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달래강 전설을 찾아서

시인김남식 2011. 5. 17. 11:47

달래강 전설을 찾아서        solsae.kns


중주 달래강에 지류는

괴산 송면 상주 화북면의 청화산 눌재에서 부터 시작을 한다

충북 괴산 충주에 있는 달래강에는 오누이의 사랑을 그린 슬픈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강물이 굽어 흐르는 어느 작은 마을 달개비 꽃이 흐트러진 십리길에서
부모 없이 자란 과년한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



그해 여름이 막 시작이 되던 유월 어느 날인가

오누이는 몇 마디씩 고구마 넝쿨을 잘라서 강 건너 밭에 심고 돌아 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고스란히 다 맞은 누이의 삼베 옷이 문제였다.
그날 따라 새삼스레 솟아 보이는 누의에 젖가슴 언저리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니 하연 속살에 숨막히는 오빠는 누이에게 먼저 집에 가라고 이른다.

 

집에 간 누이는 저녁밥을 짖고 해가 어스름에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찾아 나섰다.
반달이 지고 점점 검게 강물이 소리쳐 흐르는 강가의 덤불 숲 속을 헤매다가 죽어 있는 오빠를 발견한다.
그것도 자신의 남근을 돌로 찍은 채 말이다. 
하여 흐르는 강물에 자신에 눈물 씻으며 누이가 되 뇌이 말은
 "차라리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보지를 달래나 보지 그래어. 오라버니" 라고 되 뇌었지만 
오빠는 영영 돌아 오지 못 하였다.



그후 그녀의 눈물이 흘러 달래강이 되었다는 믿을 수 없는 슬픈 전설이 충주지방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오누이가 함께했던 그 위치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애절어린 이야기는 충주뿐만 아니라 전국 도처에 여러곳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近親相姦을 조심해야 한다는 윤리적 교훈을 깨우치려는 의도에서

그런 이야기가 傳言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solsae kns.



"國文學에서의 달래강說話"


1. 국문학의 이해 달래강 설화


여기 충주라는 지방엔 달래강이라고 있는데, 달래강은 어떻게 해서 달래강인가 하믄 옛날에 이제 아들 하나, 딸 하나 오뉘를 두고 살다가서, 부모 두 분이 다 돌아가시니까 두 오뉘가 살며 농사를 져 먹으며 사는데, 원 이짝에 있었는지 저 짝에 있었는지 그거는 모르는데, 달래강을 건너가 농사를 짓다 보니까 소낙비가 오니까 달래강 물이 많아졌어. 과년한 오빠하구 과년한 동생하고 둘이 밭을 매, 농사를 짓다가 그래 되니까 옷을 벗구서 강을 건너오다 보니까,

 

그만 참 (이야기를 망설이며, 조사자의 눈치를 보면서)저어 마음에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를 벗을 걸 보니까 그 자지가 일어서니까, 그만, '야, 이놈 너 일어설 때 일어설 일이지, 이런데 일어서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고 낫을 가지고 일하러 갔다가 낫으로 제 부자질 뚝 자르고,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어. 그러니까 그 동생이 하는 말이, ' 날 보고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하고 자꾸 울고 앉았어. 그래서 통곡을 하다 그 동생도 그만 오빠가 죽은 데서 그만 죽었대. 그래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그랬다 해서 그래 달래강이라 이름을 지었어. ( <달래강 유래>, 『한국구비문학대계』3-1, 96면 )



2. 달래강 설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달래강 설화에서 오라비는 갑자기 일어난 욕정에 당화해하는 모습을 역력히 드러낸다. 특히 자신의 낭심을 보고서 “야! 요놈의 새끼, 버릇없이 누이가 앞에 가는데 네가 일어나서 골질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말을 한다는 장면(구연)에서 잘 나타난다. 남자가 여자의 젖은 알몸을 보고 욕정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더군다나 오라비는 사춘기를 훨씬 지난 28세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현상에 어쩔 줄 몰라한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자신의 누이였기 때문이다. 결국 오라비는 “동상, 이 고개를 넘어서 내려가거라 나 뒤따라 갈테니” 하고 말한 뒤 발길을 멈춘다. 그리고 스스로 거세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를 위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지만 너무나 극단적이다. 어찌보면 오라비는 도덕적 자아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 우직한 것 같다. 반드시 자신의 성적 욕구가 근친상간으로 이어지라는 법은 없지 않는가. 또 자신의 욕정을 절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그의 우직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오라비가 자신의 상황을 단순한 생리적인 현상으로 인식하지 못한 데에는 그의 둔함만을 탓하기는 어렵다. 그 당시 사회적인 인식 역시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근친상간 금지는 당연시 되고 있다. 하지만 인식이 개방적인 오늘날에 비해 예전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해 더욱 폐쇄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보편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성교육도 설화가 전해지던 옛날에는 생각 할 엄두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 설화가 정확히 어느 시대부터 전해져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당시 사회적인 인식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적 욕구와 직면하게 된 오라비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택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이와 반대로 누이는 죽은 오라비를 붙잡고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다. 오라비는 성윤리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결심했고 이는 오라비뿐 아니라 누이도 지켜야 할 덕목이다. 그러나 누이는 오라

