉으라고 하셨다.

"내가 이 젊은이한테 자세한 말은 다 들었다. 너도 말이 학생이지 이젠

나이를 먹어 남자 사귈 때도 되었으니 너희 둘을 억지로 말릴 생각은 없다. 한

번 만난 남의 집 귀한 자식보고 좋다 나쁘다 말을 할 수 없고 하니 두 사람이

착실히 사귀는 태도를 어른들께 보이도록 해라. 명륜동 어른들께서도 이미 너를

알고 계시고, 또 보고 싶어 하신다니 윤희 너는 빠른 시일 안에 이 친구집에

인사를 다녀오도록 해라."

 

늘 무섭고 매사에 완고하시기만 한 할아버지가 반 허락이나마 그렇게 쉽게

하실 줄은 몰랐다. 내 방에 들어온 그는 한참을 서서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벽에 걸려있는 "이사도라 덩컨"의 사진 앞에서는 누구냐고 물었고,

1학년 가을에 찍은 나의 춤 사진 앞에서는 나를 보며 눈을 찡긋하기도 했다.

책상 위에 있는 못난이 인형과, 그 옆에 나란히 세워 놓은 다섯 살 때의 내

사진을 보고는 둘이 닮았다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조금 열어 놓은 방문 틈으로 동생들이 기웃거리며 킥킥대자 그는 문을 활짝

열더니 말했다.

"듣던대로 공주님들이 많군요. 들어와요."

그는 동생들에게 스스럼없이 대해 주었다. 바로 아래 동생한테는 정중히, 그

다음 동생들에게는 귀여운 꼬마들을 대하듯이 금방 친해지며 장난들을 치곤

하였다. 어머니는 내색은 안하셔도 흡족하신지 장차 사윗감 후보에게 귀빈

대접을 해 주셨다. 어머니가 먹을 것을 가지고 방에 들어오시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어머님도 여기 앉으세요. 저한테 궁금한 것도 없으세요?

어머님'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어머니가 어색해 할 정도로, 어찌나 당당한지

그야말로 주객이 바뀐 상황이었다. 큰 딸이 어느새 커서 대학을 다니고, 결혼을 하자는 남자가 집에까지 오고, 그때 흐뭇하셨을 어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으니 어머니께 죄송할 따름이다.

 

집을 나선 그는 골목을 벗어나자 마자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큰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했다. 팔을 하늘로 쳐들기도 하고, 내 등을 툭툭 치면서 어찌나 크게 웃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쳐다볼 정도였다.

"왜 그러세요? 그만 웃어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그는 내가 울상이 되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윤희야, 아 하 하--. 보면 어때, 이마! 아 하 하--."

한참을 '윤희야 임마' 소리만 하던 그는 휘파람을 불면서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습이 소년 같기도 하고 나쁘게 말하면 건달 같지도 했다.

"종환이한테 전화해야겠어. 이 자식 얼마나 궁금할까. 오늘 저녁에는

멋들어지게 한 잔 해야지."

"오늘 또 술을 마실 거라구요?"

그가 발을 멈추고 나를 잠시 바라보고 있더니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마시지 말까? 윤희가 말라면 안 마실게. 오늘은 다 윤희 맘대로다.

아-- 기분 최고다. 아버님을 못뵈서 섭섭하긴 해도 너희 할아버지, 어머니,

동생들을 모두 만나고, 또 윤희 방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는데 니 방에도

들어가 보고, 더 이상 신나는 일이 뭐가 있어."

그럴 때 그 사람은 꼭 어린애 같았다.

"나한테 미리 연락도 없이 갑자기 집에 오면 어떡해요. 놀랬잖아요."

"넌 뭐든지 반대를 하잖아. 내가 용기를 내는 수밖에 더 있어? 그리고

할아버지가 뭐가 무서우시니? 좋으시기만 하더라. 노인네 치고는 생각하시는 게 아주 멋쟁이셔. 나한테 말야, 할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신 줄 알아? 궁금하지?"

사실 그때 내가 제일 궁금한 건 할아버지의 반응이었다.

