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월산대군 묘와 신도비

시인김남식 2011. 6. 22. 19:36

 

월산대군(月山大君)신도비 묘 솔새김남식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 이야기를 말 하자면 우리는  부인 승평부대부인昇平府大夫人 박씨가 

연산군에게 겁탈을 당하여 자결 했다는 것 그래서 박원종 일당이 중종반정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우리는 드라마에서 먼저 기억한다.

하지만 왕위 간택에서 두번이나 밀려난 비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월산대군은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하며 여생을 보내야만 했는데 자기집 뒷뜰에 풍월정을 지어

시주詩酒와 서책書冊을 즐기며 풍류적인 생활로 자연과 벗하며 일생을 마쳤다.

 

 

  

 

고양시 원당에서 39번 국도를 따라가다 벽제승화원 가기전 낙타고개에서 월산대군사당 이정표를 만난다

이곳 신원동 능골 마을은 월산대군 묘가 마치 왕릉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조선조 전기부터 월산대군(月山大君)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지금도 이와 관련된 묘소가 곳곳에 남아 있다. 

뒤쪽 능골마을 지나 안까지 고개를 넘어 들어가면 물구리마을에서 100년 넘긴 느티나무가 나그네를 반긴다.

 

 

 

느티나무는 현재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는데 주민들이 풍치(風致)의 목적으로 심은 것으로 보이며

 마을은 옛부터 한자로는 수곡(水谷)으로 표기하며 물골리라 부르다가 현재는 물구리가 되었으며.

 뒷산에서 부터 시작한 작은 小川인 물구리천이 공릉천으로 흘러 내린다.  

 

 

 

물구리 마을에서 능골마을로 다시 10여분 걸어 나오면 우측으로 월산대군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월산대군사당은 일일이 관리하기 어려워일까 마을 뒤쪽 산 아래 있는데 주위에 밭이 있고 거푸집이 쌓여 있어서

 이곳이 관리하는 문화재인가 의구심이 났다  

 

 

월산대군 사당 석광사 앞에 수령 300여년 된 회화나무 보호 수가 있는데 수고 20m, 나무둘레 24m 이다 

더 운 여름날 그늘 아래서 쉴 수 있게 끔 심은 나무로 현재 아들 나무가 옆에서 잘 자라고 있다.

 

 

 

사당 근처에는 월산대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후손과 승려들이 흥복사라는 원찰을 지었는데 지금은 자취는 없고

그후 사당이 창건된 연대는 숙종 19년(1693) 이전에 건립되었으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맞배 지붕으로 현재 건물은 정조 10년(1786)에 이미 있던 건물을 다시 지은 것으로 ..

 

 

안에는 영종대왕어제제문(英宗大王御製祭文)이라 쓴 편액이 있는데 영조가 친히 석광사라는 편액을 내렸다하며

정조. 순조 때에는 조정에서 신하를 보내 왕을 대신해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사당내에는 요여(腰輿)가 있었는데, 시신을 묻은 뒤 혼백과 신주(神主)를 모시고 돌아오는 작은 가마를 뜻하는

것으로 길이 260㎝ 폭 65㎝ 높이 80㎝로 문과 난간등 각종 부재가 매우 정교하게 제작돼 있는 게 특징으로

 1488년 월산대군이 사망하면서 제작 된 것으로 월산대군 파종회가 요여를 2012년 고양시(市)에 기증했다고 한다.

 

 

참고로 화성 융건릉 원찰은 용주사이고 여주 영릉 원찰은 신륵사이며 월산대군 원찰은 흥복사이다

 

월산대군 사당 석광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월산대군 사당이 뒤에 후손들의 묘가 여러개 있는데 간혹 사람들은 월산대군墓로 착각을 하기도 한다

 

 

 

사당뒤 쪽에는 산딸기로 가을에는 밤나무로 가득하며 매봉산 주위에는 월산대군 후손들의 묘가 여럿 있다  

월산대군은 정실인 박씨부인에게는 소생이 없고, 측실에게서 덕풍군등 두 아들을 두었는데

덕풍군은 파림군·계림군·전성부정 등 3남을 두었다.

파림군은 학문을 좋아하고 검소했고 계성군에게 출계한 계림군은 을사사화의 주모자로 몰려 처형되고,

전성부정 역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국문을 당하다 죽었다.

 

 

맨 아래쪽에 양원도정 이혜(1538~1591)의 묘 유명조선(有明朝鮮) 종실 명선대부(明善大夫) 양원도정(陽原都正)

 혜지묘(慧之墓) 신부인(愼夫人) 죽산박씨지묘(竹山朴氏之墓)라 쓰여진 묘표가 세워져 있다

 

 

뒤로 월산대군의 장손 파림군(坡林君) 이주(1500~1541) 묘와 그 부인의 묘로

파림군은 월산대군의 아들 덕풍군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9살 때(중종 2년) 파림군으로 책봉 되었는데

학문을 좋아하고 검소한 생활을 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명조선국(有明朝鮮) 종실(宗室) 정의대부(正義大夫) 파림군주지묘(坡林君주之墓) 

양천현부인(陽川縣夫人) 허씨(許氏) 라고 쓰인 묘표가 세워져 있다.