비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 성윤리를 깰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는 “달래나 보지, 예 이놈아. 내가 쉽게 안 하드래도, 서로 싸움을 하드래도, 달래나 보지 왜 죽었나?” 를 반복하는 누이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누이는 오라비의 죽음에 애통하고 애닮아할 뿐 아니라 그러한 성윤리 때문에 오라비가 죽을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천하 몹쓸 놈아, 이놈아, 달래나 보지”를 연거푸 반복하는 것이다. 즉, 성의 금기를 깨려고 시도조차 하지 못한 오라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을 뿐아니라 그와 달리 자신은 상황에 따라 그 금기를 깰 수도 있다는 각오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설화를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관점에서 읽게 된다면, 근친상간이라는 성윤리에 위배되는 도덕적인 타락을 맛보지 않기 위해 죽음을 결심한 오라비에 대해 안타까워 할 것이다. 반면에 조금만 각도를 달리하여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읽는다면 오늘날보다 더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을 사회적 인식 속에서 오라비의 목숨을 도덕적 윤리보다 중요시한 누이의 넋두리에 마음아파 할 것이다.

 

달래강 설화 역시 그 오누이에게 어떤 정신적인 이상이 있어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성적인 욕망과 윤리적인 사상이 대치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은 순간적인 성적 욕망으로 사회적 또는 개인적인 추락과 파멸에 이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이러한 설화를 전해주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와 같은 설화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함으로써 본능적인 성욕을 효과적으로 경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있는 이 설화를 통해서 반드시 근친상간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처할 수 있는 순간적인 성적 욕망과 도덕적 자아 사이의 갈등 속에서 올바르게 처신하여 건전한 성윤리의식을 확립해 나가야 한다. 국문학의이해-달래강 전설분석에서 발췌  kns

 



3. 달래강 전설과 문학정리 

 

옛날 충주 달래강변에 오누이가 있었다. 오누이는 강 건너편에 있는 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어느 날 오누이는 평소처럼 일을 끝내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은 소나기가 퍼부은 뒤라 많이 불어 있었다.

앞서 강을 건너던 여동생의 옷이 불어난 물에 흠뻑 젖으면서 속살이 훤히 내비쳤다. 여체가 아름답게 드러났다.

오빠는 욕정이 솟구쳤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오빠는 들고 있던 낫으로 자기의 성기를 찍었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자 누이가 통곡하면서 말했다.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했다고 한다.

이 말에서 ‘달래강’이란 강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은 ‘달래’라는 지명이 있는 다른 지방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떠돌고 있다.

오빠인지 남동생인지, 낫으로 찍었는지 돌로 찍었는지 명확하지 않게 뒤섞여 내려오는 것을 보면

부풀려져 오랫동안 생명을 이어온 듯하다.

 

더구나 충주 달래강은 영남대로를 따라 흘러 행인들이 쉴새 없이 오가던 곳이 아니던가.

호기심이 동할 ‘근친상간’ 내용을 담은데다 내용도 애달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은 전설이다.

충주에서 태어난 ‘농무’의 시인 신경림은

 ‘달래강 옛나루에’ 시에서

‘달래강 옛나루에 목을 잡고/이렁저렁 한세월 녹두적이나 구웠지/여름도 유월 진종일 돌개바람 일고

돌개바람 일어 모래기둥 올리고/어리석은 길손들만 찾아 들더라’고 노래하고 있다.

달래강은 속리산에서 발원해 탄금대까지 120여㎞를 달리는 조그만 천이다.

임진왜란 때 중국의 한 명장이 달래강 물을 떠먹은 뒤 “명나라에서 유명한 여산의 약수보다 낫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이런 일로 맛이 단 냇물이라고 해 단냇물이 됐다.

‘달다’의 달냇물로 변했으며 한자로 바뀌어 지금의 ‘달천’이 됐다는 설도 있다.

 

충주 목행대교와 멀리 보이는 다리는 달래강 옛구교(舊橋)

초등학교 6학년때 충주로 소풍가서 충주비료공장 견학을 하고 달래강 다리 밑에서 도시락 먹었던 추억이 생각이 납니다

이곳  충주땜 주위에는 붕어찜이 유명하다


달래강 김승덕노래


달래강 구비구비 밤은 깊은데 소저에 서린눈은 끝이 없어라

그렇게 가실거면 달래나보지 어이타 말 한마디 못하셨나요

고적한 달래강은 달빛에 젖어 무심한 인간사가 애닯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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