"널 대학에 넣고는 제일 후회하신 게 너무 집에서만 가두어 놓고 기르지

않았나 하는 거였대. 고등학교 때와 같이 심하게 참견을 말아야지 하시다가도 저녁에 연락도 없이 늦으면 불안하시고, 그래도 여잔데 곱게 기르는 게 낫지 하는 생각에서 잔소리도 가끔 하셨는데, 이렇게 불쑥 남자 문제가 생기고 보니 처음에는 무척 놀라셨다는 거야. 그 말씀엔 내가 면목이 없더라구. 날 보시고는 대학 졸업도 하니 나이가 있어 듬직하기도 하고, 보아하니 나쁜 젊은이는 아닌 것 같다 하시며 너한테 잘 해 주라고 그러셨어. 너 할아버지도 허락을 하셨으니 이번 일요일에는 우리 집에 가자. 알았지? 설마 오늘도 반대는 아니겠죠? 바보

공주님."

그는 내 코를 잡아 비틀며 계속 바보, 바보 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일에 대한 쓸데없는 반대와 고집이 없어졌다. 집에서 나온 후 기뻐하는

그를 보며 내가 키우고, 가꾸고, 참고 애태우며 간직했던 그동안의 내 마음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이와 결혼을 한다한들 내 기쁨의 표현은 지금의 그를 따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저어, 있잖아요."

"응, 또 있긴 뭐가 있어?"

"미안하다구요."

"뭐가 미안해?"

"그냥요."

"그냥이 어딨어? 뭐가, 말해 봐! 뭐가 미안하냐구?"

그는 계속 물어 왔으나 난 그저 미안했다. 모두가 다--.

그날 저녁.

외출에서 돌아오신 할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낮에 충식씨에게서 대강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리 겁은 나기 않았다. 별채에는 부모님께서도 함께

계셨다.

"할아버지 저 부르셨어요?"

"그래 이리 와 앉아라."

평상시와 다름없는, 아니 할아버지가 날 특별히 귀여워해 주실 때의 다정하신

목소리를 들으니 내 어리광이 발동을 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아까 그 사람 맘에 들죠? 네? 할아버지."

옆에 계신 어머니께서 내 무릎을 꼬집었다.

"엄만 어때요? 궁금해서 그러는데... 할아버지 얘기해 보세요."

"허어, 이 녀석 그렇게 궁금하냐. 내 말해 주지. 나는 아주 맘에 안 들더라.

윤희 너, 앞으로 그 사람 만나지 마라."

"네에!?"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가 농담을 하시는 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보고 웃고 계셨기 때문이다.

"피이--, 그 사람은 할아버지가 참 좋다고 그러셨는데요. 그리고

멋쟁이시래요."

할아버지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사실은 내가 나갔다 온 것은 아까 낮에 왔던 충식이라는 젊은이 집안에

대해서 알아 볼려고 그랬다. 본인이 제일 중요하긴 하지만 집안도 아주 안 볼

수는 없잖니. 아버지라는 사람이 사업을 하면서 정치에도 조금 관여하고 있는가 데 그다지 나쁜 평은 안 받고 있더라. 아범도 사업을 하니 잘 알겠지만

사업가나 정치가나 어디 다 좋은 소리만 들을 수 있나. 나쁜 평이 들려도 듣는 쪽에서 적당히 걸러 내야지. 그 충식이라는 애도 그만하면 가정교육은 단단히 받은 것 같은데 더 두고 보는 수밖에 없지. 그 녀석 배짱 하나는

두둑하겠더라. 어멈아, 네 생각은 어떠냐?"

"저야 뭐--."

어머니는 시아버님 앞에서 늘 그러셨다. '전 괜찮습니다' '아버님께서

좋으시다면야' '아버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어머니의 이런 말씀을 나는

자라면서 많이 들었다.

"그래도 네 자식 일인데 아범하고 상의해서 결정은 너희들이 해야지.

아범이야 안 봤으니 말할 수 없을 테고 네가 솔직히 말해 보렴."

"제가 보기에 그다지 나쁜 인상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 아버님 말씀을

듣고 보니 마음이 아주 좋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신기하고 대견하다는 듯이 자꾸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윤희야, 그 댁에서도 이미 너를 알고 있는 것 같더라. 널 빨리 보고 싶어

한다니 이번 일요일에 가서 뵙도록 해라. 그리고 어멈은 내일 윤희 데리고

나가서 그날 입고 갈 옷을 얌전한 걸로 한 벌 준비하도록 해. 여잔

뭐니뭐니해도 첫 인상이 제일이니 흠 잡히지 않게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해라."

그의 우리 집 방문은 대성공이었다.

일요일. 명륜동에 가는 날 아침.