 

 

월산대군 증손이며 파림군의 장남인 양천도정(陽川都正)  이성(李誠) (1526~1587) 묘와 신부인(愼夫人)

광주김씨부좌(光州金氏부左)라는 묘표가 우측으로 세워져 있다

 

 

월산대군 묘는 낙타고개에서 중간쯤 내려 오다가 왼쪽의 고속도를 터널을 지나서 있다

 

 

월산대군묘 이정표 반대쪽은 개훈현 교육장으로 사람이 나타나면 개 짖는 소리에 좀 섬뜻하니 주의가 필요하다.

 

 

약 1분정도 목책 계단을 오르면 묘가 있고 묘 아래쪽은 의정부 - 김포 고속도로에서 차들이 요란하게 달린다

 

 

묘비는 운문雲文이 조각된 비두碑頭와 장방형의 대석을 갖추었고, 높이 180cm, 폭 74cm, 두께 32cm의 규모이며

비명은 임사홍이 찬했다고 하는데,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멸되어 있다

 

. 

 

월산대군 이정(1454-1488) 자는 자미, 호는 풍월정 시호는 효문孝文 저서로는 풍월정집이 있다.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의 장남이고 제9대 성종의 친형이다

 

 

정면에서 볼때 하나의 묘처럼 보이는데 월산대군 묘 뒤에 숨은듯 부인 승평부대부인昇平府大夫人 박씨의 묘이다

 

 

월산대군과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고 월산대군은 측실 사이에서만 두 아들을 두었다

 

 

정면에 있는 월산대군묘

 

 

숨은듯 뒷 쪽에 있는 부인 승평부대부인昇平府大夫人 박씨의 묘이다

 

 

특이한 것은 묘는 대부분이 남향인데 북향으로 되어 있으며. 부부의 묘가 나란히있지 않고 앞 뒤에 있다  

 

 

또한 다른 이상한 모습은 박씨의 묘가 뒷 머리 꼬리기 여우 처럼 길게 10여미터 나 있는게 좀 특이하다.  

 

 

왜 그랬을까? 항간에 떠도는 연산군비사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함일까?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하지만 연산군의 나이 31세 중년의 박씨는 

절대 잉태할 수 없는 나이로 모후를 잃은 연산군이 박씨에게 어머니의 정을 느껴 자주 잧았고 연산군의 세자를

박씨에게 돌보게 했다는데 아무리 연산군이 못된 폐인이라 해도 아무 원한이 없는 큰 어머니를 과연 범했을까?   

연산군 일기에서 박원종이 분개하여 반정이 일으켰다는 승자의 기록이고 뚜렷한 반정 명분을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한 것으로 조작이 농후하다. 그래서 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왜 그랬을까? 항간에 떠도는 秘史를 그대로 읽어보면...

 

승평부대부인은 비극적인 최후를 마쳤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종의 형이자 연산군의 큰아버지인 월산대군이 세상을 떠난 후 미인이었던 그의 아내 박씨는 과부로 쓸쓸히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박씨가 빼어나게 예쁜 것을 그대로 둘수 없다하여 큰어머니가

되는 것도 잊고 욕을 보였는데 박씨는 한편으로는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연산군은 박씨의 그러한 태도가 도리어 예쁘게 보여 더욱더 마음이 달아올라 그녀에게 승평부인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그의 남동생인 박원종朴元宗의 벼슬을 올려 주었다.

한편 박씨의 마음은 쓰리고 아팠으나 연산군 앞에서는 그런 태도를 공공연하게 드러 낼 수가 없어

그날 그날 살아가는 것이 죽기 보다도 괴로왔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마침내 독약을 마시고 자살해 버렸다.

 

그녀는 죽기 전에 동생인 박원종에게 유서를 남겼는데

그 유서에는 "나는 이렇게 인륜에 어긋나는 일을 당하고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죽음으로 청산하니

이 억울하고 분통함을 네가 갚아 다오." 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박씨는 죽기 전에 너무나 마음의 고통이 심하여 신병이라 핑계되고 연산군이 마련한 연회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연산군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북도 절제사로 가 있던 박원종을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얼마 후 누님인 박씨가 자살로 세상을 뜨자 그의 분노와 침통한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리하여 이때 부터 그는 누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연산군을 쫓아 내려는 계획을 품게 되었다

 

 

 

