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정릉과 신덕왕후

시인김남식 2011. 6. 13. 07:20

정릉과 신덕왕후 김남식

 

정릉은 서울 성북구 정릉 2동 산 87-16번지에 있는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56년 ~ 1396년)능이다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인 강씨의 딸로 본관은 곡산(谷山)이다.
조선 태조의 정치적 조언자로 뛰어난 지략은 조선건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조선 오백년간 원통했던 왕비를 꼽으라면 신덕왕후라고 할 수도 있다

 

 


조선개국 후 첫번재 왕비로 살아서는 태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죽어서는 능이 파헤치는

수모를 받았고 자식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고 600년이 지난 지금은 아파트 숲과 내부순환 도로에 갇혀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길을 특히 직선길이 아닌 기역자 길로 만들었다

 







 

버들잎 사랑
혼인할 당시 강씨는 이성계보다 21살 연하로 처음 만난 일화는 유명하다
어느날 호랑이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마침 우물가에 한 여인이 있었다.
이성계가 물좀 떠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뜨고나서

버들잎 한 줌을 물위에 띄워주었다


이에 이성계는 이무슨 고약한 짓이냐며 나무랐다.

그러나 여인은 갈증으로 급히 달려온 바냉수를 마시면 탈이 날것같아 버들잎을 불며

천천히 마시라고 일부러 그랬다고 수줍게 대답했다.
이말을 듣고 내심 감탄한 이성계가 그때서야 여인을 유심히 살펴 보았는데

여인의 여인의 지혜와 미모에 이성계는 한동안 넋을 잃었다.

바로 그 우물가의 여인이 신덕왕후로 태조가 격무에 시달리다 퇴근하면 안마 해 주고

어깨 너머에서 조곤조곤 속삭이면서 요즘 말로 하면 아양을 떨었으리라

 

 

당시 세자를 누구로 정하느냐로 왕과 대신들이 모여 의논할 때 옆방에서 여자에 울음 소리가 났다

강비였다.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왕비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 듣던 태조인지라

왕비의 소원대로 그의 소생인 방번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는데......

그러나 1396년 신의왕후가 나이 40에 이승을 떠나 태조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다

시중을 들어 주던 왕비가 없으니 노년의 이성계는 얼마나 허전했을까?

 

그래서 경복궁에서 바라 보이는 정동 마루턱에 墓를 쓰고

왕비의 명복을 빌기위해서 흥천사를 지어서 매일 능과 절을 둘러 보는게 일상사가 되었다

창문을 열고 왕비의 묘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다 결국 병이 나서 자리에 눞는다

그러자 다섯째 왕자인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로 책봉된 이복 동생을 죽이고

그의 편을 들던 정도전등 신하들까지 살해하는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왕자의 난
강씨는 신의왕후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와 공주들을 제치고 자기 소생의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뜻이 맞은 정도전과 정치적 연합을 하여 의안대군을 왕세자로 만들었으나

장남도 아니고 후처 소생의 차남이 왕세자가 된다는 것을 정안대군을 비롯한 신의왕후의 아들딸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계비인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을 지명했다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이자 가장 정치적 야심이 컸던 방원은 격분할 수 밖에 없었다
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의안대군은 포함한 신덕왕후의 아들을 제거하고

사위는 살해 당하자 딸인 경순공주는 여승이 되었다.
태조는 막내 방석을 죽인 방원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고 옥좌를 태종의 형 정종에게

물려주고 고향 함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훗날 태종이 서얼 금고령과 적서차별을 제도적으로 만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정릉 파괴와 복권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태종 이방원은 정릉 파괴와 이전을 지시하고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양주군 성북면 사한리 현위치(정릉)로 이장하면서

묘의 봉분을 깎아서 무덤의 흔적이 보이지 않도록 명 했으며

다른 릉과는 다르게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길을 직선길이 아닌 기역자 길로 만들었다

더구나 정자각은 헐어버린 뒤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정자각 석물을 광통교를 보수하는 데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밟고 지나 가도록 하였다

 

 

 

신덕왕후 복위 문제는 왕대를 이어가며 논의를 거듭한 끝에 우암 송시열에 상소를 받아들여

사후 300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년)지위가 왕비로 복위되었고

황폐하게 버려진 정릉이 복구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정동에 있다 옮겨온 릉이라고 하여 정릉이라고 불러 그 지역이 지금은 정릉이 되었다

 







 

릉의 숲길을 걷는데 약 1시간이 소요되며 약간의 오르막 길이 있

아파트숲과 주거공간에 쌓여있는 정릉은 주민들에 산책길을 제공해주어서 좋은 쉼터이다

 

 

정릉에서 약 10여분 올라가면 흥천사가 있어서 가 보았다 이곳도 예전과는 다르게 아프트 숲에 쌓여 있었다

 

 

1395년(태조 4)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정릉(貞陵) 부근에 원당(願堂)으로 라는 절을 세워 흥천사라 칭 하였다

 

그후 여러 우여곡절을 지나면서 1794년( 정조)

승려 성민(聖敏)· 경신(敬信) 등의 발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신흥사(神興寺)라 하였다

이후 철종 고종시대를 지나면서 증축을 하면서 대원군이 흥천사라는 편액을 내림으로 흥천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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