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김유정문학촌

시인김남식 2012. 3. 18. 09:25

小說家 김유정(1908~1937년) 문학촌      솔새김남식

 

소설가 김유정은 두 여자에게 사랑을 얻지 못한채 쓸쓸히 생애를 마친 사람이

그의 대표작은 "봄봄"과 "동백꽃" 을 들 수가 있다

봄봄은 1969년도에 '남정임 신영균 허장강' 주연으로 김수용감독이 태창흥업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내가 "봄봄" 이란 영화를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때는 김유정의 생애를 깊이 알지 못 했다 

1960년초 4H운동과 새마을운동이 한창일때  "봄봄" 은 바로 계몽 소설로 이웃과 돌려 보던 책이었다.

김유정 문학촌을 둘러보는시간은 대략 20여분 정도 소요되지만 그의 생애를 알게 되면 한시간도 모자른 시간이 된다.

오늘은 춘천에 있는 김유정문학촌을 방문하여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자.


 

김유정문학촌을 가려면 상봉역에서 9시40분 춘천가는 지하철을 타면 11시에 김유정역에 도착을 한다 

김유정역은 춘천역 남춘천역을 가기전 춘천시 신동면에 있는 면소재지의 역이다

 

김유정역은 원래는 "신남역" 이었는데 경춘선이 복선화공사를 하면서 순전히 김유정을 알리기 위해서 문학을 중심으로

관광목적을 겸하여 만들어진 역으로 역에내리면 마을이 富村스럽다



러시아에도 유명한 작가 톨스토이역이 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사람 이름을 역이름으로 쓴 곳은 바로 여기 단 한곳 뿐이다.

역전앞은 신동면사무소,김유정우체국이 있으며 먹거리 식당이 즐비하고 강촌레일파크 유락시설이 있다

 

역 개찰구를 나서면 신동면 소재지 "실레마을"로 바로 김유정문학의 현장으로 작은 동산 아래에 있는 유택은

비교적 깔끔하게 잘 정돈되여 있다

 

김유정은 서울에서 살다가 23살에 설레마을로 돌아온 그는 야학과 농촌계몽 운동을 벌이면서 실제로 보고 느낀 것을

"봄봄" 작품의 소재로 하였기에 내용은 사실과 일치 했다고 전한다


보통 문인의 생가를 문학관이라 호칭 하는데 이곳은 문학관이 아닌 김유정 문학촌으로 명명하게된 동기는 

그의 유품이 남아 있지 않아서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文房親舊인 안희남이 김유정의 유품을 보관하던 중

6.25 전쟁때 그것을 갖고 越北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은 그가 태어난 고향이자 생을 마감한 곳으로 설레마을에서 태어나 29살에 유명을 달리하게 되는데

그가 폐결핵으로 짧은 삶을 마감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다른 견해로 보는 사람도 더러있기에 슬픔을 더해준다.

즉 사랑을 이루지 못한 좌절감이 더 큰 원인이 아니었겠는가 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선 김유정을 떠올리면 그를 좌절케 한 여인은 박봉자 뿐만 아니라 박봉자에 앞서 당대의 명창 박록주에게도

사랑을 구애 했으나 거절 당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 두 여인으로 하여금 받게 된 좌절감이란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사내라면 그 아픔을 누구나 충분히 짐작 할수가 있다

그 생애를 알고 김유정 문학촌을 가보게 되면 누구나 정말 불쌍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한다

그래서 아마 그 이름을 기리기 위해서 역이름이 생기지 않았나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김유정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일찍 여윈다

매일 매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던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김유정의 첫사랑 박록주이다.

어느 날인가 박록주가 열연하는 명창을 구경하고는 죽자사자 쫓아 다녔지만 네살 연상에 유부녀로 정말 피할 수 없는

업인지 매일 편지를 보내도 안 되고 죽는다 하여도 안되고 그러던 어느날 하루가 멀다고 오는 편지를 보면서

박록주의 친구인 원채옥은 재밌어하며 행랑 어멈을 시켜 김유정을 오게 만든다


그런데  " 학생은 오로지 공부에 전념해야지, 딴 생각해서 되겠습니까. 더구나 나는 기생의 몸

학생 신분으로 가당키나 합니까?"
박록주가 교복을 입고 온 유정을 조용히 타일렀다.


하지만 이미 유정은 사랑에 눈이 멀었었다

편지를 아무리 보내도 답장이 없자 유정은 어느날 록주의 집을 찾아가 눈물로 사랑을 구애하였고 이를 보다 못한 록주의 동생

태술이 유정을 달랬고 그날로 태술과 친해진 김유정은 친구 태술을 만나려 간다는 핑계로 녹주의 집을 드나 들었다 한다 

 

태술을 통해 편지를 직접 전할 수있게 되었는데 어느 날인가 편지 끝에
녹주 내 너를 사랑한다란 혈서로 보냈지만 여전히 녹주의 마음은 요지 부동이었다.

김유정은 박록주에게 2년여 동안 광적인 구애를 하였으나 애절한 마음은 끝내 받아 들여지지 않자 결국 그는 고향 마을로

내려와 잠시 내려와 마음에 안정을 찾는듯 했으나 유정의 사랑에 구애는 여기서 끝난게 아니었다.