연산군은 잔병치레가 많아 어려서부터 백부인 월산군의 집 덕수궁에 자주 피접을 나갔고 박씨는 어머니처럼

돌봐 주었다. 덕수궁은 성종이 형인 월산대군에게 지어준 집으로 조선 후기에 덕수궁으로 개명하였다

후에 연산군이 보위에 오르자 세자도 기르게 하고 세자가 커서 궁으로 들어 올 때 같이 들어오게 하여 처소를

내어주고 처소를 방문해서 연산군에게 겁탈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해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후일 박씨 부인 동생 박원종이 연산군에 대한  원한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는 반정에 

주동적 역활을 하여 정국공신에 책록되었는데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소문을 퍼뜨렸다고 한다

위 내용은 간혹 드라마에 삽입 되는 것으로 실제는 사실과 전혀 다를 것으로 사료되며 이와 같은 부분은

사실 확인을 떠나서 죽은자의 모독이고 월산대군에게는 커다란 상처로써 사실 언급을 자제 하여야 한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맏 손자로서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으나 두번이나 권좌를 내 주어야 했다.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1438-1457)가 나이 20세 죽자 세조는 당연히 아들인 월산대군(4살)이 

원손으로 적자였지만 조카와 삼춘의 양위 다툼을 몸소 체험한 세조는 후한이 염려가 되었던지 서둘러

아예 자신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8살)을 세자로 의결한다

그리고 세조가 죽자 어리다는 이유로 월산대군(15살)은 숙부 해양대군 (19살)에게 권좌를

양보하는 첫번째 비운을 맞는다

 

예종(1450-1469)이 왕위에 올랐지만 재위 14개월만에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는다

예종의 사인은 복상사로 기록 되었지만 당시 정치상황을 볼때 派黨에 의하여 독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다시 기회가 왔지만 한명회등이 앞장서서 왕세자였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4살)과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16살)을 제치고 차남인 자을산군(13살)에게 정희왕후는 새 임금 교지를 내린다

 

이유는 월산대군은 몸이 약하고 제안대군은 나이가 어리다는 할머니 정희왕후에 의하여 

종법을 무시한 채 월산대군은 두번째의 비운을 맞는 불운의 대군으로서 역사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당시 성종은 아직 어린 13살 나이기에 할머니 정희왕후와 한명희가 7년간 섭정 정치를 한다

 

 

성종은 자신에게 왕위를 뺏긴 형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때문인지 시문과 서화의 세계에서 작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성종의 비호 덕분으로 다행히 성종과 월산대군은 우애가 좋았다고 역사는 전한다

그는 효심이 깊어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어머니인 인수대비를 아침저녁으로 문안 드리고

자신의 병을 숨기면서까지 간병을 했으니 마음이 참으로 고왔던 사람으로 병약한 것은 사실이었는지

월산대군은 35세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뭏튼 정치 대신 풍류를 택한 그는 수없는 시문을 남겼고 자신의 호(號)를 딴 風月亭集 시문집을 남긴다

월산대군이 지은 '추강에 밤이 드니' 라는 시조는 세속의 물욕과 자신의 심경을 빈배로 표현한 詩語이다

 

秋江(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無心(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9). 물욕과 명리를 초월해 살았다

달빛이 무심하다는 그 감정이 감출 수 없는 생의 悲意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의 삶이 그랬다.

비극적인 왕자의 운명을 노래한 것이라는 걸 누구나 알게 된다.

그는 양화도 북쪽에 위치한 희우정을 개축 이를 망원정이라 하여 일생 시문을 읊으며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월산대군 묘 아래쪽에 또 하나의 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월산대군 묘 바로 아래쪽에 또 하나의 묘가 있는데 사헌부감찰 이호인(1562~1599)과 두부인의 합장 묘이다

월산대군의 현손이며 양원도정의 이혜의 아들로 자는 원보(元甫),  음사(蔭仕)로 사도시 주부가 되었다가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부인 해평윤씨는 현감 철수(鐵壽)의 딸이고 부인 성주이씨는 응진(應進)의 딸이다

 

 

월산대군의 현손이며 양원도정의 이혜의 아들로 자는 원보(元甫), 음사(蔭仕)로 사도시 주부가 되었다가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부인 해평윤씨는 현감 철수(鐵壽)의 딸이고 부인 성주이씨는 응진(應進)의 딸이다

 

 조선국(朝鮮國)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이공(李公) 호인지묘(好仁之墓) 좌우에 숙인(淑人)

해평윤씨(海平尹氏) 숙인(淑人) .묘비 뒷면에는 숭정기원후재임자(崇禎紀元後再壬子)라고 새겨져 있다. 

 

 

 

타의에 의하여 권좌를 비껴간 월산대군은 아픔을 씻고저 조용히 풍류를 즐겼던 과거 와는 다르게  

묘역 아래를 바라보니 서울외곽순환 고속도로에서 차가 씽씽 달리고 시끄럽다.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월산대군 묘와 사당을 갈라 놓았는데 소외 당하는 문화유적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번 답사에서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直示하며 아픔으로 살아야 했던 월산대군의 생애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solsae k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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