어머니는 마치 분장사 같았다. 그것도 무대 출연시간이 임박한 배우를

손질하는 분장사같이 이것저것 입혀 보시며 정신이 없으셨다.

집을 나서기 전에 할아버지 방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할아버지는 몹시

걱정스러워하시는 것 같았다.

"윤희야, 우리는 너를 신경을 써서 길렀다고 하지만 남들의 눈에는 어찌

보일지 모르는 일이다. 지금 널 명륜동에 보내는 일이 과연 잘하는 일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약속이 된 일이니 잘 다녀오도록 해라. 흠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고."

내가 골목 밖을 나올 때까지 할아버지와 부모님들의 대문 앞에 나오셔서 한참 동안 바라보고 계셨다.

"카사노바"에는 아직 그가 안 나와 있었다. 낯이 익은 웨이터가 가벼운

목례를 하며 다가왔다.

"오늘 약속 하셨다죠? 연락이 왔는데 조금 늦으신다고 전해드리래요."

나는 잔뜩 긴장이 되었다

 

그의 부모님들이 날 맘에 안 들어 하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는 중에서도

어떤 연유에서인지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대문 앞에서 내 뒷모습을 보고 계시던 할아버지와 부모님, 동생들, 은영이와 그밖의 친구들... 분명히 기쁨과 기대로 가득찬 행복한 마음이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콧등이 시큰해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참으로 이상할 정도였다.

그는 아주 간편한 옷차림으로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야, 우리 윤희 오늘 근사한데? 우리 식구들이 아주 좋아하겠어. 너 지금

입은 옷 못 보던 건데, 새거냐?"

새옷을 입고 외출을 하면 누가 알아보는 것도 아닌데도 괜히 쑥스러울 때가

있는데 그의 앞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엄마가 오늘 입으라고 사 주셨어요. 자꾸 새옷 하시면 창피하잖아요."

"그래, 알았어. 자, 이제 우리 집에 가야지. 아버지 어머니께서

기다리시겠다."

그의 집은 석조로 된 이층집이었는데 넓은 마당에 꽤 많은 나무들이 겨울을

나느라고 새끼줄로 잘 싸여져 있는 것이 보였고, 무엇보다 집안의 정리 정돈이 썩 잘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내 또래의 젊은 여자가 현관 앞으로 나왔다. 그의 동생이었다.

"어서 오세요."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뽀오얀 살결이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었다. 내가

쑥스러워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가 소개를 시켰다.

"너, 윤희 보려고 오래도 참았다. 얘가 널 제일 보고 싶어 했다구."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정미예요. 오빠가 아주 어린 여학생이라고 하더니 그렇지도

않네요. 들어오세요. 귀빈 맞을 준비가 다 되어 있다구요."

그녀의 말과 행동은 귀여움을 흠뻑 받고 자란 듯한 외동딸로 보였다. 실내도

잘 정돈이 되어 있었고, 소파가 많이 보급되지 않은 그때인데 거실에 있는

검은색의 안락의자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엄마, 윤희씨 왔어요."

거실 오른편에 있는 문이 열기고 안에서 그의 어머니가 나오셨다. 난

어려워서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김윤희입니다."

"어서 와요. 충식이한테 말 많이 들었어요. 들어와 아버님께 인사드려요."

난 벌써 긴장으로 지쳐 있을 정도였다. 안방은 방 한가운데 큰 자개상이

놓여 있고, 그 아래 할아버지 방과 비슷하게 보료가 깔려 있었다.

"여보, 충식이 말대로 아주 고와요."

안방에 발을 딛는데 다리가 조금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어서와요. 누군가 하고 궁금했는데 드디어 오늘에야 보는구만. 편히

앉아요."

부모님과 충식씨와 동생, 그리고 나-- 우리는 자개상을 중심으로 둘러

앉았다. 그의 아버님께서는 우리 집에 관해 몇 가지를 물어보신 후 나의 전공인 무용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셨다. 우리 나라 무용계, 특히 외국무용계는 이젠 세대교체를 해야 될 때가 되었으니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은 노력을 해야 될 거라는 말씀과, 문학이나 미술, 음악과는 달리 인간의 감정을 신체로 표현하는 만큼 더욱 힘들 것 같다는 말씀 등 그분의 무용론은 보통을 뛰어넘고 있었다. 더구나 나이 드신 분께서 세대교체를 할 때라는 지적까지 해주시는데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층에 있는 그의 방은 창문이 꽤 컸다. 큰 참문 밖으로는 정원이 내려다

보였다. 방 한쪽은 전축과 레코드가 거의 책 만큼이나 쌓여 있었다. 그가 얼마나 음악을 즐겨 듣는지 그날에야 알 수 있었으니, 얼마나 눈치없는 둔한 여자인가.  한곡 한곡 들려 주면서 자기 나름대로 음악해설과 작곡가나 지휘자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윤희는 내가 집에 있을 때 뭘하고 있나 궁금할 대가 없었니?"

