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통학의 추억
김남식
1960년대 당시 기차는 석탄으로 증기를 데워서 달리는 증기기관차이다. 기적 소리도 괙~~ 그래서 기차 화통을 삶은 소리라고 말했다. 까맣고 기다린 화통에서 증기의 압력을 실린더로 열차에 힘을 전달하는 커다란 세 개의 바퀴가 퍽 인상적이었다. 이후 증기기관차가 사라지고 대신 경유를 사용하는 디젤기관차로 바뀌었다.
디젤기관차는 6.25전쟁 때 미군이 전쟁 물자를 수송하려고 도입해서 사용 하다가 철도청에서 인수를 받아 운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무튼 기차하면 괙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를 품으며 산천을 달리는 모습은 어린아이들 눈에는 정말 신기하고 멋있는 풍경이었다. 당시는 기차가 지나갈 때면 모든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바라보았다.
교통수단이 그리 많지 않은 때인지라 열차를 탈 기회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기차 타는 게 동경의 대상이었고 방학이 되면 외갓집, 큰댁 또는 이모 고모네 집에 놀러 가는 아이들을 참 부러워했다. 열차통학은 향학열이 높은 농촌지역의 많은 인재들이 도시로 공부하러 가게 해 주었다. 만약 기차가 없었다면 학교에 갈 수 없는 처지였다. 왜냐면 도시에 나가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닐만한 형편이 안 된 사람들이 많았다.
기차 통학은 어느 곳이든 대부분 중고등학교가 있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다녔다. 큰 도시에는 학교들이 많아서 교육도시라 불렀으며 청주도 또한 그랬다. 충북선은 청주역을 기점으로 해서 하행선은 조치원역까지 상행선은 음성역까지 기통을 했으며 더러는 충주역에서 까지 다니는 학생들도 있었다. 당시 통학의 어려운 점은 기차가 연착하는 일이다. 아침에 연착을 하면 지각이었고 저녁에 연착을 하면 집에 늦게 오는 일이었다.
기차역에서 보통 한 시간을 다시 걸어가야 하는 시골집이기에 아침에는 새벽에 출발해야 하고 저녁에는 밤늦게 집에 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충북선 기차는 보통 객차 서너 개 정도에 화물차 10개 이상을 달고 다녔다. 객차의 크기는 버스 크기보다 조금 더 컸으며 의자는 나무로 되었고 창문도 좁았다.
학생들이 꽉 찬 열차를 타야 하는데 객차 안에 들어 갈 수는 없을 때는 보통 화물칸에 올라타고 다녔다. 때로는 지붕이 없는 석탄 차에 타기도 했다. 당시 내게는 이런 아픈 일도 있었다. 지붕 없는 석탄차를 타고 가는데 내수 아이들과 기통아이들이 싸움이 벌어졌다. 마침 학교 가던 아이들이 기차를 보고 던진 작은 돌이 그만 눈에 맞았다.
그래서 눈에서 피가 나오고 앞이 보이지 않은 채 청주역에 도착해서 병원에 갔다. 다행히 며칠간 치료를 잘 해서 앞이 보였지만 시력은 0.2 ~ 0.8로 저 시력이 되고 말았다. 당시 눈알이 빠지도록 아팠는데 실명하지 않은 것으로 천만다행 이었다. 이후 커다란 새로운 객차가 나오면서 화물차는 타지 못하게 했다.
열차에는 일반 승객들과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의자에 앉을 자리가 없을 때도 있다. 그러면 보통 객차 승강기에 매 달려오는데 이것도 서열이 있어야 가능하다. 어린 중학생들에게는 위험하다고 해서 고학년이 되어야 비로소 차례가 온다. 한여름에 매 달려 올 때는 시원한 바람이 객차 안에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좋다.
당시는 이런 모험도 있었다. 열차가 출발할 때나 또는 정차할 때 미리 뛰어 내리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으쓱하는 자랑이 있었는데 운동신경과 고단수 기술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런데 한마을 사는 후배 녀석이 그만 넘어지면서 열차가 다리를 끌고 가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결국 발목을 절단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역전 승무원들이 출발 전에 열차를 타라고 지키고 서 있었다.
기차를 타고 내릴 때는 패스 권을 보여주는데 당시 패스 권 끊으라고 준 돈을 만화방이나 극장등 군것질에 사용하고 돈이 없을 때는 숨어서 타고 다닌 적도 있었다. 열차는 중1부터 대학생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타고 다녔기에 재밌는 일이 많았다. 차에 오르기 힘들어 하는 여학생을 먼저 타고 다음에 중학생들이 올라탔다 고학년이 되면 어느 역에서 통학하는 지도 서로 알게 되어 남녀가 자연히 친해졌다.
다음 역에서 여학생이 올라오면 가방을 받아 무릎에 놓거나 아니면 선반에 올려 놔주게 된다. 그리고 여학생 가방에 연애편지를 넣기도 하고 또는 장난으로 개구리를 잡아 가방 속에 넣기도 했다. 특히 여학생과 모종에 썸씽으로 구애 일이 많았고 장난도 심했다.
아침저녁으로 맨날 보는 사람들이 또 그 사람들이었다. 간혹 새로운 사람이 기통대열에 끼면 누구인지 남녀가 서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통학을 하다 보면 건너 마을 아랫마을 서로 눈이 맞아 어울리며 부모님들 눈치를 볼 것 없이 자연스럽게 연애하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친해지면 일요일에는 냇가로 철렵을 가기도 하였다. 또한 비속어를 쓰거나 유행가를 부르며 어울려서 열차 안을 헤집고 다니는 애들을 껄렁패라고 하여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학생 깡패로 전락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그때 얻어 배운 노래는 지금도 잊지 않고 흥얼거린다. 부모님은 먹고 살기 힘든 데도 오직 자식을 위해 불철주야 고생을 하던 시절이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것만 봐도 마을에서 자랑꺼리로 그냥 뿌듯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학교가 일찍 끝나는 토요일은 기통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니다.
학교는 1시에 끝나는데 열차시간은 6시30분 출발이니 5시간 가령은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돈 있는 아이들은 버스를 타고 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도서관에 남아 자습을 하거나 세계명작을 읽었다.
공부하기 싫은 사람들은 만화가게를 가거나 극장을 배회했다. 극장도 요령껏 들어가면 공짜가 가능했다. 그래서 눈치껏 들어가서 극장 앞좌석에 앉아서 점심을 먹기도 했다. 당시는 학교에서는 극장을 못 가게 했다. 청주시내 각 학교 주임선생들이 교대로 극장을 돌면서 검색을 했다. 극장 구경도 요령껏 잘 해야 하는데 재수 없게 걸려서 반성문을 쓰고 화장실 청소를 한 적이 있었다.
도서관에도 가기 싫고 만화가게도 가기 싫고 그럴 때면 동네 아이들과 통학열차가 출발하는 그때까지 기다리기 싫어서 18km를 걸어서 집에 왔다.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신작로를 4시간 이상 걸어서 집에 오면 아직도 해가 넘어가지 않고 있어서 바쁜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기차통학은 70년대 후반 까지 계속 이어왔다, 이어서 80년대 초부터는 시내버스가 곳곳을 다니게 되었다. 그래서 시골마을에서 부터 편하게 버스를 타고 대도시 학교에 가게 되었다. 기차통학은 그때를 지나온 사람들의 재밌는 학창시절에 삶이 담긴 이야기로서 아직도 아련하게 그리운 것은 그때의 젊음을 회상하고 싶어서 이다. kns