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生活수필

고관절의 사고

시인김남식 2014. 1. 24. 10:56

고관절의 사고(事故)  솔새김남식

 

어릴 때 얼음판에서 놀다가 넘어져 고관절을 다쳤다. 지금도 오른쪽 다리 엉덩이뼈가 허공에 매달려 있는 느낌이다. 한쪽 다리를 흔들면 관절에서 뚝~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앉을 때는 편히 앉지 못하고 여자처럼 다리를 쭉 뻗고 앉아야 한다. 앉고 서는 것이 좀 불편하여 허리를 굽혀 신발 끈을 맬 때나 발톱을 깎을 때는 손이 밭 끝까지 닿지 않아서 여간불편하다.

억지로 허리를 굽히면 옆구리로 골반 뼈가 올라와서 허리를 짓눌러 통증이 발생한다. 특히 고관절 부위에서 시끈한 통증이 가끔씩 발생하는 날에는 며칠을 아퍼서 고통을 호소해야 한다. 

그렇다고 뛰어 다니고 걷는 데는 큰 불편은 없다. 다만 앉을 때 불편하고 고관절 통증이 심하면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다리 한쪽은 비정상이다. 세상에 태어 날 때는 내 맘대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몸이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그저 운명이라 생각해야 했다.

능력 있는 좋은 부모님을 만나는 것도 축복이고 좋은 시대를 만나는 것도 자신의 삶에 대한 축복이다. 하지만 그것은 조물주밖에 아무도 모른다. 그것을 탓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자기부정이다. 세상에는 더 많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건강하게 태어나서 한 평생을 건강하게 마치는 것 보다 더 좋은 축복은 없을 것이다. 가끔 건강하지 못해서 불치병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그저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니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내 운명의 시작은 초등하교 3학년 겨울방학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은 형 결혼식을 앞두고 음식 준비에 동네 사람들이 집안으로 가득하였다. 큰 일이 있으면 동네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잔치 집으로 모였다. 아이들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이 정신이 없었는지 누군가 아이들을 밖으로 내 쫒으려 하였다. 그래서 양지바른 담벼락에 앉아 있던 우리는 썰매를 타기 위해서 마을 입구에 있는 큰 논으로 내려갔다.

날씨는 추웠지만 며칠 전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채 논바닥으로 가득했다. 동네 아이들과 팽이치기와 발 스케이트를 타고 한참 재미있게 놀다가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 했다.

바로 발 스케이트를 타다가 누가 그랬는지 아이들이 한꺼번에 넘어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도톰하게 얼어붙은 커다란 얼음 덩어리 위로 내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순간적인 일이었기에 아프다는 소리도 못하고 말았다. 아파서 울지도 못하고 아이들 부축을 받으며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 왔다.

 

결혼식 준비로 분주하던 가족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피멍으로 빨갛게 부은 자리에 빈대떡을 붙이던 기름을 발라 주며 괜찮다고 했지만 그것이 평생의 고통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고 다음날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큰형이 담배 사 오라는 심부름에 일어났다. 다리도 아프고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종종 걸음으로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담배 집은 인기척이 없었고 사립문은 아직 닫혀 있었다.

할아버지! 담배 주세요.”

아무 생각 없이 사립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커다란 개가 쏜살같이 달려 왔다. 움칫 놀라며 한발 뒤로 물러섰지만 개는 더욱 거세게 달려들었다. 어찌 놀랬던지 눈에서 눈물이 핑 돌고 담배를 사서 집으로 올 때 까지도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그날 오후 담배 집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잔치 일로 바빠서인지 말을 깊이 듣지 않았다. 내 아픔이 처음 시작은 그 후 2주일이 지난 어느 날 마을 공터에서 동네 아이들과 딱지치기 하며 놀고 있는데 갑자기 힘이 없으면서 정신이 멍해지더니 곧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굴이 노랗고 힘이 쭉 빠지면서 식은땀이 이마에 맺혔다. 놀던 것을 포기하고 잠시 정신을 차린 뒤 천천히 집에 오니 마침 부엌에서 점심을 짓던 형수가 문을 열고 나오면서 아버지 점심 심부름 다녀오라고 한다. 하지만 몸이 아파서 들리지 않았다. 그냥 방으로 들어가서 누우니 온 몸에 힘이 쭉 빠지고 옷은 땀에 젖었다.