"있었어요."

"난 집에만 들어오면 전축부터 틀어. 자지 않는 한은 계속 듣지. 너도 이제

나이도 먹고 했으니 클래식에 심취해봐. 그 세계가 얼마나 좋은지는 지금은

설명해도 몰라. 처음엔 어려우니 교향곡부터 듣지 말고 소품부터 듣기 시작해.

피아노 소나타나 바이얼린 연주곡 등 좋은 소품들이 많다구. 특히 넌 무용을

하잖아. 음악을 많이 들어야지. 아마 전에도 얘기했었지?"

그의 방에서 동생 정미(나보다 2살 위지만 존칭은 생략함)와 함께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동안 나의 긴장은 거의 풀렸다. 그때 아래층에서

어머니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부엌으로 데려 갔다. 부엌에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일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께선 식탁에서 만두를 빚고 계셨던 것 같았다.

"가만이 있자, 뭐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까?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게

좋겠죠?"

"네, 말씀도 낮추시고요."

"그러는 게 서로 편할까? 정초에 장만해 놓은 만두 속이 남았는데 네가

만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구나."

"전 만두를 얼마나 좋아한다구요."

"그래 다행이구나."

만두 빚는 일을 도와드려야 될텐데 솜씨가 없어 큰 일이었다.

 

"어머님, 예쁘게 만들 자신은 없지만 저도 할께요."

"아니다, 얘. 도와달라고 부른 게 아니라 너희들끼리만 노니까 내가

심심하잖니. 그래서 내려오란 거야. 그냥 앉아서 나하고 얘기나 하자."

어머님께선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나를 유심히 살펴보시는 것 같았다.

"너 충식이는 언제 만났니?"

"처음 만난 것은 입시 준비할 때구요. 대학 들어와서 4월에 우연히

만났어요."

어머니께선 '꽤 오래 되었구나'하시면서 놀라시는 표정이었다.

"널 만나고 있다는 걸 우리가 안 지는 서너 달밖에 안 됐단다. 하루는

들어오더니 불쑥 네 얘길 하더라. 며느리감이 있는데 아직 어리니 함참 기다려야 한다나-- 농담 같기도 하고 진담 같기도 한데 정미가 사실이라고 그러더라. 저희들끼리 네 얘기를 했었나 봐. 학교 다니고 있다니 물론 기다려야겠지만 누군지나 알고 있어야지. 이제 널 보고 나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난 며느리에  대해 별스럽게 굴지 않기로 평소부터 생각해 왔단다. 그저 우리야 젊은 애들 사는데 길잡이나 해주면 되는 게지. 너도 알겠지만 충식인 지금 유학 수속 중이니 네가 졸업하기 전에 떠나게 될 거다. 우선은 네가 학생이니 공부를

열심히 해라. 떠나기 전에 무슨 좋은 방법이 있겠지. 일요일엔 집에 자주 와서

우리하고도 친하게 지내자꾸나."

그의 어머니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특별하다거나 무섭고 냉정하신

분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우리 엄마와도 같은 그런 자상한 분이었다. 점심을 막 먹으려 하는데 종환씨가 왔다. 너무 어려워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식사절차까지도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종환씨의 등장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야아! 윤희씨 이집 분위기하고 아주 잘 어울리는데요. 손님 같지가 않아요.

어떠세요? 어머니, 윤희씨 맘에 드세요? 충식이 녀석이 2년 동안 만나던

아가씨예요. 맘에 안 들면 저 녀석 큰일난다구요. 정미야, 앞으로 윤희씨가 오면 니가 잘해 줘야 해. 난 좋다는 사람도 없고 이렇게 맨날 남의 들러리나 서고 다니니 어떡하죠? 신경좀 써주세요."

종환씨 덕분에 나는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남은 시간을 아주 유쾌하고 그는

마치 나의 보호자인 듯했다.