 

유정은 박봉자라는 여자에게 한번 더 채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또 생겼다
김유정이 박봉자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 동기는 '신여성' 잡지에 나란히 글이 실리게 된 
인연으로 심신이 괴로운 그가 

아픈 마음이나 달래볼까하고 혹시나 하는 이념으로 그리 생각한 끝에 30여통에 편지를 박봉자에게 보내지만

단 한통의 답장도 받지 못하는 애정에 불운을 맞는다

 

 

더구나 그녀는 유정의 친구이며 동창이던 평론가 김환태(1909-1944)과 결혼하게 되는데 결론적으로

김유정을 크게 실망 시켯고 좌절로 그 충격이 대단 했을 것으로 믿는다.

 

그로 인하여 상사병과 함께 지병인 폐결핵이 더 악화되지 않았나 생각 한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매정 할 수 밖에 없는 유교적인 사상이지만
박봉자라는 여자가 참으로 매정하지 않았나

그리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참으로 남자를 모질게 했던 여자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김유정이 그토록 구애 했지만 자기 친구에게 시집을 갔으니 그 충격이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며 박봉자까지도 

왜 그렇게 매정하게 그랬는지 우리는 알수 없지만 김유정은 두 여자에게 사랑을 얻지 못한 채 쓸쓸히 생애를 마치게 되는데 

지병인 결핵과 늑막염 치질로 1908년 1월 설레마을에서 태어나 1937년 3월 서른 이를 다 채우지 못하고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상곡리 매형 유세준의 집에서 사망하여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한강에 뿌렸다고 한다.

 

김유정 최후의 글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 따시 탐정 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 되고 흥미있는 걸로 두어권 보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 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 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 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3월 18일 김유정으로 부터

 

 


필승은 김유정의 평생지기였던 안회남의 본명으로 김유정의 유품을 보관하던 중 6.25 전쟁때 그것을 갖고 越北했다.

김유정은 이 편지를 쓰고 11일 후에 죽는다.
죽은지 10여일이 지나서야 현경윤에 의해서 문단에 소식이 전해졌고 이 마지막 편지를 읽으면 當時에는 눈물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누구든지 눈물이 핑 돈다. 그 만큼 김유정은 쓸쓸하고 힘겨운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박록주(朴綠珠) (1905~1979) 본명 명이(命伊).

경북 선산 출생으로 12세 때 박기홍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송만갑 · 정정렬 · 유성준 · 김정문 등에게 배웠다.

1937년 <창극좌>에 입단하였으며, 1945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0년 <흥보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

현재 <흥보가>무형 문화재인 박송희 명창과 무형 문화재이며 박록주 명창의 수양 아들인 조상현 명창으로 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박녹주는 타계 하기전 모신문에서 김유정과의 인연을 애석하며 왜 가혹하게 냉담 했던가를

자신을 되돌아 본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박봉자(朴鳳子) (1909~1988)
시인 박용철(대표작 / 떠나가는 배)의 동생이다.

잡지 <여성>에 "어떠한 남편 어떠한 부인을 맞이 할까" 란 공동제목으로 김유정과 나란히 글이 실린 것이 인연이 되어

30여통의 연애 편지를 김유정에게 받았으나 일체 답장을 하지 않았다.

차후 김유정과도 알고 지내던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해서 김유정을 또 한번 좌절케 했던 여자이다.


 


 

당시 결핵을 앓고 있던 날개의 작가 이상(본명 김해경 (1910~1937)은 김유정에게 우리 너무 힘드니까 자살하자 했지만

김유정이 거절을 한다 그러나 한 달 먼저 김유정이 달리하게 되었다 



오전에 김유정 문학촌을 관람하고 설레마을을 구경하며 점심식사후 금병산 3시간 산행을 하는 것도 참 좋습니다.


춘천시내 어디서 든지 "김유정문학촌" 을 찾아가는 이정표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매년 5월초 각계에서 김유정 문학행사가 이곳에서 열리고 평상시에는 주로 초중고 단체에서 많이 견학을 한다.

 

김유정문학촌은 쓸쓸히 생애를 마친 그의 일생을 그린 비디오 영상물과 홍보화일링 그리고

그의 소설 작품을 판매하고 있었으며 그때 그시절 농촌 모습을 재현해 놓았으며 순수한 농촌 계몽사업과 관광문화사업으로

대대적으로 춘천시가 홍보와 할 예정이라고 한다

 

승용차로 갈 경우에는 춘천 가기전 4차선 외곽 우회도로 양구 소양땜 이정표로 진입 하자마자 곧 바로 

김유정 문학촌 이정표를 만날 수가 있으며 4차선 도로에서  300여 미터 거리에 있다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김유정 문학촌에 가면 그렇게 볼 구경 거리는 없지만 그의 생애를 알고 가면 그 사람에 대한

연민이 생기는 곳으로 혹여 지나는 길 들려서 쓸쓸히 생애를 마친 그의 삶을 잠시 돌아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유독 남자들에게 표독한 사랑을 했던 여성분은 찾아가지 마셉. solsae.kns

 

 

 2010.03.23 수정 솔새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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