점심과 저녁은 입맛이 없어서 먹지 못 한 채 누워 있었다.

그런데 온 몸이 불덩이처럼 열이 오르고 있지만 식구들이 감기몸살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정신은 혼수상태로 가고 있었다. 다음날 홍의사가 왕진을 왔다. 그는 6.25 전쟁 때 군의관 출신으로서 동네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는 사람이다.

의사가 다녀간 후 얼마가 지났을까 환각 속에서 깨어나 정신이 들었다. 희미한 등잔불이 주위를 비추고 있었고 천정을 바라보니 높고 높은 커더란 구름처럼 보였고 양쪽의 벽은 낭떠러지 절벽 같이 보였다.

그 아래로 내려가면 커다란 강이 흐르고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혼미 상태에서 이승과 저승을 오락가락하며 자꾸만 내겐 모두가 헛것이 보였던 것이다. 긴 밤을 비몽사몽으로 보내고 다음 날도 아픔은 여전하였다. 기운을 차리려면 뭔가 먹어야 한다는 희미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저녁이 되자 몸은 또 불덩이처럼 오르고 정신이 혼미 해졌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죽음의 사선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었던 것 부산스런 식구들 소리에 혼미상태에서 잠시 깨어났다. 내가 살아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눈을 떠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저승길에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고관절 부분의 다리가 움직일 수 없도록 통증이 왔다. 며칠 전 얼음판에서 넘어진 다리에서 지금에서야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다음날도 온몸이 축 늘어지면서 정신이 혼미 해지고 추위를 느끼면서 열이 오르고 있었다. 또 다음날은 눈을 꼭 감고 움직이지 않은 채 고열로 혼수상태였다. 어머니가 흔들며 애타게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옷장에서 내가 입던 옷을 하나씩 꺼내며 울고 있었고 동네 사람들은 장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홍의사가 다시 또 왕진을 왔고 그리고 청주 병원을 가기 위해 리어카에 환자를 싣고 덜컹거리는 신작로를 따라 기차를 타기 위해서 내수역에 도착했다. 역전에 도착하자 주위 건물들이 무섭게 보였으며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무서운 저승사자로 보였다.

순간순간 죽음의 사선에서 혼미가 계속 되었다.

청주 신병원에 도착해서 친찰을 받고 입원 수속을 하였다. 그런데 미처 생각지도 않던 일이 생겼다. 이제 까지 혼미상태의 원인은 엉덩이가 빨갛게 부어오르기 위해 열이 40도까지 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명줄이 길었는지 죽음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열 살 어린나이에 고열이 지속 되었으니 그 고통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이제는 다리를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도 없었고 앉지도 서지도 마음대로 못하게 되었다. 방사선 병원에서 사진을 찍어 바라보던 의사는 심한 타박상으로 골반 뼈가 튕겨나가 고관절이 약간 벌어진 채로 그대로 굳어 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부어 오른 엉덩이는 고름을 제거하고 관절을 교정하기 위해 서울 큰 병원에 가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그냥 놔두면 뼈가 완전히 달라붙어서 고관절에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것을 귀담아 듣는 게 아니라 돈문제가 먼저 앞섰다.

사실 그때는 모두가 어려운 형편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어 오른 엉덩이 고름을 제거하고 고관절을 교정해야 하는 큰 수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아마 수술 과정에서의 출혈도 문제지만 병원시설이 원만하지 못했다.

다음날부터 내가 입원했다는 소릴 듣고 가족과 친지들이 문병을 왔다. 병원에 누워 있어도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 했지만 그냥 마음이 편했다.

문병 온 사람들에게 받은 용돈으로 연필과 공책을 사서 밀린 공부도 하였고 크레파스와 도화지를 사다가 병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그렸다. 그것을 바라보는 병원 사람들은 그놈 참 똑똑 하구나라고 칭찬을 하였다. 그러나 엄마는 병원비도 없는데 그것을 왜 사다 주냐고 오히려 누나에게 꾸중하였다. 그러나 그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통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뭔가 다른 일에 열중하는 시간은 아픔을 조금 견딜 수 있었다.