어느날 갑자기 '윤희야, 너 졸업하면 나하고 살래?'로부터 시작되어, 우리

집에서의 그에 대한 좋은 인상, 명륜동 부모님께 인사 결과 만나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 등 내가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꿈꾸어오던 일들이 점점 현실이

되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차츰 바빠지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집에서 전공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영어회화를 하는 등 유학 수속과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는 그는 일 주일에 한 번씩 만나자는 약속을 어기고는 내가 개강을 할 때까지라며 매일매일 잠깐식이나마 날 만난 후 집으로 돌아갔다. 이젠 그이를 두고 혼자 애태우며 쓸쓸해 하는 감정은 말끔히 없어졌다.

그 당시의 내 일기장에는 그의 이름은 물론이고 사랑, 행복, 기쁨이라는

말들만이 적혀 있었던 것 같다. 가끔씩 그의 유학으로 인해 우리 사이에 변화가 생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하면서도 불길한 예감이 들 때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행복한 마음 뒤에 오는 순간의 느낌일 뿐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의 졸업식은 21일경이었던 것 같다. 명륜동 집에서 그의 졸업식 전날 우리 부모님을 초대하셨다. 물론 할아버지도 함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완고하신 고집은 그냥 두 사람이 만나는 것만 허락했을 뿐 아무런 약속도 없는 사인데 나까지는 갈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졸라도 요지부동이었다. 할 수 없이 아버지, 어머니, 나만이 명륜동엘 갔다. 두 집의 부모님들께서는 우리 두 사람의 장래를 결정짓고 계시는 듯한 말씀들을 나누었다. 우리의 관계는 어른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고, 그래서 우리의 만남의 기쁨들은 한층 더해 가고 있는 반면에 그의 유학수속은 생각보다 빨리 진전되고 있었다.

 

2학년 겨울에 나의 꿈이 이루어지면서 난 성숙한 여자가 되고 있었다. 1월에

한 번 서울을 다녀갔을 뿐 대전에만 묻혀 있던 은영이와의 만남은 무엇보다도  반가웠다. 매일 학교에서 볼 때는 무슨 할 말들이 그렇게 많은지 버스를 몇 대씩 놓치면서까지 정류장에서 얘기를 나누기가 일쑤였는데, 너무 오랜만에 만나고 보니 더구나 방학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나로서는 어떤 얘기부터 꺼내야 될지를 몰랐다.

은영이도 충식씨와의 관계를 무척이나 궁금해 하였다. 그간의 꿈만 같이

행복했던 일들을 대강 알려주자 은영인 놀라워하면서 계속 감탄뿐이었다.

"잘됐다. 얘! 너무 잘됐어. 넌 어쩜 모든 일이 그렇게 잘되니? 윤희야, 난

정말이지 니가 부러워."

"쟤는? 니가 어때서 그래."

"난 아직 사랑하는 사라도 없잖아. 하다 못해 남자 친구도 하나 없으니 내가

여자다운 매력이 없나봐."

은영이의 그런 말에 난 미안함을 느꼈다. 친구,

선후배 할 것 없이 모두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뛰어난 용모에 마음씨까지

고와서 여자의 아름다운 조건은 다 갖춘 은영이었다.

"은영아, 너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야. 내 생각엔 충식이 오빠 이상의

남자는 이 세상엔 없지만 말이야. 하여튼 아주 좋은 남자를 꼭 만날 꺼야.

그리고 지금 우리가 몇 살인데 남자 타령이니? 나야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나게

됐고 오빠같이 따르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지. 어른들 말대로 넌 아직 인연이

없어서 그래. 그리고 난 지금 행복한 것만은 아냐. 얼마 안 있으면 충식이 오빠 미국으로 갈 거잖니. 그때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우울해. 아주 헤어지는 게

아닌가 해서 불안할 때도 있단다."

은영이가 웃음띤 얼굴로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윤희야, 왜 불안해 하니? 오랫동안 못 만나니까 쓸쓸하고 보고 싶기야

하겠지. 넌 성격이 활발하지 못해서 충식씨한테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했잖아. 그러니까 떨어져 있을 때 편지로 너의 감정을 다 적어 보낼 수 있고 얼마나 좋으니? 이별치고는 행복한 이별이다, 얘."

3학년의 학교 생활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무용실기는 동작 연습이

아니라 주로 창작이어서 늘 머릿속에서는 춤을 추고 있는 나의 모습이었다.