병원 밖에는 학교가는 학생들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내다보려고 창문틀을 붙잡고 일어서려다가 그냥 주저 않았다. 온몸으로 밀려오는 식은땀과 다리는 힘이 부쳐서 후들거려 그냥 울고 말았다. 힘들게 일어 설 수 있지만 걷지는 못 하였다.

궁둥이가 벌겋게 부어서 무언가 무거운 게 매달려 있는 느낌이었다. 얼마의 돈이 있어야 병을 고칠 수 있는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가족들 눈치만 그냥 바라볼 뿐 이다. 약물치료 만으로는 병세는 호전 되지 않았다. 서울로 가는 것을 망설인 채 어느덧 병원에 입원한지도 여러 날이 지났다.

병세가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자 식구들은 퇴원 하자고 한다. 더 이상 입원비를 낼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로 가고 이젠 하나같이 냉정해 지고 있다. 시골에 내려가면 어쩌자는 건지 아니면 기적을 바라는 것인지 누구하나 내 편이 없다.

 

 

퇴원하는 날 형 등에 업혀서 병원을 나서 청주역으로 나 섰다. 누구를 원망 할 수도 없고 식구들이 야속 할 뿐이다. 내수에서 내려 점심 식사를 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큰 누나가 있는 내수 읍내로 들어갔다. 누나는 정류장 부근에서 신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번갈아 나를 없고 십리 길을 걸어서 집에 돌아왔지만 누구도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퇴원해서 집에 오니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병문안 차 다녀갔다.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도 다녀갔다. 이때부터 식구들에게 천대꾸러기 미움이 가득한 사람이 되었다. 혼자 방에 있으니 답답했다. 이제부터 내게 주어진 이름은 걷지도 못하는 다리병신이다.

새 학년이 되었지만 학교에 가지 못했다. 금의 상태로는 4학년 새 학기도 진급 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멀리서 봄이 오는 듯 날씨는 봄을 향해 가고 있는데 내 건강은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고생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머니는 다리를 치료 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 곳으로 알아보고 다녔다. 그럴 때 마다 나는 가끔 울어 보기도 하고 천정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면 자신을 학대 하였다.

퇴원하고 집에 와보니 어느날 형수의 신혼 방이 달라졌다. 결혼식에 찍은 사진을 모아서 걸어 놓은 사진틀과 벽에 걸려있던 수놓은 벽보까지 모두 걷어서 옷장에 넣은 것 같다. 새 형수가 집에 들어와서 우환이 생긴 것으로 미안해서 그런 것 같다. 새 사람이 잘못 들어오면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옛날에는 그런 말이 종종 있었다.

퇴원 한지도 여러 날이 되었고 빨갛게 부어오른 궁둥이는 호전되지 않았다, 궁둥이에 사혈(死血)이 호박처럼 가득 않고 있었다. 고름을 제거하는 수술이 필요했다. 낮에는 그런대로 견디었지만 밤이면 고열이었다

퇴원한지 일주일 지나서 홍의사의 주선으로 다시 증평 수녀병원에 가기로 하였다. 다음날 형이 끄는 손수레에 누워서 털커덩 길을 또 나섰다. 오후에 수녀병원에 도착하니

아픈 사람들이 수없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천주교회에서 운용하는 메리놀 병원으로 외국신부와 수녀들이 진찰하고 미국 약을 주기 때문에 효과도 좋아 많은 호응을 얻고 있었다고 수문이 나 있었다. 일정한 사람들을 진찰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와서 미리 줄을 서서 기다린다.

상태가 나쁜 사람부터 우선 진찰을 하고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진찰도 받지 못한 채 돌아가곤 했다. 1959년 무렵에도 미국에서 구호물자가 불쌍한 한국 사람들을 위해 많이 와 있었고 그 중에 의료 혜택도 그 일부분 이였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모든 사람들에 생활이 어려웠다. 학교에서는 분유나 옥수수 가루를 주기도 했고 때로는 빵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어쨌든 진찰권을 타서 한 시간을 밖에서 기다렸다. 진찰 결과는 시원하진 못 했지만 며칠 후 다시 오라고 하며 약을 타가지고 집에 오는 길은 멀기만 했다. 하루가 다르게 다스해지는 봄빛의 태양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데 누굴 원망 할 수도 없고 내 자신을 미워하며 신세타령을 해야 했다.

집에 오니 힘이 하나도 없이 몸이 축 늘어진다. 계속해서 2주일 동안 증평 수녀병원을 다녔지만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했다. 퇴원 한지도 여러 날이 되었고 빨갛게 부어오른 궁둥이는 아직도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궁둥이에 호박처럼 둥글게 고여 있는 死血을 수술해서 고름을 제거해야 하는데 수녀병원에서는 수술을 하지 않는다.

수녀병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방에 누워서 가족들 눈치를 여전히 보고 있었다.

그냥 대책없이 기다릴 뿐이다. 환자의 명줄이 길면 살 것이고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가족들은 그런 생각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서울 큰 병원에 가서 고름이 가득 잡힌 궁둥이를 칼로 찢어서 제거하고 튕겨진 고관절 뼈를 제자리로 하는 수술을 했어야 했다. 한참 자라는 어린이 에게 고관절의 상처는 큰 손실 이었다. 그러나 고관절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만으로 천만다행이었다.

 

다리는 여전히 걸을 수도 없었고 빨갛게 부어 오른 궁둥이는 여전했다. 벽을 잡고 간신히 일어서서 걸으려 하면 다리가 후둘 거리고 식은땀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또 며칠이 지나자 어머니가 무당을 데리고 왔다. 새로 지은 변소가 있는 방향에 손() 이 있다고 한다. 손을 위하지 않고 개축했기 때문에 나무장목이 라는 이 들어와 아픈 것이라고 했다.

변소와 방에 부적을 부치고 무당이 밤새도록 굿을 하고 빌었다. 굿을 하던 날은 집안이 온통 시끄럽고 동네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 내가 굿을 하고 나서 밥을 조금씩 먹는다고 하는 어머니의 정성을 봐서라도 나는 밥을 먹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아무 효험도 보지 못하고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가 증평에서 용하다는 한의사 데리고 왔다. 의원 간판을 걸고 하는 한의사는 아닌 것 같다. 그 할아버지는 호랑이처럼 무섭게 보였다. 내 바지를 벗기더니 빨갛게 부은 엉덩이에서 고름을 침으로 빼야 한다고 한다.

그는 긴 대롱처럼 생긴 침을 엉덩이에 꽂더니 종지 그릇에 고름을 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민간 요법의 수술이 아닌가했다. 마취도 없이 대침(大沈)을 여러 곳 깊게 넣고 고름을 짜내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아픔은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다.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삼일에 한 번씩 한 의사가 와서 궁둥이에 있는 고름을 빼내는 침술을 시행했다.

잘 먹지도 못했던 환자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잠시 생각을 해보자. 그러나 증평에서 온 한의사에게 며칠 매달렸지만 이렇다 할 큰 효과도 없이 또 시간만 허비하고 말았다. 효과가 없으니 집에서 오지 말라고 했는지, 아니면 진료비를 안 주었는지 그 한의사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이사람 저 사람에게 내 몸을 맡기고 고처 주기를 원했지만 사람만 힘들게 했다. 그럴수록 내 몸은 점점 야위어 가고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한지 어느덧 두 달을 넘기고 있었다. 궁둥이 고름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스스로 치유를 하는지 튕겨진 고관절 뼈는 그대로 굳었는지 통증은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어 서거나 걷지는 못 하였다.

좀 답답해서 밖에 나가 보기로 하고 지팡이를 잡고 마당에 나섰지만 한 발 자국도 옮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엄마 난 왜 다리병신이야 죽고 싶어 하며 엄마의 옷자락에 매달려 한 움큼의 눈물을 그냥 쏟아 내고 말았다.

날자는 벌써 석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궁둥이에 고름이 가득 있어서 걷지를 못하고 있으니 걱정이었다.