먼저 음악을 선택한 후 동작이 연결될 때까지 연습을 해야 되는 등 많은

시간을 들여야 되기 때문에 늘 날이 어두울 때까지 무용실에 남아 있어야 했다.  거기에다 4학년 때 교생실습 준비로 교안작성, 지도계획서 등 숙제가 멈출 날이 없었다.

나보다 더 시간에 쫓기고 있는 충식씨와 나는 일요일만 만나는 것을 원칙으로

해 놓았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같이 일주일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일요일에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매일 서로 전화를 하고

가끔씩은 일 주일에 한 번이라는 원칙을 깰 때도 있었다.

일요일 약속은 대개 "카사노바"에서였다. "카사노카"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종환씨도 함께였고 두 사람은 내가 오기 한 시간 전에 약속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된 듯했다. 나 자신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지만 두 사람도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들 달라져 있었다. 한 남자는 회사원이 되어 평범한 생활인이 되어 열심히 뛰고 있고, 또 한 남자는 공부를 더 하겠다며 유학준비에 여념이 없고, 서로 가고 있는 있는 길은 달라도 두 사람의 두터운 우정은 아름답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 당시 우리가 걱정은 되면서도 즐거워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종환씨의

맞선이었다. 대학졸업, 취직, 다음 문제로 결혼일텐데 그동안 여자 이야기만

나오면 손을 휘저으면서 말도 못 꺼내게 하던 사람이 홀어머니의 성화에는 견딜 자신이 없었던지 중매가 들어오는대로 선을 보는 것이었다. 홀어머니는

외아들의 결혼이 무척 급하셨던지 여러 명의 여자를 알아와서는 선을 보라고

아들을 다그쳤고 매번 실패하자 충식씨 어머니까지 적극적으로 신경을 써

주셨다. 우리는 종환씨가 맞선을 보는 장소에 한 번도 빠짐없이 나갔다. 두

사람은 미리서 약속을 했었는데 멀리서 보아 여자가 맘에 들면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주먹을 들어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우린 조금 떨어진 좌석에서 살펴보곤 했는데 충식씨는 매번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어 보였다. 한 번은 종환씨가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우리쪽 테이블 옆을 지나며 말했다.

"임마! 넌 항상 동그라미냐? 그러다가 손가락 꼬부라지겠다."

그래서 우리는 웃음을 애써 참아야 했다. 두 사람의 결혼관은 매우 달랐다.

충식씨는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어떻게 한집에서 살 수 있냐는 생각이었고, 종환씨는 일단 괜찮다 싶으면 결혼을 하고 사랑해 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아주 조그마한 일부터 결혼관까지 이토록 다른 사람들의 우정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나의 생일날이었다. 음력으로 보냈으니 아마 6월 말경이었던 것 같다. 나를

무척이나 사랑해 주시던 명륜동 가족과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낸 잊지 못할 생일날 저녁이나 함께 하자는 초대를 받았다. 아버님께서는 만년필을 선물해 주었다. 가는 선이 고운 그런 만년필이었다.

"윤희야, 충식이 미국 가면 이 만년필로 편지를 쓰려므나."

어머님께선 하얀 바탕에 짙고 옅은 두 가지의 핑크빛 꽃무늬가 있는 옷감을

주었다.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는데, 맘에 들지 모르겠다. 이제 날씨도

더워지고 하니 시원하게 원피스라도 해 입도록 해라. 내일이라도 당장

맞추어라. 빨리 보고 싶구나."

정미는 놀라웁게도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무용가인 모사 그래함의 대형

사진을 주었다. 종환씨는 빨간 가죽으로 된 지갑을 선물하였다. 그의 회사에서 수출하는 것이라 하였다. 모두들 축하인사와 선물들을 주는데 유독 혼자만 가만히 있는 그를 어머니께선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얘, 충식아 넌 윤희 선물 안 주니?"

그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안 주긴요. 이따가 둘이 있을 때 줄려구요."

종환씨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얘가 이렇게 응큼하다구요. 임마! 우리도 알게 선물 꺼내 봐. 얼마나 좋은

것이길래 그래. 윤희씨도 궁금하겠다. 안 그래요?"

그는 그저 웃기만 할 뿐 그 자리에선 끝내 선물을 꺼내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후 종환씨와 우리 두 사람은 이층 그의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그가 나를 불러 세우고는 책상 서랍에서 아주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윤희야, 이리 와봐. 우리 종환이 약올리자."