무정한 세월은 한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낳는 병인 줄 알고 누구하나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모두가 아픈 사람에 몫 이었다. 아픔은 아직도 여전히 변함없었다. 내덕동에 있는 춘광 한의사에게 가기로 하고 형 등에 업혀서 청주로 나갔다. 춘광이라는 한의사는 나쁜 피가 다리에 몰려 있어서 그렇다고 하며 방바닥에 엎드려 놓고 궁둥이와 다리 온몸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사혈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이곳저곳 백여 곳을 찌르는 데 침 자리에는 빨갛게 피가 흘렀다. 아픔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지만 맥 놓고 울 수도 없어서 독하게 마음을 먹고 정말 억울해서 난 살아야 한다며 이를 악물고 꾹 참았다. 그날 한의원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한의사는 내게 참 독한 놈이다.’ 라고 말을 다 했다.

왜냐면 수많은 침을 궁둥이를 비롯하여 몸 전체에 놓는데 아프다고 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점심을 맛있게 얻어먹고 약을 지어서 집에 돌아오는 길은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밭에는 푸른 보리가 자라고 이젠 완연한 봄 이였다. 하루 건너씩 침 맞으러 청주에 나가야 했다. 의사는 누워 있지 말고 다리에 힘이 오르도록 운동 하라고 이른다. 침을 맞은지 보른이 지나자 정말 문고리를 잡고서 있는 힘을 다해 일어섰다.

그동안 일어서지도 못 하던 절름발이가 일어 설 수 있다는 게 정말 신기 했는지 어머니를 붙잡고 울었다. 1월 달 얼음판에 넘어진 뒤 4개월이 지나서 문고리를 붙잡고 겨우 혼자 일어섰다. 그간 벌겋게 부어있던 궁둥이는 많이 가라 앉아 원래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호전이 되어 갔다. 날씨는 이제 초여름으로 접어들었다.

이제 지팡이를 짚고 혼자서 사립문을 나서서 이웃에 나들이도 갈 수 있었다. 내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도 반가워했다. 얼굴 모습은 핼쑥했지만 사람들이 다행이라고 칭찬을 한다.

금방 지팡이를 놓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절룩거리는 것은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식구들이 청주 가는 것을 싫어해서 한의원에 가는 것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가고 세월이 흐르자 지팡이에 의지하여 조금씩 걷을 수 있어서 퍽 다행 이었다.

겨울 방학 때 얼음판에서 넘어지고 그리고 봄이 지나 여름이 한창인 7월말쯤에서 걷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넘어진 후 7개월만이다. 한때는 궁둥이가 열이 올라 호박덩이처럼 부어서 피고름이 한가득한 채 죽음의 사선까지 갔었지만 명이 길었던지 죽지 않고 지금까지 견디어 왔다. 공부하는 것 밖에 모르는 내가 이제 제일 급한 것이 학교 가는 일이다. 지금은 여름방학이고 새 학기가 시작이 된지 여러 달이 되었기 때문에 4학년으로 가면 학습을 따라 갈 수 없다고 한다.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지만 학교에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2학기부터 다시 3학년에 편입 하였다. 그러니 친구들은 4학년인데 나는 3학년으로 한 학년 거꾸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학교에서 운동은 할 수 없었고 걷는 것은 아직 부자연스러워서 지팡이를 짚고 학교를 다녔다. 아이들은 다리병신 이라고 놀렸다. 심한 놀림을 받을 때는 학교에서 돌아 와서 책가방을 내 던지고 방바닥에 엉엉 울고 말았다.

신세타령을 들어 주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는 차차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었다. 장막의 그늘이 걷히고 밝은 태양이 빛나는 새 날이 오고 있었다. 그래도 걷는 데는 특별히 힘든 것은 없는데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그래도 걷게 해 주는 것만도 하느님께 고마울 뿐이었다.

생각 해 보면 지나간 긴 세월동안 어린 나이에 누워있는 것도 고생이었다. 예전처럼 건강 하지는 못했지만 살아 있다는 게 고마울 뿐이었다. 보약이니 영양보충이니 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오랜 병고로 얼굴은 반쪽이었지만 걸어 다니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후 몇 달을 더 지난 가을쯤에서 지팡이를 버렸다. 얼음판에서 다친 지 꼭 1년 만이었다. 그 후 교통사고처럼 평생을 불편하게 살아야 했지만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 퍽 다행이고 행복이었다. 만약 영영 걷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거나 절름발이가 되었다면 내 삶은 더 불행으로 엉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하여 나이가 들수록 또 다른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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