그는 가느다란 줄을 내 목에 걸어 주는 것이었다. 종환씨가 신경이 쓰여 난

부끄러움에 견딜 수가 없었다.

"난 뭐 대단한 건 줄 알았는데 목걸이잖아."

"목걸이가 대단한게 아니구. 내가 직접 걸어주고 싶었을 뿐이야."

목걸이는 18K로 된 가는 줄에 작고 예쁜 메달이 달려 있었다. 고맙고 즐겁고

기쁜 명륜동의 시간을 보내고 세 사람은 집을 나왔다. 종환씨는 그 길로 귀가를 하고 그는 나를 바래다 주려고 우리집 쪽으로 향했다. 우린 가끔 빠른 길을 놔두고 기찻길을 걷기를 좋아했다. 그는 레일 위를 걸으며 떨어지지 않고 누가 오래 가는 지를 나와 시합하곤 했다. 거의 집에 다다랐을 무렵 갑자기 불러 세웠다.

"윤희야. 나 지금 소원이 있다."

"뭔데요?"

"들어줄래?"

그답지 않게 망설였다.

"뭔지 말해야죠. 얘기해 보세요."

"뭐냐하면 널 한 번 안아보고 싶어. 윤희야, 이리 와."

그가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선물꾸러미를 내려 놓고는

나를 마주보고 선 채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더니 내 몸을 끌어 당겼다. 나는 오랫동안 그의 가슴에 묻혀 내 사랑의 고동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긴 한 숨을 쉬었다.

"윤희야, 나 수속 다 끝났어."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입술을 깨물고, 나는 자꾸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말이 자꾸 솟아 올랐다.(꼬옥 안아줘요. 아--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말은 결국 입안에서만 공명될 뿐 방향을 바꾸어 다시 목구멍으로 넘어 가고 말았다.

 

1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일단의 수속이 끝난 그는 떠날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었다.

시험기간 동안 전화로만 연락을 하던 우리는 방학이 되자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우리의 만남은 전과 달라서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다. 얼마 안 있으면 그가 떠나는데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야지 하면서도 그에게 가는 내 맘은 벌써부터 외로움을 타기 시작했다.

명륜동 부모님의 권유인지 허락인지를 받고 아직은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은

사이인데 집을 드나드는 건 안 된다는 할아버지의 고집을 눈물과 어리광으로

꺾고는 난 매일 오후 1시경이면 그의 집으로 갔다. 우린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감정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어떤 날은 온종일 농담과 장난을 치며 웃고

떠들다가도 갑자기 어느 한쪽에서 우울해 하면 말할 수 없이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것 같기도 했으며, 어느 때는 말이 없이 음악만 들을 때도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다정하면서도 격렬한 1악장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의 부드럽고 낭만적인 정서와 균형잡힌

선율 등은 허공에서 헤매이던 내 마음을 잡아 주는데 많은 도움을 준 잊지 못할 곡들이었다. 그러나 더 잊지 못할 곡은 드뷔시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였다. 첼로의 침울하면서도 무겁게 가라앉는 듯한 선율에 어느날 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한 번 복받치기 시작한 눈물을 결국 그에게 들키고 말았다.

"윤희야, 음악 끌까?"

"아녜요. 그냥 들어요."

그는 잡고 있던 내 손에 힘을 주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냥 참 귀여운 아니구나 했는데, 널 사랑하게 되고

이렇게 헤어지는 게 싫으니 말이야. 요즘 내가 어떤지 알아? 너를 말야,

안아주고 싶고 입맞추고 싶고 너의 모든 걸 내 옆에 두고 싶어. 하지만 얼마 안 있으면 우린 헤어지게 되니까 참아야지. 사랑하면서도 이렇게 참아야 되는 것이 많다니, 어찌 생각하면 대단한 모순이야."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그의 무릎 위로 가져갔다.

"울지마. 네가 운 걸 생각하면 거기 가서 공부가 되겠니? 친구들은 날보고

건방지고 냉정하다고 말하지만 실상 난 그렇지가 못해. 한 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걷잡기 못하게 마구 무너질 때가 있어."

그의 말은 아픔이 되어 내 가슴을 마구 할퀴고 있었다.

기찻길에서의 포옹 이후 난 자꾸만 가의 품속을 탐내고 있었으나 그의 인내와 나의 용기 없음으로 우리는 잘 넘기고 있었다.

꼭 잘하고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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